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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을 만남으로 이루어진 변화 (요 4:5-9, 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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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최종천 목사
 
새벽에 일어날 때마다 맨 처음 드리게 되는 기도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더불어 우리 모든 성도들의 평안입니다. 나이 드신 분, 혹은 몸이 불편하신 분, 힘이 넘치는 청, 장년 혹은 우리 중고등 학생들 또 꼬물거리고 눈앞에 어른거리는 우리 각종 주일학교 어린이들까지 하나님 앞에 안전하며 평안하며 하나님께 소원을 가지고 하루를 시작하기를 기도합니다. 하루를 마치고 밤에 취침하기 전에 드리는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평안한 안식과 하나님의 은혜의 밤을 보내게 되고 새로운 아침에 또 하나님의 기쁨과 소망의 기대를 가지고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이 세상에 모든 일 중에 예기치 않았던 어려움이 많이 있고 또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많은 이러저러한 일을 겪으며 우리는 살아가기에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평안이라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저는 1부에서 6부까지의 주일 예배를 드리고 또 저녁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우리 성도 한 가정을 병원으로 심방하게 되어있습니다. 특별히 그 동안 여러 해 암으로 고생하시고 투병하셨는데 또 하나님의 은혜로 그 기간 기간에도 회복하셔서 건강하게 사시기도 하셨고 하였지만 이제 하나님의 부르심을 때가 가까워서 이제 얼마 생명의 수한이 남지 않았다고 해서 오늘 급하게 가기로 했습니다. 혹시라도 오늘 가지 못하면 또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없게 될지도 몰라서 굳이 오늘 주일 저녁 이렇게 분주한 시간에도 방문하기로 한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고 정말 자칫해서 오늘 보지 못한다면 영원히 이 세상에서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이와 같은 안타까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러저러한 마음고생을 하고 이러저러한 사연이 있고 곤고와 고통가운데 뒤척이며 우리의 삶의 길을 가기도 합니다. 때로는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마음에 상심을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자녀들로 인하여 정말 마음에 원치 않는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인간관계가 원만치 못해서 마음에 상심하기도 하며 가정의 화목치 못한 일로 인하여서 마음에 낙망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하여, 열등감 때문에, 비교의식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 이와 같은 경우를 겪기도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잠깐 불어온 황사로 말미암아 그 먼지 때문에 우리가 밖에 나가는 것을 자제할 만큼 우리 삶에는 작은 일에도 민감하게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는 것을 봅니다. 인생은 여러모로 이리저리 어려움에 치이고 고통당하면서 살아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우리는 떨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생을 보면서 또 한 가지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곤고한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또 이 세상에서 살기를 소원하고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무리 곤고한 세상이지만 그 가운데도 우리가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고, 삶에 대한 소망과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지만 어려운 가운데도 마음에 계획하는 일, 마음에 소원하는 일, 무엇인가 삶을 기쁘게 하는 일이 있기에 결국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성경을 보게 되면 한 피곤한 여인의 모습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말미암아 그 피곤한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소망을 찾아 다시 사람들에게 찾아가 그가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파하고 같은 은혜 받기를 그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내용이 오늘 성경에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이와 같은 문제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우리들에게 어떠한 변화가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성에 수가성이라고 하는 지역에 머무르게 됩니다. 지나치다가 잠시 머무르는데 이제 우물가 곁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로 내려갑니다. 홀로 계신 예수님이 우물가 곁에 있을 때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옵니다. 우물가에 여인이 물을 길러 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좀 특이한 점이 있으니 그 시간이 문제입니다. 보통 물을 길으려면 아침 일찍 와서 그날 먹을 물을 긷던지 아니면 저녁에 와서 또 밤새도록 쓰고 또 이와 같이 사용될 물을 긷던지 하는 것이 정상일 것입니다. 더구나 이 팔레스타인 지방은 매우 무덥고 낮에는 쨍쨍이는 햇볕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조차 다니기 쉽지 않은 이와 같은 때에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다른 사람 아무도 오지 않은 우물가에 물을 길으러 왔다는 것은 무엇인가 범상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계신 그 물가로 와서 이제 그 우물에서 물을 길으려고 할 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물을 좀 주시오.’ 그런데 그 여인이 날카롭게 대응합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 어찌하여 사마리아 사람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이 말은 한 것은 그 당시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라가 분열됩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합니다. 그런데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킴으로 말미암아 앗수르와 북이스라엘 사람 사이에 생겨난 혼혈민족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남유다 사람들은 북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민족의 피를 더럽혔다고 함으로 말미암아 그 사마리아 사람들을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남유다도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 갔다가 복귀를 합니다. 복귀를 하면서 그들이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성전을 재건축 하는 일이었습니다. 성전이 무너지고 믿음이 땅에 떨어지고 나라가 종말의 위기가운데 황폐해져 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회복하고 믿음의 회복을 통해서 나라의 융성을 이루기 위하여 그들은 하나님 앞에 믿음을 회복하는 아름다운 역사로 성전을 재건축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힘을 기울여 성전을 재건축하고 있을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왔습니다. ‘우리 민족이 정말 하나님의 민족으로서 모든 것을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상 때부터 마지못해서 혼혈된 민족이 되었는데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자손의 피가 흐리니 우리도 성전 건축하는데 무엇인가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우리도 동참시켜 주십시오.’ 그러나 남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피를 더럽힌 사람들이기 당신들은 여기에 동참하는 것이 가하지 않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하나님의 백성의 순정성을 오히려 당신들이 훼손시킨다’라고 해서 그들을 배제시켰습니다.

