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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 (호 4: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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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연수 목사

(호 4:6-14) 『[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7]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8] 저희가 내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도다 [9]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라 내가 그 소행대로 벌하며 그 소위대로 갚으리라 [10] 저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행음하여도 수효가 더하지 못하니 이는 여호와 좇기를 그쳤음이니라 [11]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12] 내 백성이 나무를 향하여 묻고 그 막대기는 저희에게 고하나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마음에 미혹되어 그 하나님의 수하를 음란하듯 떠났음이니라 [13] 저희가 산 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아름다움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 들이 간음을 행하는도다 [14]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하여도 내가 벌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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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본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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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축복의 능력으로, 사순절 기간을 보내며 예수님 안에서 경건한 삶을 사시는 오천가족 모두를 축복합니다.

요즘 우리교회는 세이레 기도회 중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매일 새벽마다 호세아서를 읽으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넓이와 깊이, 크기와 높음을 깨달을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 나와 쟁변하자!
오늘 다 읽진 않았지만 1절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쟁변하시나니’라는 말은 ‘논쟁, 다툼, 꾸짖음’이란 뜻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쟁변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셔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쟁변하실까요?

■ 첫째로, 이스라엘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세 가지가 없었기 때문.
[4:1]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 이스라엘에 진실이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과 행동에 신실함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 그리고 이스라엘에 인애가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실한 사랑을 지니고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인애란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을 의미하지만, 인간 편에서 볼 때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인애가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는 하였지만, 그것은 말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알화하여 섬기는 혼합주의 종교를 만들어 놓고서는 하나님보다 바알을 더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오직 저주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과 강포와 피 흘림만 있었습니다.
● 또한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교제를 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지식’이란 말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서 얻게 되는 ‘체험적 지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란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서 소유하게 되는 지식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교제를 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였으며, 그들이 드리는 제사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으로 하나님의 성전만 더럽히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벌하여,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때와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 둘째로, 부도덕한 죄악만 가득하였기 때문.
[4:2]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그들에겐 정말 있어야 할 것들은 없고, 있어서는 안 될 것들만 가득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대신 그 빈자리를 거짓 맹세와 속임수와 절도와 살인과 간음과 폭력이 채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과 쟁변하여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그 시시비비를 따지고,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쟁변하신 결과.
끝까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결과가 무엇일까요?

일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요꼬하마에서 요꼬스까를 거쳐 가미꾸라로 가는 도중에 일본 천황의 별장이 있는데, 경치가 매우 좋은 바닷가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넓은 대지에 나무도 빽빽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산에서 소규모의 산불이 나서 천황의 숲이 약간 불에 탔습니다. 불은 곧 꺼져서 피해는 대단한 것이 못 되었지만, 그 별장 관리인은 “천황 폐하께 면목이 없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너무 심하다 싶은 이야기지만 우리는 책임감에 대해 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어떤 일에 대하여 “내 탓입니다”라고 하는 책임의식을 가지기보다는 상대방이나 혹은 다른 어떤 것의 탓으로 돌리려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탓으로, 조상의 탓으로, 환경의 탓으로 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들의 잘못으로 나라가 망하고 있는데도, 자신들의 탓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서로가 상대방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어느 날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떤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범죄해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데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분이신 것이 분명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부인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부인! 부인은 지금 부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 라고 부인이 반문하자, 무디는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계속해서 회개하지 않을 때에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호 4:3]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 이스라엘의 범죄
어느 유능한 젊은 변호사가 살인죄로 기소된 사람을 잘 변호하여, 무죄 석방되게 하였습니다. 법정을 떠나면서 변호사는 자신의 의뢰인에게 앞으로 다시는 싸움에 관여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변호사는 그 동안 쌓은 훌륭한 공적으로 인해 최고 재판소의 판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살인죄로 기소된 한 중년남자의 재판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피고석에 서 있는 피고를 본 판사는 오래 전에 자신의 성공적인 변호로 인해 무죄 석방을 받았던 바로 그 사람임을 알아보고, 매우 마음이 아팠습니다. 재판은 19일 동안이나 끌었는데, 판결은 유죄였습니다. 선고가 끝난 뒤 판사는 피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년 전에는 나는 당신의 구원자였으나, 지금은 당신의 심판자가 되었군요.”

