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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백배를 결실하는 말 (마 13: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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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약선 목사

매주일 목사는 고민합니다. 이번 주일에 나오는 모든 교인들이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은혜를 받아야 할텐데.. 고민하며 기도합니다.
왜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말씀을 듣는데... 어떤 사람은 은혜를 받고, 기뻐하는데.. 어떤 사람은 무덤덤할까....
어떤 사람은 똑같은 말씀을 들었는데.. 왜 시험을 받을까..
목사는 늘 주일이 오면 고민에 빠집니다.
그리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모두 돌아갈 때는 은혜가 충만해서 돌아가게 해 주옵소서..
그래야 한 주간을 승리할텐데..
그런데 여러분들이 한 가지 고쳐야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내가 은혜를 받을 때.. 설교를 통해서만 은혜를 받으려고 하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은혜의 통로는 설교만이 아닙니다. 은혜의 통로는 여러 가지입니다.
찬송도 은혜의 통로입니다. 기도도 은혜의 통로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것도 은혜의 통로입니다. 참회의 기도를 드리는 것도 은혜의 통로입니다.
만약에 설교만 은혜의 통로라면 예배에 다른 순서는 할 필요가 없지요..
그냥 설교만 해야지.. 은혜의 통로니까.. 아닙니다. 은혜의 통로는 여러 가지입니다.

혹 설교를 통해 은혜를 못 받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은혜를 못 받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 목사가 설교를 잘 못해서 은혜가 안 되었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서 여러분들에게 설명하는 시간이니까.. 혹 은혜를 못 받았다고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읽는 그 때에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왜 당신은 은혜를 못 받느냐는 그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잘못된 것입니까? 말씀이 잘못된 것입니까?
또 설교의 은혜를 못 받으면 찬송에서라도 은혜를 받아야 할 것 아닙니까? 아멘?
찬송은 내가 부르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 찬송이 보통 찬송이 아닙니다.
세계의 많은 수억의 사람들이 오늘도 이 찬송을 부르고, 또 이 찬송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찬송을 부르고 은혜를 받는데... 그 찬송을 당신의 입으로 부르면서 은혜를 못 받는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는 말입니다.
또 신앙고백.. 그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다른 찬송이나 설교나.. 다른 데에서 은혜를 못 받으면 신앙고백을 할 때는 은혜를 받아야지요... 아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고, 그 분이 부활하시고, 그 분이 나를 데리러 오신다는 그 고백을 하면서 은혜를 못 받는 당신은 누구냐는 말입니다.
또 한 주일 감사해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릴 때 은혜가 돼야지..
남이 드리는데 내가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여러분이 오늘 정성으로 드렸다면 그 드리는 순간에 은혜가 되어야합니다.
장로님들이 대표기도를 할 때 은혜를 못 받는다면? 그러면 장로님들이 기도를 잘못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당신이 참회기도를 할 때 은혜를 못 받는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그러니까 여기에서 결론이 하나 나는데.. 은혜를 못 받는 것은 내 탓입니다. 아멘입니까?
그래서 예배시간에 여러 가지 다양한 은혜의 통로를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찬송도 부르고, 성경교독도 하고, 찬양대의 찬양도 듣고, 그 많은 것 중에 예배드리면서 은혜를 못 받고 간다? 그것은 은혜 못 받은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여서 예배할 때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마귀가 교회에 뿌려놓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것을 목사들도 교인들이 좋아 하니까 자주 이용하고, 교인들도 그 이야기를 들으면 깔깔대고 웃고 그러는데 이 것은 마귀가 뿌려놓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교회에 어떤 집사님은 예배시간마다 조는 것입니다. 앉기만 하면 조는 것입니다. 그것은 습관입니다.
피곤해서가 아닙니다. 정신자세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화가 나서 “집사님! 왜 예배시간만 되면 좁니까?”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정신 바짝 차리면서 머리를 긁으면서.. “목사님이 재워놓고는.. ”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조는 이유는 목사님이 설교를 재미있게 하고 목사님이 설교를 잘했으면 내가 왜 졸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마귀가 뿌린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 교인들이 재미있어서 깔깔대고 웃는데.. 이것은 아주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교인들이 은혜를 못 받는 것을 이야기할 때 꼭 남의 탓을 합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예배 시간이 한 시간이면 설교에서 은혜를 못 받았으면 찬송에서 은혜를 받아야 되고..
또 찬송에서 은혜를 못 받았으면 내가 하는 신앙고백에서 은혜를 받아야 되고, 참회의 기도에서 은혜를 받아야 되지..
다 은혜를 자기가 안받아 놓고는 꼭 핑계를 댑니다. 당신 때문에 내가 은혜를 못 받았다고..
우리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니까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내 탓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백배를 거두는 밭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데 백배를 거두는 밭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농사짓는다는 말은 신앙생활을 교훈하는 비유입니다.
백배를 거두는 밭이 있다고 합니다. 밭에 씨를 뿌렸는데 백배를 거두었습니다.
이 백배라는 말은 많이 거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게 꾸민 말이 아닙니다. 자연수 백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만큼을 할 수 있을까? 있지요..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실제로 이삭이 농사지으니 한 해에 백배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백배라고 주님이 말씀하실 때는 자연수 백배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 그 뒤에 삼십 배, 육십 배라는 말도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좋은 밭에 뿌린 씨처럼 내가 잘 받아들이면 내 삶속에 하나님의 축복의 열매가 맺히는데 10배, 20배가 아니고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라고 합니다.
나는 이 숫자, 문자 그대로 믿습니다. 그 이상을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봄의 이야기입니다. 요즘 같은 봄에 농부가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그 씨가 떨어지는데 어떤 씨는 길가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어떤 씨는 돌작밭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또 어떤 씨는 좋은 땅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나중에 결실하는데..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이 비유에서 씨는 뭐라고 했는 고 하니, 19절에 보니까 “씨는 천국의 말씀” 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의 말씀이란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 능력의 말씀, 은혜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씨에 대해서는 말할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우리는 씨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 이야기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좋은 것입니다. 다 능력이 있습니다. 다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씨에 대해서는 우리는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가리키는 밭에 대해서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교인들이 자기의 마음 밭이 길가이고, 돌작 밭이고, 가시덤불인 것에 대해서는 말은 안하고,
말씀에 대해서만 자꾸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격이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입니다. 아멘?

