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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경건에 이르는 훈련" (딤전 4: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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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흥규 목사

<육체의 훈련 對 영혼의 훈련>
  오늘 봉독한 말씀 중에 7절 후반부와 8절을 주목해서 봅시다.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今生)과 내생(來生)에 약속이 있느니라." 이 말씀의 요점은 분명합니다. 경건함에 이르도록 훈련을 받으라는 것이지요.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지만 영적 훈련, 즉 경건 훈련은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영생을 보증해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에베소 교회를 괴롭히던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들은 남녀간의 성적 접촉이 악한 것이기에 결혼하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특정 음식이 부정(不淨)한 것이므로 입에 대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극단적인 율법주의, 혹은 도에 지나친 금욕주의를 통렬하게 반박합니다. 결혼이나 음식은 다 좋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감사함으로 받으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고 하신 말씀을 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이 경건 훈련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제가 볼 때 아주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결혼은 성적 교합(交合)이니 부정한 것이요 그래서 금해야 한다는 것이며, 일부 음식을 먹지 말라는 율법 역시 식욕을 절제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생리욕구, 즉 성욕과 식욕을 절제하라는 가르침이지요. 이것은 무엇보다도 육적인 훈련과 긴밀히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육적인 훈련이 영혼의 훈련인 경건 훈련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바울의 확신입니다. 

사도 바울이 살았던 시대에 가장 흔했던 운동 경기는 레슬링과 경주였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이와 같은 운동 경기에 승리하기 위하여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 훈련입니다. 평소에 강도 높은 훈련을 어떻게 지속적으로 하느냐가 경기의 승패를 좌우하는데 결정적인 관건이 되는 것이지요. 운동 선수들은 특히 성욕과 식욕을 잘 조절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 이렇게 본다면 바울이 육체의 훈련과 영혼의 훈련을 날카롭게 구분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다 깊은 생각이 있어서 그렇게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혼은 성욕과, 음식은 식욕과 각각 관계가 되어 있다면 이 두 가지를 금하는 것은 모두 육체적인 훈련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육체적 훈련은 약간의 유익을 줍니다. 경쟁하는 선수와 겨루어서 이기도록 해줍니다. 그리하여 상을 받고 뿌듯한 기쁨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육체적 훈련은 약간의, 일시적인 유익을 줄뿐입니다!

극단적인 율법주의자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혼인을 금하거나 음식물에 규제를 가하는 것도 비슷한 이치입니다. 바울이 볼 때 이것은 육적인 훈련으로서 약간의, 일시적인 유익을 줄뿐입니다. 육적인 훈련은 다른 사람을 세우고 공동체의 건덕을 세우는 일보다 자기 자신을 세우는 일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자비와 사랑으로 이끌기보다 경쟁과 심판으로 이끌 뿐입니다! 극단적인 율법이 이웃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은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그렇습니다. 육체의 훈련은 현세에만 잠깐 유익을 줄뿐 금생과 내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에 규제를 가하는 것 역시 육적인 훈련이며 약간의 유익을 줄뿐입니다!

<경건 훈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 이와 같이 혼인을 금하고 음식물 먹지 못하게 막는 육체의 훈련과 비교할 때 훨씬 더 좋은 결과를 보장하는 훈련이 있습니다. 이것은 경건 훈련입니다. 육적인 훈련과 대비(對比)되는 영적인 훈련입니다.

여러분, 경건이 무엇입니까? '경건'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EUSEBEIA'인데 '선한 두려움,' '기쁜 두려움,' '복된 두려움'이라는 원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건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인데 단지 무서움 때문에 생기는 두려움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선하고 기쁘고 복된 두려움입니다. 영어로는 'GODLINESS'인데 하나님의 성품을 닮는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짐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훈련'을 뜻하는 희랍어 'GYMNASIA'라는 말은 운동 선수들의 훈련을 뜻합니다. 바로 이 'GYMNASIA'라는 말에서 '체육'을 뜻하는 'GYMNASTIC'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운동 선수가 경기에서 우승하기 위하여 피눈물나게 훈련하듯이 경건에 이르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쌓으라는 것이지요. 육적인 훈련이 아니라 영적인 훈련을 매일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경건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훈련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모세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로 쓰임을 받은 것은 갑자기 된 일이 아닙니다. 40년 동안 바로의 궁전에서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영성훈련을 받은 뒤 출애굽의 영도자가 된 것입니다. 자그마치 80년 동안 강도 높은 훈련과 연단을 받은 뒤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80년 동안 그의 인간적인 것, 혈기, 분노,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마음을 죽여서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는 경건의 사람으로서 훈련하셨던 것입니다!

