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린이주일] 유익한 존재, 심복(몬 1:11-16)

  • 잡초 잡초
  • 311
  • 0

첨부 1


- 설교 : 서정호 목사

이탈리아의 어느 한 소읍에 가면 개의 동상을 볼 수 있는데 그 동상의 주인공인 개의 이름은 '피도' 입니다. 그 개는 물에 빠졌다가 죽음 일보 직전에 어떤 신사로부터 구출되어 그 신사의 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미물인 개, 짐승에 불과하지만 그 개는 주인의 은혜를 알았습니다. 얼마나 주인을 따르고 사랑했는지 주인이 직장에 갈 때는 매일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와서 주인을 전송하고, 주인이 직장 일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다시 퇴근할 때쯤 되면 먼저 가서 정류장에서 기다렸습니다. 이렇게 주인을 생명처럼 섬겼습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이때 주인이 타고 오던 버스가 폭탄을 맞아 그만 주인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개는 그 날도 어김없이 정류장에 나와서 주인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주인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 개는 낮이고 밤이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13년 동안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다가 그 개에게 먹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 개는 주인이 돌아오기를 밤낮 없이 기다리다가 그 정류장에서 죽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자리에 동상을 세운 것입니다.

자기를 죽을 자리에서 건져 준 그 주인을 잊지 못하는 짐승을 보며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죄 없는 몸으로 친히 오셔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도 그 은혜를 알지 못한 채, 알아도 시간에 쫓기는 삶 속에서 잊은 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신앙이란 몸만 드리는 것도 아니요, 마음만 드리는 것도 아니요, 물질만 드리는 것도 아닙니다. 몸과 마음과 물질을 다 묶어 드리는 전 인격적인 헌신입니다. 우리들의 삶에서 왜 싸움이 일어납니까? 싸움은 한결같이 자기중심적일 때 일어납니다. 오해, 시기, 질투, 모두가 자기중심에서 일어납니다. 헌신하고 봉사하면 축복이 옵니다. 죽으면 살고, 잃으면 찾고, 버리면 얻게 됩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선뜻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이며 진리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반드시 쓸모가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움직이면 반드시 어떤 모양을 갖도록 돼있습니다. 짐승도 모양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제물로 쓰는 모양이 있고 사람이 먹지 못하는 모양을 가진 짐승이 있습니다. 제물로 쓰이는 짐승은 하나님께서 쓰고 사람들이 먹도록 하고 잘 키워줍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일 때 반드시 그 형상을 갖게 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런데 쓸모 있는 인간이 쓸모없는 모습으로 전락할 때가 있습니다. 유익한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존재인데 무익한 상태로 세상에 던져진 모습도 있습니다.

빌레몬서는 단 한 장으로 되어 있는 특별한 책인데 사도 바울이 선교 말기에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 골로새 교회의 지도자인 빌레몬에게 보낸 개인 편지입니다. 빌레몬은 바울이 에베소의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칠 때 그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는 사회 지도급 인사였을 뿐만 아니라 종들을 거느릴 만큼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들 중에는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었습니다. 이 오네시모가 주인집에서 도망쳐 로마에까지 와서 숨어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특별한 일로 오네시모는 로마에서 사도 바울을 만나게 되고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합니다. 이후 바울은 오네시모의 숨겨진 개인 사정 이야기와 주인인 빌레몬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바울은 오네시모를 주인인 빌레몬에게 다시 돌려보내기로 작정합니다. 당시 도망치는 종들은 대부분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고 도망을 치게 마련이었습니다. 주인의 자녀를 죽이거나, 주인의 재물을 훔치거나, 때로는 여주인을 강간하고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오네시모의 경우는 어떤지 모르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도망한 종이 잡히면 꼼짝없이 죽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바울은 오네시모를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낼 때 염려하는 마음으로 개인서신을 함께 보내면서 그를 선대해 주도록 부탁하는데 세 가지로 그의 변화된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내용을 대하면서 오네시모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범죄하여 그 분을 떠났던 오네시모 같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신분과 위치가 달라지고 사명이 새로워졌음을 발견합니다.