그러니까 왜 내가 믿음 생활하는데 열매가 없느냐?
마음 밭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니까 세 가지 마음 밭에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첫째가 길가입니다. 19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리운 자요” 아멘?
길가.. 길가란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밟아서 딱딱하게 굳어진 땅이지.. 그것은 밭이 아닙니다. 길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에 씨를 뿌렸더니 딱딱하니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겉으로 굴러다니는 것입니다.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듣기는 듣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듣고 깨닫지 못할 때... 깨닫지 못한다는 말은 믿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듣는 것은 중요합니다. 참 중요합니다. 믿음의 출발도 들음에서 납니다. 그런데 듣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들었으면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깨닫는다는 말은 믿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의 실수가 듣는 것으로 끝내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19절 말씀에 보니까 말씀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뿌리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천국말씀! “너희가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그러니까 여러분! 말씀을 귀로 듣지 마세요. 귀로만 듣는 사람은 내일 가면 다 잊어버립니다.
그 말씀이 내 마음 밭에 뿌려져야 되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그럴 때 그 사람에게 열매가 맺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듣기는 많이 합니다. 많이 듣습니다.
주일 낮에도 듣고, 저녁에도 듣고, 수요일에도 듣고, 구역예배도 듣고, 새벽 예배때도 듣고...
이렇게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나버립니다.
말씀이 뿌리를 내리는 데는 귀가 아닙니다.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의 마음 밭에 말씀이 뿌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길가에 뿌려진 씨는 악한 자, 마귀가 다 빼앗아 가는데.. 그러면 지금 내 마음이 길가와 같으면 소망이 없는가? 있습니다. 두 가지를 하면 됩니다.

