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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례, 옛사람의 장례식 (롬 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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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장빈 목사 (2005.5.1)

# 1
세례(洗禮)라는 단어, 씻을 세(洗) 자에 예도 예(禮)자를 쓰는데요, 직역하면 세례란 <씻는 예식>입니다. 여기선 <씻는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세례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은 <기독교에 입교 하는 사람에게 모든 죄악을 씻는 표시로 베푸는 의식>이라 합니다. 그러고 보니 씻어내는 대상이 우리의 죄악이군요. 그렇습니다. 세례란 나의 죄를 씻어내고 새롭게 거듭나는 예식이요, 해서 신앙요리 문답에서 배운 대로 정리하자면, <세례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회개하는 자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로써 베푸는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교인이란 복음을 믿는 자요, 이미 자기 죄를 회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늘 주신 본문 로마서 6장 1절을 보니, 사탄이 바울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며 끝까지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던 사탄의 무리들인데요, 저들의 공박을 들어봅니다. / 6:1 / (읽기) / 거기 <그런즉>이란 첫 단어는 5장 20절을 받는 접속산데요.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그런즉!> 무슨 뜻인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면, 다시 말해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면,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를 더 많이 지어야 한다는 말 아니냐는 거지요. 정말 악질적이고 이단적인 비난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단호했습니다. 바울의 대답을 들어봅니다. / 6:2 / (읽기) /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 어찌 죄 가운데 남아 죄를 지으며 살 수 있느냐는 겁니다. 명쾌합니다. 분명합니다. 단호합니다. 타협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6장 2절에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이 있으니, 한 문장 안에 두 가지 시제가 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먼저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라는 문장은 과거 시제입니다. 이미 죽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문장,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는 미래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는 그렇게 살 수는 없다는 거지요. 과거에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으니, 이젠 새로운 미래를 살아야지, 어찌 죽은 과거 속에 매몰되어 미래까지 죽이려 하느냐는 거지요. 해서 사도 바울이 우리를 향해 하는 말,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라는 겁니다. 우린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 2
로마서 6장에서 주목을 끄는 또 하나의 단어가 있으니, 바로 <우리>라는 1인칭 복수 대명사입니다. 1절에 우리, 2절에 우리, 3절에 우리, 4절에 우리, 5절에 우리, 계속해서 <우리>라는 주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인가? 너와 나는, 남이 아니라 <우리>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 우리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 이젠 더 이상 죄 가운데 살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요, 더욱 인상적인 대목은 <우리>를 주어로 하는 구절들의 서술어가 크게 둘인데, 하나는 <죽었다!>요 다른 하나는 <산다!>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다시 산다! 우리는 함께 죽어 함께 사는 존재다! 너 죽고 나만 사는 길은 없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우리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주와 함께 같이 죽고 같이 사는 존재, 바로 우리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살기 위해서 먼저 죽어야 한다는 거군요. 제대로 죽어야 제대로 살 수 있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잘 죽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무엇에 대하여 잘 죽어야 한다는 건가?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에 대하여 잘 죽어야 영생을 누리며 행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감사한 것은 죄에 대해 잘 죽을 수 있는 길을 하나님께서 친히 열어주셨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 받은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입니다. 뒤집으면, 세례교인이 된다는 말은, 죄에 대해서 확실히 죽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명령형으로 바꾸면, 세례를 받았느냐? 그렇다면 죄에 대해서 확실히 죽어달라는 겁니다. 그래야 제대로 살 수 있다는 겁니다.

# 3
그렇다면 우리를 죄에 대하여 죽이시고, 새로운 존재로 세워주신 목적은 무엇일까? 그 답이 6절에 나오는데요, 함께 읽으며 다시 확인합니다. / 6:6-7 / (읽기) / 거기 옛 사람, 표시하시고, 죄의 몸 표시하시고, 그렇습니다. 세례란 옛 사람, 곧 죄의 몸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입니다. 왜? 6절의 맨 끝 부분,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해 주시려고! 아멘! 그렇습니다. 내 안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죄의 몸을 멸하게 해 주신 이유, 다시는 죄의 종노릇하며 살지 않게 해 주시려는 지극한 사랑이요,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해 주시려는 아버지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 내 생애 최고의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우리 모두가 다 잘 알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6절의 첫 문장처럼, 우리가 알거니와, 그렇습니다. 우리가 모르지 않습니다. 알아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세례를 통하여 죄에 대하여는 완전히 죽은 존재이며, 그러므로 이젠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살지 말아야 하고, 오직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사는 자가 많다는 데 있습니다. 알면서 죄를 청산하지 못하고, 알면서 여전히 죄 가운데 있으니, 저들을 바라보는 사도 바울의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던 것이지요. 해서 바울은 거듭 반복하여 강조하며,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해 주셨던 것인데요, 여기서 다시 바울의 간절한 호소를 들어봅니다. / 6:3 / (읽기) / 거기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라는 표현에 주목하십니다. 2절의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를 부연 설명하는 말이지요, 세례, 물로 씻는 예식이라 했는데요, 종합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씻어 정결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거지요.

