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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을 좇아 행하라 (갈 5: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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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김양인 목사

성령은 그리스도인에게 공기나 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공기가 없으면 호흡을 할 수 없고, 물이 없으면 목말라 죽듯이, 성령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은 영적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성령에 대하여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곤비한 가운데서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봅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늘 생명이 충만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자라는 나무처럼 영적으로 생기 없는 상태로 살아갑니다.

그리스도인이 영적 생명이 고갈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습니다. 먼저, 영혼의 곤비함을 느낍니다. 그 결과, 마음에 기쁨이 없고 우울하며, 주 안에서 내일에 대한 비전을 보지 못하고 낙심합니다. 예배에 참석해도 감격이 없고 정신 집중이 안 되고 설교가 자장가로 들립니다. 봉사를 해도 자원하는 마음이 없이 마지못해 합니다. 왜 사는 것인지, 삶의 목적이 뚜렷하지 못하므로 세상적인 즐거움을 찾아 헤맵니다.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누구라도 방심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아”라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시편 42편을 지은 성도는 탄식하기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5) 라고 했습니다. 지금 성도님들의 영혼은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이 시간, 저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제목으로 성령을 좇아 살아가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려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된 것은 우리 각자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처럼 보이는 경우에도 실은 성령의 역사로 된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은 것 같지만, 사실은 성령께서 나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해야 옳습니다. 불신 상태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허물과 죄로 영이 죽은 상태입니다.

영은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일을 하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영이 죽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인이 저 혼자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다는 말은 성립 될 수 없습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예수 믿는 데는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나에게 예수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은 내 속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요 성령께서 그 마음을 넣어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안식일에 강가에 나가 거기 모인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루디아라는 여자가 예수를 믿고 사도 바울과 그 일행을 자기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에 보니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께서 그 사람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 전도를 받아들이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저와 성도님들이 예수 믿는 성도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는 이 사실은 그저 그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이루어진 특별한 사건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는 순간, 한 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거듭났다 함은 불신 영혼이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 3:6)라고 하셨습니다.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육(肉)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거듭난 사람은 육이 아니라 영으로 거듭났습니다. 이제 그의 영은 하나님을 알며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마음에 성령을 모신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요 친 백성으로 삼으신 증표로써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1장 22절에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신 것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장을 찍어 당신의 것으로 표시하신 것에 비유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자기 마음속에 임재 해 계신 성령을 의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달리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8장 9절에는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이를 위해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름 아닌 추악한 나를 위해 고귀하신 생명을 희생하셨음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성령의 감화로 인해 우리는 이천 년이라는 시간과 수만리의 공간을 초월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오늘 이곳에 있는 저와 성도님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음을 의심 없이 믿습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믿게 하고, 그 명하신 대로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하려면 언제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님, 저의 어두운 마음눈을 밝혀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옵소서” “성령님,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해 주옵소서”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뜻을 주장하셔서 은혜가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왕에 예수 믿을 바에는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길은 단 하나,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선한 열매를 맺는 신앙인이 되려면 성령님의 소욕을 따라서 행해야 합니다.

이제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성도는 믿기 전과 비교해 볼 때 외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똑같은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분위기가 다릅니다. 얼굴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언어가 달라졌습니다. 생활이 달라졌습니다. 무엇이 이 같은 변화를 만들어낸 것일까요? 성경은 성도에게 나타나는 이 같은 변화를 내적인 차원에서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난 변화는 근본적으로 내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영혼 깊은 곳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는 내 마음의 주인이 나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요 성령께서 나의 주인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손님으로 와 계신 것이 아니고 주인으로 와 계십니다. 무슨 일을 할 때 이전에는 내 뜻대로 했는데, 이제는 내 뜻대로 하는 것을 막는 또 다른 욕구가 내 속에서 작용하는 것을 느낍니다. 이는 저 혼자의 경험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적인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오늘 본문에는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고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체의 소욕에 따라서 살아갑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육체의 소욕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세상이 이처럼 타락한 것은 사람들이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소욕이 어떤 것이기에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요? 성경은 말씀하기를 “19)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방금 진술한 대로의 육체의 일을 행하려는 욕구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세속 문화를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도 예외가 없이 육체의 일과 상관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 마음에 육체의 소욕과 함께 또 다른 소욕이 공존하는데, 본문에는 그것을 성령의 소욕이라고 부릅니다. 성령의 소욕이란,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계셔서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할 때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를 이같이 말씀합니다.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예를 들면, 우리 마음속에 “이제부터 하나님을 잘 섬겨야겠다”는 욕구가 생겨났다고 합시다. 단번에 우리는 이 욕구가 육체의 욕구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육체의 욕구를 기록한 목록에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들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지” 하는 욕구가 생겨났다고 합시다. 이 역시 육체의 욕구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항상 두 종류의 욕구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육체의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욕구입니다. 자, 꽃 피는 봄철이 되었습니다. 주일 아침인데 직장 동료들로부터 벚꽃 놀이를 가자는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래, 그 사람 가족과 함께 벚꽃 놀이를 가야지” 라는 욕구가 일어납니다.

