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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자녀 교육을 위한 성경의 권면 (눅 2:4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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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김양인 목사
 
언제부턴가 우리는 5월을 가정의 달로 지킵니다. 아마도 이 달에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을 붙였다고 봅니다 마는, 5월을 가정의 달로 정한 것은 우리 모두에게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사회나 개인이 모여서 사회를 구성하지만, 기실은 가정이 모여서 사회를 이룬다고 하는 편이 옳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은 가정에 속해 있을 때 비로소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이 없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새와 같아서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지탱하는 시민의 본분을 올바로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반면에, 원만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사람은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해 나가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특히, 자녀 교육은 모든 부모들이 지대한 관심을 갖고 힘쓰면서도 늘 아쉬움을 갖는 분야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저는 어린이주일을 맞이해서 성경에 근거해서 바람직한 자녀 교육을 위한 방안을 말씀해 드림으로 피차 유익을 얻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성도님들의 자녀들을 신앙으로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예로부터 한국의 부모들이 자녀를 교육할 때 본보기로 삼아 온 사람이 있는데, 맹자의 어머니가 그 사람입니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이라는 고사(古事)가 말해 주듯이,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교육환경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간파했던 선각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녀들을 맹자처럼 키우지 말고 예수님을 닮도록 키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완전한 사람의 본보기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사람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분이십니다(고후 4:4).

예수님처럼 인격적으로 온전하신 분은 없고, 예수님처럼 인간적인 분도 없으십니다. 예수님처럼 지혜롭고 정직하시며 공명정대하신 분은 없으십니다. 예수님처럼 사랑이 많으시고 사람들의 연약함을 깊이 동정하신 분도 없으십니다. 저는 복음서를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완전하신 인간성을 대하면서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전지전능하신 신성을 갖고 계셨지만, 그와 동시에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사람이셨습니다.

지금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닮게 하려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이 아닌 인성입니다. 만일 우리의 자녀들이 예수님의 인품을 닮는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인격자가 되겠습니까! 이를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은 자녀들을 어려서부터 신앙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자녀가 되도록 교육하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누가복음 2장에는 예수님의 소년시절에 있었던 일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 두 살 되시던 해에 예수님께서는 유월절에 부모와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명절 기간이 지나자 사람들이 제각기 고향집으로 돌아가는데, 예수님은 그 부모와 함께 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남으셨습니다. 그 부모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동행중에 있는 줄로 알고 하룻길을 간 후에야 예수님을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발걸음을 돌려서 예수님을 찾으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 들어갔더니 예수님이 선생들 중에 앉아 선생들과 더불어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는데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 부모는 예수님을 보고 놀랐습니다. 마리아가 소년 예수님에게 말하기를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명절을 지키고 집에 돌아가는데도 혼자 성전에 남았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또 성전에서 성경학자들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토론할 만큼 성경지식이 탁월하셨습니다.

한국인들은 교육하면 지식 교육이 전부인줄로 생각합니다. 말로는 전인교육, 인성교육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정작 학교에서는 지식 교육에만 치중합니다. 그렇다고 가정에서 인성교육을 시키는 것도 아닙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침 일찍 등교해서 늦은 밤에 돌아오는 자녀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힘들 정도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자녀들은 그저 지식을 습득하여 좋은 점수를 얻는 데만 급급할 뿐,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놓고 사색하는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신 이웃들처럼 자녀들을 교육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저들과 다른 교육 원칙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키우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신앙교육입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게끔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됩니다.

신앙교육의 기본은 예배생활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모든 일에 우선해서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기를 “4)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5)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9)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고 했습니다.

부모만 하나님을 잘 섬기면 되는 것이 아니고, 자녀들도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학교 갈 때나 어디 나들이 갈 때보다, 교회 갈 때 제일 좋은 옷을 입혀서 보내십시오.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니까 깨끗하게 단장을 해야 한다고 가르치십시오. 헌금을 줄 때에도 구겨진 것이 아니라 가장 새 돈을 구별해 두었다가 주십시오. 이런 일이 비록 작은 것 같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기본적인 자세를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주일날 오라고 하면 담임선생님을 찾아가서 기독교인이므로 예배를 드리고 등교하겠다고 이야기해서 승낙을 받아야 합니다. 종교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권리이므로 반드시 예배생활의 자유를 허락해 줄 것입니다.