그들은 선한 뜻에서 정말 하나님의 성전건축에 동참하고 싶었는데 그와 같이 거절당하니 화가 나서 성전건축하는 것을 공격해서 중단시켜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방해를 받아서 성전건축이 중단되고 시간이 오래 흘렀습니다. 그러니 이 유다백성이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마음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이후로 더욱더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에 대해서 아주 좋지 않은 심정을 가지게 되었고 심지어는 사람 취급도 하지 않고 개 취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성에 들어가서 우물가 곁에 있는데 어떤 여인이 올 때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이 여인은 가뜩이나 낮에 올 수밖에 없는 사람 눈을 피해서 오는 이와 같은 곤고한 인생살이인데 거기에 이 유다사람으로 보이는 예수님이 사마리아 사람인 자기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을 보니 ‘우리를 사람취급도 안했다가 정말 이렇게 목마를 때 되어서 우리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서 물을 얻어먹으려고 해?’ 그 마음속에 있는 모든 개인적인 일, 또 어떤 민족사관적인 일 모든 것들이 분노로 돌출되어서 예수님께 이와 같이 탁 쏘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이 여인에게 답을 합니다. ‘당신이 만약 내가 누구인줄 알면 나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수를 구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생수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고 이 여인의 정체에 대해서 이제 처음 본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마침내 이 여인이 ‘당신은 선지자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얻어내고 예수님께서 바로 이 여인이 기다리던 그리스도 메시아이심을 가르쳐 주시고 확신시켜 주심으로 말마암아 이 여인은 감동을 받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내려가서 사람들을 초청해 예수님 앞으로 데려오는 역사가 오늘 성경의 내용입니다. 다 읽어야하지만 시간 때문에 첫째 부분과 나중 부분을 읽었을 뿐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을 믿게 되면 어떠한 변화와 어떠한 은혜와 어떠한 능력의 역사들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생각을 해봅니다.
첫번째는 피곤한 여정을 비척이며 가고 있는 곤고한 인생의 모습이 보여집니다.
팔레스타인의 땡볕 내리쬐는 정오 때에 물을 길러 나오는 사연 있는 삶입니다. 정말 사마리아 여인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니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셨을 때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아침에 사람들이 많이 오는 시간이나 저녁에 사람이 많이 오는 시간에 오지 못하고 굳이 땡볕 가운데 사람의 눈을 피하여 오는 여인의 심정에는 무엇인가 곤고함을 깃들여져 있었던 것입니다.
