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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자녀로서의 다윗 (삼상 16: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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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서해원 목사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물리학자중에 데이빗 브루스터 (David Brewster)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스코트랜드 출생의 이 사람은 원래 신학을 공부하여 성직자가 되려고 했으나 일찍부터 자연과학에 흥미를 가져 이 부분에 세계적인 학자가 되었습니다. 1859년에 에딘버러대학의 총장을 지냈고, 에딘버러 사전과 브리테니카 백과사전의 편집자로 활동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그가 발명한 작품 때문입니다. 바로 ‘만화경’이란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서 한번쯤은 접해 보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만 이것은 3개의 거울로 만든 원통에 작은 색종이를 넣고 빙글빙글 돌면서 들여다보는 기구입니다. 그러면 안에서 거울의 반사에 의해 다양한 무늬가 변화하며 많은 상과 갖가지 아름다운 모양을 나타냅니다. 같은 모양은 다시 나타나지 않고 계속적으로 변화(變化)하기에 이름을 ‘만화경’ 영어로는 ‘kaleidoscope’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만화경이 나오면서부터 서구사회에서는 어떤 한 사람의 다양하게 변화하는 모습과 형태의 삶을 이것으로 표현합니다.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인생을 가리킬 때 ‘the kaleidoscope of life' 라고 말하는데, 사람이 살면서 다양한 형태의 모습을 본다는 의미로 이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는 다양하게 변화하는 형태로 우리의 인생을 나타냅니다. 한 사람에게 붙여지는 직함이 많고, 모습이 많다는 것입니다. 안과 밖에서의 모습, 교회와 세상에서의 모습, 가정과 사회에서의 모습, 나이가 점점 들어 가면서의 모습, 어떤 일이 주어졌을 때의 모습 등 그야말로 만화경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런 다양한 모습을 통해 인생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양한 모습 속에 어떤 한 가지도 소홀하거나 부끄러움이 없이 잘 감당한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성경에서 가장 모범적인 인물이 바로 ‘다윗’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성경이라는 무대에 처음 등장하면서 사라지기까지 성경은 그의 삶을 만화경처럼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한가지도 그는 소홀하지 않았고, 뒤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위대한 인물이라고 봅니다. 이런 사람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특히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가정과 관련하여 나타난 그의 다양한 모습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그가 자녀로서 보여준 모습입니다. 자녀로서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첫째, 순종하는 아들입니다. 본문은 다윗이 처음 성경에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성경은 비교적 그의 가정을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이새였습니다. 이새의 가정에는 아들 8명과 딸 2명, 모두 합해서 10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다윗은 아들로서는 막내였습니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다윗에게 어느 날 큰 일이 생깁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이새에 방문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왕을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새는 장남인 엘리압부터 그 앞에 세웠습니다. 사무엘은 그의 잘생긴 외모와 준수함에 그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으로 보느니라’ 깜짝 놀란 사무엘은 그를 물리쳤고, 다시 둘째아들인 아비나답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도 아니라는 음성을 들은 뒤에 셋째 아들인 삼마를 비롯한 7명 의 아들이 다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모두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새에게 또 아들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이새는 막내가 남아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그 아들을 데려오라고 하였고, 사무엘은 막내인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한번 사무엘의 관점이 아니라 다윗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도 그날 가정에서 어떤 일이 있을 것인가를 알았습니다. 자기를 비롯한 형제가운데 기름을 붓는 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들 8명이 모두 속으로 한번쯤은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모든 아들이 다 집에 올 수는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양을 지켜야 했습니다. 아버지 이새는 그 일을 다윗에게 맡겼습니다. 이새의 마음에는 다윗은 막내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왕의 자리에서 먼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새는 다윗에게 ‘너는 아닐 것 같으니 가서 형들을 대신하여 양을 지키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말을 들었을 때의 다윗의 심경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도 아들입니다. 사무엘을 보고 싶었을 것입니다. 호기심은 많은 다윗에게는 더욱 궁금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들에 나가라고 말합니다. 위의 형들보다 더욱 민감했던 나이였던 다윗은 얼마든지 반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불평하지 않고 아버지의 말을 듣습니다. 이것이 다윗을 보면서 우선적으로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다윗의 순종의 모습입니다. 자녀로서 다윗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다윗은 아버지의 명을 받고 전쟁터에 나간 형들에게 양식을 주기 위해 가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그는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 순종에서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자녀가 부모에 대한 태도로서 순종, 공경을 강조합니다. 