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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직임을 감당하는 자 (신 11:1,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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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익로 목사

사람은 대게 세 방면에서 책임을 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첫째, 가정에서의 책임입니다. 둘째, 사회에서의 책임입니다. 셋째, 하나님 앞에서의 책임입니다. 이러한 책임을 잘 감당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사회의 빛이 되고, 가정은 행복하게 됩니다. 책임의 중요함에 대해 중국의 양개치는 말하기를 “책임을 작가하는 것이 인간의 시작이고 책임을 완수하는 것이 인간의 끝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은 우리교회에 귀한 일꾼을 세우기 위해 임직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받들어 섬길 중책을 부여하는 것이 교회의 임직입니다. 직임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은 증거이므로 영광스럽기도 하지만, 사명감당이라는 무거운 짐을 안게 되기도 합니다. 직임을 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하지만 잘 감당하는 것은 더욱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사탄의 집요한 방해와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을 만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만난 사람을 통해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합니다. 내가 만난 사람 만남을 통해 성공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난교회 즉 훌륭한 직분자를 세운 교회는 은혜 가운데 부흥됩니다. 그러나 사람을 잘못 만난 교회, 바른 직임자를 세우지 못한 교회는 교회의 생명인 평안을 잃게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복음 11:28)하셨습니다. 세상 삶에 지친 나그네들이 찾아와 쉼을 얻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직분자를 잘못 만난 교회는, 쉼의 터전이 아니라 시기와 분쟁과 갈등과 반목이 가득한 가시방석이 되고 맙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도리어 상처를 받고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덴마크의 유명한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비유를 알고 나서 이 비유의 근본 질문은“누가 내 이웃이냐”라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내 이웃을 알아보느냐”하는 것도 아니고,“내가 현재 이웃이 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책임을 질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임직을 받는 분들이나, 이미 직임을 맡은 분들이나, 더 나아가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직임자들입니다. 이 거룩한 직임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해야 하겠습니까?


1. 직임을 감당하기 위한 바른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할지라도 어떤 동기로 그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한 예로, 창세기 4장에 가인과 아벨의 제물에 대한 기사가 나타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은 한 형제로서 같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은 기쁘게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원인이 무엇입니까? 어떤 마음으로 드리는가 하는 동기의 차이였습니다. 아벨은 양치는 사람이었는데 양떼를 바라볼 때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러한 아벨은 양떼 가운데 가장 좋은 첫 새끼를 하나님께 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인은 풍년을 맞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깊이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땀 흘려 일한 노력의 결과로만 여겨졌습니다. 햇빛과 비와 공기와 이슬을 주시며 자라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가인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 제물에 정성을 다 할리 없습니다. 아무 곡식이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자기의 제물이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음을 본 가인은 동생 아벨을 시기하며 미워했습니다. 미움이 쌓이고 쌓인 가인은 끝내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살인 사건입니다.

이처럼 동기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바르지 못한 동기는 정성 없는 신앙을 가져왔습니다. 정성이 결여된 신앙은 하나님으로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거절당한 가인은 동생을 미워하다가 끝내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가인 자신만이 아니라 그의 자자손손에게까지 하나님의 저주를 물려주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고귀한 직임을 맡은 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 직임에 임해야 하겠습니까? 본문 1절 말씀에“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하셨습니다.“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 직임의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할까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이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주어진 직임에 최선을 다해 충성하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한 마음으로 직임에 임하는 사람은 진실한 마음으로 일하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한 마음으로 직임에 임하는 사람은 겸손한 마음으로 임하게 됩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한 마음으로 직임에 임하는 사람은 빛없이 말없이 직임을 감당하게 됩니다.


2. 교회의 직임은 왜 맡기셨습니까?

교회에서 최초로 집사를 세운 것은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임직자를 세운 까닭은 사도들이 맡아하던 교회의 일을 돕기 위함이었습니다. 교회가 부흥되므로 사도들은 교회의 여러 가지 일로 인해 너무 분주 해졌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지자 성도 한사람 한 사람을 골고루 살필 수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사도들의 관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성도들 사이에 원망과 불평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본 사도들이 말하기를“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사도행전 6:3-4)고 했습니다. 직임자를 세운 이유는 사도들이“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며 말씀을 전하는 것이 주의 종들의 주 임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주의 종들이 기도를 많이 하므로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며,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연구하므로 은혜로운 말씀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은혜로운 말씀이 있을 때 그 말씀을 듣는 성도들의 영혼이 잘되게 되며, 영혼이 잘될 때 범사가 잘되며 강건케 되는 것입니다(요한삼서 1:2). 그러므로 권면 하시기를“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브리서 13:17)하셨습니다. 목회자로 하여금, 기도하며 말씀을 전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마음 빼앗기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의 종들이 기도와 말씀에 집중할 수 있으며, 은혜로운 말씀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목회자 개인을 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역사를 효율적으로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성령님의 감동어린 말씀이 있는 곳에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 의심하는 심령의 의심이 안개처럼 사라지고 확신을 얻게 됩니다. 범죄한 심령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게 됩니다. 낙심한 심령은 소망과 용기를 얻게 됩니다. 썩어질 세상만 바라보는 심령이 말씀을 통해 하늘나라를 바라보게 됩니다. 육신의 욕망만을 쫓던 심령이 거룩하신 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의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 목회자를 도우라는 것입니다. 즉 교회의 역할 분담은 하나님의 일에 협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직임을 감당해야할 시기는 언제입니까?

