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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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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정근두 목사

그리스도 안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리고 이 복된 자리에 함께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여러분, 구주 대망 2005년 4월 우리는 춘곤증을 물리치기 위해서 “활기를 되살리기”라는 연속설교를 계속 듣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환하게 봄처럼 피어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땅속으로 꺼져들듯이 힘겹게 버티고 있습니까?

며칠 전에 어떤 분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문이 닫힌 다음 중간에 서버렸답니다. 그래서 살펴보니 8명이 정원이었고 안에 있는 사람이 8명이 맞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갇혀 있으면서 계산을 해 보니까 550Kg 이 되면 되는데 조금 몸무게가 나가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지요? 600Kg가 넘었답니다. 그래서 조금 하중이 더 실리니까 그냥  엘리베이터가 제대로 작동을 못하고 서 버린 겁니다. 50분을 갇혀 있었다는 겁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정량을 초과한 짐을 싣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 분은 없습니까? 초과한 인생의 무게 때문에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신 분은 없습니까? 오늘 마태복음 11장 마지막 세절은 활력을 되찾는 비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여기에 나오는 동사들을 주목해 보셨습니까? “오라” “메고” “배우라” “얻으리니”라고 말 합니다. 처음에 세 가지를 하면 영혼의 쉼을 얻으리라고 합니다.

1. 첫 번째 걸음은 그리스도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이 관건입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문제를 안고 주님께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의문을 가지고 주님을 찾습니다. 어떤 이들은 질병 때문에 주님께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으로 인해 주님께 나옵니다. 어떤 이들은 단순한 호기심으로, 다른 이는 주님께 덫을 놓으려고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동기로 나왔는지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주님께로 나오기만 하면 시비를 하질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질 않는 것은 쉼을 얻으려고 주님께로 간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구원을 얻으려고 주님께로 간다는 사람들이 수긍을 합니다. 죄 용서를 받으려고 주님께로 간다. 그러면 그건 납득이 됩니다. 생애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서 생애 의미를 찾기 위해서 주님을 찾아 나왔다고 하면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 오늘 본문에서는 쉼을 얻기 위해서 주님께로 와야 한다고 성경은 말 하고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여러분의 긴장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주님을 찾으라는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주님이 약속하시는 쉼은 어떤 종류의 쉼입니까? 그것은 우리 영혼의 쉼입니다. 신체적인 쉼을 뛰어넘는 쉼이고 영혼의 쉼이요, 영적인 쉼이며 정서적인 쉼이며 정신적인 쉼을 약속하십니다.

여러분이 받은 중압감은 단지 근육이 받는 중압감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분은 육체적인 노동, 근육의 움직임이 좀 더 필요한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편하게만 살면 나른해 지는 것 그것도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운데는 아주 힘들게 열심히 사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육신에겐 쉼이 정말 오늘 같은 날 필요한 분도 있습니다.

대게는 정신적인 과로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과도한 걱정 때문에 심리적 인 긴장 때문에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의 안식이요 정신적인 안식입니다.

신체적인 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적인 재충전이 필요합니다. 정서적인 재충전과 정신적인 재충전이 절실합니다. 걱정과 염려, 긴장과 죄책감, 두려움과 미움으로부터 벗어나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여러분은 정서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중압감을 느낄 때 맨 처음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한 잔 술입니까? 아니면 이불 뒤집어쓰고 좀 푹 자는 겁니까? 텔레비전을 켜고 빠져드는 것입니까? 아니면 찜질방이나 뜨거운 온천욕입니까? 마약이나 섹스입니까?

이 모든 것은 영혼의 쉼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봄날 아버지 집에 오니까 마음이 편해서 슬 눈이 감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서 한번 읽어 보자고 했지요. 이유가 있어서 그럽니다.

