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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 이스라엘이 사모하는 자 (삼상 9:11-21, 엡 5:15-21, 마 6: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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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오동 목사

1.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 데리고 가서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담하게 받아들여서 순종했겠습니까? 만일 그랬다면 그는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내와 상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무척 고민했을 것입니다.

과거에 그가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보다도 그 고민이 훨씬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번민과 갈등 끝에 마치 안개를 걷고 아침 해가 떠오르듯이 “주의 뜻대로 되어지이다”라고 결단했습니다.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새벽부터 짐을 꾸려서 모리아 산을 향하여 출발했습니다.

모리아까지 가는 길이 사흘 길이었습니다. 그 사흘 길은 얼마든지 마음을 바꾸고 가던 길을 돌이킬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가면서 아들과 대화를 주고받던 중 아들이 아버지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는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 느닷없는 질문에 정신이 번쩍 든 아브라함은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해 주실 것이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온갖 상념을 떨쳐버리고 다시금 믿음의 원점으로 돌아온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정말 이삭 대신 드릴 번제할 어린 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말, “하나님이 준비하신다”고 하는 이 말에서 우리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사용하는 “섭리”라고 하는 말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요리문답에 섭리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일이란 그의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활동을 지극히 거룩하고 지혜롭고 능력있게 보존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꽃도 입히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는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신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에게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살피시고 또 다스리십니다. 우선 보기에는 사태가 어렵고 불리하게 전개되어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섭리하십니다. 요셉이 그 인생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는 시기를 아무 죄 없이 감옥에서 13년을 하염없는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바로 거기서 요셉이 총리가 되는 길을 준비하셨고, 그런 일을 통해서 야곱 일가족을 흉년에서 구해서 하나님의 선민이 되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우리는 단편적인 현실만 볼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은 인생이고 역사고 전체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판단에 따라 살아갈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께 다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가장 선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소돔 고모라 성을 멸하실 때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야 숨길 수 있겠느냐?”라고 하시면서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성을 위해서 기도했고, 특별히 조카 롯과 그 일가족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사무엘서 본문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섭리하시면서 그 선지자에게는 미리 알려주셔서 준비하도록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야 정신없이 나귀를 찾아 헤맸으나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찾아 헤매는 길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위한 큰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사무엘이 낯선 사울을 만나서, 그것도 나이 든 사무엘이 아직 청년에 불과한 사울을 만나서, 하나님의 선지자가 일개 평민을 만나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온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렇게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은 끊임없이 그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당부하는 중요한 말씀이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앞두고서 우리 주님께서는 게쎄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우면서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피땀 흐르는 철야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이와 같이 “나의 품은 뜻 주의 뜻같이 되게 하여 줍소서”라고 했을 때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대업은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렇게 주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백성들을 찾으십니다. “아멘”의 백성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순종하는 백성들을 통해서 지금도 주님은 그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2. 역사를 섭리하시고 그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것을 그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오늘 사무엘서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을 찾으시기 위해서 사용한 동물이 바로 나귀였습니다.

