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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임마누엘의 능력 (삼하 5: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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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황요한 목사 

빌 하이벨즈 목사님이 ‘예수님의 리더쉽’이라는 책을 통해서 어떻게 책을 통해서 예수님을 위해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을 수 있었던, 또 칼로, 창으로 죽임을 당하면서도 순교의 현장에서 견딜 수 있었을까? 다르게 말하면 목숨을 걸고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었을까? 그 매력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라는 글을 통해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쉽의 무기는 다름 아닌 세숫대야와 수건이었다라는 것입니다. 세숫대야와 수건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길 때 사용하셨던 도구였습니다. 그 섬김의 도구가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게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리더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정치도 리더가 필요하고, 경제도 또 리더가 필요하다. 리더를 이야기할 때 보통 사람과 리더의 차이를 우리는 구별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리더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저는 리더는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 리더가 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리더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봅니다. 또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싫어지면 보이지 않고, 관심이 사라지면 보이지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자녀들을 군에 보냈을 때 갑자기 달라지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있습니다. 자녀를 군에 보내는 부모들의 대부분 고백은 거리를 나가면 군인들만 보인다. 제가 군에 갔을 때 부모님들이 하신 말씀입니다. 너를 군에 보내고 나니까 온통 거리에 가면 군인들만 보이더라.

제가 물었지요. 지금도 보이시나요? 지금은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들이 군을 양구에 갔습니다. 거기서 칼바람 맞으면서 제일 오지 속에 가 있는데, 아버지가 기도가 조금 부족해서 그런가, 제일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만은, 며칠 전에 전화가 왔어요. 요즘에 한창 부대 체육대회가 있는데, 지금 대대 대표로 나와서 거기서 일등을 해가지고, 지금 연대 대표로 파견 나와 있습니다. 하루에 3시간씩 축구하는데, 다른 것은 파견 나갔기 때문에 훈련도 안 하고, 점호도 없어서 편합니다.

연대 대회에서만 1등하면 포상휴가를 보내준다는 것입니다. 어제 제가 없는 동안에 전화가 온 모양이예요. 준결승전에 진출을 했는데, 사단대항 준결승전에 지금 진출해서 다음 주에 결승전이 있다는데, 연대장님이 이렇게 약속했대요. 일단 2박3일 휴가는 보장한다. 준결승에 갔으니까, 희남이가 2골을 넣닸니다. 이번주에 결승전에서 이기면 4박5일을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했대요. 그래서 우리 가족들이 기도하자.

양구에서 오면 하루 가고, 하루 가요. 2박3일 휴가 오면 하룻밤 자고 그냥 가야 합니다. 우리 동호는 가까운 양주에 와서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요. 그것도 참 복이지요. 추장로님이 기도를 많이 하시나 봅니다. 축구를 잘 해서 또 휴가도 오고, 그런 일이 있습니다.

아마 저 역시 아들이 제대하면 군인들이 덜 보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군 선교사역은 우리 평안의교회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선교의 부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대한민국 수도권에 가보지 않은 부대가 없을 정도로 군선교의 열정이었고, 열심이었던 부분이었지만 우리가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곳에 무언가 잘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일반인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적어도 리더가 된다면 보는 시각이 달라야 합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 하고, 남들이 볼 수 없는 부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교회에 등록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는 입장에서 서울 가야 하는데, 그냥 지나가는 입장에서 예배는 드려야 하겠고, 허겁지겁 참석한 그냥 교인이었다면 아마 그 분은 교회 와서 교회 모든 부분들이 감동적이지 않을 거예요. 또 크게 부담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교회에 등록을 해서 이 교회가 내 교회라고 생각하고, 신앙생활 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거룩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오늘 예배 준비는 잘 되어 있겠지, 예배부 위원들은 노심초사합니다. 관리부 위원들은 예배를 위해서 교회 여러 시설들이 잘 준비가 되고, 보수가 되었는지, 만약에 저 등 하나가 꺼져 있다면 지나가는 사람이야 저 등이 하나 꺼졌네. 하면서 지나갈 수 있지만 예배위원들이나 관리위원들은 예배 내내 가시방석입니다. 아이고, 예배 전에 저것을 준비하지 못했지, 저걸 고치지 못했지. 그리고 정말 죄인 가시방석에 앉은 죄인의 심정일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관심을 갖는 사람과 아닌 사람의 아주 중요한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다윗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 특별히 북왕국의 열지파의 대표들이 와서 다윗을 찾아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 달라고 간청을 하는 장면부터 말씀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일입니까?