십계명에서도 사람과의 관계에서 우선적인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이것을 더욱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우리 주님께서도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한 삶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주님은 십자가의 처절한 순간에도 그 밑에서 울부짖는 어머니를 잊지 않았고,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겼습니다. 이 모두는 바로 순종의 모습입니다. 자녀로서 부모에게 대한 순종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순종의 세대입니다. 모든 것의 불순종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성경은 이것이 말세의 한 징조라고 강조합니다.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부모를 거역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런 일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독하게 불순종합니다. 파렴치하게 거역합니다. 청개구리의 이야기는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시대에 사는 우리 신앙인에게 자녀로서 꼭 필요한 것이 순종, 공경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가 되시기 바랍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가 남편과 아내에게도 순종합니다. 그런 사람이 물론 하나님께도 순종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복을 주십니다. 다윗이 크게 될 수 있었던 우선적인 요인이 바로 순종에 있었습니다. 거기에서부터 복이 임했던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자기 일에 충실한 자녀입니다. 본문을 보면서 가장 감격스럽고 감동하게 만드는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11절의 말씀입니다. 여기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에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우리는 이 말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당시 정황을 한번 마음에 그려보십시오.

  다윗은 사무엘이 온 것을 알았습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도 알았고, 제사가 끝나면 어떤 일이 있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양을 치고 있습니다.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인들 왜 집에 가고 싶지 않습니까! 모두가 존경하는 사람을 왜 만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까! 다윗은 아직 소년입니다. 자기를 그곳에 묶어둔 불만으로 비뚤어지기 쉬운 나이였습니다. “내가 만약 장자로 태어났더라면, 아버지는 왜 나만 여기 쓸쓸한 곳에 두는가, 아무도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구나...” 이런 마음이 충분히 들 상황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 않았고, 억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해 묵묵히 양을 지킨 것입니다. 힘들었겠지만 쓸쓸하고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는 노래를 부릅니다. 평상시에 즐겨 부르던 노래를 그날은 더욱 애절하게 부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으로 이끄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이렇게 외로움을 달래고, 이 자세로 양을 돌보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자기 일에 충실한 모습이 어디에 있습니까!

  자녀로서 다윗은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목동의 일이면 그 일에 충실했고, 부모에게 공경하는 일이면 그것에도 충실했습니다. 그가 만약 공부하는 일을 했다면 우등생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사업을 했다면 분명 성공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성실했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기 일에 충실한 다윗이기에 하나님은 그를 부르신 것입니다.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은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삶을 불평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누가 보든지, 보지 않든지, 알든지 모르든지, 작은 일이든지, 큰일이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그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수고합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그런 자녀가 결국 부모와 사람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부모의 바램은 자녀가 자기 일에 충실하며 잘 사는 것입니다. 따로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믿음직스럽게 가정과 삶에서 충실하게 사는 모습이 가장 기쁜 일입니다. 이것보다 자녀로서 부모를 향한 효도가 없습니다. 나는 자녀로서 자기 일에 충실하고 있습니까? 자녀로서, 성도로서, 직분자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충실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까? 다윗처럼 그런 사람이 되어 부모의 자랑, 하나님의 기쁨, 사람에게 인정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가문을 빛낸 후손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자녀로서 마지막으로 보여준 모습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역사의 순간에 그가 섰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고, 한 나라의 왕이 되기 위해 기름을 받고 있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이 순간부터 다윗은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됩니다. 사울과 같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수십 명이 있었던 이스라엘 역대 왕 중에 단순한 왕도 아니었습니다. 당대는 물론, 후대까지 모두가 존경하고 따르는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다윗이 가문을 빛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7장에서 그가 골리앗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사울 왕 앞에 섰을 때, 사울은 누구의 아들이냐고 묻습니다. 그때 다윗이 대답합니다.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입니다” 가문의 영예와 자랑이 된 것을 알려줍니다.
