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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님을 주신 예수님 (겔 36:26~28, 요 20: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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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상희 목사

  옛날 무성영화 시대의 변사를 기억하십니까? 저도 오래 전에 무성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변사들의 대사는 영화의 또 다른 맛이었습니다. 한번은 서부활극 무성영화를 보러 갔습니다. 변사는 목소리를 쫙 깔고 감정을 넣어 대사를 합니다. 주인공과 악당이 주점이 있는 골목 앞에서 맞닥들였습니다. 이 때 변사는 신이 나서 말합니다. “에이, 이 악당아, 총을 받아라”. “예, 줘야 받지요”. 그 때 총을 주니 악당은 쓰러졌습니다. 그때는 그 엉뚱한 변사가 대사를 엮어가는 무성영화의 나름대로 큰 재미였습니다. 줘야 받습니다. 우리가 받는 것은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에이, 이 겁쟁이들아, 성령을 받아라”. 이때 우리는 “예, 받겠습니다”하고 감사하게 받으면 됩니다. 그런데 줘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성령을 선물로 받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의 선물 가운데 가장 좋은 선물은 성령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는 말씀이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도행전 2:38에는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라고 합니다. 성령은 선물입니다. 선물은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물이라는 단어는 ‘분에 넘치는 호의’라는 뜻을 지닌 ‘카리스’라는 헬라어 단어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시몬 웨일(Simone Weil)은 “우리가 가장 소중한 선물을 얻지 못하는 것은 그 선물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찾아 나서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기다리면 선물은 은혜로 주어집니다.

  1054년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리되었습니다. 흔히 정교회라고 하는 동방교회와 카톨릭이라고 하는 서방교회는 여러 가지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황의 권위에 대한 해석이 달랐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방교회에서는 교황의 무오설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교리적으로는 성상숭배가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서방교회에서는 성상을 숭배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성상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성상은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단지 상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큰 충돌을 일으켰던 신학적 문제는 성령의 출처에 대한 이견이었습니다. 동방교회는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아들을 통하여 나온다(from the father through the son)고 하였고 서방교회는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온다(from the father and the son)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필리오케’(filioque)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성경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숨을 내 쉰 것은 성령이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를 통하여서도 오는 것을 의미한다고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성령님이 오십니다. 성령님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오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받으라”는 말은 “라베테”라는 헬라어입니다. 이 말은 부정과거명령형으로 영접하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어떤 도구로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성령을 인간의 실존에 모시라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을 주십니다. 받으라고 할 때에 성령을 우리의 실존에 모시고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말씀대로 약속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말씀하신 것을 변개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식언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성취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영원하시고, 불변하시고,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유한하고, 상황에 따라서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도 약속을 절대로 변개치 않으십니다. 약속을 지키신 가운데 가장 분명한 약속은 성령을 주시리라고 하신 약속입니다. 요한복음 16:7에는 “가면 내가 그를(보혜사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6에는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고 이 약속을 성취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후 오순절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은 어김없이 주님이 떠나심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은 상징적인 행동이고, 성령의 오순절 강림의 약속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순절에 강림하실 성령님이지만 이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바람 같은 성령, 불같은 성령이 이 날에 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대한 약속은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말씀대로 약속을 성취하신 예수님은 다시 오시리라는 약속도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둘째, 실제로 영을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숨을 내쉬신 예수님입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숨이 가빠서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숨을 내 쉬신 것은 숨을 불어넣으신 것입니다. 숨을 내쉰 것은 우리에게 숨을 불어넣으시기 위하여 하신 동작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가장 영향을 많이 주신 교수님이 계십니다. 도디 도널리라고 하는 여교수님이신데 이 분은 카톨릭 학자였습니다. 수사 출신의 학자이신데 정식으로 공부해서 얻은 박사학위가 셋이었습니다. 이 분은 공부시간이 시작될 때 늘 숨에 대하여 얘기하셨습니다. 숨 쉬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늘 숨을 잘 쉬라고 충고하셨습니다. 특히 숨을 들이키며 내 쉴 때에 영성적 묵상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숨은 그 자체가 영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숨을 내 쉴 때에 우리 속의 모든 더러운 것을 다 몰아내라고 하셨습니다. 숨을 들이킬 때에 우리 속에 들어가야 할 모든 아름다운 것을 들이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숨을 내쉬고, 들이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숨을 내 쉬는 것은 사람들을 위하여 하는 것이었습니다.