그와 동시에, 마음 한쪽에서 또 다른 욕구가 일어납니다. “아니야, 오늘은 주일이니 교회에 가서 예배 드려야지” 주일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문제를 놓고 두 가지 완전히 반대되는 욕구가 대립합니다. 이 때 믿음의 수준에 따라서 갈등을 겪기도 하고 별 갈등 없이 어느 한 편을 택하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가 육체의 소욕을 따르면 성령의 소욕을 이루지 못하고, 우리가 성령의 소욕을 따르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언제나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은 대립합니다. 이 두 소욕 가운데 어느 편을 더 많이 따르느냐에 의해서 우리의 신앙 수준이 판가름 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명심해 두실 것은, 성령의 소욕을 따르면 영적 승리를 경험할 것이나 육체의 소욕을 따르면 영적 패배를 맛보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한 성령의 선한 열매를 맺기를 기대할 수 없으며, 늘 주님 앞에 떳떳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령께서 성도님들에게 원하시는 대로 성령의 소욕을 따라서 살아가십시오. 그리할 때 성도님들의 삶에는 승리만 있을 것이며, 성령 안에서  선한 열매가 풍성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게 되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능력 있는 신앙인이 되려면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자주 실패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욕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못을 지적 받으면 회개도 하고 잘못을 고치려는 노력도 하지만 원하는 만큼 성과를 얻지 못해서 괴로워합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사도 바울도 한 때 우리와 동일한 문제로 인해 괴로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탄식하기를 “18)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19)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20)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21)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했습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려고 결심하고 힘쓰고 애써보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심령이 약한 데 원인이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죄악을 이기고 육체의 소욕을 이길 만큼의 강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이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시자, 베드로가 힘 있게 말하기를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했습니다. 이는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중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대제사장들이 보낸 무리에 의해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자 몇 시간 전에 한 맹세는 아랑곳없이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에 바빴습니다. 대제사장의 바깥뜰에서 시몬 베드로는 계집종의 물음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참혹한 패배를 맛보았습니다. 제자들이 패배한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들이 유난히 겁이 많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제자들은 하나같이 진실한 사람들이요, 하나같이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진심을 믿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했던 것입니다. 시련과 핍박이 다가올 때 당당하게 맞서 나갈 용기가 필요한데 그럴 만큼 의지가 굳세지 못했습니다. 계집종이 “당신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고 했을 때 모든 사람이 다 듣도록 큰 소리로 “그래, 나는 나사렛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다” 라고 밝힐 수 있었어야 했는데,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했습니다. 그는 그로 인해 겪을 고난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신 말씀대로, 나도 한번 후회 없이 주님을 섬겨야지 결심했다가도 작심삼일이 되고 맙니다. 올해는 나를 필요로 하는 부서에서 봉사생활을 시작해야지, 이제부터는 기도생활에 열심을 내야지 결심했다가도 흐지부지 되고 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육신이 약한 것이 영적 패배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면케 해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어찌하든지 영적인 약함을 극복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거에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은 사실을 아직 극복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요즘처럼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교과서를 왜곡하는 것을 보면서 분노합니다. 세계 여론에 일본이 저지른 야만성을 성토하고 고발합니다. 물론, 일본의 교만함과 부당함은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일본과 관련해서 한국인들에게 한 가지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본에 대한 분노의 표출은 있으나 일본을 이기기 위한 범국민적인 노력은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만일 한국의 국력이 일본보다 월등히 강하다면 그래도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려고 들까요? 역사적인 사실을 왜곡하려고 할까요? 그러므로 저는 한국인들이 오늘의 분노를 국력의 성장을 위한 원동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보다 강한 나라가 되려는 각오를 가지고 온 국민이 노력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일에 실패한다면 일본의 방자함은 앞으로도 시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차원에서도 진리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강해지지 않으면 항상 죄의 세력 앞에 굴복하고 세상 유혹에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마다 한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죄와 정욕과 세상과 마귀를 이기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붙잡히셨을 적에 하나같이 도망쳤던 제자들과 오순절에 성령으로 세례 받고 성령 충만해서 예루살렘 거리에 서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외쳤던 제자들을 비교해 보십시오. 불과, 한 달 반 만에 무엇이 그들을 이처럼 변화시킨 것일까요?

사도행전 2장에는 사도들을 변화시킨 사건을 이같이 증언합니다. “1)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2)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4)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신학적으로 예수 믿는 성도들의 심령에 성령께서 임재해 계신 것을 일컬어 성령의 내주하심이라고 합니다.

성숙한 성도나 갓 믿은 성도를 막론하고 성령께서 그 안에 내주해 계십니다. 성령의 내주는 그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증표와도 같습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아간다면 선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큰일을 감당하려면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께서 특별하게 우리를 통하여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의 내주는 불변하시지만, 성령 충만은 필요할 때마다 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면 이전에 갖지 못했던 강하고 담대한 믿음이 생깁니다. 마음에 용기가 생기고 시험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병 고침과 예언과 방언과 지혜와 지식과 사랑과 섬김과 같은  은사가 우리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속속 깨달아지고, 전하는 말씀에 능력이 나타나며, 전도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할 일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성령 충만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둘째로, 자기의 죄와 나태함과 불충을 낱낱이 회개해야 합니다. 셋째로,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언제까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는 말로 위안을 삼으면서 미지근한 신앙상태로 만족하시렵니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함께 모여 기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을 받아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일을 이루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전기 스위치를 켤 줄 몰라서 밤중에도 캄캄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다면, 또는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 데도 그걸 알지 못해서 목말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나 그런 사람을 보고 한심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 가운데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무런 의식도 없이 지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 가운데 혹시라도 영적 무지로 인해 이같이 한심한 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은 없는지 점검해 봅시다. 사도행전 19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묻기를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하니, 그들이 대답하기를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계신 것을 알지도 못했으니 그들의 영적 실상이 얼마나 빈곤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성령께서는 주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오셔서 영원토록 함께 계시면서 성도들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그런즉 언제나 성령을 좇아 행하심으로 영적 생명이 풍성한 삶, 성령의 능력으로 죄악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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