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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 삶의 실상과 허상 (삼상 18: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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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공재영 목사

세상에는 사실과 사실처럼 보이는 현상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사실과 사실처럼 보이는 현상의 차이는 엄청난것입니다. 사실의 자리에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분명하지만 사실과 같은 현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불확실한 추측만 무성하게 하여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의혹만 증폭시킨다는 것입니다. 의혹만 부풀리는 사실처럼 보이는 현상속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파괴적인 삶을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축복이 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상속에서 분명한 사실을 보고 그것을 붙잡고 살아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보는 것이고 사실과 같은 현상은 보지 못하는 자리입니다. 보는 것에는 수정이 쉽게 가능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보일 때까지 수정이 불가능 할 수도 있기에 우리의 삶속에서의 파괴력은 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위력적일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면 그 공감하는 자리에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인간 삶의 현실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사실과 사실처럼 보여지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놔두고 자신의 눈에는 그렇게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사울왕이 지금 보고 있는 자신의 삶은 작은 것처럼 보이고 아마도 그럴것이라고 하면서 보여지는 다윗의 자리는 너무 크게 보여서 자신의 삶에 맥이 풀려진것입니다. 그런 사울왕의 자리가 자신이 받은 복을 잃어 버리게 한것입니다. 이것을 허상이라고 하며 이 허상이 우리를 무너지게 합니다. 진정한 인간의 미래는 실상을 통해 열려지는 것입니다. 허상의 주인공 사울은 무너지고 실상의 사람 다윗은 세워진것입니다.

1. 자신의 주소를 복되게 정해야 합니다(9)

-"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주소는 인간이 누리는 삶의 자리인 것입니다. 이 삶의 자리를 일컬어 문화라고 하는데 현대인의 큰 변화는 주거 문화가 엄청나게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인으로 하여금 삶을 작아지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 불안한 자리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감추며 살아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즉 오늘날은 주소가 쉽게 바꿔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거 문화속에 사는 것이 현대인이요 그것이 사이버 공간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울이라는 사람은 한곳에 정하고 싶은 자리가 없어진 사람입니다. 이유는 다윗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 너무 좋아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소처럼 화려하게 보이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을 힘들게 했고, 지금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서 삶이 힘들어지는가 아니면 사실은 아닌데 그렇게 보여지는 것 때문에 힘들어지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봅시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조카 때문에 힘들게 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조카가 선택한 땅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며 사람들이 그 복을 받아 누려서 된 줄을 알고 너 있는 곳을 축복할 테니 너 있는 곳에서 그 복을 누려 그 주소를 화려하게 만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자기 주소를 복되게 하는 것이요 우리의 미래는 자신의 주소가 분명할 때에 열려지게 됩니다. 이것을 증명해 보인 사람이 다윗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않으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고 하셨습니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주소를 복되게 하여 미래를 밝게 열어갑시다.

2. 나의 세계를 닫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12, 14).

닫혀진 세상이라면 할 수 없지만 닫혀진 것처럼 보여진다는 것때문에 자신의 세계를 닫아버린다면 그것처럼 가슴 아픈일은 없는 것입니다. 사자굴에 던져지는 다니엘의 세계는 닫혀진것 같은 세상이 아니고 정말 닫혀진 끝난 세상이었고, 노예로 사는 것도 절망이었는데 그 몸으로 요셉이 감옥에 들어간다면 모든 것이 끝난것이나 다름없는 세상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그 사자굴도, 그 감옥도 열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배경때문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배경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이라는 사람을 향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16:7)"고 하셨습니다. 다시말하면 내가 선택한 세상만을 붙잡고 살지 말고 하나님이 선택하신 세상속을 담대하게 살아가는자를 보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은 내가 닫아버리지만 하나님이 선택하신 세상은 하나님이 닫지 않으시면 누구도 닫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한번도 끝났다고 하신적이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나의 세계를 어렵게 시작했다가 쉽게 닫아버리지 말고 더 넓게 열어갈 수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욕심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왕은 욕심으로 덤벼들었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열어주는 자리가 있음을 믿었기에 골리앗앞에서도 삶이 멈추지 않았고 사울의 칼날앞에서도 닫아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3. 세상을 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16)

-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 세상 전체속에서 사는 것이지 내집, 내직장안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삶이라면 중요한 것은 그 세상을 품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그 세상이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살았던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획일적인 삶을 산것이 아니고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리가 어떠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리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삶의 순수함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자리는 곧 순수함의 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순수함의 자리에는 두가지 기본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삶속에 유연함을 잃지 않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솔직하게 자신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믿는자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순수함을 지키는 것 곧 세상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연하게 세상을 대처하며 살아가는 삶인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자칫 잘못하면 독선적이고 외골수로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것이 유연한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늘 자신의 삶속에서 솔직하게 자신을 먼저 고백할 수 있을 때에 순수한 믿음의 자리에 자신을 굳게 세울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자리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무대이며 그곳에서 승리자로 세워주십니다. 이 순수함을 보여준 사람이 다윗이며 이는 곧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삶을 지키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믿음으로 그들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다윗에게 좁게 보여진 세상을 넓게 열어 주신 것입니다.

결  론

예배는 하나님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그자리에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보여지는 세상이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다면 하나님의 세계를 믿고 바라보며 그 세상을 뛰어 넘어 실상의 축복을 소유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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