옳습니다. 경건에는 반드시 훈련이 뒤따라야 합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영적이고 도덕적인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경건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경건의 훈련을 쌓아야 합니까? 본문 말씀을 꼼꼼히 읽어보면 크게 다섯 가지 면에서 경건 훈련을 해나가야 합니다.

첫째로,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이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12절).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신앙의 본이 되시듯이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경건 훈련의 첫걸음입니다. 자기 중심적 삶에서 하나님 중심, 이웃 중심의 삶으로 확대 개방해나가는 것이 경건 훈련의 기초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1: 1에서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같이 고린도 교인들도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만큼 경건 생활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바울 대신 에베소 교회를 맡았던 디모데는 아직 나이가 어렸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면 누구든지 네 연소(年少)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디모데는 소심해서 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고전 16: 10-11; 딤후 1: 7 참조). 이와 같이 나이 어리고 소심한 디모데가 에베소 교인들에게 무시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신앙이나 윤리 생활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말과 행실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말한 것과 행동하는 것이 서로 어긋나서 안됩니다. 일치해야 합니다. 사랑과 믿음과 정절, 즉 순결생활에 있어서도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 교인들이 모범이 되어서 "나를 본 받으시오!"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록 디모데가 연소하다고 할지라도 교인들은 디모데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날마다의 생활에 있어서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본이 되고자 애쓸 때 경건에 이를 수 있습니다! 

둘째로, 성경을 읽는 일과 권면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13절).
바울이 활동했던 초대 교회에는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는 것이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특히 바울이 쓴 서신들을 예배 시간에 교인들 앞에 낭독하는 일이 공중 예배에서 아주 중요한 순서였던 것이지요(고후 7: 8; 골 4: 16; 살전 5: 27; 살후 3: 14 참조). 그래서 성경 읽는 일에 전념하라고 가르칩니다.

그 다음에 권하는 것은 공중 예배 시간에 설교하는 행위에 비길 수 있을 것입니다. 행 13: 15이나 롬 12: 8에 보면 성경을 읽은 뒤 권면하는 시간이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모두 설교를 의미합니다. 가르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성경이나 교회 안에 성도들이 알아야 할 여러 가지 교훈들을 교육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고 설교하고 교육하는 일이 디모데와 같은 목회자가 경건에 이르기 위하여 주기적으로 해야 할 중요한 훈련입니다. 여러분도 경건에 이르기 원하신다면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이웃에게 힘써 가르치고 전파하십시오! 

  셋째로, 우리 안에 있는 은사를 소홀히 여겨서 안 됩니다(14절).
'은사'(恩賜)는 희랍어로 'CHARISMA'인데 크게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방언이나 예언, 입신하는 것과 같은 초자연적인 은혜의 선물을 의미할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부적으로 부여하신 바 타고난 재능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 14절을 보세요.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에베소 교회를 이끌어 갔던 지도부인 장로회에서 안수 받을 때 하나님께서 디모데에게 선물로 주신 초월적 은사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이 경우의 은사는 타고난 재능이나 재주로서의 은사라고 하기보다는 에베소 교회를 잘 치리해 나가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디모데에게 허락하신 초자연적인 선물로 봐야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는 때를 따라 여러 가지 은사를 주십니다. 교회 공동체의 건덕을 세울 수 있도록 방언의 은사, 신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 가르침의 은사, 사랑의 은사 등을 주십니다. 그런데 고전 13장에 보면 은사 중에 최고의 은사는 사랑의 은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참된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 이와 같은 은사들을 가볍게 여겨서 안 됩니다. 귀하게 여기고 그 은사들을 뜨거운 마음으로 사모할 뿐 아니라 적극 활용하여서 하나님의 교회를 영화롭고 건강하게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넷째로, 이러한 일을 전심전력으로 실행에 옮겨 우리의 성숙하는 모습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15절).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을 최선을 다해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성숙하고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참된 경건은 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아도 굳은 의지를 가지고 아는 것을 생활 속에 실천하지 못하면 경건에 이를 수 없습니다.

