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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부요 (계 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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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영기 목사

라오디게아는 에베소 동쪽 수리아로 가는 간선도로 상에 위치해 있습니다.
기원전 250년경 셀류코스 왕조의 안티오쿠스 2세가 건설한 도시인데 안티오쿠스 2세는 그의 아내 라오디케의 이름을 따라 도시의 이름을 라오디게아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190년 버가모서의 지배를 받으면서 쇠퇴하기도 했으나 기원전 133년 후에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그 반영이 차츰 회복되었습니다. 로마가 경제적 정치적 잠재력을 개발하도록 허락했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가 리쿠스강 유역의 지진지대에 있다 보니까 수차례 지진에 강타 당했지만, 기원후 60년의 지진에 대한 타키투스의 보도에 의하면, 라오디게아는 로마의 재정적 원조 없이도 도시를 재건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부강한 도시였습니다.
그렇게 부요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름진 옥토와 양을 칠 수 있는 푸른 초장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흑색 양모는 라오디게아의 명산물 이었습니다. 특수한 옷과 카펫을 만들어 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재정적 기구들과 은행을 발달시켰고, 기원전 2세기부터 지방의 하천 신과 제의들을 그림으로 새겨놓은 그 자체의 동전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다 의료학원이 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안약을 발명 하는 등 의학적으로도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물이 광천수입니다. 그래서 눈병과 귓병이 많이 생겼고, 일찍부터 안약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곳이 언제부터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골로새서 2:1에 “여러분과 라오디게아에 있는 사람들과 그 밖에 내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내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골로새서 4:13-16, “나는 그가 여러분을 위하여 그리고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수고를 많이 하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의사인 누가와 데마도 여러분에게 문안 합니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눔바와 그 부인의 집에서 모이는 교회에 문안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편지를 읽은 다음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에서도 읽을 수 있게 하고 라오디게아 교회에서 오는 편지도 읽으십시오.”
이 골로새와 히에라볼리는 가까운 도시였고 라오디게아는 히에라볼리의 건너편에 있었습니다. 히에라볼리에는 성 빌립의 교회 터가 남아 있고, 그 건너편에 라오디게아가 까맣게 보입니다. 골로새는 지금 넓은 언덕만 남았고 히에라볼리는 파묵깔래 라는 이름의 온천지역으로 남아있습니다.
라오디게아는 아예 도시 자체의 흔적도 없습니다. 그냥 교회 터라고 여겨지는 작은 터만 남아있습니다. 어떻든 바울이 살았을 때 이미 라오디게아에 기독교 공동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은  “아멘이시오, 신실하고 참되신 증인이신요,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멘’ 이것은 진실을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3:5에서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가 이르나니”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 “진실로 진실로”라는 말이 곧 아멘 아멘 입니다.
그리고 아멘은 순종을 의미합니다. 신명기 27:15-26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며 백성들에게 아멘 하라고 하십니다. 15-26절에서 13번이나 “모든 백성은 아멘하고 응답하십시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아멘 곧 진실하고 죽기까지 순종하신 분이십니다.
“신실하고 참되신 증인”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 주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진리만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성취하셨으며 완성하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모든 증거의 내용이시며 목적이시며 완성자이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것을 있게 하신 분입니다. 천하 모두가 그분은 통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겁니다.
요한복음 1:1-3 “태조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게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고 14절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이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 곧 근원이십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 곧 “아멘이신 분이시오,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시오, 하나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창세기 16장에 보면, 아브람의 아내 사래가 아이를 못 낳게 되자, 자기의 몸종인 하갈을 아브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갈이 아브람의 아이를 잉태합니다. 그러자 하갈이 자기의 여주인인 사래를 깔보았고, 이런 일로 아이를 잉태한 하갈은 사래의 학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 합니다. 사막에 있는 샘 곁에서 하갈은 하나님의 사자를 만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에게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복종하며 살라”고 하면서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갈이 말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 하면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름 지어서 불렀습니다.
“보시는 하나님” “감찰하시는 하나님”
무엇이든 낱낱이 보시고 알고 계시는 하나님.
그분은 여러분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두려움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두려움을 없애 주십니다.
