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있을 곳에 없었기에 (요 20:24-25)

  • 잡초 잡초
  • 251
  • 0

첨부 1


- 설교자 : 한용근 목사

  오늘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도마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성경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도마는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서 아주 열정적이고 뜨거운 믿음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죽음에 대해 말하셨을 때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황이었지만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요11:16)라고 할 정도로 자신의 생명조차도 주님께 헌신한 사도였습니다. 도마는 이처럼 예수님을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주님을 따랐던 제자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아쉽게도 주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을 때 그는 그 자리에 있지 못해서 그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럴 수도 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어제 만나지 못했으니 오늘 만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지난 주일에 예배를 못 드렸으니 이번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선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도마는 있을 그 자리에 없었기에 다른 제자들이 모두 받는 주님의 축복을 놓치고 말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기회가 쉽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장래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확실하지 않고, 앞이 보이지 않고, 장래가 불투명한 가운데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여러분을 축복하면서 “내가 너를 책임져 주마”라고 말했다고 해 보세요. 기쁘지 않겠습니까? 소망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내가 네 문제를 해결해 주마”라고 해 보십시오. 그 때부터 누구도 그 어떤 것도 그 인생의 걸림돌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야곱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인생의 미래가 아주 불투명했습니다. 형 에서는 자신을 속이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빼앗아간 야곱을 어떻게 죽일까를 엿보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 야곱이 죽을 것 같은 불안감에 그를 불러 형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외삼촌 라반에게 가 있으라고 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로부터 쫓기는 몸으로 집에서 나왔습니다. 저 멀리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인생의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과 근심 속에서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킬 것이며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행할 때까지는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현대인의 성경 창28:15)라고 악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큰 용기와 힘이 되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믿음의 큰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를 제외한 10명의 제자들에게 타나셔서 축복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할렐루야! 불안 속에 있었던 제자들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20절에 그들이 주님을 보고 기뻐하였다고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6:22)고 하셨고, 요한복음 14:27절에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기쁨은 세상이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었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평안은 세상의 어떤 것도 그들에게 줄 수 없는 평안이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 모두에게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모든 제자들에게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큰 평안이 차고도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불안과 근심과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이 모두 기쁨으로 변하게 되었고, 큰 평안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입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도마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이 축복의 자리에 있지 못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지 못했으니 안타깝지만 그는 그 자리에 임한 주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된 것은 ‘설마 그 때에 그 날에 주님이 오실까?’라고 생각하고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주님께서 그날 그 자리에 오신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가 그렇게 했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팽개쳐 두고 어떻한 일이 있어도 제자들과 함께 마가의 다락방에 아마 일등으로 와서 새벽부터 기다렸을 것입니다. 결국,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큰 기쁨과 평강의 축복을 받는 큰 은혜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둘째로 도마는 있을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불신자가 되었습니다. 믿음은 어디에서 나는 것입니까? 로마서에는 분명히 말하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고 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출발하는 것이요, 그 들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도마가 주님이 마가의 다락방에 나타나셔서 말씀을 전할 때에 안타깝게도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주님을 만나서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은 모두가 한 결같이 “주님은 부활하셨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큰 은혜와 기쁨과 평강을 주셨다”이렇게 말할지라도 그 자리에게 없었던 도마는 “설마...”  “그럴리가....” “아니겠지....”라는 말을 사용하는 믿음없는 불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주님께서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셨겠습니까?  참 불행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믿음없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눈물로 영접하면서 내가 주님을 만났다라고 고백하는데 어떤 사람은 “설마...”  “그럴리가....” “아니겠지....”라고 말합니다. 참 불행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향해 오늘 말씀하시기를 “믿음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믿음은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성장하는 것인데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으니 당연히 의심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구약의 느헤미야서에 보면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사명자로서 땀을 흘리며 밤에는 횃불을 태양삼아 낮에는 폭포 같이 땀을 흘리며 백성들과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무너지 하나님의 성벽을 건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마야라는 사람이 6장에 등장합니다. 이 스마야라는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제사장이 공사현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가 있어야할 그 자리에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예배 드려야할 자리에 없는 것입니다. 공사현장을 총 책임지는 지도자로서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그래서 왜 스마야라는 제사장이 예배에 오지 않는가하고 알아 봤더니 느헤미야를 죽이려는 원수 산발랏과 도비야라는 사람에게 뇌물을 받고,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그는 믿음에서 멀어져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삶을 산 것입니다. 이처럼 모임과 예배에 자꾸 빠지는 사람들은 신앙적으로 아주 위험한 사람들입니다.