  에스겔 37장에는 골짜기의 마른 뼈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어보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능히 살아나리라”고 하십니다. “힘줄이 생기고, 살을 입히고, 가죽을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이 마른뼈가 살아서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숨이 없으면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숨은 살리는 힘입니다. 마치 첫 사람 아담을 흙으로 빚으시고 거기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생기를 불어넣기 전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오순절 다락방에 바람 같은 성령이 온 방에 가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바람 같은 성령이란 성령의 보편성을 의미합니다. 모든 곳에 편만하신 성령을 의미합니다. 바람은 성령을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바람은 지면에서 흐르고 있는 공기의 흐름입니다. 기압의 차이에 따라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공기가 흐릅니다. 이것이 바람입니다. 기압의 차이가 커지면 바람이 빨라집니다. 지난 식목일 양양의 산불 때는 초속 20미터 가까운 바람이 불어 산불이 급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이런 흐름이 빠른 바람을 태풍이라고 합니다. 태풍은 정말 무섭습니다. 인도양의 태풍은 사이클론이라고 합니다. 카리비안의 태풍은 허리케인이라고 합니다. 북태평양의 태풍은 타이푼이라고 합니다. 호주에서 남반부로 부는 태풍은 윌리윌리라고 합니다. 지난번 태풍 매미와 같이 태풍은 정말 무섭습니다. 성령의 위력도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평생 쓰러질 것 같지 않은 거센 사람도 성령의 바람은 넘어뜨립니다.

  구약에서는 숨을 ‘루아흐’라고 합니다. 루아흐는 창세기 2장의 사람을 만드신 재료입니다. 신약에서는 ‘프뉴마’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바람과 성령은 같은 단어입니다. 구약의 바람은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숨이며 하나님의 통제이며 하나님의 창조에 사용되는 하나님의 숨이었습니다. 프뉴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이며, 숨입니다. 신약에는 프뉴마라는 단어가 370회 나타납니다.

  요즘에는 숨두부라는 것도 있습디다. 두부가 숨을 쉬는,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의미의 생명이 있는 두부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숨을 쉬는 싱싱하고 건강에 좋은 두부라는 뜻입니다. 숨을 쉬면 건강합니다. 숨을 쉬면 삽니다. 숨은 그 자체가 생명이며 힘입니다. 특히 성령을 의미하는 숨은 영혼의 건강과 생명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이 한번을 농촌을 방문하였습니다. 농장 건물 꼭대기 바람개비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적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바람처럼 변덕이 심하단 말입니까?”하고 비아냥댔습니다. 그 말을 들은 스펄젼목사님은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불든지 하나님이 사랑이십니다. 우리가 부는 방향으로 자세만 잡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지요”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비행기를 보세요. 바람이 어느 방향이든 비행기는 뜹니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이쪽 방향으로 뜨기도 하고, 다른 쪽 방향으로 뜨기도 합니다. 비행기는 바람을 마주하고 뜨기만 하면 안전하다고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뜨는 걸 좋아합니다. “요즘 아무개 떴다”고 합니다. 뜨기를 원하십니까? 바람을 마주하고 살아야 뜹니다. 올라갑니다. 바람을 등지면 안됩니다. 성령님을 마주하고 살아야 뜹니다. 성령님을 등지면 곤두박질합니다. 예수님과 마주하기만 하면 은혜 아닌게 없습니다. 단지 우리 사람들이 등지고 살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마주하고 그 바람을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그 숨을 느껴야 합니다. 주님이 불어넣으시는 숨결을 느끼며 삽시다. 그리하면 우리 속이 풍성해지고, 부요해지고, 치유되고, 건강해지고, 변화될 것입니다.