왕이 되기 위해서, 땅을 지배하기 위해서 전쟁을 해야 하고, 침략을 해야 하고, 권모술수를 다 써야 하는데, 그래도 어려운 것이 오히려 열두 지파 중에 2/3가 넘는 열 지파에 지도자들이 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달라고 간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백성과 지파와 장로들에게 다윗이 지도력을 인정받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리적인 지도력이 아닙니다. 군사의 힘으로, 폭력의 힘으로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존경에서 나타나는 지도력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이 담겨진 그러한 지도력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랬을 때에 다윗의 마음은 얼마나 기뻐겠습니까? 잘못하면 이런 환경에서 우쭐하고 교만해 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너희들이 별 수 있느냐? 내 밑에 들어와야지, 이런 생각이 들 수 있는데,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있는 다윗에게 나아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달라고 했을 때, 다윗이 제일 먼저 한 일은 3절 중반에 보면 다윗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들과 언약을 맺었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나와 있지 않지만 대략 우리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너희의 땅과 주권이 너희에게 온다고 하면 너희들은 내 백성이 되는 것이다. 백성이 된다고 하면 세금을 내야 하는 의무, 전쟁이 나면 아들들을 군대에 보내야 하는 의무, 이런 것들이 이 계약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세금을 잘 내고, 군대에 아들들을 보내서 당신이 필요할 때 물질적으로 인적으로 협력하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을 왕과 북왕국 지도자들이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에 앞서서 다윗의 모습을 보면 이런 중요한 시간에 다윗의 삶의 태도를 우리가 엿볼 수 있는 그러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여호와 앞에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삶의 중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자기가 영광의 자리에 있던지, 자기가 무슨 사람들의 높임을 받던지, 다윗의 중요한 중심은 내가 지금 여호와 앞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코람데오라고 합니다. 여호와 앞에서 내가 그 분 앞에서 내가 지금 있다.

여러분의 지금의 모습이 여호와 앞에 있는 모습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여호와 앞에서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오늘 우리 새가족양육부의 주제는 예배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예배자의 모습이 무엇일까?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닌 드리는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의 구조가 제3자의 입장, 구경꾼의 입장으로 자꾸만 시스템이 갑니다. 여의도부터 시작이 되어서 체육관식의 교회, 그리고 영국이나 혹은 미국의 그 어떤 뮤지컬이나 연극을 볼 수 있는 그런 어떤 극장식의 교회, 2,3,4층의 발코니로 계속 좁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예배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 실용적인 측면에서는 그런 것이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예배자라는 측면에서는 아주 그것은 제로입니다. 여러분 2,3층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거기에 올라가면 이상하게 다리가 꼬아지지요. 저절로 다리가 꼬아집니다.

거기 2,3층에서 무릎을 앞에 대고 손을 놓고서 정말 겸손하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려고 하면 오히려 이상해요. 옆사람들은 다 다리를 꼬고 있어요. 팔짱을 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성도들을 쳐다보면서 ‘아이고 저 아줌마는 파마 잘 못 했네. 되게 속상하겠다. 저 사람은 벌써 유행하는 봄옷 꽃무늬 옷을 입었네. 비싸겠다. 내가 지금 현대백화점에서 본 건데, 언제 그렇게 사왔지?’