오늘 주보에 김수동 목사님이 글을 쓰는 것을 보니까 아버지 집에 왔으니 성질 한번 부려보겠습니다. 라고 하던 황수찬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실려 있지요? 어떤 사람들은 아버지 집에 와서 성질 한가락 해 보겠습니다. 라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아버지 집에 오기만 하면 마음이 편해서 새근새근 주무시는 분도 있고 잘 오셨습니다. 어쨌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만이 새 힘을 주신다고 성경은 약속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40:28-29)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30-31)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힘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알지 못하던 힘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껏 갖고 있지 못한 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여러분에게 주어진 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능력의 원천에 접속하십시오. 텔레비전에 접속하지 마십시오. 음식에 접속하지 마십시오. 모든 다른 것보다 더 전능자 하나님께 접속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칠 때, 삶의 중압감으로 눌릴 때 오직 하나님과 함께 하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는 조용한 시간을 확보하십시오. 하나님께 접속하십시오. “여호와를 앙망하십시오.” 지속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잠잠히 바라며 기다리는 것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잘 하지 못하는 것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워낙 “빨리 빨리”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휴대폰이 개발되고 잘 팔리는 모양입니다. 디지털 산업의 발전에는 “빨리 빨리”도움이 되는 것 같은데 영성개발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유행에 민감한지 어제 밤에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옷차림하고 오늘 아침에 나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엘리베이터마다 “문 닫힘” 새까만 글자가 다 지워져요 얼마나 열심히 눌렀던지 음식점에서도 기다리질 않고 여유롭게 식사를 하는 법이 없습니다.

저는 1월에 결혼 30주년이 되어서 아프리카에 마침 가 있었는데 친구가 초대를 하더라고요. 음식점에 가서 음식을 주문하고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 나오질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조그만 동네에 입학식이어서 엄마 아빠들이 아들딸들을 다 데리고 와서 숙박업소라는 것이 다 동이 났고 음식점도 미어터지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를 서비스 맡았던 아이가 일을 한지 얼마 안 되는 아이인지 음식이 나오질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불러서 이야기를 했지요. 그런데 30분이 지나도록 감감 무소식이었고 한 시간 반을 기다렸어요. 밥 한 그릇 먹겠다고 그래서 주스 값만 계산하고 나오겠다고 하니까 위엣 사람이 상황을 파악하고 쫓아와서 조금만 앉아계시라고 그래서 1시간 40분 넘어서 50분쯤 되었을 때 밥 한 그릇 먹고 30주년 기념행사 잊지 않도록 잘 했습니다.

외국에는 예약 문화가 발전되어 있는데도 그냥 점심때 들이닥치면 어느 나라 사람이냐? 한국 사람이다. 그러면 밥을 준데요. 왜냐하면 빨리 먹고 갈 거니까 예약손님을 받는데 지장을 우리는 안줍니다. 전쟁이 난 것처럼 그렇게 급히 해 치웁니다.

우리는 기다리는 것을 싫어합니다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시간을 두고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 특별히 주님을 바라보라고 요청하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앙망할 수 있습니까?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보통 때는 문자 그대로 잘 안 지키면서 이런 말씀을 보면 야~ 나도 골방이 하나있으면 좋겠다. 라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집을 지을 때  골방을 넣는 사람도 있어요. 그렇게 까지 하실 것 없이 아이들 다 학교가고 나면 빈방은 모두 골방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그곳에서 기도하면 됩니다. 그런데 집안에 식구들이 아무도 없이 이렇게 앉아서 기도를 해도 우리 마음이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로 잘 안가요. 오랜만에 조용하게 기도한번 한다고 폼 잡으면 시선이 우리 자신에게로 옵니다. “봐라 내가 얼마나 멋지냐? 기도하고 오늘 기도하기 위해서 무릎까지 꿇고 있네.” 이렇게 됩니다. 기도는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로 관심을 돌리는 겁니다.