낮의 해도 밤의 달도 너를 상치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쨍쨍이는 햇볕이 사람을 해칠 만큼 이와 같이 심한 고통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을 길러 물동이를 이고 너털거리고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쩔 수 없는 선택할 수도 없이 밀려 사는 인생의 때가 있습니다. 이 여인은 본인이 낮에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밀려 왔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총에 밀려 사람들의 말에 밀려 정말 그들은 견딜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어쩔 수 없어서 이 여인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여인의 마음이 좋을 리가 없지요. 사연 있는 삶이라는 것은 곧 상처받은 삶이 아니겠습니까? 날카롭게 사물과 사람을 대할 수밖에 없는 상처받은 심령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아주 날카로울 때가 있습니다. 분노가 마음에 비끄러워서 어떤 출구만 찾으면 폭발하듯이 솟구쳐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날카로운 비수처럼 상대방을 향하여서 쏘아 붙이는 이와 같은 오늘 여인을 보면서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굉장히 짜증을 잘 내고 분노를 잘 내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합니까? 말은 하지 않고 마음으로만 생각을 하지요. 뭐라고 생각을 했지요? ‘환자다’ 그렇지요. 환자는 원래 그런 것입니다. 몸도 환자일 수가 있고 마음도 환자일 수가 있습니다. 환자들은 몸이 아프니까 마음도 괴롭고 짜증도 잘내고 뿐만 아니라 그저 마음속에 그 분노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내 몸 하나 괴로운데 정말 모든 게 다 짜증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은 누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 같으면 ‘아, 환자구나’ 생각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말로 하면 안된다고 했지요. ‘환자다. 당신은 환자라서 그래’ 그러면 더 큰일 난다고 했지요.
정말 상처받아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왜 이러는지도 모르고, 내가 왜 상처 받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마음속에 분노 짜증 마음속에 그냥 여러 가지 역겨움들이 우리를 혼란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정말 낮에 물 길러 올 수밖에 없는 여인, 더구나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할 때 당신은 유대인이고 나는 사마리아 사람인데 그렇게 취급하지 않더니 오늘 왜 아쉬우니까 이런 소리를 해 하는 이와 같은 민족적인 감정 모든 것이 복합되어 있는데 사실 이 여인은 마음에 더 큰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낮에 사람 눈을 피해서 물을 길러 올 수밖에 없는 더 큰 문제가 있으니 이 여인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는데 하나도 정식적인 남편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나타나지 못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 정서가 얼마나 불편하고 상처 받았겠습니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담대히 자기 남편이라고 데려올 사람 하나 없는 위축되고 마음 불편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남에게 자신을 숨기고 싶고 자유롭지 못하고 뭔가 숨고 싶고 은폐하고 싶은 문제가 있다면 그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로운 인생이 되기를 원하지만 우리가 잘못했던 과거의 사실로 말미암아 우리가 자유를 얻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근원적인 곤고의 요인들이 있습니다. 가리고 싶은 삶의 부분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좀 허풍이 센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마음에 상처가 많고 마음에 정말 가리고 싶은 부분들이 많은데 그것을 가리기 위해서 그렇게 허풍을 떠는 것이지요.
생의 위축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만들지 못합니다. 결국 곤고한 인생의 모습 비척이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의 지질한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서 우리는 두 번째 예수님과의 대화 속에서 삶의 진리를 깨달아가는 인생의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은 우물가였으므로 물을 매개로 하여 이 여인과 대화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 여인은 예수님께 물을 달라는 것을 가지고 실물 교수를 하고 있습니다. 물을 달라고 하시며 그 물을 가지고 설명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 상황에 맞게 주어진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우쳐 주시도록 그 현실을 사용하여 설명하신 것을 봅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면 예수님은 장소나 어떤 상황이나 상관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천국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어떤 삶의 상황도 우리가 놓여진 어떤 위치도 문제가 아니라 우리는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고 주님은 그 상황과 여건과 위치를 사용하여 우리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에서도 어떤 상태에서도 주님을 만나고 믿고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예수를 믿을 만한 처지가 되지 못해요. 내 마음의 상태는 예수님께 나올만한 상태가 못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에게 나아가지 못해도 주님이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우리는 어떤 상태라도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통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경우가 세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 하나님 앞에 너무너무 죄가 많아서 나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할 때, 두 번째 사람 앞에 너무 창피해서 도저히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할 때, 세 번째 내 자신 스스로 생각해도 내가 너무너무 형편없어서 내 자신에게도 부끄럽다고 생각할 때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때라고 합니다.

