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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높아지고 싶거든 낮추라 (눅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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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홍인덕 목사

기도를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재판관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서 기도는 응답되어질 때까지 끈질기게 드려져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어떠한 태도로 기도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불의한 재판관과 힘없는 과부를 대조시켜서 인내를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극단적인 두 사람을 대조시켜 어떠한 자세로 기도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우선 생각할 것은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기도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볼 때 최소한 이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도를 위해 성전을 찾았습니다. 그만큼 이들은 하나님께 대한 자세가 갖추어져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간 이유가 무엇입니까?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 밤낮으로 눈을 뜨시고, 이 성전을 살펴 주십시오. 이 곳은 주님께서 ‘내 이름이 거기에 있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곳입니다. 주님의 종이 이 곳을 바라보면서 기도할 때에, 이 종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종인 나와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에, 그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주님께서 계시는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는 대로 용서해 주십시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네가 나에게 한 기도와 간구를 내가 들었다. 그러므로 나는 네가 내 이름을 영원토록 기리려고 지은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따라서 내 눈길과 마음이 항상 이 곳에 있을 것이다.”
이 솔로몬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의 약속을 따라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난 창을 열고 기도하였고 그 결과 사자 굴에서도 건짐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이 약속의 말씀을 의지하고 성전을 찾는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전을 찾아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귀한 응답의 밑거름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도 주의 전을 찾아 기도해야 하는 것이요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가 섬기는 주의 제단을 향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주님의 성전을 찾아와 기도하는 두 사람의 믿음이 정말로 아름답다 할 수 있는데 그런 믿음으로 성전을 찾은 두 사람 기도가 어떻게 다르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먼저 바리새파 사람의 기도를 생각해 봅니다.
오늘의 비유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스스로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몇몇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바리새파 사람이야말로 주님이 말씀처럼 스스로를 의롭다고 확신하고 남을 멸시하는 사람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바리새파 사람이 어떻게 기도를 드렸기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따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는 남의 것을 빼앗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더구나 이 세리와는 같지 않습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내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우선 이 사람은 사람들 앞에 보이도록 서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하지 말아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네 상을 이미 다 받았다.”

그러니까 이 바리새파 사람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지금 성전에 서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그래서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고자 하는 마음을 우리는 바리새파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내용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내용을 다시금 살펴보게 되면 바리새파 사람은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의인이 있는가 살펴보신 즉 한 사람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힘쓰고 애썼다고 한들 감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랑을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바리새파 사람은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고 더구나 이 세리와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라고 한 말의 뜻은 자기가 결코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로서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모든 소득의 십일조도 드리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만으로 자기가 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자기가 모든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노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어느 지도자에게 예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게는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 모든 계명을 다 지킨 것 같아도 보다 중요한 것을 우리가 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 사랑의 실천입니다.
잠언 14장 2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웃을 멸시하는 사람은 죄를 짓는 사람이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
잠언 19장 17절은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넉넉하게 갚아 주신다”
그만큼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왜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부자가 음부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까? 바로 자기 집 문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 병든 거지를 돌보아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마음으로부터 진심을 다해 돌보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요 바로 그것이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인 것을 주님이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물며 여기 바리새파 사람이 자기가 저기 있는 제 세리와도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하다고 했으니 그에게는 눈물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세리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조차 없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잠언 16장 2절에서는 또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의 행위는 자기 눈에는 모두 깨끗하게 보이나 주님께서는 속마음을 꿰뚫어 보신다”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항상 살필 수 있어야 하고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남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 도무지 사람 같지 않은 그러한 사람,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에게까지 사랑의 손길을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이른 것을, 너희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한 너희가 너희 형제 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렇습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더 나가서 원수까지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다고 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해서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고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오히려 나보다 못난 사람이 있다 싶으면 그 사람을 도와서 바르게 세워주고 이끌어줄 수 있고, 부족한 사람이 있으면 그 부족한 것을 채워줄 수 있을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따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이 바리새파 사람은 의롭다는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매일같이 뜨겁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또한 함께 모여 기도하는 중보의 시간을 은혜롭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를 내세워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내게 그런 귀한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중보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하는 인정을 받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세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우러러 볼 엄두도 못 내고,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아,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먼저 이 세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되 멀찍이 서서 기도합니다. 그것도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엄두도 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 가슴을 치며 기도합니다. 그의 기도의 내용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죄인이라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리야말로 자신의 참 모습을 바로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하나님 앞에 드러나지 않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셔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이 세상에 사는 죄악 가운데 죽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까? 우리들을 죄악 가운데서 건져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죄인 됨을 고백하고 주님께서 나를 위해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어 주셨음을 마음으로 믿고 주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의 죄를 주님께서 다 용서하여 주시고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죄악 가운데서 방황하는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요한 사도는 이를 우리들에게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안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더우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 사도가 가르쳐 주신 것처럼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아 주님 앞에 우리의 죄를 자백할 때 주님은 여전히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시오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시는 분이시며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 세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있습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그러한 세리의 죄를 용서하지 않겠으며 어찌 그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주님이 저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불의를 깨끗케 하여 주시니 저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와 엎드릴 때마다 먼저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어야 하고 먼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와서 문제 해결만 부르짖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마음의 소원만 하나님 앞에 아뢰면서 주님의 돌보심만 간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내 안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내 안에 이웃을 돌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이웃을 향해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습니까? 이웃을 세워주는 일에는 얼마나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주님의 자비를 구하면서 이웃을 향해서는 얼마나 자비를 베풀고 있습니까? 진정 원수도 사랑하며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오늘의 바리새파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네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던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하십시오.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 바로 잡으며 또한 이웃을 함께 세워나가십시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여러분의 기도가 다 응답되는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집으로 내려갔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까? 바로 세리였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잠언 22장 4절은 “겸손한 사람과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받을 보상은 재산과 영예와 장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잠언서 29장 23절은 “사람이 오만하면 낮아질 것이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을 것이다” 말씀하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 18장 12절은 “사람의 마음이 오만하면 멸망이 뒤따르지만 겸손하면 영광이 뒤따른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겸손입니까?
참다운 겸손 그러니까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임을 인정하며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하나님 앞에서 높이 들림을 받을 것입니다. 아울러 그렇게 겸손한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요 그가 재산과 영예와 장수를 얻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해도 우리가 겸손하지 못하고 자신을 낮출 수 없다면 그 사람은 거짓 경외함에 불과한 것이요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는 선언을 주님으로부터 들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나의 부족함을 고백하십시오.
바울 사도는 고백합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하면 그것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법칙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곧 나는 선을 행하려고 하는데 그러한 나에게 악이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다 위대한 사도라고 칭찬하는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이렇듯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자신을 낮추는 것이요 겸손한 모습입니다. 그저 겉으로만 자신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죄인일 수밖에 없는 우리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겸손의 참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고백의 자리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또 다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다른 사람이 모두 나를 칭찬한다고 해도 여전히 나는 부족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십시오. 누가 혹시 연약하여 쓰러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붙들어 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이 그러한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아울러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여 주심으로 우리를 의롭다 인정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까지 아름답게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 아래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성도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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