홀로 모든 짐을 내려놓고 말씀 앞으로 나아가면 좋을 것입니다. 기도도 시작할 수 있고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어떤 분들은 찬송을 하는 것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사람마다 깊은 자리에 들어가기 위한 마죽 물을 붓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은혜로운 책을 읽어서 은혜로운 분위기에 심령이 들어간 다음에 기도할 수도 있고 찬송을 몇 장하면서 그 가운데서 은혜로운 기도가 터져 나올 수도 있고 다 다르니까 흉내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것을 좋아 하십니다. 바쁜 자신에게서 관심을 돌려서 하나님을 향하기만 하면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세상을 사는지 압니까? 하나님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기 시작하면 여간 문제가 생겨도 인상을 쓰지 않고 화내지 않습니다. 연애 삼배에 빠져있는 여러분 자녀를 못 보았어요? 그 사람 목소리만 들리면 그냥 얼굴이 확 피어납니다. 집에서는 인상을 쓰고 우거지상을 하고 있다가도 “딩동”하고 목소리만 들려도 표정이 확 밝아지잖아요. 그런 겁니다. 하나님께 계속해서 우리가 연결이 되어있으면 우리는 여간한 일을 가지고 그렇게 화 낼 것이 없습니다.

울적하면 술집으로 가고 영화관으로 가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방식이겠습니다. 요즘은 정신적으로 공허하면 의미 있는 봉사 활동을 하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피곤하면 열심히 일을 해 보라고 권하기도 하고 안 그러면 일을 접어두고 좀 쉬어라 휴가를 한 번 가져봐라 이렇게 충고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주도든 설악산이든 지친 심신이 따라온다는 거예요. 문제가 뒤에 남질 않고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한 휴가가, 휴가가 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게로 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아무 조건을 걸지 않으시고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은 무슨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심성수련회가 아닙니다. 약물투여가 아닙니다. 피곤한 인생은 주님을 만날 때에 위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영혼에 안식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1부 예배에 보니 최근에 혼자되신 여 성도가 여기에 저기에 앉아 있고 그런가. 했더니 저기 갓 줄에 혼자된 남자분이 앉아있는 것을 보니 보기가 안 되었더라고요. 중간 중간에는 그동안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면서 또 한분은 오랫동안 병원 치료를 받다가 모처럼 모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분들도 있고요, 하나님께서 쉼을 주시지 않으면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은 교회로 오라고 말씀하시질 않습니다. 성경을 읽으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소그룹에 속하라고도 하질 않습니다. 새벽기도 열심히 하라 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나에게로 오라 그럽니다.

거기가 새 힘을 얻는 원천입니다.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은 어떠한 힘입니까?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엡1:19)은 지극히 크십니다. 주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입니다. 그 영광스런 힘을 쫓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는 그리하여 모든 상황 속에서 모든 관계의 어려움에서 우리를 넉넉히 이기게 ..................

우리를 벗어나게 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우리도 당합니다. 다만 그 고통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주님이 같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삶을 바꿔 놓는 겁니다. 

괴로움을 잊어보려고 온갖 노력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망설이지 말고 지금이라도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께로 향합시다. 그가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수많은 약속들을 떠올리고 그 가운데서 하나라도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절망적인 소식 앞에서 낙담하는 야이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간신히 주님을 만나서 가쁜 숨 몰아쉬고 있는 딸에게로 가고 있는데 중간에 길이 막혀서 사건이 일어나서 집에서 사람이 와서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더 이상 선생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그를 향해서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가장 비참한 소식이 여러분의 귀에 들리는 순간에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그 소식은 여러분의 귀에만 들린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귀에도 들리는 것입니다.