벌써 수백명, 수천명이 되는 규모라면 한 시간 아이쇼핑 하느라고, 시간이 다 갈 거예요. 그것은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지만, 그 구조상 구경꾼으로 만들어 주는 거예요. 뮤지컬이나 연극은 구경꾼으로 있으면 그만입니다. 구경하는 거잖아요, 보는 거잖아요. 우리를 예배자를 구경꾼으로 만드는 구조를 우리는 탈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2층 베란다에 발코니를 만들어 150명분 좌석을 만들 수 있지만 그러지 않았어요. 가능하면 새성전도 그런 모양으로 할 것입니다. 뒤쪽에 영상실이나 여러 기능적인 모양을 위해서 발코니는 필요하겠지만 예배자를 위해서 발코니는 사실 그렇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표현할 때 자신을 종이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종이다. 그래서 열세번의 성경을 써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된 나 바울은 자신의 위치를 그는 잘 알았습니다. 예배자가 예배자로서의 위치를 잘 알고 있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지금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왕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예배자로서의 하나님의 기르시는 어린양의 자세를 가졌습니다. 여러분 왕이래도 백성들 앞에 왕이지, 하나님 앞에 왕은 아니잖아요. 가장 중요한 자세입니다. 쥐꼬리만한 세상의 지위만 가져도, 거드름 피우고, 교회 와서도 세상의 지위가 자기를 대변해 주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안타까운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 자기가 무엇이지, 하나님 앞에서는 아니잖아요. 왕도 사람들 앞에 왕이지, 사람들 앞에 왕은 아니잖아요. 하나님 앞에서는 그저 은혜 받아야 하고, 용서받아야 하고, 인도함을 받아야 할 어린양인 줄 믿습니다. 다윗의 위대함 중에 하나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지금 모든 사람들 앞에서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잊지 않았습니다. 4절입니다. 다윗이 30세에 왕의 자리에 나아가서 40년을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70세까지 그는 왕으로써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이 성경에서의 30살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는 나이 같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41장에 가보면 요셉이 13년 동안에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고 나서 그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바로가 왕좌만 자기가 차지했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도장이나 모든 명령권을 요셉에게 주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요셉이 최고 통치자입니다.

영어성경분을 보면 요셉을 Prime Minister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각책임자에서는 총리가 대통령과 같지 않습니까? 요셉은 고통 속에서 오해를 받고, 미움을 받고 그랬지만 그는 그런 상황들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라고 하는 삶의 중심을 잃지 않은 줄로 믿습니다. 자기를 미워해서 노예로 팔았습니다. 보디발 집에 노예로 갔지만, 그는 거기서도 하나님 앞에서 그는 산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위해서 보디발의 집을 형통케 하셨더라. 그가 오해를 받아서 감옥에 갔습니다. 감옥에 가서도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의 모습이 변함이 없었어요.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해서 전옥에게 복을 주셨더라. 그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하여 바로에게 형통케 하셨다.

바로가, 감옥의 간수가, 혹은 보디발 군대 장관이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이들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복을 유통시키는, 하나님의 복과 연관이 되는 복의 근원이 가는 곳곳마다 그 요셉 때문에 모든 관계 되는 사람들이 형통을 얻었고, 복을 누리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이 시대에 요셉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나 때문에 복이 유통되어야 한다. 요셉은 30세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다윗이 30세에 왕이 되었습니다. 신약에 와보면 우리 주님께서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30세에 왕이 되었고, 30세에 총리가 되었고, 30세에 그리스도의 사명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전에는 당신의 모든 것을 감추셨습니다. 가리셨습니다. 그저 주님의 사역, 하나님의 때 카이로스의 때가 오기까지 주님은 철저히 준비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지, 준비되기 전에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30세, 운동선수들은 30세면 환갑, 진갑 다 지났다고 그럽니다. 30세, 오늘날 우리 한국사회도 30대가 이 사회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CEO들이 30대에 나오고 있습니다. 대기업의 이사, 대기업의 중요한 팀장들이 30대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가장 보수적이라고 하는 금융권에도 30대 여성들이 그것도 강남에서 지점장을 하고 있습니다. 파격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는 굉장히 생각이 진부하고 있습니다. 30대에 권사님을 조금 세우려고 하면, 새파란 사람이 어떻게 권사를 합니까? 30대에 장로를 조금 세우려고 보니까, 새파란 사람을 어떻게 장로를 시킵니까?

우리 감리교회 법은 벌써 수십년 전에 권사는 30세로, 장로는 35세로 세워놨는데, 우리의 생각이 못 따라갑니다. 그런 말 하는 사람은 제가 대력 2가지 정도에 일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나는 50에 권사가 됐는데, 너가 얼마나 잘 났길래 30에 권사가 되느냐? 그런 마음이 작용을 했을 거예요.

그래서 30대에 권사를 세우려면 아유, 새파란게 무슨 권사냐? 그렇게 해서 그를 눌러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너도 나처럼 50이나 되어서 권사나 해라. 그런 어떤 시기심, 질투심, 그런 것들이 작용하는 거예요.

