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혼의 추수꾼이 되려면 (마 9:35-38)

  • 잡초 잡초
  • 222
  • 0

첨부 1


- 설교 : 권영국목사
   
  오래전 한 소방대원을 심방한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은 홍제동 화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집 안에 어린 아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 아이를 구하기 위해 불타는 건물로 뛰어들었다가 유독가스와 무너지는 철골 구조물에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그때 현장에서 불을 끄던 소방관 6명이 순직 했습니다.

“건물 속에 어린아이가 갇혀있다”는 말을 현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들었지만, 감히 누구하나 구하려 나서는 사람이 없는데 그 때 용감히 불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119 소방대원이었다. 그들도 사람인데 자기 목숨이 아깝지 않았을까? 불 속에 뛰어드는 것이 두렵지 않았을까? 이유는 그들은 소방대원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옷이라는 게 참 이상한 힘이 있어서 보통 사람이라도 군복만 입혀 놓으면 군인처럼 행동한다. 오래 전에 예비군 훈련을 받으면서 느낀 점입니다. 평소에는 집에서나 직장에서 멀쩡하던 사람들이 예비군복만 입혀 놓으면 아무데나 드러눕고 볼일을 보고 거의 강아지 수준에서 행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강아지 같던 사람도 양복으로 갈아입으면 금방 신사로 바뀌어 버립니다. 옷이 사람을 만듭니다.
자신만이 소방대원의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그 일이 자기 책임이라는 것을 깨닫고 반사적으로 그런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은 지금 온갖 불이 붙고 있다. 미움의 불, 원망의 불, 가난의 불, 질병의 불. 사망의 불, 그 속에서 사람들은 고통하며 울부짖고 있다. 그 때 누군가 외치기 시작합니다. “저 속에, 아직도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어요. 여보세요. 사람이 죽어가고 있어요.” 불 구경꾼은 많은데 그 소리를 듣고도 누구하나 들어가려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어떻게 구원해 낼지 방법을 몰라서 망설이고 있고, 어떤 사람은 방법은 알아도 자기 생활에 방해를 받을까봐 귀찮아서 외면하고 있습니다. 다들 혀만 끌끌 찰뿐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데 그 때 용감히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에는 십자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영적 소방대원, 그들의 이름은 성도입니다. 성도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어가는 한 영혼을 건지기 위해 반사적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영적 119 대원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옥 불 속에서 신음하며 “와서 나와 내 부모 형제를 도와 달라”고 울부짖고 있는 것을 구경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는 날마다 일어나는 불가사의한 일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말씀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전도할 생각은 전혀 해 보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를 믿고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은 많지만 하루에 일분이라도 성경을 읽고, 일 년에 단 한사람에게라도 <예수 믿으세요> 라고 전도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 몇 %나 될까요?

우리는 우리가 입고 있는 <옷>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소방대원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은 화재 현장에서 구경만할 수 없습니다. 구경만 하려면 옷을 벗어 놓아야 합니다. 성도는 불신 영혼이 죽어가는 모습을 구경만 해서는 안 되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살려내야 할 사람들입니다.

소방대원의 옷을 입고 있으면 그 사람은 적어도 한번은 불 속에 들어가서 사람을 건져 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평생 한 영혼도 구원해 낸 경험이 없다면 옷을 입혀 주신 주인 앞에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5월22일은 <높은뜻 온가족 페스티벌>이 열리는 날입니다. 그 날은 예수 믿지 않는 분 가운데 개인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분을 모시고 함께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세상에서 지옥에 가는 한 영혼을 건져낼 수만 있다면, 방황하는 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일에 도구로 사용될 수만 있다면, 이 땅에서 우리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1. 성도의 양식은 <영혼 구원>입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은 <수가 성> 우물가에서 점심을 갖고 온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의아해 하고 있는 제자들을 보고예수님은“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잡수신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양식으로 삼으면 그것을 <행식>이라고 합니다.

성도들이 먹는 양식에는 <행식>과 <생식>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먹는 양식>을 <행식> 이라고 한다면, 머리에 생각만으로 먹는 양식은 <생식>입니다. 그림의 떡을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먹으면 먹을수록 짜증만 나는 것처럼, 성도들이 생각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 영적으로 굶주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그림의 떡을 먹어놓고 배부르다고 착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과 같습니다. 생식은 아무리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먹을수록 굶주림만 더 해 집니다.