다윗은 가문의 자랑만 되지 않았습니다. 나아가서 나라의 자랑이었고, 결국 하나님의 자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다윗을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극찬했습니다. 한 시대를 살면서 다윗은 자랑거리였습니다. 가족이 그를 자랑하고, 나라가 자랑하고, 하나님도 인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처럼, 다윗은 기름이 부어진 뒤에 곧 바로 왕이 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20여년의 세월이 흘러야 했습니다. 그 세월동안 다윗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땀도 흘렸고, 눈물도 쏟았고, 고통과 시련가운데 왕이 되기 위한 자기희생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가 왕으로 세워진 것이 그에게 찾아온 영예와 축복이었다면, 그것에 걸맞는 대가를 지불한 것입니다. 철저한 헌신이 있었고, 섬김과 봉사가 있었고, 바르고 참된 삶을 위한 그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습니다. 영예와 함께 수고가 따른 것입니다.

  요즘 사회에서 많이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 ‘노블레스 오빌리제’(noblesse oblige)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미 이 말로 책도 출간이 되었고, 퀴즈대회에서도 자주 등장합니다. 이 말은 불어로서 ‘명예’를 뜻하는 ‘노블레스’와 ‘의무’를 말하는 ‘오블리제’가 합성된 말입니다. 즉 ‘귀족층의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프랑스 격언으로 '명예' 만큼 ‘의무’를 다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어원적 뿌리는 로마시대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로마시대의 귀족들은 그들이 누리는 신분과 영예와 함께 그 명예에 따르는 신실한 의무를 이행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로마가 세계를 지배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최근에 ‘로마인 이야기’를 쓴 일본의 ‘시오노 나나미’라는 작가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로마인들이 지성에 있어서는 헬라인들에게 뒤지고, 신체에 있어서는 켈트인과 게르만족에게 뒤지고, 경제력에 있어서는 카르타고인들에게 뒤떨어졌지만, 그렇게 큰 제국을 이루어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정신‘때문이었다고 말했습니다. 로마시대에 왕족과 귀족들은 솔선수범과 절제를 실천함으로 모든 평민의 본이 되었습니다. 로마의 부유한 원로들은 솔선하여 세금을 더 많이 부담했습니다. 전쟁의 때에는 고위층부터 먼저 전쟁터로 달려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던졌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귀족이라는 영예에 맞는 도덕적 책임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정신은 영국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영국도 철저한 신분사회이고, 귀족사회입니다. 얼마 되지 않는 소수의 귀족들이 전체의 영국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노블레스 오빌리제의 정신이 강합니다. 그 하나의 대표적인 예가 있습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국 왕실의 앤드류 왕자는 스스로 전투기에 올라 조종사로 참전함으로 화제를 모은 일이 있었습니다. 1,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에도 귀족이요, 유능한 학생인 캠브리지와 옥스퍼드 대학의 학생들이 앞장 서 전쟁터로 나갔습니다. 나중에 졸업식 때에는 학생들이 없어서 하지 못할 때가 있었고, 지금도 그 대학의 벽판에는 그 전쟁터에서 피 흘리며 죽은 학생들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미국에도 물론 있습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시절에 먼저 전쟁터로 달려간 사람들은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그 자제들이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때에도 하버드와 예일과 같은 대학의 귀족가문의 학생들이 먼저 전쟁터로 떠났습니다. 지금도 미국의 유명사립대학들은 미국의 대부호와 저명인사들의 기부금으로 재정이 넘쳐납니다. 이런 풍부한 재원 덕에 미국의 사립대학은 학문의 금자탑까지 세울 수 있었습니다. 사립대학이 숱한 인재의 산실과 학자의 요람이 되었던 것은 바로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정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영적인 ‘노블레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셔서 영예를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세상에서 그 어떤 것보다 고귀한 신분을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룩한 ‘오블리제’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예만큼 이제 나에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모의 자랑, 하나님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녀로서 다윗이 보여준 모습입니다.

  이제 부모님께 순종하고 존중하십시오. 자기에게 맡겨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가문의 자랑, 하나님의 자랑이 되도록 노력하고 힘을 다해야 합니다. 이런 각오로 이번 주간도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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