2. 짐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 나아오면 무거운 짐을 주님께 내려놓아야 합니다. 옛날에 승용차 처음 나왔을 때 그런 이야기 들어보셨지요. 어떤 시골 할머니를 차에 태웠더니 계속해서 짐을 이고 있는 겁니다. “내려놓으시죠.” 그러니까 “ 내가 탄 것만 고마운데 어떻게 짐을 내려놓을 수가 있습니까?” 계속 무거운 짐을 머리에 얹어두고 지내지 마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것은 여러분이 모든 것을 하려고 덤비기 때문입니다. 마치 세상 모든 일이 여러분에게 달린 듯이 고민하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온 우주를 책임지는 총지배인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내려놓아도 세상은 내려앉질 않습니다. 여러분이 관심을 끊어도 여러분의 생각처럼 모든 일이 엉망이 되질 않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처럼 여러분이 숨이 떨어져 눈을 감아도 세상은 아침에 해가 떠오르고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일 것입니다. 보장합니다. 다 모든 염려를 여러분이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제 말을 믿고 무거운 짐을 이제는 내려놓고 살아 보십시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멍에가 뭡니까? 쟁기질 하고 써레질 하는 소에 목에다 얹어 놓은 것이 멍에가 아닙니까? 대한민국의 소는 힘이 좋아서 소 하나에 하나의 멍에가 얹혀 있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틴 이스라엘 쪽의 소는 힘에 부치나봐요 그래서 멍에 둘을 가지고 한 멍에 소 두 마리의 목을 얹어 놓는 겁니다. 그래서 두 마리의 소가 같은 일을 한가지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아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는 내 멍에만 해도 힘듭니다. 그런데 주님멍에까지 메야 된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멍에라는 것은 팔레스타인 땅에 있어서는 짐을 가볍게 하는 수단입니다.

멍에라고 할 때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둘 다 여러분의 인생 짐을 가볍게 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 째로 멍에는 동역의 상징입니다. 여러분의 모든 짐을 여러분 홀로 지고 가도록 의도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져 주마”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우리 어깨에 짐을 더 얹질 않으십니다. 우리의 짐을 나누어 감당해 주십니다.

내 멍에를 메라고 해서 주님께서 우주를 다스리시는 일을 우리보고 함께하자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 집안 다스리는 것도 골치가 아픈 일인데, 조그만 사업체 꾸려가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데 한 달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월급 주는 날자가 말이지요. 한 나라도 아닌 온 우주를 다스리는 일을 여러분에게 동참하자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거기까지 안 맡겨도 교회에 나와서 졸고 있는데 그것까지 맡겨놓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온 세상 다스리는 일이 빈 물통 들고 가는 것 밖에는 안 된데요. 그런데 문제는 요즘 집집이 시설이 좋아 틀면 쏴~ 하고 찬물도 나오고 따뜻한 물도 나오니까 물통의 물을 들어 봤어야지요. 그렇지요?

옛날에는 공동 수도가 하나밖에 없었잖아요. 그래서 물을 받으려면 항아리, 물통 등을 들고 가서는 새치기를 못하도록 새끼줄을 중간에 역어서 쭉 세워놓았는데 순서대로 받다가 여러분 앞에서 딱 끊어져 보십시오. 갖다놓고 아무리 틀어도 한 방울 두 방울 밖에 떨어지지 않을 때 그러면 물통은 가벼워서 좋지만 집에 가면 먹을 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빈 물통을 드는 것 여러분이 빈 물통을 드는 것처럼 힘이 하나도 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짐을 맡기지 않을 거니까 멍에를 같이 해 보십시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고 시인은 권면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보다 강한 어깨를 가지시고 여러분보다 더 큰 힘을 쓰시는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짐을 떠안기지 않고 떠맡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게 접속하질 않을래, 나와 멍에를 함께 하지 않을래, 내가 네 짐을 맡아주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짐은 가볍다고 하는데 여러분의 짐은 어떻습니까? 지금도 지칠 만큼 무겁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멍에를 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하고 멍에를 같이 하면 됩니다. 모든 일을 여러분이 하려고 덤비지 마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때 마다 하나님과 접속이 단절될 때 마다 그 멍에를 벗어버릴 때 마다 여러분은 스트레스를 받을 것입니다. 짐을 모든 짐의 무게가 여러분 어깨에 다 실리기 때문입니다.