성도들이 먹어야할 양식은 <행식>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식> 드시지 마시고 <행식> 드시는 성도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오기 전에 예수님이 하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님은 그곳으로 물 길러 온 한 여인을 전도하셨습니다. 바로 <영혼 구원>이 예수님이 잡수신 양식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식 중에 최고의 행식,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 중에 가장 큰 일은 예수님 하신대로 <영혼 구원>입니다. 죽을 사람을 살려내는 일입니다. 영혼 구원,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가 가장 기뻐하시는 뜻이라는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주님은 아버지의 그 소원을 내 소원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평생 삶의 목적을 영혼 구원에 두셨습니다.

제자들이 육신의 양식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동안 예수님은 영혼의 양식으로 이미 배부르셨습니다.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행식>이었습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자기도 모르게 불평불만이 나오듯이, 예수를 오래 믿어도 늘 불평과 불만에다 재미를 못 느끼시는 분들은 영적으로 배가 고프기 때문입니다. 그런 분들은 이제부터 예수님이 잡수신 <행식>을 꼭 드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안되고 성경을 읽으면 잠이 오고 대접받기를 좋아해서 남을 섬기는 일이 어려운 분들은 영적질병에 걸렸다는 증거입니다. 영적 질병을 고치는 만병통치약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전도입니다. 원기 왕성하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영적생활을 원하신다면 영혼 구원하는 일에 뛰어드십시오. 전도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에 전도하는 일은 성도가 먹어야 할 최고의 <행식>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을 알고 있습니까? 아버지의 최대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일하십니까? 우리의 일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이라면 그것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 아버지의 애타는 소원이 무엇인지 아버지가 가장 관심을 두는 일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식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소원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것입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 까지 아버지는 쉴 수가 없습니다. 그 때까지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먹는 것은 먹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모든 관심은 아들을 찾아내는 한 가지에 걸려 있을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후 3:8>에서 자식을 잃어버린 아버지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가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천년 긴 세월도 하루처럼 참고 기다릴 수 있고, 또 기다리던 자식이 내일 돌아온다고 해도 오늘 하루를 천년처럼 길게 느끼며 마음 졸이며 기다리십니다. 그 아버지의 기다림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다 잘해도 영혼 구원 한 가지를 못 하면 아버지의 마음은 아프십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이 다 부족해도 영혼 구원 한 가지만 잘하면 아버지는 최고로 기뻐하십니다.

2. 인간의 최대 적은 죽음입니다.
그러면 영혼 구원하는 일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평등 시리즈>라고 하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먼저 사람이 40대가 되면 <지식평등>이 온답니다. 40이 되면 대학을 나왔던 안나왔던 다 똑같아 진대요. 옛날에 배운 것 다 소용이 없고 써먹을 것이 하나도 없대요. 그래서 지식의 평등이 오고요. 50이 되면 <외모의 평등>이 온답니다. 50 넘으면 다 둥글넓적해서 이쁠 것도 없고 미울 것도 없고, 다 거기서 거기랍니다. 누가 그래요, 우리나라 사람은 감자 같이 생겨서 50이 되면 모조리 똑같답니다. 뭐 화장이다 맛사지다 하지만 그것이 발악이래요. 외모로 고민하시는 분들 50대 까지만 기다리시면 자연히 해결됩니다. 그 다음 60이 되면 <성의 평등>이 온데요. 남/녀가 다 섞여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간데요. 한마디로 주책이 없다 이거지요. 하는 짓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르겠데요. 그리고 70이 되면 <건강의 평등>이 와요. 안 아픈 사람도 거기서 그만, 아픈 사람도 거기서 그만이래요. 80이 되면 <재물의 평등>이 옵니다. 돈이 많으면 뭐해요? 쓸 곳이 없는데, 먹을 것을 먹을 수 있습니까? 어디 화려하게 외출을 하겠습니까? 집이 좋으면 무엇하고 온갖 것 다가지고 살면 무엇 하겠습니까? 재산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90이 되면 <생사의 평등>이 와요. 살은 들 산 것이 아니요, 죽은들 죽은 것이 아닙니다. 살았으나 죽었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산송장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시간만 지나면 세상에서 지니고 살던 모든 것에 평등이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전에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1등 칸에서 편안히 즐기는 사람도 있고 3등 칸에서 불편하게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 기차는 종착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모든 사람은 종착역에서 내려야만 합니다. 인생의 죽음 앞에서 우리가 가진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자랑하고 내세우던 그 무엇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죽음으로 달려가는 인생에게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무엇일까요?