그런데 3절 후반부를 보니,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곧, 그 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그 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는 말, 이런 뜻인데요, 함께 확인합니다. / 로마서 5:10-11 / (읽기) /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린 죄에서 벗어나 다시 아버지와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해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즐거워하게 된 것입니다. 가정을 생각하는 달, 주 안에서 즐거움이 넘치는 행복한 가정, 천국 가정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시 6장 3절로 오시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합니다. <알지 못하느뇨?> 요즘 우리말로 번안하면 이렇게 됩니다. <다 알면서 왜 그래?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 다신 죄 가운데 살지 않는다는 것 알면서 왜 그러는 거야? 이젠 그만 해!>

그러면서 4절에서 놀라운 말씀을 주십니다. / 6:4 / (읽기) / 예수와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 그 분과 함께 장사 된 것이다! 한 마디로 세례란 옛 사람의 장례식이라는 겁니다. 6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주셨지요.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못 박혔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 이제 그 분 안에서 철저히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세례란 옛 사람의 장례식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이제 새로운 인생, 거룩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해서 세례를 받은 우리, 다시는 죄짓지 말아야 합니다. 사탄이 와서 내 목에 칼을 들이대고 <내 말대로 죄를 지을래? 아니면 지금 죽을래?> 양자택일을 강요할 땐, 주저하지 말고 지금 죽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럼요, 죄를 지으며 구차하게 살다가 결국 지저분하게 죽는 것보다, 지금 죄 짓지 않고 영광스럽게 죽는 쪽이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 아니, 잘 죽어야 잘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죄의 권세가 만만치 않다는 데 있습니다. 죄의 유혹이 만만치 않다는 데 있습니다. 사탄의 간계가 홀홀하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해서 사도 바울도 여러 말씀으로 반복해서 강조했던 것이요, 또한 사도 자신도, 주 안에서 날마다 죽노라! 고백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특히 오늘 세례를 받고 세례 교인이 되실 여러분, 이제 날마다 나 스스로에게 이렇게 외치시기 바랍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다!> 그럼요, 오늘 우린 나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을 것입니다. 이제로부터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계신 주께서 사는 것입니다. <나는 죽었어, 죄에 대하여 죽었어. 이젠 주님이 내 안에 사시는 거야!> 그렇습니다.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 4
여기서 4절 말씀을 다시 봅니다. / 6:4 / (읽기) / 우리는 그 분의 죽으심,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았고, 하여 죄로 물든 옛 사람은 그 분과 함께 장사 되었는데요, 이렇게 해 주신 중요한 이유와 목적이 있으니, 4절의 끝 부분인데요,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아멘!

거기 중요한 표현,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표시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게 하시고, 죄로 물든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장사 지내게 해 주신 하나님의 마음, 알고 보니 새 생명 가운데 새로운 존재로 살게 해 주시려는 지극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죄에 머물 수 없지요. 그러니 그 어두운 거리로 되돌아갈 수 없지요. 우리 앞에 새 생명의 길이 열렸는데, 이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는 데, 여전히 죄와 노작거릴 하등의 이유도 여유도 없는 거죠.

또 하나 잊지 말 것은, 그런데, 이렇게 죽어서 사는 세례교인의 궁극적 목적이 있으니, 4절 한 가운데 있는 표현, 바로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라는 점입니다. 중요합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인생의 제일가는 목적이지요.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도 아버지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우리로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해 주심도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사나 죽으나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해야 하며, 그러므로 영광을 가리는 죄와는 이제 더 이상 가까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 4절에 주목해야 할 중요한 단어 둘이 있습니다. 앞부분의 <죽으심>과 뒷부분의 <살리심>입니다. 서로 대칭되는 두 단어인데요, 그런데요 꼼꼼하게 따져 보면, <죽으심>에 정확하게 대칭되는 표현은 <사심>입니다. 높임말을 빼서 죽으심을 <죽었다>로 바꾼다면, 이 말의 대칭되는 표현은 <살았다>가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죽었다, 살았다> <죽으심, 사심> 그런데 <사심>이란 표현 대신 여기 4절에선 분명히 <살리심>이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살았다>가 아니라 <살렸다>로 표현한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답은 간단합니다. <죽으심>이란 우리 예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선택하셨다는 뜻이요, <살리심>이란 예수님이 스스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주셨다는 겁니다. 압축해서 표현하면 아들은 죽었고, 아버지는 살리셨다는 거지요. 그랬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스스로 죽음의 길, 십자가의 길을 선택했던 것이요, 아버지는 그 아들을 다시 죽음에서 건져 살려주셨던 것입니다. 아들은 죽었고, 아버지는 살리셨습니다. 아멘!