고통 가운데 부르짖는 하갈의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백성을 똑똑히 보시고 억압 때문에 괴로워서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출 3:7). 그래서 하갈에게 위로와 장래를 약속하셨고, 그래서 이집트에서 고통당하는 백성들을 이끌어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은 여러분의 처지와 형편도 알고 게십니다. 여러분의 아픔과 슬픔과 고통과 두려움을 그분은 알고 게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여러분에게 은혜 주시길 원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사랑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을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고, 두렵게 하는 죄와 사망에서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생명을 대신 내어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러분이 구제할 때,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 골방에서 아무도 모르게 기도해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했니 안 했니, 잘했니 못 했니 해도 주님은 여러분이 얼마나 힘써 주님의 일을 하는지 다 알고 계십니다. 작지만, 비록 두 렙돈이라고 하는 별 볼일 없는 헌금이지만, 그것이 그 여인의 생활비 전부라는 것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옥합을 깨뜨려 자신의 발에 부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낭비하느냐고 했지만, 주님은 그것이 곧 자신의 장례를 치르기 위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여러분의 행위를 알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그리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애쓰고 땀 흘리는 것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행위에 대해 반드시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안다고 하는 것은, 좋은 것만 안다는 게 아닙니다. 나쁜 것도 안다는 것입니다.
역대 대통령들의 가장 골칫거리가 뭔지 아십니까? 언론입니다. 어디서 그렇게도 잘 찾아오는지……. 또 알면, 대통령이 잘 하는 것만 이야기해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야 국민들이 대통령을 신뢰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언론이 대통령의 잘못도 들추어내어서 떠드니…….
우리의 중심을 아시는 주님, 우리의 모든 행위를 아시는 주님. 그렇다면 그냥 우리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과 두려움 이런 것만 아셔서 그때마다 은혜와 복을 주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설사 잘못했다가도 얼른 R닫고 주님께 돌아올 것 아니겠습니까? 책망보다 칭찬이 오히려 우리의 임이 될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께서 라오디게아교회를 책망하셨습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은 라오디게아교회의 잘못된 것을 알고 계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잘못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죄 됨도 알고 게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강단의 설교를 통해, 때로는 주님의 종들을 텅해, 때로는 성도를 통해, 때로는 이웃과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책망하시고 권고하십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은혜와 복에 대한 말씀만 듣는 것이 아니라. 책망의 말씀도 들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외쳤던 소리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고 하신 말씀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뭐든 다 잘하는 데 왜 책망하겠어요? 왜 야단치겠어요? 잘못 할 수도, 잘못 할 때도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책망하고 야단치는 겁니다. 그것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교회의 잘못을 책망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다른 여섯 교회에 대한 칭찬과 책망 역시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미워서? 저주하거나 심판하시려고?
아닙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권고하고 격려해서 구원 받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더 이상 죄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기를 원해서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떠난 삶에 머무르지 않기를 원해서 입니다. 그런 자리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생명 가운데 나오라는 겁니다. 그런 자리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나오라는 겁니다.
본문 19절,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하십니다.
그 목적은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야단치고 때리는 것이 재미있어서 하시는 것 아닙니다. “내가 너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하나님이다.” 그런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기 위함도 아닙니다. 누구든지 잘못에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구원과 은혜와 복을 받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런 마음으로 라오디게아를 향한 책망, 곧 오늘을 사는 우리도 능히 그런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책망을 들으십시다.
이 시간, 성령께서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 있는 사람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1) 라오디게아교회는 미지근한 신앙 때문에 책망 받았습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이걸 잘못 해석하면 “신앙생활해도 화끈하게 해라. 하려면 화근하게 하고 안 하려면 때려치우고”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의 신앙상태가 그렇다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라오디게아가 그렇습니다.
골로새에서 흘러오는 찬 물과 히에라볼리 지금 파묵깔래에서 흘러오는 온천수가 만나는 곳에 라오디게아 입니다. 그래서 그 물이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마치 라오디게아 교인들의 신앙상태 같다는 겁니다.
