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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2005 새생명전도주일)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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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임정석 목사

오늘 처음으로 저희들과 함께 예배드리게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쁜 마음으로 환영하는 뜻에서 뜨겁게 박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작품 가운데
『사람에게는 얼마만한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한 도시에 살고 있는 언니가 시골에 살고 있는 동생을 찾아가 대화하는 장면부터 시작됩니다.

이 언니는 장사꾼에게 시집가서 도시에 살고 있었고,
동생은 농사꾼에게 시집가서 시골에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모처럼 만났기에 차를 마시며 즐겁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그러다가 언니가 도시생활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언니가 사는 집이 얼마나 크고 안락한 집인지..
또 아이들은 얼마나 멋진 옷과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살고 있는지... 
또 아이들이 놀 때는 어떤 마차를 타며, 어떤 영화를 보며 사는지...
한참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언니의 자랑을 한참 듣고 있던 동생은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누가 뭐래도 난 언니의 생활과  내 생활을 바꾸고 싶지 않아요.
  우리 생활이야 겉으로는 보잘 것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근심 걱정 없이 살아요.
  언니 말대로 도시 생활이야 깔끔하고 호화로와 우리보다 좋아 보일지는 모르지만
  장사하다 보면 크게 벌든가 아니면 아주 망하든가 둘 중에 하나가 아니겠어요?
  손해와 이익은 손의 앞 앞뒷면과 같다는 속담도 있쟎아요
  그러니 오늘의 부자가 내일의 알거지가 될지 누가 알겠어요?
  거기에 비하면 우리 시골 생활은 안전하고 틀림없어요.
  큰 부자는 못될지 몰라도 배 곪는 일은 없으니까요.

이 말을 한참 듣고 있던 언니가 말합니다.

  배만 고프지 않게 살면 뭘해. 삶이 돼지같은 걸..
  게다가 좋은 옷을 사 입을 수 있나.. 훌륭한 사람을 사귈 수 있나...
  아무리 뼈빠지게 일해 봤자 이 거름더미나 돼지우리를 벗어나지도 못할테고..     
  불쌍한 것은.. 네 아이들도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니 말이야...

한참 듣고 있던 동생이 가만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문을 또 엽니다.

  그래요. 그건 우리의 삶의 방식이지요..
  그 대신 우리의 시골 생활은 아주 건전하고 자유로운 삶이라고 할 수 있어요.
  누구에게 굽실거릴 필요도 없고.. 누군가를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그렇지만 도시생활이 어디 그렇습니까?
  날마다 유혹과 불안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오늘이 아무리 좋아도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죠
  이를테면 형부도 언제 노름에 미칠지, 언제 술독에 빠질지 모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 그러다가 재산을 몽땅 다 날리고 알거지가 될지 누가 알겠어요?

모처럼 만난 언니와 동생은 처음에는 이런 저런 이야기로 다정하게 대화를 시작했으나
서로 자랑을 늘어놓다 보니 그만 감정과 자존심을 건드리게 되면서
서로 불편하게 되고 이야기도 점점 빗나가게 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렇게 이야기가 빗나가게 되던 즈음 동생 남편 빠홈이 난로가에서 듣다가 끼어들게됩니다.

  그래요! 그 말은 사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네 농부들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 품 같은 이 땅을 가꾸며 살아왔기 때문에
  어리석은 짓에 한눈 팔 겨를이 없지요.
  다만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땅이 모자라는 것뿐이지.. 땅만 많다면...
  세상에 겁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악마까지도 말입니다!...

이렇게 모처럼 만난 자매와 빠홈이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밤이 깊어 다 잠자리에 들게되는데
이 이야기를 벽난로 뒤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듣고 있던 악마가 생각해 보니
매우 약이 올랐습니다.

  뭐라고? 땅만 있으면 악마까지도 겁나지 않는다고?
  좋아! 그렇다면 어디 나와 한판 겨루어 볼까?
  네가 소원하는 땅을 듬뿍 안겨주어 그것으로 네 놈을 반드시 사로잡고야 말겠다!!

그 후 이 악마는 어떻게 해서든지 빠홈과 한판 겨루려고 시기를 계속 엿보는 가운데
세월이 흐릅니다.

그러한 가운데 빠홈은 여러 가지 일로 땅을 조금씩 조금씩 확보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사들이게 되는 땅도 빠홈은 마음에 차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점점 빠홈은 땅에 집착하는 욕심쟁이로 변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때가 왔습니다.