멍에의 두 번째 의미는 항복과 양도의 의미입니다. 같은 멍에를 메면 그다음부터는 누가 누구를 따라야 되지요? 주님이 여러분을 따라야 됩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따라야 됩니까. 어떻습니까? 대답이 너무 쉬울 때는 사람들이 대답을 하지 않더라고요. 다 아는 거지요?  우리가 주님을 따라야 됩니다. 주님이 가는 방향으로 같이 가면됩니다. 한 멍에를 같이 메고 있으면 방향을 달리하고는 갈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방향으로 가면됩니다. 멍에를 같이하고 있으면 더 빨리 갈수도 없고 더 느리게 갈수도 없습니다. 같이 가야만 되는 겁니다. 그러면 편한 것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방향으로 가고 주님의 걷는 속도로 걸으면 짐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인생길이 봄나들이 꽃길처럼 변하는 겁니다.

주님은 서두르거나 달리는 일이 없더라고요.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어 가는데도 허덕이며 달려가서 살린다고 그러시질 안더라고요. 죽도록 내버려두더라고요. 왜?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때는 마음이 조급하잖아요. 우리는 지금 하나님 오늘까지 안도우시면 안됩니다. 큰일 납니다. 그러는데 우리는 그렇게 다급해서 큰일 난다고 몇 번씩 이야기를 했는데 하나님은 못 들으셨는지 전화도 한통 없더라고요. 그렇죠.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늦어지는 것 같고 일은 다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끝나지를 않습니다. 그렇게 쉽게 끝나지 않습니다. 그다음부터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보다 크고 놀랍고 아름다운 일들이 이제는 전개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면 사는 것이 참 기쁩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생각했던 대로 되면 감사하고 내가 예상했던 데로 척척 되어도 아~ 잘 먹고 나왔는데 신호 대에 설 때마다 파란불이 척척 바뀝니다. 완전히 중부경찰서장이 중부경찰서장으로 끝나지 않고 높은 자리로 승진할 생각이 있는 사람 같아요. 신호조작을 다 해 주는 것을 보면 그렇지요? 그래도 기쁜 일이지만 막힐 때도 있어요. 막힐 때가 있으면 내 생각대로 잘 빠져도 기쁜 일이지만 내 생각대로 안 되어도 더 좋은 것이 있다고 믿으면 믿기만 하면 막힐 때가 더 기쁘다니까요. 내가 생각하는 데로 만 되어도 좋은데 내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크게 아름답게 놀랍게 될 것을 생각하니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그렇게 인생을 살아야지 하나님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이번에 안 도와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내가 교회를 가는가 한번 보십시오. 이러면 얼마나 고달파지는지 모릅니다. 그런다고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찔찔 메는지 아십니까? 여러분의 남편과는 수준이 다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짓누르는 멍에가 무엇입니까? 직장에서의 출세가 여러분을 짓누릅니까? 부모님의 기대가 여러분을 짓누르고 있습니까? 그들을 기쁘시게 하려고 자나 깨나 고민을 하고 있습니까? 함께 일하는 분이 여러분을 힘들게 합니까? 더 많이 갖고 싶은 욕망이 여러분을 짓누르고 있습니까?

어느 멍에든지 여러분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아니면 누군가를 섬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가장 가벼운 것 여러분에게 딱 맞는 그것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멍에입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어보면 여러분의 신체적인 조건에 딱 맞습니다. 여러분의  체형을 고려하고 여러분의 체질을 고려해서 여러분의 능력에 딱 맞는 “딱 이다”그러지요? 딱 맞는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이 가벼운 멍에를 팽개쳐 놓고는 자기 나름대로 멍에를 메고 있어요. 한 개 두 개도 아닌 세 개 네 개도 아닌 멍에라는 멍에는 다 걸치고 있는 것 같아요.

