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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가는 길이 바른 길입니까? ( 욘 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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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박충웅 목사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친지라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삼일 삼야를 물고기 배에 있으니라

요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40일이 지나면 하늘에서 불이 내린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회개하면 살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느웨는 이스라엘과 원수 사이였습니다. 요나는 민족 감정이 앞섰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요나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나는 은근히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랐습니다. 그가 입을 다물고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니느웨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항구에 가서 니느웨의 정 반대쪽인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어 그 배를 타고 떠납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긴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간이 지닌 가장 오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역사가 아닌 신화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오시기 전 역사의 무풍지대에 살던 요나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배짱이 좋은 사나이였습니다. 이는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입니다. 다른 말을 빌리면 꾀는 조조보다 더 하고 계산이 빠른 이기주의(Egoist)였습니다. 그는 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니느웨라는 도성은 죄가 너무 커서 앞으로 심판할 계산 속에 있는 방탕한 도시입니다. 사치스러웠습니다. 방탕했습니다. 그는 생각해 봤습니다. 이러다가 그 도성에서 정녕 피해를 받을 것을 생각하고 니느웨 도성으로 갈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는 결심했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겠다고.. 여호와의 낯은 ‘리푸네 예호와’. 이는 ‘여호와 앞’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기수를 다른 곳 다시스로 돌렸습니다. 다시스는 스페인의 옛날 무역항입니다. 일설은 북아프리카라는 말도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어느 해석을 취해도 이런 곳들은 이스라엘에서 먼 곳이기에 그곳까지 간다는 것은 극단의 도피를 뜻하고 있습니다. 그는 배를 타려고 욥바로 갔습니다. 그 뒤에 배 밑층에 내려갔습니다. 그 뒤에 바다 속에 던져 내려갔습니다. 그 뒤에 큰 고기 뱃속에 떨어져 내려갔습니다. 여기서 계산은 정확합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사람은 계속적인 내리막길입니다. 요나의 처지는 불쌍할 정도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피하면 편할 것 같지요. 요나는 배를 탔습니다. 풍랑이 일어납니다. 미친 바람은 요나가 탄 배를 그냥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것도 모르고 배 밑창에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게 사람 죽이는 것입니다. 마귀의 전법은 이렇습니다. 일시적인 평안의 낚시로 우리를 사냥하려고 합니다. 매력도 있습니다. 그럴 듯합니다. 우리의 감각을 즐겁게 합니다. 하지만 여기 무서운 독이 스며 있습니다. 요나는 모든 일이 척척 잘 풀립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일들이 잘 풀립니까? 거침이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주일을 범합니다. 십일조도 안 냅니다. 감사도 안 합니다. 세상과 어울려 삽니다. 그런데도 돈도 잘 법니다. 아들 딸 공부도 잘 합니다. 시집 장가도 잘 갑니다. 이때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Ⅰ. 사람의 생각대로 살면 위험합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배를 못 타게 하셨으면 좋았겠지요. 처음부터 태풍이 불었으면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영영 하나님을 떠났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요나의 수단과 방법은 여기서 끝납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계산의 시작입니다. 바람을 동원시켰습니다. 선원들은 자기 나름의 신을 부르며 아우성이었지요. 기막힌 광경입니다. 모든 물건을 다 던졌고 생명만 건지겠다고 몸부림이나 아직도 요나는 꿈속을 거닐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미련합니까? 선장은 이 요나를 심하게 나무랐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 모르는 이방인에게 책망을 받습니다. 제비를 뽑은 결과 그는 바다에 던져져야 할 몸이 되었습니다. 그때야 양심의 가책이 시작됩니다. 그는 바다 속에 던져져 고기 뱃속 사흘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 교육이 정말 멋이 있습니다.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거기서 요나가 항복한 것입니다. 요나는 여기서 크게 기도합니다. 회개를 겸한 감사였습니다. 고기 속에 간 것도, 거기서 산 것도 이적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크게 배워야 합니다. 사람의 간교한 꾀나 재주가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스스로 위대한 거인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이 하나님 역사 앞에 설 자리가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 반항아 요나도 한마디로 인류의 대변자 같습니다. 그는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은혜도 받았습니다. 사명감도 있었기에 가장 죄 있는 니느웨로 가라 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요나는 칭찬 받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누가 봐도 나무랄 곳이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고집과 재주가 요나를 여지없는 역사의 배신자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는 비극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범죄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질서에 도전장을 냈습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큰 고기 뱃속에서 사흘 간 교육받은 것으로 끝은 납니다. 그가 볼 땐 이유 있는 반항인지도 모릅니다. 요나의 생각에는 당연하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소요리 문답에 죄란 무엇입니까? “죄란 하나님의 법에 복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어기는 것입니다.”(요일 3:4, 롬 4:23, 4:15, 약 2:10, 4:17) 죄의 정의를 잘 알아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나에게 대한 하나님의 처사가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 됩니까? 사명자에 대한 지나친 망신을 주신다고 생각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요나가 깨달아야 합니다. 니느웨의 생명을 살려야 합니다. 선지자가 생명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길을 걷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아프게도 하십니다. 때로는 낭패를 당하게도 하십니다. 그래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 때는 강도를 좀 더 높이십니다. 그런 아픔을 통하여 깨닫게 하십니다. 요나는 그렇게 많은 훈련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요나는 스스로의 잘못을 알았습니다. 이렇게 태풍이 분 것은 다 내 탓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나를 빨리 미친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당신네들이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드디어 불신자에 의해 바다에 던져집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은 남아 있습니다. 큰 고기를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고기가 통째로 삼킨 것입니다. 씹지 않고 꿀꺽 삼켰습니다. 그래서 그가 살았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방법으로라도 그의 역사를 이룹니다. 요나는 고기 뱃속에서 비로소 기도가 터져 나왔습니다. 회개했습니다. 보십시오. 모세가 애굽의 40년을 화려하긴 했으나 살인자 밖에 못 되었습니다. 그의 쓸쓸한 미디안 광야 40년은 초라하긴 했으나 사명자로서의 교육을 톡톡히 받았습니다. 다니엘도 역시 그의 이스라엘의 소년 시절은 평탄하긴 했으나 사자굴 속 하룻밤에 짜릿하게 하나님의 사랑을 뼈 속 깊이 체험했습니다. 사울의 젊음은 거만과 완전에 가까운 율법주의로 만족했으나 아라비아 광야 3년의 수업이야말로 사울이 바울 되게 했습니다. 이들에 비하면 요나는 참으로 짧은 사흘 만에 모든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Ⅱ. 빨리 돌아서야 합니다.