무익한 존재, 유익한 존재

오늘 바울이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라는 이름은“유익한”“유용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유익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유익한 존재였던 오네가 도망침으로 오히려 무익한 존재가 되어 그 이름의 뜻과는 정반대의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유익한 존재로 창조되었으나 타락과 죄로 말미암아 무익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다시 유익한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란 어느 편에 서 있는지, 누구에게 속한 존재인지에 따라 유익한 존재로 혹은 무익한 존재로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에 붙잡혀서 무익한 존재에서 유익한 존재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제는 주님께 유익한 존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내 심복이라

심복이라는 말의 뜻은“내장” 또는“심장”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애정이 깃들어있는 마음을 뜻합니다. 이 구절의 정확한 번역은 “그는 곧 나의 심장이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자신의 심장을 돌려보낸다는 말씀입니다. 심복이란 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것입니다. 나의 애정과 나의 정열과 나의 마음을 그대로 실어 보내는 것, 그가 곧 내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의 심복이요 바울은 곧 그리스도의 심복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심복입니다. 예수님의 심복으로 여기 보냄을 받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심복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주인의 뜻을 바르게 헤아리고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대통령의 심복은 대통령의 눈빛만 보아도 그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심복은 예수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둘째로 주인의 뜻을 깨달았으면 어떤 위험이나 고통이 수반되어도 그대로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군(軍)에서 지휘관의 심복은 지휘관을 위해 자기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는 자여야 합니다. 셋째로 심복은 자신의 소유를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소유는 모두 주인을 위해 있는 것이요 주인의 뜻을 위해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심복으로 부르셨기에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인지를 언제나 살펴야 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추천하고 그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복음 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

16절에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게서 뛰어나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고 했습니다. 형제란 사랑의 교분 뿐 아니라 동역자로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앞으로 전개될 신비한 사역을 바라보고 기뻐하며 큰 애정과 사랑으로 그를 빌레몬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는 참으로 미천한 종의 신분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잘못된 것이나 빚진 것이 있으면 자신이 갚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그를 자신의 심복으로 믿고 자신의 형제로 받아 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무익한 사람이 아니라 유익한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추천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그를 향한 사도 바울의 애정과 구속적인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형제를 애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같이 사람을 바르게 보고 사랑할 때 우리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습니다. 우리 역시 오네시모와 같은 범죄자요 쓸 모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참으로 유익하고 그리스도의 심장과 같은 복음의 사역자로 변화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익한 것들에게 착념치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무익한 것들에게서 나를 끊어버리도록 기도하며 유익한 일에, 하나님이 선하다고 인정하실 일에 좀 더 마음을 쓰고 행동에 까지 이르러 우리의 마음에 평안이 내재하고 하나님께도 유익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작은 일에, 무익한 일에, 삶의 가치기준을 두며 살 때가 많았음을 고백하며 유익한 삶을 살아가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귀한 나눔의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인데 두 가지 상반된 내용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자존심

초등학생 어린이가 백화점에서 물건을 사며 100만 원짜리 수표를 꺼냈습니다. 종업원은 어린아이가 너무 큰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상하여 부모에게 확인을 한 다음 물건을 팔 수 있다고 하면서 아이의 어머니 전화번호를 물어 전화를 했더니 아이의 엄마가 하는 말 “그까짓 100만 원짜리 수표를 냈다고 확인 전화를 하다니... 도대체 우리 아이를 뭘로 보는 거예요? 아이의 자존심을 구기지 마세요” 정말 대단한 어머니이십니다. 자식에게 100만원씩 쓸 수 있는 돈을 주는 것도 놀랍고, 어릴 적부터 아이의 자존심을 지나치게 세워주는 모성애도 눈물겹네요. 도대체 얼마나 잘 사는 부자이기에...

하지만 한 달 월급이 100만원이 안 되는 아르바이트 종업원의 자존심은 그날 무참하게 짓밟혔답니다. 이 이야기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 입니다.

