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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창조적 소수 (민 14:1-10, 마 26: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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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황영복 목사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5.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6. 그 땅을 탐지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하는 동시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수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교회나 단체에 실제로 그들을 이끌어가며, 가운데 일하는 사람은 몇 사람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창조적인 소수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하나님도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의 다수를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창조적 소수를 통해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부정적인 태도를 취해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은 절망의 광야로 회귀, 방황하다가 파멸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어려움이나 문제를 당할 때 그럼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안에서 해결하겠다는 창조적인 자세, 결연한 의지가 필요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교회에 소속된 성도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위해 충성을 다하되 그 중에서도 귀하게 쓰임받는 창조적인 소수가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잘려진 나무의 밑둥치를 그루터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루터기는 쓸모없어 버려진 부분이 아닙니다. 미래를 위하여 남겨둔 희망 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에 사용하기위한 그루터기와 같은 존재, 사명이 있는 사람, 즉 할 일이 있는 사람입니다. 생명이 있는 한 그루터기는 할 일이 있습니다. 새봄이 오면 싹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야 합니다.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추수를 해서는 다음 해에 농사를 지을 씨를 남겨두는데 쓸모없는 것, 있으나마나 한 것은 다 골라 가지고 "이것은 씨앗하자."며, 창고에 두는 농부는 없습니다. 지혜로운 농부는 추수를 해서는 그 해에 가장 알차고 제일 좋은 것, 충실한 것을 다 선별하여 "이것은 종자다. 내년을 위한 씨앗이다."며 보관해 ㅁ놓습니다. 물론 이 종자 씨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이것은 손을 대지 않습니다. 씨앗은 제일 좋은 것을 보존하기에 희망이 있다는 말이요. 다음 해 더 좋은 수확을 기대하고  남겨두었는 말입니다. 왜 그 좋은 것을 남겨 놓았겠습니까? 내년에 농사를 더 잘 지어 좋은 수확을 얻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토인비는 일찍이 "인간의 역사는 많은 사람에 의해 진보하고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소수의 신념과 용기에 의해 이룩된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교훈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벳사이다 광야의 위대한 이적을 일으킬 때에 오직 헌신한 어린아이의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마리로 5,000명을 먹이고도 열두바구니가 남는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오를 저와 여러분을 사용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쓰임 받은 창조적 소수는 누구였습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을 가리킨 말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70년간 노예 생활을 하게 되는 비전 참절한 참성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구원의 노래를 부릅니다. 그가 말한 비통한 일은 죄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요 그의 구원의 노래는 하나님 앞에 신실한 남은 백성으로 인해 생겨진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 남은 백성을 '그루터기'라고 했습니다.

"(사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비록 사랑하는 택한 이스라엘 백성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순종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징계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그 때 이사야가 본 메시지는 그 진노 중에서라도 하나님의 은총은 있었습니다. 범죄하고 벌을 받은 그 무서운 벌속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한 것이 남아있는 그루터기의 은혜였습니다.

나무나 풀의 윗부분은 모두 시들거나 말라 비틀거나 하는 등 다 제거되어 버려도 밑부분 뿌리 부분은 남아있습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오면 다시 새싹이 나고 움이 틉니다. 그런 희망적인 개념을 가지고 남아있는 그루터기에 대한 계시를 이사야가 받은 것입니다. 물론 그 남아있는 그루터기는 소수를 말합니다. 얼마 안되는 수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이 다음 세대를 위해서 거룩한 씨입니다.

"(사28:5)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 남은 백성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남은 자는 분명히 다수가 아닙니다.??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 남은 백성들을 통해 영광을 회복하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바울은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자가 남아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옛날뿐만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도 다 타락하고 잘못된 길로 갈지라도 그래도 남은 자가 있다란 계시를 바울도 받았던 것입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옛날이나 지금이나 분명히 하나님이 이 시대에도 남은 자로 삼아주셨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남은 자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나를 선택해 주셨고,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함께해 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백성 중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바로 창조적 소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진입 과정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홍해를 건너고 40년 가까운 광야의 시련을 겪은 이스라엘은 꿈에도 소원인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원주민과의 격돌에 대비하여 충분한 방안을 모색하고자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한 사람씩을 차출하여 적진을 탐색할 정탐꾼을 조직 파견하였습니다.