또 하나는 우리 한국 사회에 팽배해 있는 그런 어떤 연장자, 노년에 대한 생각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권사 하면 한 50은 되어야 하지 않아요? 이런 생각들, 지금 21세기로 가고 있는데, 일년이 과거에 10년보다 더 많이 바뀌고, 변화되는 급변하는 사회에 살고 있는데, 아직 우리 생각과 우리 인식은 19,20세기를 우리는 아직 못 벗어나고 있는 거지요.

이번에 장로님을 세우면서도 저는 40대에 나오기를 기대했어요. 그런데 그게 잘 안됩디다. 또 장로를 세워야 할 텐데, 제가 반드시 40대 초반에서 장로를 몇 사람을 세울 것입니다. 교회가 60,50,40,30대 이렇게 각 계층, 세대를 대표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나와야 합니다.

다윗이 30세에 왕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리고 다윗은 그 일을 훌륭하게 감당을 했어요. 요셉이 30세에 총리가 되었지만, 존경받는 사람으로서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사회에 우리가 뒤따라 가면서 30대에 벌써 사장이 나오고, 30대에 벌써 팀장이 나오고, 지점장이 나와서 우리에게 도전을 주어야 그런가 하고 뒤따라 가는 시대가 아니라 교회가 성경에 있는 것처럼 훨씬더 앞서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저도 요즘은 제가 사진을 찍어 놓고, 제 개인홈피 싸이에 사진을 올려놓고 보면 그냥 늙어 보여요. 언제 그렇게 늙었지? 이렇게 써 놓았더니, 아빠 아직 안 늙었어요. 라고 토를 달아 놓았어요.

제가 싸이 이야기를 하면 여러분 지금 무슨 이야긴지 몇 분 이나 됩니까? 박근혜 대표도 싸이를 하는데, 50, 60대들도 다 자기 개인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어요. 돈 한 푼 안 들고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 과거에 사진을 찍으면 앨범을 만드느라고 그랬지요. 지금은 앨범이 필요없는 시대가 되었어요. 싸이 수백, 수천개에 주제별로 다 넣어 놓을 수 있어요. 언제든지 꺼내어서 브리핑 할 수도 있고, 얼마나 달라졌는지, 우리는 그냥 구석기 같은 생각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그런 그만한 시애에 우리가 그것을 따라갈 수 있는 준비가 끊임없이 되어져야 합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6절에서 9절로 갑니다. 모든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다윗이 통일왕국의 왕이 되기를 바랬을 때, 다윗은 두 가지를 결정했습니다. 하나는 정치 중심으로서의 예루살렘, 그래서 남왕국과 북왕국으로서의 예루살렘이 수도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어떤 영적인 중심으로서 예루살렘이 남북의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의 중심이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예루살렘이 수도가 되어야 하겠다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가나안의 여호수아가 점령한 이후에 열두지파가 모든 지역을 나눠준 이후에도 사사들이 사사기 시대에 통치한 이후에도 그리고 사울왕이 초대왕이 되어서 이스라엘 남북의 통일왕국의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중심에 있었던 예루살렘은 여부스 족속이 여전히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을 정리를 해야 하겠는데, 수도로 삼아야 하겠는데, 정치의 수도로, 신앙의 수도로 삼아야 하겠는데, 그런 결단을 했지만, 주변의 여부스 족속들은 너무나도 난공불략의 요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돌로 된 그런 암반을 기초를 한 도시입니다. 그리고 양쪽에는 기드온 계곡과 힘논의 골짜기, 완전히 계곡으로 둘러쌓여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점령하지 못했던 곳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진군을 한다고 하니까 여부스 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다윗에게, 다윗의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우리 성경에서 아주 50년대에 번역된 이 성경 중에 표현이 잘 못된 것들이 있습니다. 시각장애인들과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 이렇게 번역이 되어져야 하는데, 새번역, 개역성경은 이렇게 시대에 맞게 번역이 되어졌습니다만은, 우리 개역성경은 우리 부분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지금 여부스 사람들이 의도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 성 안에 몸이 불편하고, 아주 약해서 정예군사들이 아닌 사람들과 다윗 하고 싸워도 우리가 이겨. 이런 이야기입니다.

다윗을 얼마나 업신여기면서 하는 이야기인 줄 모릅니다. 마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성을 쌓으려고 할 때에 삼발락이 와서 조롱하면서 너희가 쌓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와도 무너질거야 라면서 조롱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점령하려고 하는 다윗의 전략은 그런 감정적인 기분과 부분에 의해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전략이 있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루살렘을 점령하지 못했던 난공불략의 예루살렘 성, 거기에도 허점은 있었습니다.

