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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먼저 손 내밀고 (마 5: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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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금성 목사

사람이 짓는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는 살인죄입니다. 형법에서도 살인죄에는 가장 무거운 형벌을 내립니다. 살인죄는 대부분 무기 징역이나 사형 판결을 내리고 있습니다.
십계명에도 살인에 대한 계명이 있습니다. 여섯 번째 계명이 ‘살인하지 말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살인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의 자리는 모세 율법에 대한 6 가지 반제 가운데 첫 번째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있는 계명들 가운데 형식적으로 지키고 있는 여섯 가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오늘 본문부터 시작해서 5 장 끝까지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6 가지 반제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나름대로 재해석 하셨습니다. 이 율법 6 가지는 살인에 대해서, 간음에 대해서, 결혼에 대해서, 맹세에 대해서, 보복하는 일에 대해서, 원수 갚는 일에 대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율법보다도 오히려 훨씬 엄격합니다.

사람들은 복음을 통해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계명이 많으면 행동에 구속을 당합니다. 해라, 하지 말라는 주문이 많을수록 자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를 율법에서 벗어나게 해 준 고마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보다 한술 더 떠서 더욱 엄격한 윤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욕하는 것도 살인에 해당한다고 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것도 간음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고차원적인 윤리입니다.

그러니까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이 생각하는 율법보다 예수님은 훨씬 엄격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목숨을 끊는 것만이 살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제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하는 것도 살인죄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1-22>

살인은 하나님 앞에서 짓는 죄입니다. 다른 죄들은 들키지 않으면 뻔뻔하게 버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인죄는 저지르고 나면 평생 잊지 못합니다. 자기 양심이 괴롭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고 징벌하는 죄입니다.

그래서 살인은 상대를 죽였지만 결국 자신도 죽이게 되는 무서운 죄입니다.
살인에 대한 심판은 엄중합니다.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형제에게 짓는 살인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는 헬라어로 ‘아델포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아델포스는 초대교회의 예수 믿는 사람의 별명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서로 ‘아델포스’로 불렀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남자 여자 차별이 없습니다. 모두 한 형제가 됩니다. 그래서 형제라는 말은 기독교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한 아버지 밑에 있으니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모두 한 형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노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교인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입니다. 둘째는 형제에게 라가라고 하는 자입니다. 셋째는 형제에게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입니다.

둘째 라가라고 욕하는 것과 셋째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 형제에게 노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같이 예수를 믿으면서 교회를 다니면서 화가 나는 일이야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 화를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끼리 화를 내면 세상이 비웃습니다. 세상의 소금이고, 세상의 빛인데 화가 나도 참아야 합니다.

화를 참지 못하면 그 다음에는 걷잡을 수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 다음에 벌어지는 일들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들입니다. 교인들끼리의 싸움, 교회 안에서의 싸움은 공동체에 치명적입니다.

가끔 교회가 둘로 나뉘어 싸운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요즘은 서울의 대형교회 몇 군데가 내분에 휩싸여 있습니다. 세상 신문에 그 싸움이 뉴스로 다뤄지기도 했습니다. 그런 뉴스는 기독교를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선교에 막대한 폐를 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인끼리 화를 내는 일은 선교의 살인죄에 해당됩니다. 하나님은 교우끼리 화를 내고 싸우는 것을 놔두지 않으십니다. 본문에 심판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곧 지옥을 의미합니다.

둘째 형제에게 라가라고 욕을 하는 경우입니다. 이 라가라는 말은 히브리어입니다. 뜻은 구제불능이란 뜻입니다. 너는 선한 일과는 관계가 없다. 배냇병신이라는 말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병신이라 고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주 고치지 못할 영영 구제불능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절망적인 욕입니다. 그래서 이 욕은 인격 살인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욕을 하는 사람은 공회에 잡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공회는 종교에 대한 재판을 받는 자리입니다.