  예배에 자꾸 빠지면 결국 그 영혼은 마귀의 자식이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있어야할 자리에 있지 않으면 도마처럼 됩니다. 유다서에는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유1:6)고 했습니다.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의 처소를 떠나면 결국은 심판을 받습니다. 스마야처럼 마귀의 자식이 되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주님께서는 부활 이후 주일 마다 항상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요20:19,26). 주님은 주일마다 제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만일 도마가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던 그 두 번째 주일에 또다시 그 자리에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너무나도 끔찍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도마는 주님이 계신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전해 주시는 생생하고도 살아 있는 그 생명의 말씀을 듣지 못했습니다. 말씀을 듣지 못한 결과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는 그와 함께 3년을 함께 했던 믿음의 친구들의 말조차 믿지 않는 불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그가 만일 두 번째 주일에도 동역자들과 함께 부활의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분명히 더 큰 불신의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의 공통점은 열심히 예배에 참석한다 것에 있습니다. 그들에게 “왜 한번도 빠지지 않는냐?”라는 질문을 하면 그들은 “주님이 언제 우리에게 놀라운 역사를 행하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놀라운 역사의 현장에  빠지기를 원치 않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만일 여러분 속에 의심 있어도 예배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성도의 모임에 있으면 그곳에도 빠져서도 안 됩니다. 주님은 내 이름으로 두 명 또는 세 명이 모인 곳일지라도 그곳에 주님께서 함께 거하시면서 역사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시편 1편 말씀에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라고 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와 동행하고 있습니까? 어디에 인생의 자리를 펴고 앉아 있습니까? 진실로 복 있는 사람이 되어 주님을 만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셋째로 도마는 있을 곳에 있지 못함으로서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모였을 때에 여러 가지 위로의 말씀과 사랑과 권면의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 부분에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절)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선교적인 사명을 위임해 주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명을 받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의 포도원에는 놀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일꾼이기 때문에 일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그가 일해야 할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사도로서 세계 선교 사역의 리더로 사명을 받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선교사로서 파송을 받는 그 자리에 주인공인 도마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안타까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도마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까짓 거 한 번 빠진 것 가지고...”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그 한 번이 인생을 좌우하는 자리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주님은 그날 그 자리에 모인 제자들에게 “세계를 바꾸는 능력과 힘을 주셨던 것”입니다. 22절 말씀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 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뜨거운 역사의 현장에 도마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 화요일에 저와 제 아내는 우리 자신들의 신앙을 돌아보기 위해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외인묘지에 다녀왔습니다. 여기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 일가와 아펜젤러의 무덤이 있습니다. 가난하고 헐벗고 가련한 한국의 여성을 사랑하여 이화학당을 세운 의사요 교육자요 외교관이었던 스크랜턴 부부의 묘도 있었습니다.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80평생을 언론활동에 종사하다가 1969년 8월 5일 서울에서 세상을 떠난 호머.B.헐버트박사의 묘가 있었습니다. 그 묘비에는 “한국인이 아니면서도 한국을 더 사랑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1919년 4월17일에는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서양인이며, 우리나라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여 한국의 병들고 가난하고 소외된 한국인들을 돌보다가 일본인들에게 추방당하였던 셔우드 홀 선교사의 묘도 있었습니다.

  저희 두 사람들은 그들의 묘를 보면서 동시에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화려한 명성과 업적에 비해 그들의 묘는 이곳저곳이 부서져 있었고, 심지어 그것이 평지인지 묘지인지를 구별하지 파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천국의 길을 주만 바라보면서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두 사람은 서로의 눈 속에 있는 눈물을 보면서 “여보, 우리가 어려움을 만나면 이곳을 찾아와서 다시 용기를 내어서 돌아가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곳을 다녀와서 102장 찬송을 깊이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찬송은 베벌리 셰아(Beverly Shea)가 작곡한 찬입니다. 셰아가 이 찬양을 작곡할 때 미국은 극심한 불황으로 회사마다 혹독한 구조조정과 임금삭감에 시달리던 때였습니다. 셰아는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피아도 건반 위에서 조그마한 종이쪽지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쪽지에는 그의 어머니 레아 밀러(Rhea Miller)가 괴로워하는 아들을 위해 적어 놓은 정성이 담긴 시였습니다. 그 시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시를 보면서 세상을 살면서 자신에게 진정으로 가장 귀한 것, 가장 값어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방황을 멈추고 삶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 예수 믿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사명을 받은 사람인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도마는 그 사명을 받는 자리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 아담에게 생명의 호흡을 그 코에 불어 넣으셨던 것처럼 주님의 생명의 호흡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축복하시며 사명을 위임하는 그 때에 그 자리에 도마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축복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명이 위임되고 성령의 역사가 있는 그 자리에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주님의 영광의 날에 모두 참여하기를 특별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