첫번째, 길가.. 땅은 굳어서 그대로 두고 씨를 뿌리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다 엎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길가처럼 굳어있으면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말씀의 삽으로 파 엎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말씀을 파 엎을 수 있는 연장은 말씀의 삽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고, 우리의 시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으로 파 엎기를 바랍니다. 파 엎기만 하면 됩니까? 물을 주어야 합니다.
길가를 파 엎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의 단비가 내려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해서 정말 은혜의 단비가 내 마음 밭에 촉촉이 내려야 길가에 마음이 좋은 땅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돌밭이 있다고 했습니다. 20절, 21절 읽겠습니다.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아멘?
돌밭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길가보다는 믿음이 조금 전진되어 있습니다. 보면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상당히 전진한 것입니다.
길가는 듣고 깨닫지 못한 사람인데.. 이 사람은 듣고 기쁨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밭 속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속에 돌들이 가득해서 이 돌 때문에 씨가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고.. 약하게 약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언제나 평안합니까? 환란의 바람이 불고, 시험이 오고 그러니까 이 약한 나무가 자라다가 쓰러졌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오늘 여러분 가운데 돌밭 같은 마음이 많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아멘! 즉시 기쁨으로 받습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결심도 합니다. 나도 저 말씀대로 살아야지.. 나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봐야지..
그러나 그 말씀이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합니다. 왜? 마음속에 여러 가지 돌들로 가득합니다.
쉽게 설명하면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 욕심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그 욕심 때문에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요한웨슬레 목사님이 설교를 했습니다.
첫 번째, 여러분 하나님의 복을 받아 돈을 많이 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이 좋아서 아멘 할렐루야 그랬습니다
두 번째, 여러분! 많이 저축해야합니다... 그러니까 아멘 할렐루야~
세 번째,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불쌍한 이웃을 위해 많이 아낌없이 쓰십시오.. 그랬더니 아멘을 하나도 안하더라는 것입니다.
많이 버십시오.. 하니까 아멘 할렐루야! 많이 저축하십시오 하니까 아멘 할렐루야!
많이 쓰십시오 그러니까 아멘도 안하도 안합니다...
아이고~ 우리 목사님 두 번째 까지만 했으면 백점자리 설교인데... 세 번째를 말해가지고 죽을 썼다고..
죽을 쓴 것은 목사님이 아니라 당신들이 죽을 쓴 것입니다.
욕심이 있는 사람은 헌신해라.. 봉사해라.. 그러면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정착이 안 되는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받기 좋아하는 사람.. 교만한 사람은 여보세요. 남들을 섬겨야 복을 받습니다... 그러면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내가 왜 섬겨? 대접받아야지...?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남을 죽도록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
그 사람에게는 아무리 말해도... 이웃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러면 미워서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사랑하라고 하면..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뿌리가 안 내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돌작 밭 같은 마음은 희망이 없는가?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그 돌들을 골라내면 됩니다.
회개하고, 한 가지 한 가지 발견될 때마다 자꾸 골라내세요...
회개하세요! 내 속에 돌들이 많이 있는데 회개를 안하니까 말씀이 자라는 것 같다가 또 쓰러져 죽어버리고. .자라는 것 같다가 또 죽고..

세 번째, 가시떨기 밭이 있다는 것입니다. 22절,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아멘.
세 번째에는 가시떨기 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중에 우리가 생각해야 될 중요한 말은.. 막혔다! 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제 씨가 뿌려져서 뿌리를 내려서 자라 올라오는데.. 쭈욱 자라야 꽃도 피고, 열매도 맺는데.. 이것이 자라다가 막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가시덤불이 딱 막고 있으니까 이것을 뚫고 나오지 못해서 자라다가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꽃도 못 피고, 열매도 못 맺고.. 그냥 올라가다가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생활이 아닙니다.
끝까지 올라와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그것이 성공적인 믿음생활입니다.
아마 나이 많으신 분들도 야구를 모르는 분들이 없을 것입니다.
방망이 들고 서 있다가 투수가 공을 던지면 공을 치고 돌아오는 것인데.. 거기에 베이스가 1루, 2루 3루까지 돌고 홈으로 와야 1점입니다.
내가 마음이 1루까지 백번을 가도 그것은 점수가 아닙니다.
내가 2루까지... 백번을 가도 그것은 점수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3루까지 갔습니다. 그러면 3분의 2를 도는 것인데... 3루에서 홈으로 못들어오면 그것은 점수가 아닙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그럴 때가 많습니다. 날마다 1루까지는 잘 갑니다.
그런데 1루 갔다가 다시 돌아옵니다. 이것이 길가입니다.
날마다 교회에 와서 듣습니다. 듣기는 듣는데.. 아무것도 없습니다.
돌작밭은 2루와 같습니다. 듣고 기쁨으로 즉시 받기는 합니다. 그러니까 1루 돌아서 2루까지 기쁨으로 왔는데.. 끝까지 돌아와야지 다시 거기에서 죽어버립니다. 그러면 아무 열매가 없습니다.
여기 가시덤불은 3루까지 간 사람을 말합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잘 왔다니까요. 그런데 위에 막힌 곳이 있습니다. 이것을 뚫고 나와야 열매를 맺는데.. 여기까지 와서 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3루까지 백번을 가도 그것은 점수 1점도 아닙니다.
아이고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3루까지 백번을 갔는데..
글쎄, 백번이 아니라 천번을 가도 1점이 안됩니다.
돌아와서 자기가 출발했던 그 곳에 발을 디뎌야 1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1루까지는 여러번 왔다 갔다 하는데.. 나는 지금 신앙의 열매가 있겠지? 3루까지 가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열매가 맺어야 됩니다.