그런데 문제는 자꾸 내 속의 내가 다시 살아나 새 생명의 길로 가지 못하도록 방해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죽어 장사 지낸 줄 알았는데, 내 안의 옛 사람이 또 살아나 나를 방해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죽긴 왜 죽어? 너 바보 아냐? 넌 가서 저 선악과만 따 먹으면 돼!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니까! 이 바보야, 왜 죽어? 죽지 마! 넌 살 수 있어!>

정말 안타까운 사실은 세례를 받은 성도들 가운데도, 여전히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영광은 쓰레기통에 쳐 박고 자기 살 궁리만 하는 거지요. 인간적 욕심에 눈이 멀러 자꾸만 죄를 더하게 되는 거지요. 그러나 그 욕심이 모든 죄의 근본인 것을,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낫고, 죄가 장성하여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을, 그렇게 죽으면 영원히 죽는 것을 모르고 그렇게 아등거리니, 정말 안타까울 뿐이지요.

사탄이 우리 마음에 넣어주는 나쁜 생각 중에 하나가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해서 믿음의 없거나 약한 분들, 특히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분들, <너 죽인다!>는 말에 그렇게 벌벌 떱니다. 그 두려움의 순간을 이기지 못하고 평생 쌓아 온 모든 것을 포기하고는, 그저 사탄이 하라는 대로 별짓을 다합니다. 왜 죽음, 곧 사망 권세를 이기는 부활의 힘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을 확실히 믿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믿음이 강한 성도, 주님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고, 이제 새 생명 가운데로 행하는 주의 백성, <너 죽인다!>는 공갈 정도에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대신 부활에 대한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담대하게 말합니다. <그래? 한번 죽여 봐라!> <나는 나의 몸만 죽일 뿐인 너의 칼은 두렵지 않다, 내가 두려운 분은, 오직 나의 영혼까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내 아버지 하나님 한 분 뿐이다!> 믿음을 가진 우리 성도들의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세례식을 통하여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사탄에게는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말로 꼬여도 사탄의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탄이 소개한 악한 동무하고는 같이 놀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다 준다 해도, 사탄의 유혹에는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 마디면 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믿음은 반석이라 했습니다. 반석은 흔들리지 않는 법, 그러므로 흔들리는 건 믿음이 아닙니다. 그럼요, 믿음의 사람, 작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절대로 유혹에 흔들리지 마시고 말씀 위에 견고하게 서시어 오직 주의 일에 더욱 힘쓰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 언제 죽을까를 염려하며 오늘을 망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다시 말해 일사각오로 주의 일에 힘쓰는 겁니다. 우리, 오늘 밤에 죽을 지도 모릅니다. 내일 죽을 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언제 불러 가실지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 조금이라도 힘이 남아 있을 때 주의 일에 힘쓰는 일입니다. 그렇게 살아생전 숨쉬며, 오직 새 생명 가운데 행하며, 주의 일 열심히 하다가, 죽어 세상 떠날 때 만세 반석 열린 곳에 다 들어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 5
감사한 것은 이렇게 주와 함께 사는 자들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신다는 점입니다. / 6:5 / (읽기) / 거기 <연합한 자>라는 단어에 표시하십니다. 두 번 반복되었군요. <연합한 자, 연합한 자!> 자, 우리는 누구? <연합한 자!> 나는 누구? <연합한 자!> 누구와 연합한 자?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그렇습니다. 세례를 받은 나, 이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입니다. 가장 큰 축복이지요.

거기 <연합한>이란 헬라어 단어는 <접목된>이란 뜻입니다. <연합한 = 접목된!> 접목(椄木)이란 단어, 한자로 써보실까요? 접붙일 접자에 나무 목자를 쓰지요. 그러므로 <연합한>이란 단어는, A라는 나무가 B라는 나무에 접목되어, 마침내 둘이 하나 되어 한 나무가 되듯, 그렇게 하나로 연합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와 하나입니다. 할렐루야! 가장 높고 원숙한 신앙의 경지이지요. 참으로 놀라운 고백인데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고백이요. 내가 주 안에 거한다는 고백이요. 해서 나와 그리스도는 하나요,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라는 고백인 것이지요. 아멘!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라는 말은 엄청난 축복의 선언입니다. 왜? 죄인인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 되어, 이젠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젠 그리스도와 나, 나와 그리스도, 결코 둘이 아닙니다. 나와 주님은 하나입니다. 해서 사도 바울, 이젠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고백했던 것입니다. 내가 주 안에! 주님이 내 안에!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 버렸습니다. 누구와 함께? 나의 주, 예수님과 함께!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나의 옛 사람, 곧 죄의 몸이 십자가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시려고, 주님의 몸과 나의 몸을 강한 끈으로 묶어 놓으셨군요. 우리의 상상력이 필요한 대목인데요, 주님의 몸과 나의 몸을 하나로 묶어 주는 끈이 어떤 끈? 바로 사랑의 끈! 죽음에서조차 나와 주님을 하나로 묶어준 끈, 사랑의 끈, 해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지요. / 8:35 / (읽기) / 그렇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는 없습니다.

존경하는 여러분! 이제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닙니다. 나의 옛 사람은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습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하여 완전히 새롭게 태어난 새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제 다시는 죄의 종노릇하지 마시고,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아름다운 인생, 해서 날마다 새로운 사람으로 싱싱하고 행복한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 6:11 / (읽고 기도로 마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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