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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어린아이들을 용납하라 (잠 22:1-6, 딤후 1:3-5, 마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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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오동 목사

1.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먼저 어린이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합시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하는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어린이들이야말로 가정의 꽃입니다. 그들 때문에 가정은 즐겁고, 평화가 넘치고,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린이들은 이 사회의 초석이요 하늘나라의 주인공들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집안이 잘 되려고 하면 세 가지 소리가 들려야 하는데 첫째가 아이들의 소리요, 둘째가 베 짜는 소리 즉 일하는 소리요, 셋째가 글 읽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집집마다 아이들이 많았습니다. 당시는 문을 문종이로 발랐기 때문에 아이들이 많은 집은 그 문이 찢어지고 바르고 해서 아주 누더기 같이 되어집니다. 그렇지만 자녀가 없는 집은 문이 깨끗합니다. 그런데 그때 자녀들이 많아서 그렇게 골몰하면서도 문이 너덜너덜 찢어진 집들을 보고는 “장래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농사 중에는 자식 농사가 제일 중요하다”고도 했습니다.

옛날에는 모두들 살림이 넉넉지 못했고, 또 교육에 대한 관심도 없었기 때문에 자녀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요새는 교육에 대한 관심이 너무 지나쳐서 자식들을 잘못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過猶不及’입니다. 모자라는 것이나 지나치는 것이나 잘못되기는 매일반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부모 특히 아버지가 가정에서 제사장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제사장적 축복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야곱은 그 아버지의 축복을 받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동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하여 결국 그 축복을 받아내서 장자의 반열에 서게 되었고,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이기 때문에 정말 주의 종들을 통하여 축복받는 것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에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을 예수께 데려와서 안수받기 원한 것도 그런 전통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몹시 피곤하시고, 할 일이 많고, 또 갈 길도 바쁩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을 꾸짖은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우리도 흔히 하는 말이 “애들은 가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짐을 가득 싣고 가던 대형 트럭이 터널을 통과하려다 짐이 걸려서 통과하지 못하고 꼭 끼어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차를 빼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보았지만 헛수고였고 뒤따라오던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서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어린이가 거기 나타났습니다. 어른들은 “애들은 저리가라, 위험하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차를 빼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아이 때문이었습니다. 아이가 제공한 지혜는 그 트럭의 타이어에 공기를 좀 빼서 차 높이를 조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꾸짖는 것을 보신 우리 주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그들에게 안수해 주셨습니다. 그 부모들이 얼마나 기뻤겠으며 그날 우리 주님께 안수기도 받은 그 아이는 얼마나 행운아였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꼭 같이 말씀하십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절대로 어른 중심으로만 살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른만 숫자로 치지 말라고 하십니다. 어른 위해서만 계획 세우고 운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을 배려하라고 하십니다. 어린이들에게 축복의 길을 열어주라고 하십니다. 특히 어린이들이 주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어른들이 온갖 노력을 기우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저 제자들 같은 우리들을 주님은 책망하십니다. 주님은 어른만 아니라 어린들을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2. 이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양육하고 교육 시킬 것인가에 대하여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1) 우리는 흔히 아이들 형제를 키우면 형제를 비교하는 일이 다반사(茶飯事)입니다. “네 형을 보라”든지 아니면 “형이 동생만도 못하냐?”고 핀잔을 줍니다. 또는 다른 아이들과도 비교합니다. 속담에 “비교하면 비참해 진다”는 말처럼 아이들을 양육하고 교육하는데 이보다 더 해로운 것이 없습니다. 비교 시키므로 서로 적대시하도록 만들어 놓습니다. 형제도 없고 친구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타도해야할 적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자식을 대할 때 중요시 하는 것은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저마다의 개성”입니다. 서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개성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일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자매간이었으나 개성이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사색적인가 하면 마르다는 활동적이었습니다. 이것이 저들이 예수님을 섬기는데도 나타났습니다. 마리아는 주님 발아래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고 마르다는 음식준비 한다고 분주했습니다. 이럴 때 두 사람을 놓고 우열을 저울질 하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마르다가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것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마리아는 마리아대로 주님을 섬겼고 마르다는 마르다의 방법대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주님은 이 두 사람을 다 용납하셨습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만 해도 60억이 넘습니다. 그런데 그 60억 가운데 지문이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머리카락이 같은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은 저마다 독자성이 있고, 개성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들은 한결같이 공부 열심히 하여 일류대학 또는 더 좋은 대학에 가야한다는 소망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취향이나 재능에 전혀 상관없이 남이 하는 것은 무조건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강제로 시키고 있습니다. 이래서 무한경쟁의 각박한 현실로 아이들을 내몹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꼭 의사가 환경 미화원 보다, 재벌이 가난한 화가보다, 대학교수가 농부보다 나은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5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2달란트, 또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셨던 그 달란트 교육법을 우리가 본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에게 주신 그 달란트를 개발하고 발전시켜서 주님께 쓰임 받는 자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2)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 제자들로 하여금 주님과 함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마28:20에 보면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면 보혜사가 오실 터인데 그는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무슨 특별한 기교를 가르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냥 함께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임마누엘의 놀라운 은총 아닙니까?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하면서 마침내 인류 역사를 바꾸어 놓는 위대한 주님의 사도들이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독일 있는 아들 가정에 딸이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우리는 태어난 아기를 엄마와 떼어 놓는데 거기서는 갓 태어난 아기를 엄마에게서 떼어놓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나자 말자 엄마 품에서 엄마의 체온을 느끼며 엄마와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도록 하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뭐니 뭐니 해도 자녀의 가장 훌륭한 교사는 부모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아이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와 함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태어나자 말자 떨어져야 하고, 부모들이 직장 생활하기 때문에 떨어져야 하고, 극성스런 열심 때문에 자녀들이 학원 저 학원 다니느라고 하루 종일 떨어져야 합니다.