아무리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최우선이고 다른 일은 그 다음에 해야 한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가르치고 본을 보이시기 바랍니다. 이리하여 성도님들께서 자녀들의 신앙교육에 성공하신다면,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앞길을 열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삭과 요셉과 다윗과 다니엘과 또 그의 세 친구를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같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잘 섬겼던 사람들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항상 저들과 함께 하시면서 모든 재난으로부터 지켜주셨고 모든 사람 위에 뛰어난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이 땅에서 형통한 삶을 누리게 하셨던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능력만 의지해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힘입어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시고 지혜가 되시며 인생의 인도자가 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경외할 때 이 땅에서도 형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장 6절로 7절에 “6)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자녀들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도록 어려서부터 신앙으로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셔서 이 땅에서 형통하게 됨은 물론이요 하나님 나라에 쓰임 받는 그릇으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도님들의 자녀들에게 순종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이 타락한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담에게 “16)…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고 하셨으나,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그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불순종이 이처럼 무서운 죄가 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패망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명을 불순종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말렉 족속을 쳐서 사람들과 가축을 다 멸하라고 하셨으나 사울은 아각 왕을 살려두고 살진 소와 양들을 살렸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그 이유를 묻자, 사울은 변명하기를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그에게 사무엘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고 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을 불순종하다가 결국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었으며, 그의 왕위는 순종의 사람인 다윗에게 돌아갔습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잘 섬겼을 뿐 아니라, 부모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터에 나간 형들을 찾아갔다가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이 나와서 이스라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이 감히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독하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전쟁터에 나가본 경험이 전혀 없는 일개 목동이 물매와 막대기 하나 가지고 용맹한 골리앗을 향하여 달려 나갔던 것입니다. 누가 보아도 다윗은 골리앗의 적수가 되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니 단 한번 물매질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요셉도 하나님을 잘 섬겼을 뿐 아니라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먼 지방에서 양떼를 치는 형들에게 심부름을 보냈을 때 그는 순종했습니다.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자손의 지도자가 되었던 여호수아 역시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순종의 사람들입니다. 이는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 50절에 보니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셨습니다. 순종은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할 뿐 아니라, 육신의 부모를 기쁘게 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성공하는 것을 볼 때 기뻐하지만 그 보다는 자녀가 순종할 때 더욱 기뻐합니다. 에베소서 6장에 “1)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3)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매달 부모에게 생활비나 용돈을 드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부모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드려 부족함이 없게 해 드릴지라도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효를 행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순종을 가르쳐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가르치고, 그 다음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되 주 안에서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을 올바로 배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도 소중히 여김을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순종을 배운 사람이 어디서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정당한 권위에 순종할 줄 모르고 반항하는 사람은 절대로 리더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면 어려서부터 순종을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성도님들의 자녀들에게 이웃을 사랑하도록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안고 있는 병폐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야 어찌되든지 나만 잘 되면 된다는 사고방식이 팽배합니다. 법이 있어도 지킬 줄을 모르고, 어딜 가나 질서를 지키려 하지 않습니다. 국민소득만 높다고 선진국이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국민들의 질서의식이 바로 서지 않으면 아무리 소득이 높아도 후진국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질서를 지키고 남을 배려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나만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잘 사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지금과 같은 교육방법으로는 가망이 없습니다. 성경에 입각해서 자녀들에게 이웃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재산이 많은 부자는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 회장이라고 합니다. 그의 재산은 4백60억 달러로서 한화로 약 54조원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빌 게이츠는 세계에서 가장 부자일 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자선을 많이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최근 5년간 2백29억 달러를 보건. 교육 분야 등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이 같은 기부금 액수는 그의 전 재산의 절반이 넘는 규모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부인과 함께 에이즈 퇴치 운동을 비롯해서 각종 자선 활동을 몸소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는 돈만 벌줄 아는 사업가가 아니라, 번 돈을 쓸 줄도 아는 멋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이웃 사랑의 정신입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재화의 양은 무한한 것이 아니고 한정되어 있습니다. 내가 많이 가지면 다른 누군가는 적게 갖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재화를 갖고 있으면 많은 사람이 곤궁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때 그 책임을 추궁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있는 모든 물질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은바 물질을 가지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이웃에게 선을 행하지는 아니하고 자기를 위해서만 사용한다면 반드시 그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재산가라도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부르시면 빈손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단 돈 한 푼도 갖고 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재산을 모을 줄만 할고 선한 일에 쓸 줄 모르는 사람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묻기를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가 대답하기를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유대 사회에서 지도층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외면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다가가서 응급처치를 해 주고 나귀에 실어 주막에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습니다. 또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그 사람을 돌보아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사실인즉,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은 동족이지만, 사마리아인은 그와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평소에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인으로 여겨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그가 유대인인가 사마리아인인가를 따지지 않고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이웃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의 자녀들을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도록 교육하시기 바랍니다. 자기만 생각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배려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먼저 다른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줄 때, 그들도 나에게 이웃이 되어 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려고 하면 그들도 나를 이용해 먹으려고 들 것입니다. 그래서는 진실한 인간관계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십시오.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으며, 마음 상한 자들을 위로하시고, 죄책에 사로잡힌 자들에게 용서를 주셨고, 배고픈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드디어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달려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힘이 있습니다. 경제력 또는 금력(金力)이 있는가 하면, 정치적인 힘 곧 권력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이 있듯이 공부를 많이 하면 지력(知力)을 갖게 됩니다. 육체의 힘이 센 것을 완력(腕力)이라고 합니다. 이 외에도 여러 종류의 힘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한 힘은 사랑의 힘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의 자녀들이 사랑의 능력을 갖추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자녀들은 항상 어린 것이 아니고 하루가 다르게 몸도 마음도 자라갑니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부모의 곁을 떠나 자기의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부모는 그 때까지 자녀들을 양육하는 책임을 맡은 것입니다. 새끼 새가 어미에게서 날개 짓과 먹이 얻는 법을 배우면 훌훌 날아가듯이, 자녀들이 제 힘으로 이 세상을 떳떳하게 살아가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따라서 자녀 교육의 원칙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인정받는 신앙인으로 키우십시오. 하나님께 순종하고 정당한 권위에 순종하도록 가르치고,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양육하십시오. 그리할 때 성도님들의 자녀들이 하나같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꾼이 되고, 이 사회를 유익을 끼치는 삶을 살게 되므로 부모에게 기쁨을 주며 면류관이 되는 자녀들이 될 것입니다.

그 날이 되기까지 성도님들의 자녀들이 예수님을 닮아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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