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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절하고 싶은 사람 (창 37: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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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자식을 향하는 부모의 자리는 하늘에까지도 올려 놓고 싶으며 지구의 끝까지 달려가서라도 자식을 세워주고 싶은 것입니다. 무엇이라도 해줄 수 있을 뿐 아니라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다보니 자녀를 향한 부모의 기대는 당연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대라기보다는 자신의 생명줄을 잡고 태어난 자식이기에 세상에서 축복된 존재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가장 순수한 인간의 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순수한 인간의 자리가 욕심으로 자리를 잡을 때에 많은 부작용이 일어나기도 하고 벗어버릴 수 없는 굴레속에 가두어 버리기도 합니다. 본문의 사건을 통해 부모가 자식에게 진정으로 기대해야 되는 것이 무엇이며 그 자리가 어디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진정으로 기대해야 하며 세워주어야 하는 자리는 정말 절하고 싶은 사람으로 세상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당신들의 단이 내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해와 달과 열한별이 내게 절하더이다"라고 하나님이 요셉의 꿈속에서 미래를 열어보이신 것은 절을 받는 자리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성도로 하여금 세상에서 절하고 싶은 사람의 자리에 세우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형들이 미워하는 세상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절하고 싶은 세상이 더 넓어질때 이것이 축복이며 나하나의 존재가 세상을 복되게 할 수 있습니다. 절하고 싶은 사람처럼 자랑스런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이런 자리가 있음을 믿고 우리 자녀를 이렇게 세우는 자가 됩시다.

1. 꿈을 품고 살아가게 해야 합니다(5, 9, 창42:9).

  꿈이란 미지의 세계속에 나를 위한 자리 곧 미지의 세계를 열어가는 인생의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꿈이 없는 자리는 자신의 자리를 잃어 버린 것이요 설계도 없이 집을 짓는 자와도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가 불확실하며 찾지 못하는 사람을 일컬어 이방인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의 자리를 가장 존귀하게 하며 자신의 삶을 복되게 하는 것은 자신이 선택받은 존재임을 자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자리는 넓은 영토의 문제가 아닌 것이며 자신의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인생이 이방인처럼 되는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에게도 소망이 있으며 자신이 사랑의 존재 곧 자신이 사랑의 대상이기도 하고 사랑을 받은 자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을 아는 것이 선택받은 자리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요셉이라는 청년은 그야말로 버려진 존재요, 아무렇게나 대해도 전혀 항변할 수도 없는 비인격적 존재로 밀쳐진 상태에서도 오직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은 이방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자 곧 선택 받은자인것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품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꿈의 내용이 바로 절하고 싶은 사람의 자리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꿈이 있었기에 어떤 고통의 자리도 이겨내며 성실하게 자기 관리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꿈을 현실에서 보았다고 했습니다. 지금도 성경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하십니다. 그곳에는 성도를 위한 꿈이 있습니다.

2. 하나님앞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찾아가야 합니다(창39:9).
 
  인간의 자리에 벗어 버릴 수 없는 굴레가 있는데 그것은 상대적 갈등입니다. 이 상대적 관계속에서 생겨나는 갈등이 한을 품게 만들고 인간 삶을 깊은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족쇄를 채워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임을 우리는 바르게 인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자리에서 신음한 대표적인 사람이 본문에 나오는 요셉이라는 사람입니다. 인격적으로 볼 때에 형들보다 더 나은 인격의 소유자였고, 능력으로 저울질 할때에는 어떤 동료보다도 우월하고 주인보다도 더 지혜가 있었으며, 인간관계의 적응력에 있어서는 그 누구도 따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도록 영향력을 보여준 사람이 요셉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렸고, 주인의 노리갯처럼 여김을 받았으며 신분이 자신보다 천하다고 하여 은혜를 헌신짝 버리듯이 버림을 받는 자리에 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이런 관계속에서 맺힌 한은 풀릴 수가 없었고, 그때 입었던 상처는 치료가 불가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요셉은 사람앞에서 자신을 찾으려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앞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찾았기에 원한이 자리잡지 못했고, 상처는 치료를 받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곧 성도의 문제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문제라는 것임을 분명히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앞에서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을 때에만이 참된 삶이 있는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하는 하나님앞에서의 요셉은 절하고 싶은 사람이었습니다.

3. 하나님이 함께 하는 복을 크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창39:2-3, 창41:38).

  인간 세상에서 자기 자신이 무시당한다고 생각되었을 때에 그것 처럼 서글픈 자리는 없는 것입니다. 무시 당한다고 자신이 느끼게 된다는 것은 자신이 힘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단체나 할 것 없이 힘이 없으면 세움을 받을 수가 없지만 힘이 있는자는 설령 변두리에 있는 사람일지라도 중심에 그를 세워 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의식구조속에는 힘을 길러주기보다는 기를 세워주려고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투자를 한다는 것입니다. 힘을 길러 주는 데는 반드시 길이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 힘을 길러주는 길을 제시하시기를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잠3:4)"고 하신 것입니다. 그 지혜의 근본을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요셉은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는 복을 크게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복을 크게 본 요셉의 삶의 철학은 오직 하나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으며 매사에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산 것입니다. 그 결과 주인이 요셉에게 하나님이 함께 함을 알았고, 임금도 요셉을 그렇게 세워준것입니다. 그래서 노예의 자리에서도, 죄인의 신분이었을지라도 절하고 싶은 사람으로 요셉을 세워주었습니다. 그 요셉을 집안 온 식구가 절했고, 온 나라 백성이 절한 것입니다. 그 자리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복을 크게 본 것입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복을 가져야 합니다.

결  론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믿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산다면 요셉처럼 내 자녀로 하나님의 세계속에서 자신을 찾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절하고 싶은 사람으로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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