내 자신도 스스로 생각해도 창피하고 사람들 앞에는 얼굴을 들지 못하겠고 하나님 앞에는 더더욱 나갈 수 없을 때 바로 그때가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시는 장면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아가 주의 은혜를 입는 이와 같은 용서함 받는 하나님의 영광을 힘입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어떤 여건에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세를 힘입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여인의 모든 삶의 모습을 잘 알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마침내 여인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네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하지요. 그런데 ‘나는 남편이 없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네 남편이 다섯이 있다만은 네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 옳다, 너는 실제로 네 남편이 없지 않느냐? 이 여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나를 처음 본 이가 어떻게 나에 대해서 아느냐? 이 말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예수님의 능력을 일순간에 깨닫게 해주십니다.

빌립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어요.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 그 진리의 도가 너무너무 귀해서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에게 찾아 갑니다. 예수님께 가 봅시다. 우리가 기다리던 그 이가 바로 여기 오셨습니다.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사렛이라는 촌 동네, 그런 시시한 곳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 지역적인 감정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해서 비하하였습니다. 그러자 빌립이 단번에 제압해 버립니다. ‘와보라’ 네가 와서 직접 보면 과연 네가 말한 것이 맞는가, 내가 너에게 전해준 사실이 맞는가 네가 알 것이다. 그저 단 한마디로 제압하고 있습니다.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왔습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지요? 네가 무화과 아래 있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아, 나는 예수님을 본적이 없는 걸요.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봤다는 것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봤다는 것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화과 나무아래 있다는 것을 내가 보았다 말함으로 네가 놀라느냐? 네가 더 큰 것을 보리라. 마침내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영광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을 그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은 이것으로 변화를 받게 되어 주님을 따르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어도 우리에게 주님의 능력을 보여주셔서 우리가 주님을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알고 주님께 솔직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설득시킬 능력이 있습니다. 버티는 것이 우리의 은혜가 아닙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설득시킬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좋아하세요. 여러분 사람들이 우리를 좋아할 때 우리가 사람이 좋아하는 것만큼 그런 인물이 보통 못 되잖아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는 인격적이지 못하고 도덕적이지 못하고 나는 또 여러 가지 의지적이지 못하고 나는 여러 가지 잘 미혹당하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우리를 좋아한다면 우리 마음의 짐이 되겠죠? 그런데 만약에 그걸 다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좋아한다면 우리는 마음에 부담이 없이 진정으로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상대를 모르고 좋아하다가 시간이 가면서 그 상대방의 약점을 보면서 그래도 좋고 아끼고 사랑할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앙드레 말로는 인간적 조건에서 그런 말들을 합니다. ‘내 친구는 나를 사랑해주는 인간이다. 내가 실패해도 비열한 일을 해도 심지어는 내가 배반했다 할지라도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다’
내가 실패해도 정말 하잘것없는 상태에 이르러도 내가 비열한 비난받을 일을 해도 심지어는 내가 배반했다손 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럴 수밖에 없겠지 하고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친구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이상을 능가하는 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여인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음에 길과 과정을 설명해 주심으로 마침내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얻게 해주심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여자가 가로되 메시아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곧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구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곧 그다’라고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은 생명의 진리를 알게 하시고 주님을 알면 생명의 길이 열리고 기쁨으로 생명의 길을 깨닫고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 주님과 함께 대하면 주님과 더불어 함께 가다보면 우리는 주님의 은혜의 길을 깨닫고 영원한 생명을 깨닫고 그것을 소유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처음 나오신 분들은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다녀도 예수님에 대해서 전부 알지 못할 때가 있지요. 그러나 한걸음 한걸음 주님과 동행하다 보면 눈에 보이는 길이 있고 깨달음이 있고 그 과정을 통해서 한걸음 한걸음 믿음의 세계로 나갈 때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새로운 능력과 영광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깨닫게 해주십니다. 마침내 이 여인의 고백을 이루시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님을 고백하게 하시고, 알고, 믿고, 능력으로 생명의 구원을 소유하게 하십니다.