3. 영혼이 살아야 모든 것이 삽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인간의 육체를 만드신 다음에, 하나님의 숨,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어 살게 했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마치 탯줄처럼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우리 영혼은 죽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관계를 끊게 만들까요? 죄입니다. 죄란 하나님 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내 마음대로 살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내 욕심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바로 욕심 때문에 죄가 들어오게 되었고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게 만들며, 그 때문에 사망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다시 성경을 읽어 봅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3:10-12)

모든 인간은 자신의 욕심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고, 영혼은 죽게 되었습니다.
영혼이 죽었기 때문에 육체에 죽음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살면 육체도 삽니다. 영혼이 기쁘면 육체도 기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순서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어떻습니까? 육체만 만족케 하면 행복한 줄 알고 육체의 쾌락을 위해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을 맛보지 못합니다. 병든 육체를 고친다고 영혼이 건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는 살아 있어도 영혼이 죽어 있으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거기에 인생의 모든 것이 달려있습니다. 전도는 바로 죽은 영혼을 살려내는 일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 세상에 있어야 할 목적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살려두시는 이유도 그기에 있습니다.

이 도시에는 죽은 영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채, 사망의 권세에 짓눌려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여리고 성에 기생 라합은 정탐꾼들을 붙잡고, 내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와서 나와 내 형제를 구원해 달라”고 지금도 부르짖고 있는 우리 이웃의 절규에 우리는 귀를 막고, 모른 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4. 그러면 영혼의 추수꾼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영혼의 추수꾼은 사람을 영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36절에 주님께서는 무리를 <목자 없는 양>으로 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육체적으로 보면 그들은 군중이고 무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을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보셨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어떤 존재입니까? 양은 50미터 앞을 보지 못할 정도로 시력이 약합니다.
그래서 눈앞에 풀만 좇아 가다가 길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그리고 양은 자기 힘으로 자신을 방어하지 못합니다. 뿔이 있습니까? 날카로운 이빨이나 발톱이 있습니까? 다리는 몽땅해서 빨리 달리지도 못합니다. 사나운 짐승이 공격하면 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양은 목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영적으로 보면 누구든지 다 <목자 없는 양>과 같습니다.
그들은 눈앞에 먹이만 좇아 가다가 절벽에 떨어지기도 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다가 길을 잃고 짐승의 밥이 되기도 하고,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영원한 멸망의 길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는 사람을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조건으로만 보고 전도하기를 주저하지는 않았습니까? 겉으로만 보지 말고 그들의 심령 깊숙이 있는 공허함, 피곤함, 고뇌를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위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주위에는 우리보다 돈 많은 사람들도 있고, 많이 배운 똑똑한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나름대로 세상을 재미있고 멋있게 사는 것 같습니다.

예수를 오래 믿고 신앙이 좋다고 생각한 집사님 한분이, 잘사는 불신자를 보며 무심결에“우리는 언제 저만큼 살아보나?”하고 부러운 듯이 말을 합니다. 예수를 믿어도 영적으로 보는 눈이 어두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영적 상태는 불신자를 얼마나 불쌍히 여기는 눈이 있느냐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예수를 오래 믿어도 불신자를 볼 때 불쌍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면, 혹시 내가 영적 소경은 아닌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영혼의 추수꾼은 불신자의 영혼을 볼 때 우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영혼의 추수꾼이 되려면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민망하다>는 말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깊은 동정심을 느꼈다는 말입니다. 올바른 전도자가 되려면 이러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처럼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 민망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데, 우리는 지금이라도 주님이 오신다면 지옥 갈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알면서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래도 그분의 제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전도를 못하는 까닭은 사람을 영적으로 보지 못해서도 그렇지만 영적인 상태를 불쌍히 여기는 진정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영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구원해 내는 능력은 사랑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어떤 전도사님이 전도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집 모퉁이에서 한 아저씨를 만났습니다. 허름한 복장에 첫눈에도 지쳐있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이 전도사님도 하루 종일 전도를 하느라 지쳤기 때문에 쉬고 싶은 마음밖에 없어서 그냥 지나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부담이 오는 것입니다. “그냥 한번 전하고나 가자.” 그래서 그 아저씨에게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얼굴을 보는 순간, 갑자기 그 영혼이 얼마나 불쌍히 여겨지는지, 예수 믿으라는 말도 못하고, 그저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당신 왜 날 끌어안고 우시오?”
“예, 아저씨. 예수 믿으시면 너무 좋은데....”
이 전도사님의 진실한 사랑에 낯선 아저씨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전도는 영혼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방법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방법이 생각나지 않을 뿐입니다.