셋째, 죄를 사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성령을 주신 까닭은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죄를 사하기 위하여 죽으셨고, 죄를 사하기 위하여 성령을 주십니다.

  누가복음 5장에는 한 중풍병자를 친구들이 침상에 매달라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 내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에게 “이 사람아,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십니다. 그 자리에서 지켜보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참 불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옆에서 은혜는 못 받고 책잡고 고소할 조건만 찾았으니 얼마나 불쌍한 인생입니까? 그들은 예수님께 대하여 “신성모독하는 자가 누구냐,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으냐”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네 상을 들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리고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는 죄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기록이 있습니다. 47절에는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고 합니다. 48절에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여인에게 선포하십니다. 49절에는 함께 앉은 자들이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있습니다.

  죄사함은 예수님의 권세입니다. 죄사함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선물입니다. 간음현장에서 잡혀온 한 여인을 보세요. 벌벌떨고 있었습니다. 부끄러워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돌로 치려던 사람들은 살기등등하여 예수님의 말씀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들어치라”. 이 말을 듣고 어른부터 아이까지 다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예수님께서 뭘 쓰셨을까요? 어떤 분이 그랬습니다. “죄 없음”이라고 쓰셨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쓰고 계십니다. 땅이 아닌 십자가 위에 남겨두십니다. 손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피로 쓰십니다. 그분이 남기신 메시지는 단 세 글자입니다. “죄 없음”. 이 말은 우리에게 영원한 희망입니다.

  주기도문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주님이 가르치십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우리가 죄를 사하여주는 것도, 우리의 죄를 사함받는 것도 성령의 은혜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도 못합니다. 나의 죄를 용서받지도 못합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말합니다.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죄사함은 성령과 관계를 가집니다. 성령님은 죄사함의 권능을 주십니다. 죄사함은 성령님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면죄부(Indulgence)를 팔러 갔던 테젤(Tezel)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면죄부를 팔면서 지난 죄를 다 사함 받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앞으로 지을 죄도 사함 받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하나를 더 사면 앞으로 지을 죄도 사함 받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테젤이 면죄부를 팔고 로마로 돌아오다가 강도를 만나 돈을 다 털렸습니다. “면죄부를 판 돈을 훔쳐가면 지옥의 밑창에 떨어질거요”하고 그는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그 강도는 면죄부를 보이며 “앞으로 지을 죄도 면죄 받는다고 그러지 않았소”하고 소리 치고는 도망가 버렸습니다. 죄의 용서는 면죄부 때문이 아니라 성령님의 도움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고든 스미스는 ‘분별의 기술’이란 책에서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격려하시는 네 가지 다른 방법들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을 주십니다. 둘째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셋째는 우리를 진리로 이끄십니다. 넷째는 우리의 삶의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죄를 깨닫게 하고 죄 사함을 주시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결론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과 유행이 되도록 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움(newness)의 정신과 현재(nowness)의 정신이 다른 것과 같습니다. 현재적이란 다 새로운 것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낡은 것이 현재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신앙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대의 정신은 분명 거룩한 정신이어야 합니다. 우리 시대의 정신은 분명 성령이어야 합니다. 바야흐로 학자들은 우리 시대를 영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 삶에도 중요한 힘이 되는 시대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렇게 삽니다. 첫째는 뜨겁게 삽니다. 둘째는 예언과 꿈과 환상을 가집니다. 셋째는 생동감 있게 삽니다. 넷째는 죄 사함의 삶을 삽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선물인 성령을 받읍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예언과 꿈과 환상이 있는 비전의 삶이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매일매일 생동감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죄 사함의 체험 가운데 사는 삶이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숨이 우리의 가슴을 가득 채우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에 영이 풍성하고, 영으로 충만하고, 영적인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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