돈을 벌어야 하는 멍에도 걸치고 있고 건강해야 된다는 멍에도 목에 걸고 있고 남편의 불변하는 사랑이 나에게 항상 같이 해야 된다는 그 멍에까지 걸어놓고 있고 사는 것이 자식도 내 기대에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멍에까지도 목에 걸고 살면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지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여러분이 선택을 하지 않았어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부모로 해서 태어날 것인지를 여러분은 선택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사주팔자 중에 하나도 여러분이 선택한 것이 없다니까요. 여러분이 선택을 했으면 여러분 중에서 과연 몇 사람이 대한민국을 조국으로 해서 태어나려고 했겠습니까?

생의 모든 중요한 일들이 여러분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는 시간조차도 여러분에게 달려있지를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면 내가 하나님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사람이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염려를 해봐야 지극히 작은 일 하나도 해결할 수 없는데 왜 여러 가지 일로 염려하느냐?”(눅12:26, 현대어성경) 머리털 하나 희게 하거나 검게 하는 것조차 마음대로 못하는 인생이 온갖 것 다 안고 그렇게 염려하면서 왜 그렇게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3. 신뢰하는 것을 배우라

마지막 단계는 주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신뢰하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께서는 짓눌리며 걱정하면서 사는 대신 목적을 따라 사는 삶, 평강을 누리며 사는 것을 본보기로 우리에게 남기셨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사셨기에 언제나 평강이 넘치는 세월을 보내셨습니다. 일에 짓눌리는 삶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따라서 사셨습니다.

주님처럼 열심히 사신분도 없었지만 주님은 일에 끌려 다니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걸음을 한번 따라가 보십시오. 주님의 모범을 따르십시오. 어떻게 사셨고 어떻게 하셨는지를 눈여겨보십시오. 그 바쁜 와중에서도 쫓기지를 않으셨고 고요를 유지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처럼 바쁜 날에도 새벽 아직 미명에 아버지와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고요히 가지시고 하루를 출발하는 모습은 그런 삶은 가히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날 하루가 얼마나 바쁘셨는데도 그 분이 우리에게 “내게 배우라”고 초대하십니다. 주님의 기회를 드리기만 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개인지도를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쪽 집기 과외를 해 주신다는 겁니다.

하지만 배움을 단 순간에 단 한순간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시간을 요합니다. 지나친 하중을 견디며 사는 것도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니듯이 그런 삶을 벗어버리는 것도 하루 밤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잘못된 습성을 고치는 데는 시간이 걸립니다.

우린 주님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온유함과 겸손함, 아니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긴장해소에 도움이 됩니까?

차라리 소신을 갖고 인내하라든지 용기와 박력을 가지라든지 아니면 시간활용법이나 목표설정을 바로 하라든지 그래서 효율적인 삶을 살라고 말하면 모르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길 원하면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은 바로 공격성이요 교만함이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습니까? 느긋이 기다리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상이 누구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쯤은 좀 바뀌어져 주었으면 좋겠는데 안 바뀌니까 신경질이 나는 거잖아요. 화가 나는 거잖아요. 느긋하게 기다리는 것이 우리에게는 어렵습니다. 지연되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안달을 냅니다. 무슨 일이든지 바로 바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우리 자식들은 더 고생할 것 같아요. 하나둘 밖에 낳지 않아서 해 달라는 대로 그때그때 다 해 주면 나중에 그 아이가 커 보세요. 천원 이천 원 하는 것을 사달라고 할 때이지 천만 원 이천만원가지고 그때그때 해 줄 수 있는 부모가 우리가운데는 몇이나 됩니까? 그때부터 고생을 하는 겁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우린 교만합니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한 삶입니다. 여러분과 저의 자아야말로 우리가 견딜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을 일을 하려고 덤비고 통제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통제하려고 들고 손에 넣을 수 없는 것 넣을 수 있는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손에 넣으려고 설치면 삶이 고달프지요. 입에 단내가 나지요.