'나는 어린이들이 좋다'라고 하는 아래와 같은 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
나는 어린이를 좋아한다. /
모두가 어린이가 되었으면 하고 /
어린이가 되지 못한 어른이 싫다 /
내 나라에는 어린이들만이 들어오기를 바란다. /
이것은 영원으로부터 결정되어 있었다고 /
꼬부라진 어린이, 등이 굽은 어린이, 주름살 간 어린이, 하얀 수염 난 어린이 /
어떤 어린이든 좋다 /
다만 한 가지, 어린이면 된다. /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법칙 /
어린이 외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
나는 어린이를 좋아한다. /
그들 속에서는 내 모습이 아직 흐려지지 않았고 /
그들은 내 모습을 일그러뜨리지 않고 있다 /
아직도 새롭고 순수하여 찌그러졌거나, /
얼룩진 모습이 도무지 없다 /
그들의 모습은 나를 용케도 닮았다. /
내가 그들을 좋아하는 것은 /
그들이 아직도 자라는 중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어른들에게서는 /
아무 것도 기대할 수 없다고 /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
이미 더 크지도 자라지도 않는 어른들이 /
스스로 완성되었다 믿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
나는 어린이를 좋아한다. /
그들은 아직도 몸부림치고 싸우고 /
아직도 죄를 범하기 때문에 /
또 그것을 스스로 알고 정직하게 고백하며 /
다시는 범죄치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
그들은(어른들은) 누구에게도 잘못한 일이 없고 /
가책 받을 일이 하나도 없다. /
나는 그들에게 용서해 줄 것이 없고 /
그들은 내게 용서받을 것이 없다고 한다. /
슬픈 일이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니 /
참으로 슬픈 일이라고 /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특히 내가 어린이를 좋아하는 것은 /
그들의 눈 때문이다. /
그 눈 속에 그들의 젊음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
내 나라는 다섯 살 난 어린이 눈밖에 없다. /
어린이 눈만큼 아름다운 것을 나는 모른다. /
그렇기에 그들 마음속에 내가 살며 /
그 영혼의 창문을 들여다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
길에서 순결한 눈을 만날 때 /
그 안에서 미소를 짓는 것은 바로 나다. /
하지만 어린이 얼굴에 /
빛 잃은 눈동자처럼 서글픈 것도 없다. /
텅 빈집에 열려진 창문처럼 /
두 눈은 있어도 바라보는 눈길이 없다. /
이럴 때면 나는 슬픔에 잠겨 /
그들의 문 앞에서 추위에 떨며 노크한다. /
빨리 그 집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
가엾게도 그는 혼자다. /
이 어린아이는 마침내 살이 찌고, 굳어지고, 메말라 늙어 버린다… /
가엾은 늙은이! 하나님은 탄식하신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어린 늙은이들이여! /
모두 문을 열어라, 바로 나다. /
너희에게서 어린이를 부활시키러 온 /
부활한 영원자다. /
서둘러라 때가 왔다! /
너희에게 다시 한 번 아름다운 얼굴과 /
어린이의 맑은 눈을 주러 / 내가 왔다… /
나는 어린이들이 좋다. /
모두 어린이가 되기를 바란다고 /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어린이를 좋아하신다고 하는 어린이 예찬의 긴 글입니다. 물론 이 글 속에는 영적 의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어린이가 있는 곳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어린이가 있는 곳에 함성을 지르는 감격적인 찬송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 어린이의 세계에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 곧 교회 부흥, 가정 부흥, 나라 부흥이 있습니다. 바로 사랑과 신뢰와 용서와 겸손과 온유와 감사와 기쁨이 있습니다. 확실히 보장된 축복의 미래가 있습니다. 어린이가 있는 곳에 가정 전도, 부모 전도의 문이 열립니다. 가능의 미래, 영광의 미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이가 없는 집, 어린이가 없는 교회, 어린이가 없는 나라는 무덤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린이는 가정의 꽃이고 미래의 희망이며 국가와 사회의 기초이며 새싹입니다. 어린이는 약해 보이지만 언제나 새롭고 싱싱합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이 튼튼하고 싱싱하게 자랄 수 있도록 보살펴주고 가꾸어야 합니다. 어른들의 의무이며 부모님들의 의무이며 시대의 과제입니다.

가끔 교회 안에 보면 새로 믿는 분들 중에서 어린이처럼 순수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 신앙이 아주 순수합니다. 계산하고 따질 줄을 모릅니다. 신앙에 감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날마다 감격하면서 삽니다. 기뻐서 교회에 오고 찬송하고 기도할 때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어린아이의 영혼을 가진 분입니다. 육체의 나이는 들었어도, 영혼의 나이는 갓난아이입니다.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교회된 특색과 미래적인 중심의 힘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새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닌 어린아이와 같은 자들을 교회의 한가운데, 역사의 한가운데 세우시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영적 어린아이는 교회에서 가장 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요 기둥과 터가 됩니다(딤전 3:15). 이 집의 가운데는 어린아이들이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어린이들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새 사람들로 말미암아 새롭게 희망을 가지는 하나님 나라 운동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