본문 1절에 말씀하시기를“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순종과 직임 수행은 항상 행해야할 일입니다. 중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과 직임 감당의 종점은 이 세상의 삶을 마치고 주님 앞에 서는 순간입니다. 그때까지 중단 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충성의 특성은 최후까지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도중에 포기하면 그 동안의 힘쓰고 애쓴 모든 일은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이는 마치 마라톤 경기와 같습니다. 42.195km를 달리는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우승 결정은 최종의 순간입니다. 도중에 아무리 선두에 서서 달렸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승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마지막 골인 지점까지 앞에서 달려야 우승으로 인정합니다. 직임에 대한 사명감당이 이와 같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히 발탁된 12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였습니다. 가룟유다는 제자들 가운데서도 남달리 계산에 밝고 정직하게 보였기에 재정까지 맡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룟유다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지 못하고 주님을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가룟유다는 배신자의 상징입니다. 충성은 마지막까지 충성해야 그것이 참된 충성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 2:10에“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하셨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은,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죽을 때까지 충성하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영국 런던의 워커 미술관에는 콘트러라는 화가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은 폼페이 도시가 베스비우스 화산의 폭발로 인해 그 화산재에 묻혀 전멸 당하는 비참한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화산재가 비처럼 폼페이 도시에 내렸습니다. 사람들은 화산재를 피해 성밖으로 몰려 나갔습니다. 이들로 인해 큰 환란이 야기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습니다. 이 극한 혼란 속에서도 성문 곁에서 묵묵히 서 있는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그 성을 지키는 문지기였습니다. 뜨거운 화산재가 우박처럼 쏟아지는 그 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맡은 일에 충성하고자 그는 자리를 지키며 서있었습니다. 이 그림의 제목은“충성”입니다. 충성은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시간과 상관없이, 환경과 상관없이 주어진 직임을 잘 감당하는 것이“항상” 입니다. 하나님은 직임을 맡은 자에게 당부하시기를“직임과 말씀을 항상 지키라”하셨습니다.


4. 직임을 잘 감당한 자에게 약속하신 축복은 무엇입니까?

첫째, 강성하리라 하셨습니다.

본문 8절에“너희는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라고 하셨습니다.“강성”이란 단어의 본래 뜻은“조력하다. 돕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사람은 강하고 번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주어진 직임과 말씀을 항상 지키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함께 계셔서 그를 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주어진 직임을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의 대표적 인물로 다윗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다윗은 말하기를“내가 주의 계명을 금 곧 정금보다 더 사랑하나이다.”(시편 119:127)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사명 감당에 대해서도 말하기를“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사무엘상 17:34-35)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양떼를 지켜야할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생명을 다해 사자와 곰과 싸워 이긴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다윗의 축복에 대해“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역대하 11:9)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양치는 목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다윗은 강성하여 그를 대해 이길 사람이 없었습니다. 블레셋나라 명장 골리앗도 다윗의 물매 돌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사울왕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다윗을 해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크게 강성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직임을 항상 지키며 살아간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결과였습니다.
강성하기를 소망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도록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말씀과 직임을 잘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날이 장구하리라 하셨습니다.

본문 9절에 기록하기를“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그와 그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하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풍요로움이 가득한 땅에서 누릴 넘치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장구하리라”는 것은 가나안 땅의 풍성한 유업을 자자손손이 이어받을 것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후손의 축복을 약속한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 이 약속의 말씀대로 후손이 큰 복을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 가운데 왕위가 계속 계승되었고, 마지막에는 메시야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혈통으로 이 세상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이 큰 영광은 말씀과 직임을 항상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간 결과였습니다. 신명기 5:10에“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하신 말씀의 실현이었습니다. 후손이 잘되길 바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직임을 항상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게 됩니다.

본문 12절에“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하셨습니다. 첫날부터 끝 날까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지키시고 보살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관심과 애정을 나타낸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머물러 계시는 사람은 누구도 해할 수 없습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모스코바를 향해 진격할 때 러시아 카자크족이 포위하고 포위망을 좁혀오자 프랑스 군대는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카자크족이 어느새 모든 교량을 파괴하고 퇴로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습니다. 매서운 추위 속에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강물이 얕은 쪽을 골라 병사들에게 부서진 다리의 교각을 붙들게 하여 가교를 만들게 해서 병사들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마지막 병사가 건너가자 물속에서 교각을 붙잡고 가교를 만들었던 병사들에게 철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모두 교각을 붙든 채 얼어 죽었던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희생은 사명의 엄숙함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충성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피흘려 돌아가신 주님께 대한 성도의 충성이 이에 못 미친다면 어찌 십자가 군병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 주님의 몸인 교회의 중직을 맡아 살아가는 삶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이 길은 좁은 길입니다. 이 길은 때론 고난의 길이기도 합니다. 이 길은 때로는 희생을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나를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간교한 유혹이 끊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굳은 각오가 아니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도중에 변절하여 넘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길을 잘 달려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있습니다.

첫째, 너희가 강성하리라.
둘째, 너희 날이 장구하리라.
셋째, 세초부터 세말가지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선택은 우리의 자유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든, 내 자신의 뜻대로 살든 그것은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직임을 감당하든, 아니면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리든 그것은 내 자유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콩을 심고 팥을 거둘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내 생애의 축복과, 복된 후손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과 맡겨진 사명을 위해 최선의 충성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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