경건은 우리가 진리로 알고 있는 바를 전심전력을 다해서 실천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전심전력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권투 경기를 하는 선수는 그냥 주먹만 휘둘러서는 아무 소용없습니다. 체중이 실린 강펀치를 날릴 때 상대방을 쓰러뜨릴 수 있습니다. 경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과 힘을 다하여 최선을 다해서 훈련을 쌓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믿음이 퇴보하는 생활이 아니라 날마다 전진하고 성숙하는 생활임을 온 세상에 보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로, 우리 자신과 우리의 가르침을 잘 살펴서 계속해서 경건 훈련을 해나가야 합니다(16절).
살핀다는 말은 희랍어로 'EPIMENEIN'인데 어떤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심하게 신경을 쓰면서 반성한다는 뜻이지요. 우리 자신의 자아와 우리가 가르치고 있는 바를 늘 반성해서 자아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경건은 자기 반성에 있습니다. 내가 믿는 것과 내가 행동하는 것이 일치가 되는가, 나의 인격과 나의 가르침이 하나가 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깊이 성찰해나갈 때 우리의 경건은 깊어질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의 성찰은 일생 동안 지속되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만 잠시 반성하고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꾸준히 계속해서 반성할 때 우리의 영성과 경건성은 점점 더 깊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서>
이제 본문에 나타난 경건 훈련의 다섯 가지 내용을 다 말씀드렸는데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8절에 따르면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을 뿐이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해서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준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경건 훈련이 주는 유익에 대해서 너무도 확신했기 때문에 9절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 말은 참말이요 모든 사람이 진리로 받아들일만한 확실한 말씀이라는 것이지요!

뿐만 아닙니다. 16절 말씀에 보면 경건 훈련은 우리 자신도 구원하고 우리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도 구원할 수 있는 첩경이 됩니다.

여러분, 오늘부터 경건 훈련을 하십시오. 등산을 한다든지 운동을 한다든지 하는 육체의 훈련, 여러분의 건강 위하여 얼마나 유익합니까? 그러나 그 유익은 일시적입니다. 부분적입니다. 약간의 유익이 될 뿐 모든 면에서 유익하지 않습니다. 오직 경건에 이르는 훈련만이 영원하고도 종합적이고 지금 이 땅위에서의 삶뿐 아니라 다가오는 천국에서의 생명까지 보장해주는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의 소녀가 해변가에서 사이좋게 조개를 줍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앞에 큰 조개가 보였습니다. 두 소녀의 손이 동시에 그 조개를 덮쳤습니다. 서로 아옹다옹하면서 자기가 먼저 발견했으니 이 조개는 자기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사이좋던 두 사람은 일순간 냉랭해졌으며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결국 고집이 더 세고 목소리가 더 큰 소녀가 큰 조개를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부터 두 사람은 말도 안하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헤어져 조개줍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큰 조개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소녀에게 일순간 큰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전혀 뜻밖에 진주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 소녀는 그 진주를 친구에게 혹 빼앗기기라도 할 듯이 품안에 몰래 감추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큰 조개를 빼앗긴 것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전에 기분 상했던 마음이 눈 녹듯 풀어졌습니다.

진주를 얻은 소녀는 자기가 먼저 큰 조개를 주운 소녀 곁으로 가서 다시 즐거운 마음으로 사이좋게 조개줍기를 계속했습니다. 그들 앞에 또 다시 큰 조개가 나타났는데 이전에 비길 데 없이 크고 예쁜 조개였습니다. 이번에도 두 사람의 손이 동시에 그 큰 조개를 덮쳤지만 더 이상 아옹다옹 다투지 않았습니다. 진주를 가슴에 품은 소녀가 기쁜 마음으로 양보했기 때문이지요. 자기는 훨씬 귀하고도 아름다운 보배, 진주를 얻었으니 그깟 조개 정도야 얼마든지 친구에게 양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 크고 더 아름다운 것을 찾은 사람은 더 이상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는 법입니다.

육체의 훈련이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영혼의 훈련인 경건 훈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오늘 육체의 훈련보다 훨씬 더 큰 유익을 가져다 주는 경건 훈련에 대해서 들으셨습니다. 이제 이 좋은 것을 알았으니 넉넉하고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의 삶속에 기꺼이 경건을 실천하며 하루하루 생활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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