그들의 신앙이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선 한 것도 아니고 악 한 것도 아니고, 기도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인인데 어떻게 보면 전혀 아닌 것 같은……. 성경책 들고 교회 오면 그리스도인 같은데 저 문만 열고 나가면 예수 안 믿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들……. 주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 말 할 때는 그리스도인 같은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뭔가 하면 찾아 볼 수도 없는 사람들……. 회의나 뭐 할 때는 교회가 이래야 한다고 주장해서  진짜 그리스도인 같은데 막상 그 일들 하려고 하면 구경꾼이 되거나 잘 했니 못 했니 비판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미지근한 신앙의 사람들입니다.
19절 권고의 말씀에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말하자면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는 열심이 없었다는 겁니다. 왜 그랬을 것 같습니까?
우린 그렇게 말합니다. 시간이 넉넉하면 시간마다 예배 참석하고 교회 일도 열심히 할 수 있을 텐데……. 사는 형편이 좀 나아지면 예배 참석하고 교회 일도 열심을 할 텐데…….
정말 그런 사람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기를 원하지만 직장 일 때문에 못 나온 사람 있습니다. 그나마 그 직장에서 해고 되면 생활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 두려워 이 시간에도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다 풍성했습니다. 17절, 그들은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도 열심이 없는 겁니다.
왜 그랬을 것 같습니까?
그들에게는 내적인 뜨거운 생명력이 없었던 겁니다.
주님의 은혜와 복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그런 갈급함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든 안 하시든 상관없는 겁니다. 주님께서 은혜와 복을 주시든 안 주시든 상관없는 겁니다. 굿이 신앙생활 열심히 하지 않아도 살아가는데 부족한 것 없는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의 직장생활 어떻게 하십니까? 열심히 하잖아요. 적어도 출근만큼은 제대로 하잖아요. 그런데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직장생활 만큼 하세요? 열심히 하나요? 예배 시간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 하잖아요?
왜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도 직장생활 제대로 하면 먹고 사는 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 건 예수 믿기 때문이 아니라 직장생활 충실하거나 사업을 열심히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 굳이 신앙생활 열심히 할 까닭이 없는 겁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 역시 굳이 신앙생활 열심히 할 까닭을 잃어버렸습니다.
수요일 저녁, 예배드리기 위해 여기 앉아 있느니, 집에서 좀 쉬고 다음날 출근해서 직장 일이나 내 사업에 더 충실히 하는 것이 훨씬 유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주일 아침 여기 예배 참석하셨습니다. 그러니 이 예배가 기쁨이 되었습니까? 감격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무한한 은혜, 새롭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과 위로와 용기를 경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예배를 드려도 기쁨이 없고, 찬송을 불러도 감동이 없고, 말씀을 들어도 맹맹한 겁니다. 아예 지그시 눈을 감고 있거나 졸거나 그러는 겁니다.
이제 교회 바닥 왁스를 칠하여 반짝반짝 빛납니다. 그랬더니 누군가, 내일 목사님 예배 할 때 눈이 부실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 대답이, “매주 예배 때마다 교인들 보면 눈이 부시다.”고 했습니다.
사실, 찬송 부를 때 특히 설교 할 때, 눈 지그시 감고 있거나 조는 사람 있으면 의도적으로 눈을 돌립니다. 그리고 시간 내내 그리로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물론 잠자는 이들을 깨우는 찬송이어야 하고, 잠자는 심령을 깨워야하는 설교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눈을 내려 닫아버린 사람 마음을 닫아버린 사람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겁니다.
보세요. 똑같은 예배입니다. 그런데 누구는 은혜 받고 감격이 있고 기쁨이 있는데 누구는 왜 맹맹합니까?