그렇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판의 왕으로 다가 오실 것입니다. 끝까지 깨닫지 못하는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결국은 깨달음이 없을 때의 결과이죠.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림.
하나님이 탄식하십니다.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우린 다 하나님을 알죠? 그러나 하나님을 알되, 관념적으로만 알아서는 안 됩니다. 단순히 지식적인 차원에서만 아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깊이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체험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나와는 어떤 관계에 있는지 등,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에 대한 답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 중요한 것입니다.

■ 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알아 가는 일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일과 향락을 추구하는 정욕적인 삶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백성들 스스로도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갔고,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서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6]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 번영함이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도록...
이스라엘의 번영은 오히려 이스라엘에 사악함이 충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7]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당시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의 통치를 받고 있었는데, 솔로몬 왕 이후로 최고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번영을 하나님께서 주신 복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육적으로는 풍요했지만, 영적으로 빈곤했기 때문에 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 행위는 가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풍요로움 때문에 범죄 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전세계 82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은 행복지수 49위랍니다. 빈곤한 나라이기 때문에 불행할 것 같은 나이지리아 같은 나라는 19위, 우리가 돕는 필리핀도 우리나라보다 행복지수가 월등하게 앞섭니다. 물질적 풍요가 감사를 가져다 주는 걸까요?

영국의 경제 철학자인 챨스 핸디라는 사람은 자신의 저서 󰡔The Hungry Spirit󰡕(빈곤한 정신)에서 “많은 사람들이 풍족한 사회 속에서도 가난에 허덕이며, 삶을 탕진하는 것에 대해 나는 화가 난다”고 말하면서 “문제는 돈이 아니라, 정신의 빈곤이다”고 하였습니다.

굶주림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저차원의 굶주림’(lesser hunger)과 ‘고차원의 굶주림’(greater hunger)입니다. 저차원의 굶주림이란 삶을 유지하기 위한 것들, 상품과 서비스, 그리고 그런 것들을 위해 지불할 돈에 대한 굶주림을 말합니다. 그리고 고차원의 굶주림은 ‘왜?’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즉 삶의 목적에 대한 이해에 관한 굶주림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차원적 굶주림은 가지고 있는데 반해 고차원적 굶주림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며 굶주려야 하는 고차원의 굶주림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굶주림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을 따르는 일을 중단하였기 때문입니다.

[10] “저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며 행음하여도 수효를 더하지 못하나니 이는 여호와 좇기를 그쳤음이니라”

하나님 좇기를 그칠 때의 결과는 멸망과 궁핍임을 그들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 범죄한 이스라엘의 실상
프랑스의 작가인 에밀 졸라는 󰡔나나󰡕라는 소설을 써서 일약 세계적인 작가가 된 사람입니다. 나나는 바리에떼라는 극장의 여배우로 활약하다가 스스로 창녀로 전락해버리는 이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인데, 풍만한 육체와 눈부신 미모를 가진 아름다운 나나는 천부적으로 선량하고 동정심이 많은 여자였습니다. 그러나 나나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연극배우가 되었지만, 세탁부인 어머니와 기와장이였던 아버지와 살았던 그 지긋지긋한 가난이 두려워서 돈을 모으기 위해 매춘부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나나의 특징은 결코 내일을 믿지 않는 다는 것과 가난한 시절에 가져보지 못했던 화려한 생활에 대한 무서운 집념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창녀인 나나의 주위엔 수많은 남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하였는데, 나폴레옹 3세의 시종인 백작과 돈 많은 은행가와 젊은 군인 형제들이 모든 재산을 바쳐가며 나나의 사랑을 얻으려고 발버둥칩니다. 결국 백작은 나나의 쾌락의 포로가 되어 가산을 탕진하며, 부유한 은행가도 나나와의 쾌락을 좇다가 형편없이 파산해버립니다. 그리고 군인 형제들 중 형은 나나로 인해 공금을 횡령하다 몰락해 버리고, 동생은 나나와의 사랑에 빠져 결국 자살해버립니다. 그러나 파멸한 것은 그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나 자신도 왕궁처럼 화려한 거실에서 결국 천연두에 걸려 죽어갔습니다.
이 소설은 나나의 마지막 모습에 대하여 “비너스는 썩고 있었습니다. 마치 시궁창이나 길거리에 내버려진 상한 고깃덩이처럼 썩고 있었습니다. 쾌락이라는 이름으로 숱한 사람을 해친 독소가 마침내 스스로의 얼굴을 천연두로 썩게 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묘사하면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의 실상은 음행과 향락에 사로잡힌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11]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