땅이라고 하면 무조건 가지고 싶어하는 이 빠홈에게
엄청난 땅을 가진 한 부자가 자기 머리에 쓴 여우털 모자를 벗어서 땅에 내려놓으며
이렇게 제안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여우 털 모자가 있습니다.
해가 뜰 때 여기서 출발하여 해 지기 전 까지 이곳으로만 돌아오십시요.
그러면 당신이 돌아온 땅은 모두 다 당신에게 드리겠습니다.
아주 싼 값인 하루당 1,000루불에 다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해지기 전까지 이 장소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당신은 땅도 갖지 못하고 1,000루불의 돈도 돌려받지 못할 것입니다."

빠홈은 신이 났습니다.
그래서 돈을 꺼내 1,000루불을 여우털 모자 안에 넣고는 걷기 시작합니다.

무한한 땅!! 그렇게도 평소에 갖고 싶었던 땅!!
이것을 내가 걷기만 하면 다 내 것이 된다니.... 빠홈은 도저히 믿어지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있는 힘껏 멀리 멀리 갑니다.

돌아올 거리와 시간을 생각하고 걸어야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땅에 욕심이 있어서
자꾸만 자꾸만 멀리 멀리 걷습니다.

그는 그렇게 걸으면서 간혹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지금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는 정말 땅에 욕심이 많아서인지.. 그러한 생각을 누르면서 계속 걷습니다.
그러다가 해가 질 무렵이 거의 다 되어서야 '이젠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되겠구나'하고는
있는 힘을 다해서 걷습니다.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그의 마음은 처음과는 달리 후회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렸나봐.
  지나친 욕심 때문에 일을 망친거야.
  해 지기 전까지 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사람들은 이런 날 보고 뭐라고 할까?
  다들 바보라고 비웃겠지..
  내가 하루 종일 걸어서 땅은 많이 차지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내가 그 땅에서 사는 것은 허락해 주지 않으실 모양인가보다.
  아.. 나는 스스로를 파멸시킨 것이나 다름없어.. 너무 너무 힘들어..

그러면서 그는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지는 가운데 신음소리를 내면서 도착하자마자
그만,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맙니다.

사람들은 몰려들어 쓰러진 빠홈을 부축하려 했으나
이미 그의 입에서는 피가 쏟아져 나왔고,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는 지나친 욕심으로 인하여
자기가 누울 자리 단 2미터(m)만 얻어 땅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지나친 욕심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될 뿐 아니라 때로는 자신에게 죽음까지도 가져다 준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살려면 땅이라고 하는 것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땅이 있어야 집도 짓고 살 수 있고, 논밭도 있어서 농사도 짓고 살 수 있습니다.
물론 요즘은 주거 개념이 일반 주택에서 아파트로 상당히 바뀌었기 때문에
개념 정리가 잘 안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여하튼 그렇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땅이라고 하는 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이 단편소설의 제목처럼 사람이라면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하는 것을
알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을 모르고 살면 이 빠홈처럼 욕심이 과해서
하루종일 걸어 얻고자 하는 땅은 얻었지만 제대로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는
그런 어리석은 행동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빠홈이 참 어리석다.. 이런 생각이 들지만..
또 깊이 생각해 보면 어리석은 사람은 그 빠홈이 아니라 우리들.. 아니!!
나 자신이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추구해야 할 것은 추구하지 않고 엉뚱한 것이나 추구하며 살고
정말 시간과 물질과 정성을 기울여 애써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하루 하루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은 아닌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최근에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들 모두에게 감동을 주면서 베스트 셀러로 떠오른 책.. 중..
『목적이 이끄는 삶(The Purpose Driven)』이란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그 책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평생 살면서 묻는 3가지 질문을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나는 누구인가? 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며
둘째 나는 중요한 사람인가? 라는.. 자신의 가치를 묻는 질문이고
셋째 나의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라는.. 자신의 비젼을 묻는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 질문을 풀어나가기 시작합니다.

삶의 목적을 알기 위한 추구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수천년 전부터 인류가 노력했으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 문제를 자기 중심적으로 풀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인생에서 무엇이 되고 싶은가?
나의 열정, 나의 목표, 나의 꿈은 무엇인가?

조금 전에 말씀드린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처럼
나에게는 얼마만한 땅이 필요한가?.. 거의 모든 사람이.. 이런 식으로 풀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문제를 제대로 풀 수 없습니다.
정답도 없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문제를 푸는 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질문하는 방식도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인생의 문제를 바르게 풀며
바르게 하는 질문은 어떤 것입니까?

이것이 중요한데..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 릭 워렌(Rick Warren)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생을 바르게 알고, 인생의 목적을 바르게 알기 위하여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인생의 출발점, 인생의 원점을 먼저 알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제시한 것이
세상을 창조하고 인생을 만드신 하나님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먼저 인생이 분명하게 알게되고 깊이 알게되며 지속적으로 알게 될 때
모든 문제는 다 풀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경 본문말씀에는 빠홈과 아주 비슷한 사람이 두 사람 등장합니다.