신명기 6:5,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시편 119:2, “주님의 증거를 지키며 온 마음을 기울여서 주님을 찾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렇게 온 마음을 기울여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예레미야 29:12,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날 것이다. 너희가 온전한 마음으로 나를 찾기만 하면 내가 너를 만나 주겠다.” 그렇게 온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요엘 2:12, “지금이라도 너희는 진심으로 회개하여라. 나 주가 말한다.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그렇게 금식하고 통곡하고 슬퍼하면서 주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나고 그래야 주님의 복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런 뜨거운 마음을 소유하십시오. 그런 열심을 소유하십시오. 아멘

2) 라오디게아 교회에 또 하나 문제는 물질 위주의 신앙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랬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요하고 번창한 도시이기에 교회 역시 부요하고 번창했습니다. 그런데 주님도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실상은 그들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금전적으로, 물질적으로는 부요했지만 영적으로는 대단히 빈곤한 상태였습니다. 화려하고 값진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 마음에는 평안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욕심에 늘 부족하고 뭔가 채워지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마음이기에 더 많이 가지려고 발버둥쳤습니다.
그렇다고 부요한 것이 죄요, 가난한 것이 곧 덕이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부요한 것이 복이요 가난한 것이 저주라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 가진 것으로 스스로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겁니다.
예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겁니다.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라는 겁니다.
그렇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부자들은 자기 가진 것에 만족합니다. 자기가 가진 것에 소망을 둡니다.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 불러갈까 겁이 납니다. 그러면 이 가진 것 다 어떻게 됩니까? 그러니 천국에 대한 소망도, 가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지적하신 겁니다.
그러나 부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역시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의,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면 그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히려 더 큰 주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은 어떻습니까? 가난하기에,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기에 이들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랍니다. 이들의 소망은 힘들고 어려운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렇기에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너희 것이다”(눅 6:20)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 팔자라고 여겨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이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그 사람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신앙은 엉망인데 그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몸이 병들면 재빨리 병원에 가든지 합니다. 몸의 건강을 위해서는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빠삭하게 알아서 먹어야 할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 먹습니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서 합니다. 몸에 좋다는 것은 얼마가 들든 어떤 것이든 구해 먹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병든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 합니다. 스스로 병들었는지 어떤지도 모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는 그야말로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주인 낮 오후 수요저녁예배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조금 형편이 나아지면서 수요예배 아예 안 나오고 심지어 주일가지 빼먹습니다. 신앙이 병든 겁니다.
내 삶은 주님의 도우심이 아니라 내 힘으로 사는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거, 말씀 보는 거, 왠지 싫다기보다 마음이 안 갑니다. 괜히 불평이 생기고, 교인들 보아도 반갑지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이 분제가 아니라 내 신앙이 병들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가지는 보편적 특징은, 자기에게서 문제를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서 찾습니다. 심지어 신앙조차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안 해주시니까 그러는 거 아니냐고 합니다.
정작 자기 자신을 못 보는 겁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잘 보도록 안약을 만들어 팔았지만, 정착 자신들은 자기를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겁니다. 부요라는 것이 꼭 물질적인 것만 아닙니다.
인간관계도 그렇습니다. 어려울 때는 누군가 도와주길 바라고 도와주면 고마웠는데, 좀 형편이 괜찮으면 귀찮아합니다. 저가 날 안 도와주어도 나 혼자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미지근한 것도 그런 겁니다. 이젠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굳이 하나님께 아쉬운 소리 할 것 없다는 겁니다. 굳이 아무개에게 도와 달라 할 것 없다는 겁니다.
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목회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소중히 여깁니다. 또한 성도들이 함께 하지 아니하면 목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도 없는데 믿음이 있는 척 합니다. 주님을 향한 열심은 이미 식어 싸늘하게 되었는데도 여전히 열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는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래서 주님을 찾지도 않으면서도 주님께서 언제나 자기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복 주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합니까?
본문 16절에 보면,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명심하십시오.
행여나 스스로 나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실상 너는 비참하고 불쌍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었다고.
그래요. 우리의 행복은 내가 얼마나 가졌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한 부요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참에 있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려거든 흰옷을 사서 입고,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발라라.” 하셨습니다.
여기 불에 정련한 금이나 흰 옷이나 안약은 어디서 살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게서”
왜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사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멘이신 분이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분이요, 세상 모든 있는 것들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 곧 근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만 있으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 있으면 행복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 함께 할 때 누리는 부요가 진정한 부요인 것입니다.
잊지 말고 기억 하십시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어, 그분을 모셔 들여 그분과 함께 먹는 사람이 정말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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