참 훌륭한 고기 뱃속의 졸업장을 받고 사명의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여기까지 몰고 와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나는 깨달았기에 악명 높은 반역자의 누명을 벗을 수 있었습니다. 일면 감사한 일입니다. 사실은 요나의 고기 뱃속에선 순수한 진실만이었습니다. 이것저것 지저분한 과거를 모두 청산 했습니다. 이젠 그는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맘속에 타는 불꽃은 아무도 끌 수 없었습니다. 그는 거센 파도보다 더 강한 용기가 용솟음쳤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갖는 전통적인 기질의 사람 요나는 다른 어느 곳에서 배울 수 없는 학업을 고기 속에서 수련했습니다. 회개하기 전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는 변했습니다.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사실 “회칠한 무덤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죽어가는 니느웨 인간을 위해 인간 편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혁명가였습니다. 그는 홰기를 외치셨습니다. 십자가를 전하신 것입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이중인격자 바리새인을 엄히 나무라셨습니다. 주님은 당시 사회에서 버림받은 세리나 창기의 벗이었습니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는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주님은 당시 지도층 사람들에게는 눈의 가시였으나 죄인 사랑에는 기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무지를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의 귀한 생명을 포기하면서 인간을 사랑하신 사죄의 초청인이었습니다.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진리를 전파하신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요나는 특별한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과 다릅니다. 그는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입니다. 그는 빨리 니느웨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는 다시스라는 정반대편으로 도망가고 있습니다. 이런 고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무시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러고도 배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태풍이 일어 사람이 죽게 된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나 엉뚱한 사람이었습니까?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그냥 두실 리가 없지요. 그는 깬 것입니다. 사실 인간은 마귀 앞에 인형처럼 조롱 당하고 있는 니느웨인을 무시한 요나를 톡톡히 훈련시켰습니다. 사랑의 피는 완전 식어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송장들의 행렬을 보고도 애처로움이나 사랑을 줄 줄 모르는 차디찬 사람입니다. 사랑의 체온은 상실했습니다. 그는 과연 누구의 영광을 위해 다시스로 가고 있습니까? 니느웨 저녁노을을 등진 요나가 평탄할 줄 알았다면 너무나 하나님을 얕잡아보는 미련꾼입니다. 그는 니느웨의 저녁 노을이 벗긴 이 마당에서 인간의 썩는 냄새를 능히 맡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이 사랑을 대신했습니다. 순간의 편안함을 위해서 니느웨의 죽어가는 것쯤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불행한 나라 유대에 태어나셨습니다. 메마른 땅에 비좁기 그지없습니다. 대낮이면 너무 더워 개와 벌레 외에는 움직이지 않는 300만 도성에 태어나셨습니다. 이들을 위해 이 인간의 비극을 위해 지신의 전부를 희생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방법은 이렇습니다.

맺는 말 :

이것이 사랑의 정신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나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고의적으로 피했으니 될 말입니까? 보십시오. 요나는 늦게나마 고기 속에서 3일을 톡톡히 기도했습니다. 사람은 여기서 미련한 추태를 보이고 있습니다. 매를 맞기 전에 스스로 갔으면 다들 좋을 뻔 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매 맞기 전에 깨닫는 것이 축복의 지름길입니다. 오늘 사회도 한가집니다. 1,2차 세계 큰 전쟁을 통해 인간의 터전은 완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세계인은 퓨리탄 신앙으로 돌아왔습니다. 보십시오. 두 번째 세계 전쟁 때 미국의 B29가 원자탄 싣고 일본 항공을 누빌 때 일본인은 대창을 들고 맞겨뤘습니다. 이길 수 있습니까? 불가능하지요. 안 되지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 이런 식입니다. 전혀 불가능합니다. 순순히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이 최상의 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는 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러 가지의 교훈을 얻어 봅니다. 이것이 축복받는 길인 것입니다.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가는 새 운동입니다. 요나는 지름길을 두고 둘러갔습니다. 처음부터 니느웨로 갔어야지요. 거기 10만이 넘는 죽어가는 영혼이 있습니다. 그는 자기 원수의 나라 앗수르가 망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선지자로서는 절대 생각해서 안 될 일이지요. 그는 엉뚱한 데로 갔습니다. 망신 당하고 죽을 고생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늘 주안에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2005.5.15 -충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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