다시 말씀 드리지만 우린 모든 것을 우리 뜻대로 하려고 덤비지만 여러분과 저는 우주의 총 지배인이 아닙니다. 모든 일의 해결사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큰 기계에 많은 톱니바퀴 중에서 한 톱니에 지나지 않습니다. 장기판에 깔려있는 제일 적은 졸(卒)에 지나질 않습니다. 

예수님의 평안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의 평안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에는 12번 이상 나와 있는데요. 예수님은 단순하게 사셨습니다. 주님이 말 하라고 하시면 말하고 주님이 행동하라고 하는 것 하셨어요. 나는 아버지께로 들은 것만 말 한다. 단순한 순종의 삶, 그것이 평안의 삶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삶은 스트레스를 줄이는 유일한 길입니다. 쉴 때가 되면 쉬고 모든 사람을 여러분이 다 기쁘게 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살면 젖을 뗀 아이가 어미를 바라듯이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 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20:24)

하나님이 한걸음 인도하시는데 우리 생애에 우리가 이해가 안 되는 일을 닥쳤다고 하나님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고 밤새워 부르짖어 본들 답이 떠오릅니까? 그냥 모든 일은 나를 사랑하시는, 나를 아시는, 나를 도우시는 아버지의 손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면 됩니다. 일일이 이유가 뭔지 다 알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의 시인은 고백합니다. “이젠 틀렸다 싶어 모든 것 포기해 버리려 할 때에도 주께서는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고 계십니다.”(시142:3, 현대어성경) 더 이상 안 되겠구나 끝났다 그럴 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the  best way 가 뭔지 가장 최선의 길이 뭔지를 가르쳐 주시는 겁니다.

경제적인 문제로 힘드십니까?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

돈에 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있는 것 가지고 만족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부디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우리가 다 가지지는 못했지만 남처럼 더 많이 가지지도 못했지만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제가 아직 가지고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할 것이 줄줄이 많더라고요.

어제는 억지춘향을 한다고 내가 여러분 출석을 부르겠다고 3시에 문수구장에 갔지 않습니까? 호반광장에 가서보니 출석을 부를 자리가 없더라고요. 먼저 간 것 호수나 한번 둘러보는데 가다말고 집사람이 제게 묻더라고요. 보통 때에도 그냥 올수 있냐고요. 돈을 안내고, 그래서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얼마나 양심에 가책이 되는지 어머니가 저에게 늘 불평을 하시는 것이 너는 나를 좀 데리고 놀러 안다니냐? 다른 목사들은 놀러 도 잘 다니더니만 너는 왜 그렇게 바쁘냐? 정말로 제가 바빴던 모양입니다. 문수구장에 평일에도 돈을 안내고 가는지 집사람이 제게 물었으니까 말이죠. 둘러보니까 거기만 해도 아름답더라고요. 시간을 내어 가보니 아주 즐길 만 한곳이 많이 있었어요. 지금 여러분에게 남겨져 있는 것을 가지고 감사하면 우리는 생이 마감하는 순간까지 계속 감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5월은 생명 사랑 나눔 축제의 달입니다. 초청의 달입니다. 사람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영광스런 초대가 여기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8-30)

이제 주님께로 나아오십시오. 주님의 멍에를 한번 메어 보십시오. 그리고 주님께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모든 것을 여러분이 다 하려고 들지 말고 주님이 해 주신다. 그걸 믿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까? 내대신 주님이 도와주신다. 내 인생의 주인은 주님이시다. 한걸음, 한걸음 주께서 인도하신다. 그렇게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차를 타셨습니다. 아직도 짐을 머리위에 얹어놓고 지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내려놓으십시오. 탄 것만 해도 미안한데 짐을 못 내려놓겠다고 자꾸 그렇게 말씀하시지 말고 다 내려놓으시고 주님의 인도를 따라 가면 삶이 황홀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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