세 번째는 변화되어 기쁨이 넘치고 자신을 회복하고 그 기쁨을 다른 이에게까지 전하는 복된 삶으로 예수로 인해 변화받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곤고하고 지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깨닫는 인생이 되고 이제는 마침내 예수로 인해 변화받은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친 영혼, 깨달은 영혼이 마침내 변화를 받는 아름다운 은혜의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이 영혼은 예수님과 더불어 은혜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고 그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내려갑니다. 이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동네 사람들의 눈에 안 띄려고 몰래 혼자 물을 기르러 나왔던 여인이 이제는 동네로 내려가서 오히려 담대하게 내가 받은 은혜를 설명하고 너희도 와서 내가 받은 은혜를 받으라 너희도 영원한 생명을 얻으라 하고 그 사람들을 초청해서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입니다. ‘와보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알면 생명에 감격이 생깁니다. 이제까지 내 삶을 능가하는 힘과 자신감이 생깁니다. 사람들을 피해서 여기 왔던 여인이 사람들을 찾아나가 그 사람들에게 담대히 자기가 받은 모든 내용들의 사실을 전하고 그들을 초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이에요. 이전의 삶이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물 기르러 왔는데 그 물동이가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동네사람들 가서 데리고 오는 것이 예수님의 능력과 은혜를 전파하는 것이 더 큰 은혜가 된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상위가치의 발견으로 하위가치에 대한 아무런 미련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 불이 켜져 있습니다. 이 불이 탁 나갔다고 합시다. 깜깜한 밤이에요. 우리는 촛불을 하나 켭니다. 촛불을 켰다가 불이 탁 들어왔어요. 촛불은 소용이 없게 됩니다. 이 밝은 불빛 아래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후~’ 불어서 촛불 끄게 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밤에 밖에서 손전등가지고 불 켜다가 낮이 되면 손전등 켜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면 손전등 탁 끄잖아요. 상위가치를 발견하면 하위가치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상위가치를 발견하면 하위가치는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상위가치를 발견하게 될 때 이제 우리에게 있어서 내가 그동안 그렇게 귀하게 여기던 것들이 오늘 나에게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너무나 너무나 마음 상하던 일이 괜찮아 왜 그것 가지고 마음 상했을까? 이루어지면 감사하고 안 이루어져도 괜찮아. 난 일어설 수 있어. 정말 전에는 마음이 괴로워서 살 수 없었어요.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괴로워했지? 그것 아니어도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돼. 우리는 비로소 상위가치를 찾음으로 말미암아 하위가치의 것들에 대해서 풀려날 수 있는 자유로움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진리를 발견하면 진리를 소유하면 자신감을 소유하게 됩니다. 제가 우리 성도님들께 늘 말씀드리죠. 우리는 매우 자신 있어야 된다. 도도할 만큼 자신 있어야 된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자신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발견하고 소유한 사람은 자신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담대히 얘기할 수 있어요. 위축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언제어디서라도 우리는 자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진리를 전파하고 싶은 사명감이 생기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이제 물동이 하나가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자신있게 영원한 생명의 생수를 주고 싶은 거지요. 사람들에게 질시 받고 스스로도 사람을 피하고 싶어하던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던 삶이 이제는 오히려 그들에게 사고와 행동에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영향력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예수를 믿고나면 무엇인가 달라지게 됩니다. 여러분 아주 귀한 것 소유하게 되면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것이 작아보이게 되고, 자신 있어집니다. 가령 여러분의 주머니에 10만원이 있다고 합시다. 그게 전 재산이에요. 아주 귀해요. 이게 내 전 재산이다.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데 갑자기 누가 10년 전쯤에 1000만원쯤 빌렸는데 그 사람이 사업이 망하고 도저히 사정이 안되고 줄 수 없다고 해서 받을 길도 없고 마음이 처음에는 괴롭다가 나중에는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10년만에 나타나더니 우리에게 1000만원을 가지고 왔어요. 마음이 기쁘지요? 그런데 10만원을 생각해 봤어요. 그것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에요, 천십만원이 더 중요하죠.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없죠? 천만원 없던 것 생겼는데 10만원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자, 그런 마음쯤 가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도 않으면 예수 어떻게 믿습니까? 큰 예상치 못한 기쁜 일 있으면 작은 일은 ‘아니야 괜찮아 있어도 괜찮고 없어도 괜찮아. 내게 전에는 이게 큰일로 생각됐는데 이것을 또 큰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거야’라고 뭔가를 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사람이 담대해지고 대범해지고 자신있어지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마음에 용기가 생깁니다.

오늘 이 여인은 사람을 피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들이 여인의 말을 듣고 왔어요. 놀라운 변화 아닙니까? 사람 피해서 다니던 사람은 질시받고 비난받고 손가락질 당하던 여인이에요. 그런데 그 여인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예수님 앞에 오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잖아요. 영생을 전하는 가장 귀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변화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예수님 만나면 예수님의 은혜와 능력을 소유하면 사람이 이렇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정말 쩨쩨하던 사람이 정말 소심하던 사람이 정말 다른 사람 회피하던 이와 같은 마음에 짐을 느끼고 피하고 싶어하던 음습한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있고 담대하고 능력가운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이 말씀드리고 맺으려고 합니다.