8절에 보면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들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쳐라. 이 워터게이트, 수구로 올라가서 치라는데, 이 말 뜻 무엇인지를 얼마 전까지도 성서학자들이 알지를 못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다윗이 이 수구로 올라가서 예루살렘을 치라고 했을까? 결과적으로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다윗성이라 이름을 짓고, 시온성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어떻게 그 성을 점령했을까?

단 하나의 단서가 이 8절 부분인데, 이 부분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최근에 이 부분이 발견을 되었습니다. 고고학자에 의해서 발견이 되어졌습니다. 예루살렘 성밖에 보면 기드온계곡과 힘논의 골짜기 만나는 기온샘이라고 하는 샘터가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는 바위산이기 때문에 절대 물이 나지 않아요.

평상시에는 성 밖으로 사람들이 나와서 기온샘 골짜기에서 물을 길어다가 성 안으로 들어가서 식수로 썼는데, 전쟁이 일어나서 문을 꽉 닫으면 물이 없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는 외부에서 전쟁이 일어났는데, 그 사실을 알고 공격을 하지 않고, 포위만 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는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백성들이 오줌을 받아 먹고, 그러면서도 식수가 모자랐다고 그랬습니다.

그런 만큼 예루살렘 성 안에는 물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 기온샘이 계곡에서 흘러 흘러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데 그 물줄기 중에 하나가 힘논의 골짜기 하나가 기드온 계곡에 들어간 것뿐만 아니라 하나가 다른 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학자가 발견을 했습니다.

그 좁은 골짜기를 통해서 들어갔는데, 들어가 보니까 거기에 엄청난 동굴이 있고, 그 동굴은 옆으로 사람이 갈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수직으로 된 동굴이었어요. 기온샘이 흘러가다가 동굴 밑에서 큰 샘을 이루고, 거기서 이제 틈으로 해서 흘러가는 것, 성에 있는 사람들이 위에서 길게 밧줄을 매서 두루막에서 거기서 물을 길어서 오르고 내리는 아주 비밀스러운 수구가 있었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이었는데, 다윗은 이 예루살렘성을 점령하는 일에 전략을 짜면서 사람이 수십미터의 암벽을 따라 올라갈 수 없는 상황에서 요즘으로 말하면 특공대를 편성해서 수구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한 번 올라간 다음에 밧줄로 사람을 끌어올리고, 사람들을 성문으로 들어가서 문을 열게 만들었습니다.

여부스 사람들은 우리가 불편한 사람들을 내 보내도 우리가 이길 것이라고 자만심을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우리가 수구를 통해서 다윗은 성문을 여는 전략을 가졌던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이겼던지 오늘 그는 전략적인 것을 말씀드리는 시간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다윗이 예루살렘성을 점령해 가면서 그는 승리하고 이름을 다윗성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통일왕국의 수도로 삼았습니다. 그러한 다윗의 승리, 그런 다윗의 강해짐, 다윗의 승승장구의 비결이 무엇이냐? 그가 머리가 좋았고, 전략가 이었고. 용맹했고, 남들이 볼 줄 몰랐던 것을 볼 줄 알았고, 그런 부분들도 그에게 뛰어난 부분이었지만, 그러나 오늘 다윗을 다윗되게 한 그런 중요한 요소가 바로 10절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다윗이 강해진 비결, 다윗이 점점 강성해진 이유, 그것은 바로 임마누엘인 줄 믿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 다윗이 점점 강하여지더라. 우리가 성공한 비결, 우리가 점점 높아지는 비결, 우리가 점점 잘 되는 비결, 우리가 점점 형통해 지는 비결은 바로 우리의 전략에 있지 않고,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매 있는 줄로 믿습니다.

11절에서 12절을 보면 아주 놀라운 사건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지금의 레바논지역에 두로왕 히람이 다윗에게 경축사절을 보냈습니다. 당신이 왕이 됨을 축하합니다. 백향목과 목수와 석수를 보냈습니다. 백향목은 레바논에만 있는 향기나는 향나무예요. 하얀 색깔의 향나무입니다. 세계 어느 곳에도 찾아 볼 수 있는 아주 진귀한 것입니다. 레바논의 국기는 백향목으로 만들어져 있어요. 나중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에도 그 백향목을 바다로 운송을 해서 성전을 짓습니다.

