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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공동체 습관(1) : 충성 (갈 5:2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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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종호 목사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1.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움직임은 오직 믿음에 의한 움직임이다.

성도들이 만나는 현실적인 두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도이면서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살아왔던 방식을 그대로 사용하는 문제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도답게 살지 못하고 성도로 살아갈 환경이 만들어지기만을 기다리는 문제입니다. 전자는 자신 안에 새로운 능력이 있음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옛 능력으로 사는 것이며, 후자는 자신 안에 새로운 능력이 있음을 알면서도 외적인 환경을 이유로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두 문제는 성도들이 공동체 속에서 실패하는 이유입니다.

첫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면서 세상 나라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세상 나라의 원리에 익숙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 세상 사람들의 삶의 방법,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목적에 익숙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도 세상 나라의 원리를 따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향해 움직일 때도 세상 나라의 방식을 따라갑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움직임을 거부하십니다. 이러한 움직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 백성의 움직임을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을 향하여 눅 9:62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오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감당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며 예수님께 나오기를 주저할 때 그들을 향하여 책망하신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인생의 전부로 여긴다면 우리는 예수님 앞으로 한 발작도 나갈 수 없습니다. 현실의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 다음으로 미루지 않는다면 결코 예수님께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가는 움직임은 전적으로 믿음의 움직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움직임은 오직 믿음에 의한 움직임입니다. 세상의 방식과 가치관으로는 예수님께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공동체를 향한 움직임은 전적인 믿음의 움직임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향해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공동체를 향해 움직일 수 없습니다. 성도의 교제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향한 움직임은 믿음의 길입니다.

둘째 이유는, 세상 환경이 믿음의 환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영적인 유익을 주는 환경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들이 영적인 유익을 주기 위해 도전해 가야 할 환경입니다. 우리들의 영적인 삶에 어려움을 주는 고난의 환경입니다. 그럼에도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외적인 환경이 영적인 유익을 주는 환경으로 변화되어 다가와 주기만을 원합니다. 영적으로 유익한 환경으로 다가오기 전에는 자신에게 있는 영적인 능력으로 그들에게 다가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람들에게 전 11:4에서 솔로몬의 입을 통해서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구름을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풍세만을 바라보는 자는 언제까지나 파종하지 못합니다. 하늘의 구름만을 바라보는 자는 언제까지나 거두지 못합니다. 자신이 움직이며 일하기 좋은 기회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결코 자신이 기다리는 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풍세를 이기며 도전해 가는 자가 파종할 수 있습니다. 구름을 이기며 수확하러 나가는 자가 거둘 수 있습니다. 열심히 기회를 찾아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는 권면입니다.

이것 역시 풍세 뒤의 결과를 바라보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구름 뒤의 결과를 바라보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세상은 풍세와 구름으로 우리의 눈을 현실에 머물게 하며, 하나님의 백성의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풍세 뒤에 준비된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구름 뒤에 감추어져 있는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히 11:1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적인 안목으로는 볼 수 없는 나라입니다. 믿음의 안목으로만 볼 수 있는 나라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실상을 보는 눈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증거 하게 하는 영적인 감각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향하여 움직여 갑니다.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풍세와 구름 뒤에 가려진 실상을 바라보며 움직입니다. 믿음은 그 실상과 증거를 보며 우리 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하게 합니다.

2. 세상을 이기며 하나님을 향하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삶을 실패로 이끌어 가는 현실적인 두 문제를 이기는 유일한 길은 믿음의 길입니다.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과거의 세상적인 옛 능력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능력을 발견하고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세상의 악한 풍세와 구름을 뛰어 넘는 안목으로 소망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능력으로 세상을 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향한 삶,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삶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우리의 세상적인 행위로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적인 노력이나 수고로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엡 2:8에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나가며, 교회 공동체로 나갑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주시는 선물입니다.

즉 믿음은 성령께서 이루어 주시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갈 5:22-23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말씀하시며, 그중 일곱 번째 열매로 “충성”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충성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피스티스”로서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 의미상의 이해를 위해 “충성”으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충성은 군 조직이나 관료 조직에서 말하는 “충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단어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믿음”에 있어서의 충성을 말합니다. 약속을 충실히 지키는 신뢰할만한 성품을 말합니다.