이들 열 두명의 수색 대원들이 제출한 보고서는 두 가지였다. 통일된 보고서가 아니고 두 갈래로 갈라진 보고서였던 것입니다. 열 명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당신께서 보내신 땅에 가 보았더니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지방의 과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사는 사람들은 키가 장대 같았습니다. 그리고 성과 도시들은 정말 굉장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지만 그 사람들 보기에도 그랬을 것입니다"(민13:25-공동 번역)

이와 같은 비관적 보고에 접한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옛날 노예 시대, 애굽 생활을 그리워하며 공포에 질려 있었습니다. 이른바 패배주의적 기색에 물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그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이들 가운데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슬픔에 겨워 자신들의 옷을 찢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이런 현실을 목도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울분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민수기 14장 7~10절에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탐지하려고 두루 다녀 본 그 땅은 매우 좋은 땅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주를 거역하지만 마십시오. 여러분은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그들의 방어력은 사라졌습니다. 주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그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온 회중은 그들을 돌로 쳐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고, 그 가장 큰 이유는 '원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했는지 하나님께서 "너희 말이 내 귀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14:28-30)고 말씀대로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수의 의견보다는 소수이지만 하나님 신앙과 용기에 넘친 의견을 따라 가나안에 진입하는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의 말씀이든지 말씀대로 믿고 순종할 뿐 아니라 입술로 죄를 짓지 않을 때 여호수아와 갈렙같이 신령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있기를 복빌어 드립니다. 교회에서도 교회를 다스리는데 민주주의적인 수단을 응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수의 의견을 중요시하여 다수 가결로 안건을 처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수의 의견이 좋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다수의 의결로 결정되는 거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결정되어야 합니다.

브라잇(J. Bright)은 "하나님 나라"라는 명저를 남겼습니다. 그는 이 저서에서 모세의 공헌을 세 가지 측면에서 평가하였습니다.

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
② 하나님을 형상화하지 않았다는 것,
③ 하나님은 인간과 그 역사의 섭리자라는 것을 밝혀 주었다는 점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모두 같은 말을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말과 다르면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르는 결단으로 사시기를 복빌어 드립니다.

3. 예수님 당시에는 향유를 부어드린 마리아가 창조적 소수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감지하고 있을 때 유대인 지도자 시몬의 집에서 저녁 대접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한 여인이 참예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손에 옥합을 들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그 옥합에든 기름을 예수의 머리에 쏟아 부었습니다. 그 기름은 매우 값진 것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제자들은 어찌하여 이 값진 기름을 허비하느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면 얼마나 빛날 일이겠는가? 합리적인 항변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수의 머리에 바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값의 기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초대한 시몬은 이 여인의 정체에 대해 마땅치 않게 여기며 그런 부정한 여인을 상대하는 예수에 대하여 회의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자신은 전혀 다른 견해를 보이셨습니다.

"이 여자는 나에게 기특한 일을 하였는데 왜 괴롭히느냐? 이 여자가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은 나의 장례를 위하여 한 것이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온 세상 어디든지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가 한 일도 알려져서 사람들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마26:10- )

예수는 공개적으로 인자의 고난의 비밀을 세번씩이나 언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직 이 여인 한 사람만이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때를 보아 예수의 장례에 대비하여 향유를 부은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장례 예식에는 도유식(塗油式)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법정에서 반로마, 반체제 인사로 처형될 예수의 장례가 격식대로 이루어질 수 없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으나 이 여인은 예수의 생전에 도유식을 행하는데 쓰임 받은 창조적 소수가 되엇습니다.

신학자 틸리히(P. Tillich)는 이 여인의 행위를 "거룩한 낭비"라고 정의했다. 이 거룩한 낭비가 역사의 추진력이었다고 규명했습니다.

역사가 토인비(A. Toynbee)는 인류의 구원은 바로 이 여인과 같은 사람들에 의해 성취된다고 말하였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이 여인과 같은 전적인 헌신의 사람들에 의해 존속되었고 또 부흥되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인자의 고난의 비밀에 대한 예수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에 대비하여 향유를 쏟아 부음으로써 주님의 장례를 위해 큰 일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 결과도 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 뜻을 몰랐지만 이 여인 한 사람만은 예수의 말씀의 뜻을 헤아려 그에 대비하며 살았습니다.