이 히람왕이 다윗이 요청한 것도 아닌데도, 경축사절도 보내고, 자기가 가장 소중한 백향목을 베어서 목수와 석수와 함께 다윗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보내서 다윗을 위해서 왕궁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한 이유를 12절은 2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 다윗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왕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물리적으로, 인간적으로 술수를 통해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저 다윗이 왕이 된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셨고, 하나님께서 인정한 왕이라는 사실, 다윗의 그 정통성을 이 히람이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그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높이실 것이다. 저 다윗의 나라, 이 이스라엘이 장차 중동지역에서 머리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히람이 알았습니다. 선견지명이 있는 것이지요. 안목이 있습니다. 국제정치에 안목이 있는 것입니다. 히람은 다윗을 인정했습니다.

이 다윗은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이웃이 알아주는 다윗, 이웃국가가 인정해 주는 다윗,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때때로 다윗은 더딘 것 같았습니다. 주변의 참모들이 너무너무 답답해 했습니다. 두 번이 아니라 한 번에 해결을 짓겠다고 내가 사울왕을 죽이는 일에 두 번씩이나 기회가 있었을 때에도 주변 사람들은 너무너무 답답해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고 거짓메세지까지 들어내면서 다윗의 마음을 움직여보려 했습니다.

다윗은 중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 때때로 더딘 것 같고, 때때로 손해보는 것 같았지만 결국 하나님은 다윗을 높여주신 줄 믿습니다. 그 높이신 다윗을 주변의 사람들도 높일 줄 알았습니다. 이웃이 인정해 주는 신앙을 소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상이 알아주는 신앙을 소유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에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요셉으로 시작을 해서 모세와 다윗으로 연결되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약속이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초조해 하지 말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 보려 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나 그러나 중심은 하나님께 있어서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인도하심에 우리의 삶을 맡길 때 주께서 우리로 강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점점 강하여진 비결은 임마누엘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승리비결을 저는 3가지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남달랐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조금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어려움이 닥치면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 언어와 행동에서 금방 문제가 생기고, 흐트러짐이 생기잖아요. 하나님이 살아계신거야?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날 수 있어? 이러면서 정말 집사로써, 권사로써 할 수 없는 일들을, 말들을 우리는 쉽게쉽게 뱉어 놓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요청합니다. 환란 중에도 기뻐하라. 형통할 때만 기뻐하라. 환란 중에도 감사해라. 잘 될 때만 기뻐하지 말아라. 대학, 서울대학교만 합격해야 감사헌금 하는 것입니까?

서울대 의대 졸업반, 이제는 의사가 되겠구나. 남편을 잃고 복 중에서 그 아이를 키운, 유복자라고 하지요? 아이를 남편삼아, 희망삼아 키웠던 어느 교회 권사님, 대학교 수련회를 강원도로 갔다가 바다에서 수영하다가 죽었어요. 기가 막힌 거예요.

아이가 서넛 있어도 감당할 수 없는 일인데, 그 유복자 아들, 서울대 의대를 보내고, 이제
곧 졸업반, 의사만 되면 돈 벌어줄거고, 이제 의사만 되면 고생은 끝난 것인데, 대학부수련회 갔다가 죽었어요. 목사님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그 소식을 들은 성도님들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이제 우리 교회는 큰 환란에 큰 시험에 회오리가 불어오겠구나. 요즘은 헌금을 해도 입구에서 하고, 감사헌금을 해도 제가 일일이 읽어드리지 않지만, 예전에는 헌금을 해서 다 가져다 놓았어요. 그날 두둑한 헌금봉투가 하나 놓여있었어요. 그 권사님의 감사헌금 이예요. 우리 아들을 이 땅에서 죄악에 경험하기 이전에 순수하게 먼저 하나님 불러가신 것 감사합니다.

그 상황에서 감사헌금을 할 수 있는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 감사헌금을 들고 감사의 제목을 읽으면서 목사님도 울고, 성도들도 울었어요. 감사라고 하는 것이, 기쁨이라고 하는 것이 형통할 때만 한 다면 세상 사람들도 다 하는 것이지요. 아니 오히려 우리들이 못 하고 있어요.

여러분들 세례 받았다고 세례감사헌금 해 봤어요?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다고 감사헌금 해 봤습니까? 우리 부목사님보고 그런 이야기 한 번 했어요. 내가 목회를 너무 잘 못 하고 있는 것 아닌가?