가끔 가다보면 우리는 내 얕은 지식과 짧은 인생의 경험을 가지고 고정관념을 만들어서 그것을 가지고 내 앞의 것들을 쉽게 판단하고 재단해 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쉽게 비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치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이 이 인생살이 하는데 세상의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양 그것 가지고 판단합니다. 삶의 진리에 대한 열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접근하지 않으면 우리는 인생을 바로 운행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2년 전부터 등산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뭐 별거 아닙니다. 처음에는 동네 산에 가다 이제 조금 멀리 높은 산가는 그 정도입니다. 처음에 제가 동네 산을 가다가 좀 높은 산에 가자고 해서 큰 산에 갔습니다. 우리 장로님 안내를 받아서 갔는데 제가 거기서 몇 가지 이상한 일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장로님 안내를 받아서 가는데 장로님이 갑자기 산에 가시더니 조금 딴 사람이 되더라고요. 수건을 꺼내더니 띠를 만들어서 머리에다 매시는데 꼭 람보같이 매시는 것입니다. 참 이상했어요. 왜 이렇게 매나? 다른 사람들도 눈에 띄더라고요. 저는 ‘야, 산에 그냥 다니지 왜 이렇게 폼을 잡고 다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뭐, 그냥 다니면 되는 거지, 그까짓 거 에베레스트 산에 가는 것도 아닌데 뭐 그렇게 폼을 잡고 티를 내고 다니나.’ 솔직히 제 맘에 그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서보니 등산복도 잘 차려입고 가는데 저는 그 사람이 전문등반가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야, 왜 이렇게 조그만 산에 전문가들이 많이 오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올라가다 보니 대다수 그런 옷을 입었더라고요. 그래서 ‘아, 그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음 가운데 ‘산에 아무 바지나 입고 티셔츠나 입고 오면 되는 거지, 저렇게 꼭 폼 잡고 차려입고 와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올라갔더니 어떤 사람은 산에 선글라스 끼고 온 사람도 있더라고요.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왜 산에 선글라스를 쓰고 와? 여기가 무슨 무대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지나니까 저도 머리띠 하고 다니고, 등산화도 신고, 등산복 다 입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다니다 보니까 땀이 너무 나서 눈에 막 땀이 흘러들어가서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건으로 머리를 띠고 모자 쓰고 갔는데 그 수건 벗어서 짜면 물이 주르륵 흐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기능적으로 머리에 띠를 띠신 것이었습니다. 또 아무 신발이나 신고 산에 가면 미끄러져요. 미끄러져서 다치겠더라고요. 그러니까 할 수 없이 등산화도 신는 것이고, 등산복도 입으면 기능성 옷이라서 땀도 쉽게 배출되고 그러는 것 같습니다.

제가 모를 때 얼마나 남을 판단하고 비판했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이 옅으니 제가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남을 막 제단하고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제가 회개하고 있죠. 정말 내가 알고 있는 얕은 지식 가지고 내가 알고 있는 작은 것 가지고 마치 그것이 전부인 양 틀렸어, 옳았어, 이게 맞아 저사람 왜 그럴까? 제단하고 판단하고 비판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생각합니다. 이제까지 내가 체험해보지 못했을 뿐이지 이제까지 내가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내가 모르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주님에 대해서 알지 못한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주님에 대해서 알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해서 내가 마음대로 알고 있는 지식가지고 내가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내 마음을 열고 주님이 내 마음에 오셔서 내 마음을 주관하시도록 내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것이 오히려 믿음의 합당한 자세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합당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주의 권세를 깨시고 생명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신 분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지금 잘 알지 못해도 그 분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어떠한 역사를 이루실까 기대하고 내 마음을 열고 그분을 초청하는 것이 우리에게 더욱더 유익한 일이요, 지혜로운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작은 지식가지고 오히려 나를 방어하며 오히려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기회를 드리는 것이 우리 믿음의 자세로 합당한 모습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되고 구원의 백성되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마음을 열고 우리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되어 기쁨과 은총을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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