이 믿음은 “진리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확신”과 “구원에 있어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기초로 합니다. 우리는 은혜의 선물로 주신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또한 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인 교회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 믿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갑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 받은 이후, 하나님께로 나가는 것이나, 교회로 나가는 것이나, 세상을 향해 나가는 것이나 모두 믿음의 걸음입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으로 걷도록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믿음과 세상을 향한 성도의 믿음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상 공동체를 향해 우리들이 나타내야 할 믿음을 “믿음”이라는 표현 대신 “충성”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대다수의 영어 성경은 “충실함(faithfulness)”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믿고, 신뢰할 말한 모습이며, 세상 사람들이 믿고 신뢰할만한 모습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인 “충성, 곧 신뢰할 만한 믿음”으로 세상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한 교회 공동체의 성도가 된 그 순간부터 이 믿음으로 나가도록 선물로 주셨습니다. 또한 성령을 통하여 날마다 우리 안에서 그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로 주시는 믿음을 따라 옛 능력을 단절하고, 보이지 않는 증거들을 바라보며 믿음의 능력으로 당당하게 나아갑니다. 성령은 이렇게 우리 안에서 믿음으로 나가는 습관을 길러 줍니다.

우리가 성령의 도움으로 자신의 내면세계를 향하여 사랑, 희락, 화평의 마음의 습관을 이루어갈 때,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오래 참음, 자비, 양선의 행동의 습관을 이룹니다. 이러한 마음의 습관과 타인을 향한 행동의 습관을 이루어 가는 자들은 하나님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향하여 신뢰할만한 믿음, 곧 “충성”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충성을 위해 공동체의 요구를 온유함으로 받아들입니다. 또한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절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충성, 온유, 절제는 공동체를 향한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행복한 공동체 습관입니다.

성도들이 교회 속에서 세상 원리를 주장할 때 상호 충돌로 갈등이 생깁니다. 세상 방식으로 공동체를 향해 나아갈 때 다른 지체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로서, 신뢰할 만한 믿음인 충성으로 나아갈 때 그러한 갈등과 충돌은 사라집니다. 비록 처음에는 실패할지라도, 점차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습관화시키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능력을 키워주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구원의 확실성을 믿는 믿음에 뿌리를 내린 공동체를 향한 “충성의 습관”을 길러 주십니다.

성도들이 교회 속에서 악한 풍세와 비구름에 믿음으로 도전해 나가지 않으면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하기 힘듭니다. 하나님께서 신뢰할 만한 믿음으로 자신이 속한 공동체 속에서 도전하며 나가는 충성이 없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특권과 축복을 누리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이루어주시는 특권과 축복은 대다수가 믿음의 길을 통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그 믿음으로 하나님과 교회 공동체와 세상을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3. 우리의 행복한 공동체 습관은 신뢰할만한 믿음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가 나타내야 할 성령의 열매로서 “충성”은 예수님께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골 2:6-7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뿌리를 둔 믿음에 굳게 서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나갈 때 사랑과 희락과 화평의 마음의 습관이 임하며, 예수님을 향한 마음으로 이웃을 대할 때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의 이웃을 향한 행동 습관이 임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예수님께 뿌리를 둔 믿음으로 교회 공동체와 세상을 향해 나갈 때 신뢰할 만한 믿음의 모습인 충성의 열매가 공동체 습관으로 임합니다. 이러한 충성의 습관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공동체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즉 성령의 열매로서의 충성은 공동체를 향한 순종과 사랑으로 나타나는 공동체 습관입니다. 이러한 순종과 사랑은 하나님께서 신뢰할만한 충성입니다. 사람들이 신뢰할만한 충성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이러한 순종과 사랑의 신뢰할만한 충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이러한 충성의 믿음을 경험하는 교회 공동체는 더욱 더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이러한 믿음을 경험하는 세상은 세상의 능력을 뒤로 남겨두고 신실하신 하나님께로 나옵니다.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며, 그 약속대로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의 충성의 열매를 통해 교회와 세상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행복한 공동체 습관은 신뢰할만한 믿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순종과 사랑에 의해 나타나는 신뢰할만한 믿음은 곧 우리의 행위입니다. 거룩과 경건을 위해서 공동체 속에서 세상 정욕과 죄악을 끊고,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행위입니다. 거룩과 경건에 도전하는 공동체의 악과 세상의 악을 향하여 담대하게 도전하며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직접 움직여 나가는 행위입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열매인 신뢰할만한 믿음으로서의 충성을 나타내는 자로서 공동체 속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을 나타내야 합니다. 성령을 의지하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는 행위를 나타내야 합니다. 공동체 속에서 지식적이고, 경험적이며, 외형적인 행위를 나타내던 중에 겪었던 어려움들을 성령에 따른 충성으로서 치유해 나가야 합니다. 세상 풍세만 바라보며 감추어 왔던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움직임들이 성령께서 주시는 충성의 능력에 의해서 활발하게 진행되어 가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약 2:26에서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공동체를 향하여 순종과 사랑으로 나가게 하십니다. 예수님께 뿌리를 둔 순종과 사랑의 믿음으로서의 충성이 구체적인 행함으로 나타나게 하십니다. 이러한 믿음이 살아 있는 믿음이며, 하나님과 모든 사람들이 신뢰할만하며, 믿을만한 믿음입니다. 이러한 충성이 공동체를 아름답게 하며, 공동체의 모든 삶을 행복한 삶이 되게 합니다.