셋째는 미련한 놈이라고 흉을 보는 경우입니다. 미련하단 말은 우리가 흔히 쓰는 말입니다. 지혜의 반대말이 미련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혜는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로 미련하다는 것은 축복을 거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이 멈추면 끝입니다. 이것은 명예살인입니다. 그래서 이런 욕을 하는 사람은 가장 가혹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렇게 가혹한 벌이 내려집니까? 미련한 놈이란 욕 한 마디가 그리 큰 죄가 됩니까? 지옥불이란 살인죄에나 적용될 벌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교인에게 이런 욕은 살인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입니다. 욕이란 개인적인 심판입니다. 상대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너는 구제불능이다. 너는 미련한 놈이다.” 이런 욕들은 인격을 살인하고, 명예를 살인하는 것입니다.

지내다보면 같은 교인에게 화가 날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오해를 해서도 생깁니다. 그래서 화를 냈는데 그것이 심판을 받을 만큼 큰 죄가 됩니까?

라가라는 욕은 우리나라 욕으로 바꾸면 바보란 말도 됩니다. 우리는 장난으로도 바보라는 말을 잘합니다. 그런데 이 바보라는 말을 식구나 친구에게 하는 것과 교인에게 하는 것은 다릅니다. 교인에게 하는 욕은 같은 말이라도 확실히 더 무겁습니다. 그렇다고 욕 한마디에 공회까지 끌려갑니까?

미련하다는 욕도 그리 심한 욕은 아닙니다. 그래도 교인에게 한다면 이것도 더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정도 핀잔으로 지옥불에 떨어집니까?

그럼 이런 죄는 용서가 안 됩니까? 한 번 욕한 것 때문에 지금까지 예수 잘 믿은 것이 날아갑니까? 그냥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죄는 반드시 풀어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핵심 주제는 살인이 아니라 화목입니다. 23 절은 ‘그러므로’ 란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22 절에 나오는 지옥 심판이 따르는 죄를 해결하려면 23 절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율법을 어기면 형벌이 따릅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형벌을 용서받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율법이 아니고 복음입니다. 22 절의 가혹한 말씀은 23절을 위해서 있었던 것입니다.

제사보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이 화목입니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은 22 절의 세 가지 경우입니다.

형제에게 화를 내놓고 예배드리려고 교회에 왔습니다. 나는 분풀이를 해서 속이 시원합니다. 그렇지만 당한 사람은 마음이 상해 있습니다. 깊은 상처를 받아 아픕니다.

형제에게 욕을 해놓고 예배드리려고 교회에 왔습니다. 그렇지만 욕을 먹은 사람은 약이 바짝 올라 있습니다. 욕한 사람은 쉽게 잊을 수 있지만, 욕먹은 사람은 잊지 못합니다. “날 바보라고 했겠다. 날 미련한 놈이라고 했겠다.” 벼르게 됩니다. 원수를 맺었습니다.

화를 내는 것과 욕을 하는 것은 일종의 보복입니다. 보복은 처음 당한 것보다 더 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나도 속이 상해서 화를 냈고, 욕을 하고 돌아섰는데 당한 형제는 더 괴로워합니다. 욕으로 입은 상처는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으로 형제간에 화목이 깨졌습니다.

일단 화목이 깨지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예물을 가지고 제단에 드려보지만 제사가 되질 않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예배에 참석했지만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찬송을 해도 즐거움이 없고, 기도를 해도 간절함이 없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심령이 닫혀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과의 막힌 관계를 푸는 화목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이 화목의 문제를 풀지 못하면 예배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화목은 선행이 아닙니다. 화목은 기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먼저 화목하라고 말씀합니다.

예배를 드리려고 나왔지만 화목이 깨진 상태에서는 예배가 되질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한 예배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예물을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관심 있는 말씀은 예물을 제단에 두고 가서 화목한 후에 드리라는 것입니다.

