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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내 아들아 (잠 23:15~19, 딤후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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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성희 목사

  5월은 가정의 달이며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어린이들이 지혜로운 어린이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린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지혜가 많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안고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도 어린이들을 많이 안아주고 복을 빌어주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어린이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어린이가 되고 우리에게도 사랑받는 어린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새 교황의 교황명이 ‘베네딕토 16세’라고 합니다. 인터넷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새 교황이 베네딕토 16세이다. 나하고 나이가 같네. 어쩌면 그 어린 나이에 카톨릭의 수장이 되었을까?” 우리 어린이들이 어린 나이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지혜가 풍성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라 국가의, 사회의, 교회의 꼭 필요한 인물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마태복음 7:11에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자녀에게 무엇을 줄까요? 자녀들에게 주고 싶은 가장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좋은 것을 자녀에게 주는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 아들아”란 말은 구약에 흔한 표현입니다. 특히 잠언에 많이 등장하는 표현입니다. 원래 이 말은 스승이 제자를 부르는 칭호라고 합니다. 잠언에만 13번이나 나오는 “내 아들아”라는 말은 스승이 제자에게 부르는 칭호 이상으로 부모가 자녀에게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아버지라고 하는 단어는 부모를 지칭합니다. 아들이라고 하는 단어는 자녀를 지칭합니다. 당시의 남성 중심 사회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꼭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말이라고 해도 됩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을 적은 어느 쪽지를 봤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녀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너무나 평범하고 상식적인 말입니다. 우리 사회가 이런 평범한 상식적인 삶을 살고 있지도 못하다는 말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아들, 딸에게 편지를 써본 일이 있습니까? 있다면 언제였습니까? 요즘은 편지 쓰기도 힘들어요. 편지 쓰기 싫으니 메일이나 보내고, 휴대전화로 문자 메시지나 보내지요. 문자 메시지는 21세기의 새로운 공해로 등장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하루에 약 8,000만건의 문자 메시지가 전달된다고 합니다. 한번에 20자라고 가정할 때 하루에 16억 글자가 공중에서 떠도는 셈입니다. 문자 메시지도 좋지만 편지 한번 써보세요. 아들, 딸에게 편지로 부탁하고 싶은 말, 위로하고 싶은 말을 써보세요. 아이들도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한 농부가 아들들에게 너무 심하게 농사일을 시키는 것을 보고 이웃 농부가 농작물을 키우기 위해 아들들에게 그렇게 심하게 일을 시킬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농부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농작물을 키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들을 키우고 있소”. 우리의 자녀를 잘 키워야 합니다. 특히 신앙적으로 키워야 합니다. “내 아들아”라는 말씀을 통하여 아이들에게 주신 성경적 교훈을 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지혜를 얻기 원하는 아버지의 소망입니다.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라고 합니다. 자녀의 지혜는 부모님의 즐거움입니다. 요즘의 부모님도 그렇습니까? 요즘 부모님들은 자녀에게 지혜보다 지식을 강요합니다. 공부 잘하고, 명문대에 입학하라고 주문합니다. 지식을 최고로 여기기 때문에 지혜는 자리에서 밀려납니다. 부모가 지혜를 원치 않고 지식 원하는데 자녀가 지혜 얻을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세상을 사는 데는 지식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고3보다 더한 것이 고3 어머니 병이라고 합니다. 수능 수험생 어머니들은 1년 내내 고3처럼 생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어머니들은 자녀들의 성적에 따라 자신들 인생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너무 지식만을 추구하고 살다보니 이에 대한 역기능들도 많이 나타납니다. 얼마 전에는 과학고 학생회장이 자살하였습니다. 성적 문제인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는 고3학생이 시험 도중에 투신자살하였습니다. 부정행위 때문에 꾸중을 들은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사실은 꾸중이 아니라 성적에 대한 압박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최고의 지혜, 참 지혜는 자신과 하나님을 참되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가련하고 상실된 죄인들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하시려고 열망하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아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혜는 분별력입니다. 지혜란 히브리 단어로 ‘살아가는 기술’이란 뜻입니다. 지혜는 삶의 분별력입니다. 어떤 것이 참 삶인지 분별하는 기술이 지혜입니다. 지혜란 라틴어로 sapere 즉 음미하다 또는 맛보다 라는 뜻입니다. 지혜는 삶을 음미하는 것이고 살아가는 기술을 의미합니다.

  지혜는 고난 중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독일 베를린의 막스플랑크 교육연구소는 15년 동안 1천명을 대상으로 나이와 지혜의 연관성을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연구를 통해 지혜로운 사람들이 갖는 몇 가지 공통점을 밝혀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역경을 극복했거나 고난을 체험한 경험이 있습니다. 둘째,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경험이 있습니다. 셋째, 일찍 인생의 어두운 단면을 체험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연구소는 결론으로 인생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혜를 얻는다고 발표했습니다. 지혜는 인생을 깊이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혜는 삶과 죽음의 의미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스 철학자들도 지혜의 삶이란 곧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현대의 예민하고 고상한 이교도들은 죽음으로 들어서는 삶으로 들어가는 자상의 신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살면서도 죽음을 준비하고 압니다. 죽음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는 준비된 자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로리 베스 존스는 ‘청바지를 입은 예수’에서 “지혜는 침대에서 흔들어 깨워야 하는 사람들을 방문하지 않는다. 지혜는 준비되고 그 음성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과 만나 이야기할 것이다”라고 합니다. 지혜는 준비된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값싼 것이 아닙니다. 이런 지혜가 우리 아이들에게 충만하여 세상을 지혜롭게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여호와를 경외하기 원하는 아버지의 소망입니다.