셋째, 영혼의 추수꾼이 되려면 실제로 가야 합니다.
본문 말씀 35절에,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느니라”

예수님은 눈으로만 전도하신 분이 아니고 마음으로만 전도하신 분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3년 공생애 동안 얼마나 많은 곳을 발로 돌아다니셨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머리로 생각만하고 마음으로만 생각해서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머리로 알고 마음이 뜨거워져도 발이 떨어져서 불신자들에게 가야하고 입을 열어 예수를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낫고, 마음 좋은 사람보다는 손 좋은 사람이 낫다. 그러나 손 좋은 사람보다는 발 좋은 사람이 더 낫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보다 영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영혼 불쌍히 여기는 사람보다는 섬기는 손을 가진 사람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섬기는 손가진 사람보다 그에게로 달려가는 발가진 사람이 훨씬 낫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전도자입니다.

이번 주 여러분이 해야 할 과제는 초대할 분과 함께 차를 마시는 것이 과제입니다. 편안하게 집으로 초대하시든지 아니면 분위기 근사한 카페로 초대하시든지, 그리고 헤어 질 때에는 아이들을 위해 간단한 선물이라도 준비해 사랑을 표시하시기 바랍니다. 전도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사랑은 감정만 아니라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입니다.

넷째 영혼 구원하는 능력은 기도에서 나옵니다.
본문 37,38절에 예수님은 영혼의 추수꾼들에게 부탁하고 계십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

예수님은 전도하시면서 늘 기도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전도는 기도 없이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왕이신 예수님에게서 이 비결을 꼭 배워야 합니다.
음악이나 미술하는 분들이나 글 쓰는 분들을 보면 자신의 작품에 혼이 들어가기 까지 얼마나 애를 씁니까? 하물며 온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주님께로 데려오는 전도는 세상의 예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전도자는 예술가 보다 더 혼신을 기울이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전도는 마음만으로도 안 되고 기술로 되는 것도 아니고 성령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한 영혼을 변화시키고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역사는 사람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전도자에게 오직 성령이 임하여야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을 받기까지 기도에 힘쓰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능력 없이는 결코 영혼 구원하는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시작도 끝도 기도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제가 늘 교회에서 가장 안타깝고 답답하게 생각되는 성도들은 시간과 물질, 건강과 지식 등 남보다 많은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을 섬기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과 자기 가족만을 생각하는 성도들입니다. 주일예배는 드리고 헌금도 하지만 적어도 그들에게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일에 부탁을 하면 손에 물방울을 톡 튀기듯이 냉정하게 거절합니다. 다른 사람 때문에 내 생활이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점잖게 신앙생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소원을 모르고 아버지가 가장 기뻐하는 일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한 달 동안 암탉이 달걀을 가슴에 품듯이 한 사람의 이름을 여러분 영혼 속에 품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간은 내가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할 한 사람의 이름을
함께 쓰도록 하겠습니다. 누구든 좋습니다. 어린아이든, 학생이든, 노인분이든.... 괜히 적었가가 그날 안오면 어떻게 하나? 오고 안오는 것, 믿고 안 믿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 눈으로 그들의 영혼을 확인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품고, 기도 중에 그 이름을 부르다가 그리고 발로 가서 전할 뿐입니다. 적어도 그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이름을 모르시면 몇동 몇호 아줌마, 슈퍼 아저씨, 그렇게 적으시기 바랍니다.

여자가 사람을 낳기 전에는 근심하고 걱정하나 사람을 낳은 후에는 사람 낳은 기쁨으로
모든 괴로움을 잊어버린다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 영혼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옥 불에서 천국으로 옮기는 일에 쓰임 받는 것보다 더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 일에 나를 써달라고 기도합시다.
주님 앞에 서는 그날, 이 세상에서 여러분의 전도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달려 나와 여러분의 손을 붙잡고 눈물 흘리며 감사하다고 말할 때, 이 땅에서 받은 모든 고통과 상처는 다 잊혀 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축복을 저와 여러분, 우리 높은뜻 숭의교회 위에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