보통 교회들은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면 보통 300만원, 500만원 헌금을 하고, 장로가 되면 우리 인천에 있는 어느 교회는 1억원씩 헌금을 합니다. 그게 기본입니다. 나는 장로가 되어도 1원 한푼도 내지 마세요. 이렇게 앞서간다고 목회를 했는데, 내가 정목사님 보고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목회를 잘 못 하고 있나? 너무 한 거 아닌가?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세례 받는다고, 하나님 자녀가 된다고, 감사헌금 제대로 한 번 해 보셨어요? 목사가 앞서 가면서 잘 못 된 그런 부분들을 과감하게 헤쳐나간다고 하더라도 여러분의 최소한의 감사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윗을 생각합니다. 정말 그가 하나님을 향한 어려울 때에도, 믿음이 어려울 때에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그의 승리의 기도는 정직함에 있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 아들과 함께 사는 아버지가 늘 노동을 해서 그날 그날 생활을 걸어오는 저녁이면 빵집에 가서 빵을 사다가 저녁을 먹고, 아침을 먹는 가난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평소와 같이 빵을 사다가 먹으려고 빵을 쪼개는데, 빵 속에 동전이 하나 나와요. 아들은 땡 잡았다고, 속에 동전이 있다고, 이 동전으로 빵 하나 더 하나 살 수 있다고 기뻐하는데, 아버지는 정색을 하면서 ‘아들아, 우리가 이 집에서 산 것은 빵을 산 것이지, 동전을 산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아마 어쩌다가 주인이 빵을 만들다가 동전을 떨어뜨린 모양인데, 그 동전은 돌려줘야지.’ ‘아빠는 우리가 산 빵 속에 들어가 있으니까 우리 것이지.’ 아들은 어려운 살림에 빵 하나 더 사고 싶은 욕심에 그랬지만, 아버지는 정색을 하면서 돌려줘야 한다고 하면서 그가 아침에 일을 나가면서 빵집에 들러 사정을 설명하면서 동전을 돌려 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나이 많은 빵집 부부가 얼마나 반가워하는지, 고마워하면서 우리가 나이가 많아서 우리가 빵집을 운영할 나이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누구에게 빵집을 조금 물려줘야 하겠는데, 어떤 사람을 물려주면 좋을까를 의논하다가 정직한 사람을 만나면 물려주자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부러 빵을 만드는 빵 속에다가 계속 동전을 다 넣어서 팔았는데, 아직까지 빵 속에 동전이 들었노라고 가지고 온 사람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오늘 처음입니다. 고맙습니다. 그러면서 뭐 하시는 분이냐? 사실은 내가 그날 그날 노동을 해서 사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그러지 말고 오늘부터 우리 빵집에서 빵 굽는 기술을 배우면서 일을 했으면 좋겠다. 제가 그 기사를 보면서 결론적인 부분을 보니까 이 사람에게 기술을 가르치면서 그 빵집을 아무런 조건없이 그냥 주었습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정직한 것입니다. 사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이 바로 정직입니다. 다윗은 정직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나는 빵을 샀는데, 동전이 웬 떡이냐? 라는 것이 우리 일반적인 개념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좀 더 정직한 삶의 태도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물질적으로, 여러분의 시간적으로, 여러분의 삶에서 정말 정직한 영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 다윗의 승리비결은 거기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릇이 컸다는 것이지요. 사울의 죽음, 이스보셋의 죽음, 어떻게 보면 원수의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수의 죽음을, 실패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고, 장례를 치러준 사람에게 가서 격려하고, 위로해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는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서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이 다윗의 승리의 비결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하나님을 향한 정직함으로, 하나님을 향한 은혜로움을 통해서 나누어주는 그의 넉넉한 그의 그릇이 한가지로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기에 임마누엘의 삶을 살았기에 다윗은 점점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승리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축복을 사모하는 우리, 성공을 사모하는 우리, 머리가 되기 원합니다. 모든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따라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외에 그것을 제외하고, 어떤 우리의 수고와 노력도 헛되다고 하는 것은 우리는 다윗의 삶을 통해서 보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임마누엘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우리가 수단 방법을 다 해보지만 하나님이 제외된,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우리의 삶은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에, 함께 하시기에 강해졌다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형통했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럼으로 우리의 삶의 원동력은 임마누엘임을 선포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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