  “네 마음으로 죄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경외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존 파이퍼는 “하나님은 하나님이길 좋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토미 테니의 최근의 책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굶주린 예배자’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모세는 심지어 이적이나 은사도 갈구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하나님을 원했다. 하나님에 대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알기를 갈망한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하여 압니다.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사가 아니라 은사 주시는 분을 갈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을 갈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일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중심의 삶이어야 합니다.
  경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경외하는 말은 성경에 170번 나옵니다. 경외가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경건한 두려움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을 깨달았을 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시편 34:9에는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라고 합니다. 잠언 19:23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시편 128:4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고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경외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경외는 복의 비결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복 받으리라고 합니다. 부족함 없으리라고 합니다. 생명에 이르리라고 합니다.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건지시리라고 합니다. 도와주시리라고 합니다. 언약을 보이리라고 합니다. 살피리라고 합니다. 주께 돌아오게 하리라고 합니다. 칭찬을 받게 하리라고 합니다. 경외하는 자에게는 한결같이 나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경외하여 얻는 것은 수십 가지에 달합니다. 경외하는 자에게는 축복이 쏟아집니다. 이런 축복이 있는데 어찌 신앙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라지 않겠습니까? 자녀가 하나님을 잘 경외하기를 바라세요. 성경에 열거된 그 복만 받아도 세상 사는데 걱정이 없겠습디다.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대통령은 “이웃이 일자리를 잃으면 경기 침체지만 자신이 잃으면 공황이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여호와 경외만 하면 경기 침체, 경제 공황 이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런 세계적인 문제는 문제도 아닙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이런 형통함이 있습니다.

셋째, 바른 길로 인도하기 원하는 아버지의 소망입니다.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할지니라”고 합니다. 지혜를 얻으면 바른 길로 갑니다.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바른 길은 바른 곳으로 인도합니다. 지혜로운 아이는 이렇게 바른 길을 갈 줄 압니다.
  바른 길을 가는 것은 가야 하는 길을 아는 것입니다. “길이 아닌 곳에 가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엉뚱한 사람들은 길이 아닌 곳이 더 재미있다고 합니다. 지난번 이집트에 갔을 때 사막에서 오프 로드로 달려보니 그 것 참 재미있습디다. 이것이 인간의 그릇된 본능인 듯싶습니다.

  토저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만 이미 약속된 길을 걸을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도 사람들의 인정 여부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갈 길을 가셨습니다.
  도덕적 길은 명확한 길입니다. 상식이 통하여 모두가 공감하는 길입니다. 길을 묻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안내할 사람은 없습니다. “이 길을 따라 200미터 정도 내려가지 말고요. 그런 다음 모퉁이의 주유소에서 왼쪽으로 돌지 말고요. 경사진 길을 따라 올라가면 슈퍼마켓이 있어요. 거기서 왼쪽으로 돌지 말고요”. 우리들 대부분은 무엇을 하겠다 보다는 무엇을 하지 않겠다는 전제하에 일하려고 고집한고 합니다.

  신문을 볼 때마다 경악스런 일들이 늘 있습니다만 지난 주간엔 정말 엽기 부인 이야기가 났습니다. 20대의 이 여인은 남편의 눈을 찔러 살해했습니다. 둘째 남편도 눈을 찔러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보험금 6억을 타내어 마약에 탕진했다고 합니다. 길을 잘못 가도 한참 잘못 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른 길은 영적인 길입니다. 노무라 마사키의 ‘내 하루의 도둑맞은 58분’이란 책에 보면 술자리에서 악마의 유혹만큼 위험한 세 가지 ‘더’가 있다고 합니다. “한 잔만 더, 한 집 더, 한 곡 더”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더’라는 말이 나올 때가 가장 기분 좋은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늘씬하고 예쁜 여인을 의미하는 사자성어가 무엇인지 아세요? “쭉쭉빵빵”이랍니다. 이 말이 할머니에게 해당되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왜 할머니에게는 해당되지 않고 젊은 여성에게 해당되는 말입니까? 쭉쭉빵빵은 얼마 못 간다는 말입니다. 얼마 못 간다는 말은 지혜로운 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지혜가 있어야 지혜롭게 선택합니다.

  디모데후서 2:1에는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라고 합니다. 지혜는 은혜 가운데 강하게 합니다. 강하게 하는 것은 지혜 밖에 없습니다. 지혜로 강한 우리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

  뉴욕의 한 에이즈 병원이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세운 병원입니다. 젊은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 죽음을 기다린다고 하여 수녀가 가 보았더니 그의 눈은 생을 마감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제 아버지의 용서를 받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습니다”. 수녀는 수소문하여 아버지가 있는 곳을 알아내어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병실에 들어온 다음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껴안고 “내 아들아, 내 사랑하는 아들아”를 외쳤습니다. “아버지, 저를 용서해 주세요”. 두 사람은 서로 부드럽게 안았습니다. 두 시간 뒤에 그 젊은이는 눈을 감았습니다.

  자녀에 대한 사랑이 변화시킵니다. 내 아들에게 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내 아들이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내 아들이 바른 길 가기를 바랍니다.

  내 사랑하는 자녀에게 사랑으로 권면하므로 우리 자녀가 지혜가 풍성하게 자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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