어짜피 예배가 안 되니까 예물도 다시 가지고 갔다가 화목한 후에 다시 가져와 드리면 되질 않습니까? 그런데 굳이 예물은 제단에 두고 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화목하는 것이 예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예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화목하는 과정이 바로 예배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배를 통해 예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물이 열납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형제와 원망들을 만한 일을 남겨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화목하기 위해 잠시 제단을 떠나야 합니다. 다시 돌아올 때까지 예배는 연장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물을 받으시기 위해서 기꺼이 기다려 주십니다. 지금 드리고 있는 이 예물이 하나님 기뻐 받으실 예물이 되기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만약 예물을 거두고 다음 기회로 미룬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화목은 결코 미뤄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구와 화목하지 못한 상태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이 즉시 가서 화목하는 일입니다.

화목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내가 미안한 일을 했다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면 어렵습니다. 화목하기 위해 갔다가 더 크게 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다시 네가 틀렸느니, 내가 옳았느니 하면서 따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본인들이 정확하게 내용을 압니다. 내 잘못이 없는 것 같아도 먼저 용서를 비는 것이 큰 사람입니다. 화목이 깨진 것에는 내 잘못이 상당히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가 더 옳은지 틀린지를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입니다. 아직 교만하기 때문에 따지려는 것입니다.

화목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일이 벌어지고 빠를수록 좋습니다. 25 절 말씀에도 “급히 사화하라”고 했습니다. 화목은 먼저 급히 해야 할 일입니다.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작은 앙금이 남아 있는 것도 안 됩니다. 26 절에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즉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화해를 했긴 했는데 마음에 여전히 두고 보자 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화해했는데 멋 훗날 그 이야기가 또 나와서는 안 됩니다. 서로 용서하고 지나간 일은 다시 꺼내서는 안 됩니다. 깨끗하게 지워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로 옹졸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화해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을 닮지 못합니다. 작은 일에도 쉽게 토라지고 삐칩니다. 그리고 여간 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발가벗기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작은 자존심을 내세우며 수치를 견뎌내지 못합니다.

나를 화나게 만든 사람을, 그것도 같은 교인을 응징하면 결국 나도 죽습니다.

양희은 씨의 노래 가운데 ‘작은 연못’ 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김민기 씨가 작사 작곡한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1 절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위에 떠오르고
그몸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죠

상대를 죽이면 결국 나도 죽습니다.

우리가 왜 화를 내고 욕을 하면서 싸울까요? 서로 의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상대가 악하고 욕심으로 가득 차 악의적인 손해를 끼치는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는 처음부터 화를 참을 수 있습니다.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단지 의견이 달랐을 뿐인데···

화해하지 않고 편히 사는 법이 또 하나 있긴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얼굴을 보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서로 떨어져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피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화목을 풀지 않고 잊자는 것입니다. 떨어져서 상관하지 않고 지내면 그것으로 다 될까요?

그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잘 드릴 수 있을까요? 같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면 괜찮습니까? 화목을 해결하지 않은 두 사람은 영원히 위선적인 예배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 사찰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젊은 분이라 때론 약간 혈기를 부릴 때가 있었습니다. 저하고는 직접 부딪친 적은 없었습니다. 저와 함께 있던 다른 목사님에게 대든 적이 있었나봅니다. 크게 싸운 일이 아니라 서로 잊고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몇 년 후에 그 집사님께서 그만 식도암에 걸리셨습니다. 수술을 받고 투병을 했지만 병을 이겨내질 못하셨습니다. 그런 차에 목사실에 전화 한통이 걸려 왔습니다. 그 집사님의 힘없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동료 목사님께 전화를 바꿔드렸습니다. 집사님은 지난 과오를 용서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화목하지 못했던 일이 걸려서 마음 놓고 죽을 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두 분은 전화였지만 너무 진지하게 지난 일들을 서로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집사님은 주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그 집사님이 늦었지만 그 전화를 참 잘하셨다고 느낍니다.

여러분! 교인끼리 화목하지 못한 것은 살인죄입니다. 즉시 먼저 손 내밀고 화목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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