음행과 술 취함과 향락 생활에 빠져서 신앙을 상실하였으며, 지적, 윤리적, 도덕적 마비 상태에 놓여 있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상태를 본문 18절은 “저희가 마시기를 다하고는 행음하기를 마지아니하며”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시기를 다하다’는 말은 더 이상 마실 것이 없을 때까지 술을 마시는 것을 의미하며, ‘행음하기를 마지아니하다’는 말은 계속적으로 음행을 즐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술에 만취하여, 스스로 음행을 즐겼음을 의미합니다.

[13] “저희가 산꼭대기에서 제사를 드리며 작은 산 위에서 분향하되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서 하니 이는 그 나무 그늘이 아름다움이라 이러므로 너희 딸들이 행음하며 너희 며느리들이 간음을 행하는도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과 바벨론의 신들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는데, 이런 신들을 섬기는 제사의식에는 젊은 처녀나 여인들을 제물로 바치며 음행하는 것이 기본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들은 대부분 생산과 다산을 주관하는 신으로 섬겨졌기 때문에 이들 신들을 잘 섬김으로 풍성한 수확을 거두는 복과 많은 자녀를 낳는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여인들은 이런 것을 핑계삼아 공공연하게 음행을 자행하였습니다.
간음죄를 짓는 것은 이스라엘의 남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4] “이는 남자들도 창기와 함께 나가며 음부와 함께 희생을 드림이니라”

당시 아스다롯 신전에는 많은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창녀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아스다롯 신전에서 행해지는 제사의식에 참여하여, 제사의식의 하나로 이들 여사제들과 부끄러움 없이 음행을 자행하였던 것입니다.

여하튼 이스라엘은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심각한 음란죄를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종교의 허울에 가려져 있어서 신성한 종교행위처럼 착각되었습니다. 입으로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고백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전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듯이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고후11: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사단은 무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고 매혹적인 모습으로 다가와서는 무서운 영적 힘을 발휘하여 순식간에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거짓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결국에는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죄에 중독이 되는 것입니다.

■ 버려 두지 마옵소서.
롬1:24-28에 보면, 하나님께서 음행을 행하는 자들과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기를 싫어하는 자들을 ‘내어버려 두었다’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롬1:24-28에서 ‘내어버려 두었다’는 뜻으로 사용된 말은 ‘파레도켄’(παρέδωκεν)인데, ‘포기하다, 넘겨주다, 던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짓고 있는 죄에 그들을 던져버리신다는 것입니다.

버려 둔다는 것은 최고의 심판입니다. 스스로 멸망에 처해지도록 간섭하지 않는 이것이 곧 심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그냥 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회개를 기대할 수가 없기 때문에 심판해 버리는 것이 곧 버려 두는 것입니다.

[17] “에브라임이 우상과 연합하였으니 버려 두라”

요13:27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를 팔려는 마음을 가진 가룟 유다를 향하여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히 버려지는 순간입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속히 하라”고 버려지는 순간부터 가룟 유다는 다시 회개할 기회를 상실하는 것입니다.

■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흔히 미운정, 고운정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자꾸 만나고 부딪히다 보면 정이 든다는 것이겠죠. 하나님과의 만남을 두려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지금도 찾아 오셔서 여러분과 쟁변하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오늘 호세아서에서 읽은 이스라엘 민족의 상황이 강건너 불보듯이 볼 남의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 사회에서도 얼마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음란과 부도덕과 행음, 우상숭배가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쟁론할 때입니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나가야 할 때입니다.
이 사순절 기간 동안 이 한국 땅의 크리스챤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바로 알고 깨달아서 자신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사회와 나라를 살리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 지기를 축원합니다.

이사야가 꿈꾸던 그 이상향을 우리도 바라보기를 축원합니다.

(사 11:9)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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