4. 초대교회는 바울과 바나바가 창조적 소수였습니다.

바울은 "예수-그리스도 구원론"을 체계화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그의 신앙과 사상에 근거하여 신약성서는 집필되고 편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의 전반부는 반 그리스도적인 삶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유대인들은 바울의 전도에 반기를 들었으며 심지어는 살해 모의까지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는 반 그리스도 박해 운동에 주력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항거하여 사울이 바울이 되는 다메섹 사건을 입증하며 바울을 보호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다메섹 사건의 진실을 믿고 바울을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옹립하였습니다. 바울 이전의 사울에 대한 선입관 때문에 다메섹 사건 이후의 바울을 버리려는 유대인들에 대항하여 바울을 지켜 준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역자가 되어 그리스도교의 기틀을 다진 것입니다.

바울의 배후에는 두 사람의 인격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예수요 다른 하나는 바나바였습니다. 예수는 바울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불러내시고 바나바는 그의 보호자가 되고 그의 길잡이가 된 것입니다.

바나바가 바울을 보호하는 일은 아무도 찬동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위험만이 뒤따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하나님의 역사에 충실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바울을 지켜 주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 만남이 없었던들 오늘의 바울이 있을 리 없는 것처럼 바나바 없는 바울은 상상 조차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바나바로 말미암아 성서적인 인물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위대한 인물의 배출에는 그만한 조언자 숨어 있게 마련입니다. 그 조언자들은 많은 적대자들의 오해와 반대에 부딪치며 그 일을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진실이 이 땅에 구현되며 위대한 인간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 선교에 있어 바울이 없는 그리스도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역사적 예수가 그리스도로 승화 인류의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된 것은 바울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다메섹 사건과 바나바는 그리스도교 선교사도 기둥이라 해도 과장된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렘48:10)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뜻을 받드는 자의 자세를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말씀도 제대로 받지 않고, 그러니 하나님의 일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선과 차선을 가리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먼저하고, 하나님의 일을 태만히 행했던 것입니다. '태만'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고 버릇과 예의가 없이 제 마음대로 함부로 날뛰고 말을 지어내는 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을 태만히 하면 저주를 받고, 방자히 행하는 자 또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신18:20).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과 귀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의 말하는 것을 다 듣고 아시기 때문에 들으신대로 반드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선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눅12:2-3)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반드시 심은 것은 열매로 나타납니다.

가나안 진입에 있어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생활 중에홍해 바다의 구원,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 마사와 메추라기의 공급, 반석에서의 생수가 나게 하며, 의복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는 축복을 체험했습니다(신8:4, 29:5, 느9:21).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못하고 원망함으로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 중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은 넉넉히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견고하게 주의 일에 항상 힘쓰는 자들이 되어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신령한 가나안 땅에 다 들어가는 창조적 소수가 되시기 바랍니다(고전15:57-58).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그의 몸에 부은 여인 처럼, 바울을 그리스도의 참 증인으로 끝까지 비호해 준 바나바의 경우 하나의 공통점은 그들은 다수 편에 서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신앙대로 실천하고, 믿음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입니다. 위험에 직면하여도 오직 믿음으로 실천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확고부동한 신뢰는 옛날에서만 필요한 것만이 아니라 이제 우리에게도??요청되고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광대하심과 그 선하심을 믿는 신앙의 힘이 사명이 있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남은 그루터기 즉, 창조적 소수가 되기위해서는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명감은 미래를 여는 에너지입니다. 사명이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전도를 잘하는 사람도 사명자요, 봉사를 잘하는 사람도 사명자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도울 줄 아는 사람도 사명자요, 천국과 영생에 소망를 가지도록 지도하고 진리를 잘 가르치는 사람도 사명자요, 기도 열심히 하는 자도 사명자입니다. 나는 무슨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자기 사명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 주어진 직분과 사명을 위해 헌신할 줄 모르는 사람은 참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 어지럽고 중요한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남겨 둔 그루터기가 되지 못한다면 신앙생활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미스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충성하고, 헌신하는 자리에서 뒤로 물러서는 것이 아니고 사명감을 가지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에 헌신하는 챤스가 올 때에 창조적 소수처럼 이렇게 귀하게 앞장서서 쓰임 받을 수 있기를 복빌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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