그런데 여기, 가시덤불.. 막혔다는 것입니다. 뭐가 막혔다는 것입니까?
두 가지입니다. 세상 염려와 재리의 유혹이라고 합니다.
세상염려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바로 믿지 못하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늘 세상염려로 막힙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입니다. 하나님 말씀보다는 세상의 방법을..
기도보다는 세상의 수단을..... 더 앞세우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받고 자라는 것 같지만 결국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끝나버립니다.
또 하나는 재리의 유혹입니다. 물질의 유혹입니다
여러분! 교회와 여러분의 사업을 절대 연관시키지 마세요!
그러면 은혜를 못 받습니다.
교회와 여러분의 사업을 절대 연관시키지 마세요..
종종 어떤 분이 사업을 하시는데.. 교인들이 많으니까 같은 업종이 여러 가지 있잖아요?
교인들이 저쪽 집은 많이 가는데.. 자기 집은 조금 오니까 상처를 받고 떠났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이 예를들어 음식점을 합니까? 우리집에 교인들이 많이 안온다고 상처받지 마세요.
교회는 사업한다고 오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곳에 섭섭함을 갖기 시작하면 전혀 은혜를 못 받습니다
섭섭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절대 그러지 마세요. 그것은 은혜스럽지 못합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그 분은 참 지혜로운 분입니다.
엄청난 건설업자입니다. 그런데 자기 교회를 지을 때 자기가 안 지었습니다.
다들 장로님이 당연히 해야지요..
안합니다. 우리교회는 내가 안합니다. 다른 교회는 내가 다 지어도.. 우리교회는 내가 안합니다.
그래서 다른 업자가 와서 짓는데 열심히 감독하고 그랬습니다.
이 장로님은 정말 지혜로운 자입니다. 교회와 그런 것과 연관시키지 마세요!
내가 수많은 사업체에 가서 우리교회에 등록하고 가서 예배드릴 때 보면..
그 사람들이 생각할 때  큰 교회니까 교인들에게 이 교회와 내 사업과 연관시키면 이득이 오겠지..?
자기 기대에 미치지 않아서 떨어져 나간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것과 절대 연관시키지 마세요!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올라가다가 세상의 재리에 막혀서 결실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좋은 밭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가시덤불은 소망이 없는가?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불을 질러버리면 됩니다.
성령의 불을 밭아서 내 마음의 가시덤불을 성령의 불로 태워버리면 가시덤불이 태워지면 거름이 됩니다.
그러면 좋은 밭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했습니다.
좋은 밭에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면 백배, 육십 배, 삼십 배로 거둡니다.
저는 문자 그대로 이 말씀을 믿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내 마음을 좋은 밭으로 만들어서 말씀을 아멘으로 받고 그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은 내가 받은 그 말씀을 통해 적어도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복을 주심을 믿으세요!

봄이 되어 농부들이 씨를 뿌리는 계절입니다.
내 마음이 어떤지를 살펴서 무엇 때문에 내가 은혜 받지 못했다고 핑계대지 마세요!
은혜의 통로는 여러 가지입니다.
왜 당신은 은혜를 받지 못합니까? 설교를 통해 은혜를 못 받으면 말씀 읽을 때 은혜를 받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 속에서 은혜를 못 받으면 찬송을 부르면서 은혜를 받아야 될 것 아닙니까? 그래도 못 받으면 당신은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내 밭이 문제입니다. 은혜를 받아서 정말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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