현대 유대인들은 어린이 집에서 ‘메타페레트’라고 부르는 육아전문 여성들이 오후 4시까지 돌보는데 오후 4시가 되어서 어머니들이 아이를 데리러 가서 맨 먼저 하는 일이 아이를 꼭 껴안아 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집으로 데리고 가서는 아이와 함께 하면서 끊임없이 스킨십을 한다고 합니다. 자녀와 함께 하면서 사랑으로 보살펴 주는 것 이상의 훌륭한 육아 또는 교육방법이 없다는 것을 주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3) 예수께서 고향에 가셨을 때 고향 사람들은 예수께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 부모가 누구다, 저 형제가 누구다’라고 하는 고정관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능력 있으신 주님께서도 고향에서는 단지 소수의 병자들만 고치셨을 뿐 능력을 행할 수 없으셨다고 했습니다.

최초로 비행기를 만든 사람이 라이트형제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렸을 때 공부에는 관심이 없고 허구한 날  길에서 주워 온 볼트니 낫트니 하는 것을 가지고 놀기만 했습니다. 장난감을 사주면 그 자리에서 분해해 버렸습니다. 우리들 같으면 매일 부모들로부터 야단맞느라 정신없을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해라”든지 “무엇이 되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늘 곁에서 같이 있어주면서 자녀들이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호기심을 채워주었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예컨대 “너는 앞으로 의사가 될 각오로 공부해라”는 식의 말은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대신 “싫은 것은 할 필요 없다 그러나 하고 싶은 것은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하라”고 한다고 합니다.

부모의 잣대에 맞추려고 한다든지, 어릴 때 한 두 번의 실수나, 어릴 때의 모습이 마치 그 자녀의 고정된 운명인 것처럼 편견을 가질 때 아이가 가지고 있는 진주는 영원히 잠재된 채 버려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기의 편견을 버리고 자녀를 늘 새롭게 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부모가 자신의 눈을 흐리게 하는 편견을 깨끗이 버릴 때 아이 안에 감춰진 오색찬란한 진주가 그 빛을 발하게 된다고 합니다.

(4) 일본의 어떤 학교에 데쓰조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이 되기까지 글을 쓸 줄도 몰랐고, 성적은 항상 밑바닥이었고, 말도 별로 없었으며 친구조차 없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이 아이 때문에 고민하다가 고참인 아다찌 선생님에게 그 고충을 털어 놓았습니다. 아다찌 선생이 그 아이를 살펴보았더니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는데 의외에도 그 아이는 쓰레기 하치장 같은데서 파리를 잡아와서는 유리병에 넣고 키우면서 관찰을 하는데 파리에 대하여는 박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다찌 선생은 서점에 가서 파리에 관한 서적을 그해다가 주었더니 데쓰조는 당장 그 책을 보고 빠지면서 그 책을 읽기 시작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이 열려서 말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파리를 관찰하면서 책을 읽고 그것을 정리해서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 그대로 일약 “파리 박사”가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망친다”고 했습니다. 부모들 마음에 과한 욕심이 있을 때 이것이 자녀들을 망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다찌 선생은 요새말로 하면 정말 눈높이 선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쓰조라고 하는 쓸모없는 아이를 일약 파리 박사로 내세울 수 있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쓰는 금언 가운데 “물고기를 주면 하루를 살지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주면 평생을 산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자녀 양육과 교육 방법은 물고기를 주는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면 과한 표현이겠습니까? 왜 20대 대졸 실직자가 이렇게 양산되어집니까? 단지 사회 구조 때문이라고만 하겠습니까? 여기 대부분의 책임이 부모들에게 있다고 한다면 강하게 반발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 부모들이 성경의 원리에 입각하여 우리 자녀들을 바르게, 하나님 뜻대로 양육하고 교육을 시켜야 하겠습니다. 특히 무엇보다 자녀들을 품에 안고 키우게 되는 어머니들의 신앙과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로 하여금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주님의 복을 받아 승리하는 자녀들이 되도록 믿음과 지혜로 헌신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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