첫번째 등장하는 사람은 탐심에 눈이 먼 사람입니다. 13-15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이 말씀을 보면 형제가 유산 문제로 싸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전혀 싸울 일도 아닌데 왜 싸우나 이런 생각도 듭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유산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나누는 것입니까?

유대인의 관습에 따르면 형제가 유산을 나누게 될 때 형은 2/3, 동생은 1/3이 몫입니다.
이것이 원칙이고 간단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싸울 일이 없다는 것이며, 원칙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칙도 있고 문제도 간단하며 답도 이미 다 나와 있는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예수님은 이미 다 간파하셨습니다.

  욕심이 문제고, 지나친 과욕, 탐심 바로 그게 문제다.

혹자들은 이 문제가 물론 원칙이야 있을 것이고 원칙대로 하면 문제는 없겠지만
그렇게 재판까지 해 달라고 간청하는 것을 보아 뭔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몇가지 추측을 합니다.

첫째는,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재산을 분배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을 것이라는 추정입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재산을 나누어주었으면 문제가 되지 않을 터인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유언도 한마디 하시지 못하고 재산도 나누지 못한채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형이 이렇게 주장했다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집의 장남이니 아버님이 별 말씀 없이 돌아가셨다면 유산은 다 장남 것이다.

이러면서 유산을 동생한테는 전혀 나눠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지 않는가 하는 추정입니다.

둘째는, 형이 형 노릇을 못해서 동생이 부모님을 줄곧 모셔 왔는데
그러다가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추정입니다.
그런데 이럴 경우도 형이 동생 몫의 두배를 주장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유산을 분배할 때 형이 동생보다 두배 가지는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안에는 형이 부모를 모신다는 전제 속에 제정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부모는 형이 모시지도 않고 동생이 줄곧 모셔왔는데
형은 형대로 형이 받아야 할 유산만 주장한다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형제가 다 부모님을 모시지 않았다고 추정하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동생은 형이나 자기나 다 똑같은 처지이므로
이제와서 형이 자기보다 두배를 주장하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며
나누려면 똑같이 반반 나누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다시 본문 말씀을 한번 읽어봅시다. 13-15절입니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무엇이 문제입니까?

잘 모르겠으면 정답을 보면 되겠습니다만..
정답은 탐심에 있었다는 것이며.. 또 소유의 넉넉함을 추구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소유 없이 무소유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람이 무소유로 수도자적인 생을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이 이 땅에서 존재하고 살아가려면
최소한도의 먹을 것 입을 것 거주할 것 등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가면서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어떤 식으로 존재하며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데
소유의 넉넉함 그 자체는 죄가 아니나 그 소유의 넉넉함 그것..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은
문제라는 것이며
더더욱 중요한 것은 그 소유의 넉넉함을 추구하기 위하여 탐심까지 발동하는 것은
잘못된 삶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유산 문제도 그렇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유산이라는 문제 앞에서는 형제도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싸우고 소송하고 심지어 청부살인까지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문제 앞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초는
오직 인간 속에 있는 탐심을 물리치는데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형을 보면 형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 같고
동생을 보면 동생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좀더 깊이 들여다보면 형보다 동생에게 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론 유산분배라는 관점에서 불 때 문제가 어느 정도는 있기에
동생이 지금 형을 예수님에게 고발하고 있는 것이지만
더더욱 중요한 것은 이 동생의 마음 속에는 "탐심"이라는 죄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또 말씀하시는 이유는 조금 전에 다루었던 그 "탐심"이라는 정체가 무엇인가를
명확히 규명하고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입니다.
탐심을 가진 자는 어리석은 자요
하나님을 위하여는 재물을 쌓을 줄 모르고.. 자기를 위하여만 재물을 쌓는 자요
결국 이러한 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라는 것입니다.

마치 빠홈과 같은 사람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니 과욕을 낳고 과욕이 잉태하니 탐심을 낳고
탐심이 잉태하니 죄를 낳고  죄가 잉태하니 그 죄가 결국 자기를 죽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면서 오늘 말씀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면서 꼭 알아야 할 것이 몇가지 있다면... 그것은
첫째, 나는 어디서 온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 물질이란 무엇이며... 물질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셋째, 진정한 부자란 어떤 사람이 진정한 부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누가 어리석은 사람인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다.
누가 진정한 부자인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사람이 진정한 부자이다.
누가 진정 가난한 사람인가?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사람이 진정 가난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탐심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진정 가난한 사람입니까?
그는 욕심과 탐심의 노예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진정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노예로 살아가는 존재라면 평강과 만족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을 텐데 탐심의 노예로 살아가기 때문에 불안과 불만족 속에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기에 아무리 가져도 불안과 불만족을 헤어나올 수 없기에.. 가난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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