사울의 집에서 과거에는 나귀를 잃은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아니하게 나귀들이 어디론가 살아졌습니다. 아버지 기스는 아들 사울에게 잃은 나귀들을 찾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 될 사람을 찾고 계셨습니다. 결국 다지고 보면 사울이 왕이 되는 길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나귀였습니다.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그 나귀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 광야 길을 갈 때 모압 왕 발락이 이것을 매우 두려워한 나머지 선지자 발람을 초청했습니다. 목적은 저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람 선지자는 몇 번을 거절한 나머지 결국 초청에 응해서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 그릇 가는 선지자를 막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긴급 투입한 도구가 바로 그가 타고 가던 나귀였습니다. 나중에는 나귀가 입을 열어서 말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그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할진데 오늘 저나 여러분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심하고 철저하게 관리하시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잠시 어렵다고해서 불평하거나 원망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넘어서 하나님의 뜻으로 섭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여러분의 가는 길을 가로 막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일을 당하면 우리도 저 발람 선지자같이 성이 불같이 나서 칼을 빼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우리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자기감정이나 욕심, 또는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너무 깊이 빠지게 되면 발람같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습니까? 혹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분노가 있습니까? 좋은 기회를 놓치고 안타까워하고 있습니까? 잠시 그 현실에 한 발 빠져나와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실패나 고통을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차분히 대처할 때 하나님께서는 내가 잃은 것 보다 훨씬 좋은 것을 준비해 주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였습니다만, 여러분은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의 사모하시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더 좋은 것으로 여러분에게 이루어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귀 이야기는 예수님에게도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고 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나귀새끼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누가 뭐라고 하거든 “주께서 쓰시겠다하라”고 일러 보내셨습니다. 아직 아무도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이기 때문에 다른 일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쓰실 때 그 나귀는 세상에 그 어떤 훌륭한 나귀, 아니 어떤 훌륭한 존재도 할 수 없는 귀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 주님은 우리를 저 나귀처럼 원하실 때가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건 상관할 것 없이 주님은 우리를 보시고 “네가 누구냐 내가 사모하는 자가 아니냐? 피로 값 주고 산 내 백성이 아니냐?”라고 하십니다. 그럴 때 주저하지 말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주님께서 쓰시는 도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바로 거기에 은혜가 있고 복이 있다.

3. 모든 것을 아시고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께서 사무엘과 사울을 위하여 또 준비한 사람이 있습니다. 11절에 “물 길으러 나오는 소녀”입니다.

당시 사무엘은 한 곳에 정착해 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을 순회하면서 그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지금같이 연락수단이 좋지 않던 당시로서는 이렇게 순회하는 사무엘의 소재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숩 땅에 선지자가 있는지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행히 사울의 사환 중의 한 사람이 그것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리고 그때 마침 물 길으러 나오는 소녀가 있어서 선지자에 관하여 물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 일이 적중되었습니다. 소녀의 말이 “있나이다. 보소서 그가 당신 보다 앞서 갔으니 빨리 가소서 백성이 오늘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므로 그가 오늘 성읍에 들어 오셨나이다”. 정말 타이밍이 제대로 맞아 떨어졌습니다. 엄청나게 큰 일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우연을 이용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하고 응답을 받고 나서는 말하기를 “그것이 내기도 응답이라기보다 우연히 일치된 것일 뿐이다”라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그렇게 우연히 응답을 해 주십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우연인 것 같아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든 것이 다 필연입니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소녀가 물 길으러 가도록 역사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라고 하는 사람은 혁혁한 전공을 세워 그 나라 왕에게 절대 신임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센 병에 걸렸습니다. 만일 그 병이 심해지면 그 훌륭한 장군이 폐인이 될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습니다. 이 일은 단지 나아만 개인이나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문제였습니다. 아마 왕은 천하에 용하다는 의사를 다 구하도록 명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아만의 집에 여주인에게 시중드는 여종인 소녀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는 전쟁 때 포로로 끌고 온 이스라엘 소녀였습니다. 그녀가 어느 날 이런 딱한 사정을 보고는 자기 여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만일 장군께서 우리나라에 있는 선지자 앞에 가신다면 틀림없이 그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듯이 이 말을 들은 장군은 당장 왕에게 신임장을 받아가지고 이스라엘을 찾아갔습니다. 결론은 우리가 잘 알듯이 엘리사 선지자가 요단강에 씻으라는 말과 함께 그 장군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장군은 그 길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 장군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안전을 위해 절대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한 나라의 국방을 지킨 일이 많은 군대가 아니라 종으로 끌려 간 한 소녀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고 가는 길, 우리가 기도하고 하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미리 미리 요소요소마다 필요한 사람들을 준비하시고, 필요한 여건들을 마련하셔서 그 일을 이루어주십니다. 우리가 잠시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생기고, 우리 가는 길에 장애가 가로 막혀도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 생각이나 능력을 초월하십니다.

여러분은 주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께서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할진데 여러분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철두철미하다는 이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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