이렇게 행함이 있는 믿음이 신뢰할만한 믿음이며 충성이 되는 믿음입니다. 공동체에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을 나타내는 믿음이며, 세상의 모든 어려움과 핍박을 이겨가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충성의 믿음으로 사는 자들을 기쁨과 평강이 넘치도록 축복하십니다. 롬 15:13은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셨습니다. “믿음 안에서” 주어지는 기쁨과 평강을 약속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따른 행위를 위하여 일어나게 하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모든 악의 능력을 끊고 예수님께 뿌리를 둔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세상의 모든 역경 너머에 있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바라보는 소망의 능력을 주셔서 그 역경을 향해 도전해 가게 하십니다. 이러한 믿음의 행위는 공동체의 아름다움과 행복을 보장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바울은 롬 10:17에서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 더욱 튼튼히 뿌리를 내립니다. 성령은 이 말씀을 근거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게 합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순종과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는 충성은 우리의 행복을 향한 최고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뢰할만한 믿음의 충성으로 악의 능력을 끊고, 그 충성으로 공동체를 향해 나아갑시다.

4. 신뢰할만한 믿음인 충성은 공동체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서의 신뢰할만한 믿음인 충성은 공동체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그 충성의 본이 되는 세 인물을 소개합니다. 딤전 1:12에서 사도 바울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자신을 증거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부름 받은 이후 첫 사역의 출발부터 마지막 순교의 순간까지 부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의 의도대로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 충성하였습니다.

또한 히 3:5는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라고 하며 모세의 충성을 소개합니다. 모세는 장래 하나님 나라에 들어 올 우리들의 본과 거울을 만들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습니다. 비록 자신의 꿈이었던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서운한 징계를 받았음에도 느보산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보낼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 나라의 종으로서 충성하였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충성의 열매로 모세오경을 거울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히 3:6은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라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집의 아들로 충성하였다고 소개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충성하신 예수님의 충성의 결과로 우리들도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충성의 결과로 우리들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바울이나 모세나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은 공동체의 행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충성된 자의 공통적인 모습은 하나님께의 순종과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실함과 신실함이었습니다. 믿고 맡길 수 있는 신실함이 신뢰할만한 믿음으로서의 충성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믿고 그에게 이방인의 구원을 맡기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 세계를 향하여 퍼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믿고 맡기심으로써 가나안 땅이 정복되고, 우리의 영원한 거울로서의 율법이 우리 손에 쥐어졌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충성으로 인정하는 신뢰할만한 믿음의 행동화 된 외형적인 모습 몇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주인의 지시에 따라 주인의 의도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충성된 모습이었습니다. 마 24:45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인의 요구와 주인의 의도를 알고 움직이는 행동화된 믿음이 충성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지극히 작은 일 까지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입니다. 마 25:21은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라고 평가하십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이 두 달란트의 일이든 다섯 달란트의 일이든 무조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충성입니다. 교만과 불순종을 물리치고 그 지극히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불의한 재물”까지도 공동체를 위해 최선을 다하여 사용하는 것이 충성하는 것입니다. 눅 16:10-12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수고로 얻지 않은 시간, 물질, 재능, 환경 등이라 할지라도 무시하거나 낭비하지 않고 공동체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 사용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넷째는, 자기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고전 4:2는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딤전 1:12에서 바울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자신에게 직분을 맡기신 분을 신뢰하며, 그분이 믿고 맡길 수 있도록 자신이 받은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충성된 모습입니다.

다섯째는, 죽을 때까지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계 2:10은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충성에는 기간이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죽을 때까지 믿고 맡기는 분의 신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열매로서의 충성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 속에서 그들이 믿고 신뢰할만한 순종과 사랑을 행위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열매가 새로운 능력이며 악한 풍세를 뚫고 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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