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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돌이켜, 내 이름으로 (마 1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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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 : 이용호 목사

설교내용  어린이주일은 한국교회에 정착된 기독교 명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미국이나 일본에도 어린이날이 있고 선진국일수록 어린이를 위한 날과 프로그램이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저는 해마다 어린이주일을 맞이하는 이 계절에 여러분들에게 밝고 명랑한 통계보다는 부정적이고 어두운 통계를 말씀드리는데 대해서 늘 부담을 느낍니다.

  금년에도 신문이나 TV에서 여러 가지 가정에 관한 문제를 알려주는 가운데 부모의 이혼으로 인하여 고아가 되는 아이들이 통계상으로 8,000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가출로 인하여 아이들이 고아가 되는 것도 점점 늘어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가출하는 현상으로 인하여 남아있는 아이들이 고아가 되고 부모의 이혼으로 인하여 양육을 책임지는 경우도 있지만, 양쪽에서 양육을 포기함으로서 고아가 되는 숫자가 점점 늘어납니다. 아동학대도 줄어들지 않고 점점 늘어납니다.

  가정의 보배

  이런 사회적인 환경 속에서 금년에도 어린이주일을 맞이합니다. 우리는 어린이주일을 하나의 절기로만 지키고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이번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 교훈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우고, 어린 세대를 위해서 교회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다시 한번 새겨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로마의 귀부인 코벨리안은 우리에게 감동적이고 교훈적인 일화를 남겨주고 있습니다. 로마의 귀족들은 서로 돌아가면서 파티를 엽니다. 로마의 귀족 가운데 티벨리우스 크락쿠스라는 유명한 귀족은 귀족 중에도 가장 존경을 받는 귀족이라고 합니다. 특히 그의 부인 코벨리안은 로마가 자랑하는 귀부인 중에 한사람입니다. 한번은 코벨리안 집에서 파티가 열렸는데 귀족들의 파티에는 반드시 보석을 자랑하는 순서가 있답니다. 한달 동안 선물받은 보석을 자랑하는 순서가 있는데 그날도 많은 귀족들이 보석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주인되는 코벨리안은 보석자랑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옆에서 모든 귀족들이 권했습니다. "당신도 보석을 자랑하시오"하고 하도 권하기 때문에 마지못하여 보석을 가지러 옆방으로 갔습니다. 거기 모인 수많은 귀족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코벨리안의 보석이 무엇인지 기대를 하였습니다. 코벨리안은 두 아이를 데리고 와서 "이 아이가 우리 집의 보석입니다. 내가 자랑할 것은 이 두 아이밖에 없습니다." 온 청중들은 물 끼얹은 듯이 조용해지면서 숙연한 모습으로 파티가 마쳐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아이는 우리 가정의 보배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아이들이 가정에서 부모로부터 학대를 받고 있고 망가져 가는 가정 속에서 가장 큰 피해자로 어린아이에게로 닥쳐오는 이런 현상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셨고 아이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좋은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서로 "누가 크냐?"고 시비를 했습니다. 이때 주님은 한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돌이켜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이 메시지에서 세 가지 당부를 하셨습니다.

  어른의 거울

  첫번째는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른의 거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어린아이를 거울로 가운데 세워놓고 가르쳤습니다. 제자들을 향하여 "이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시는데 그 앞에 강한 말씀을 한마디 하셨습니다.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돌이켜'라는 이 말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용어입니다. 헬라 말의 뜻을 보면 '뒤로 돌아서라'는 말입니다. 지금 네가 가고 있는 방향이 잘못되었으므로 뒤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잘못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생각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이 잘못되었습니다. 제자들의 행동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주께서는 돌이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의 생각, 행위, 말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돌아서되 어린아이처럼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하나의 모델입니다.

  세 가지 성품

  예수님이 보신 어린아이는 어떤 모습이기에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고 하셨는가? 어린아이가 갖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어린아이는 정직하고 순수합니다. 어른들은 순수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욕심을 가지고 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사물을 그대로 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욕심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생각과 정서가 순수하지 못합니다.
  둘째, 어린아이들은 겸비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과 같이 있으면 나도 어른만큼 안다고 나서는 아이가 없습니다. 아이들은 어른 앞에 가면 나는 어른보다 힘이 없고 알지 못하고 약하다는 것을 알고 어른 앞에서 자세를 낮춥니다. 어린이가 갖고 있는 겸비함, 이것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셋째, 어린아이는 어른의 말을 순종합니다. 교사가 하는 말을 순종합니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갖고 있는 본성의 특징은 순수함, 겸비함, 순종함입니다.

  이 말을 제자들에게 적용을 시켜보면 제자들은 순수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다. '누가 크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오만합니다. 그들은 지금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에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돌이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하면서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도 어린이를 영적인 거울로 세워놓고 어린아이와 같이 돌이키기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방향이 잘못된 것이 있습니다. 생각, 행위가 잘못된 것이 많습니다. 이것을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지난 이라크 전쟁 때 뉴스에 온갖 장면이 많이 비추어졌습니다. 가장 인상깊게 본 한 장면은 후세인 동상을 무너뜨려 이라크 시민들이 동상 위에서 뛰고 환호하고, 어떤 시민은 신발을 가지고 후세인의 머리를 치면서 열광하고 환호하는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다 떠난 후에 일그러진 동상, 망가진 후세인의 두상 위에 헌 신발짝 하나를 올려놓은 모습을 사진기자가 잡아서 비추었습니다.

  위험한 성문화 신호들

  여러분, 고대사회 특히 중동사회는 전통적으로 가장 천한 노예들을 벌줄 때 상전이 신발을 가지고 때립니다. 노예 외에는 신발로 때리는 법이 없습니다. 매 보다도 더 천한 것이 신발로 맞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신발을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는 것은 강렬한 메시지를 전해주는 것입니다. 이 후세인의 처참한 모습, 기세 당당한 후세인의 종말이 우리 앞에 비춰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 앞에서 돌이킬 줄 모르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언젠가 심판할 날이 온다고 경고합니다. 돌이켜야 합니다. 그날이 오기 전에 돌이키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아주 부담스러운 모습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청소년을 보면 두 가지 큰 부담을 느낍니다.

  첫째, 타락한 성문화의 환경입니다. 인터넷 사이트 속에 나타난 성 개방의 현상, 우리주변의 성 개방의 현상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교수, 의사, 목사 모두 예외가 없습니다. 이렇게 PC방이 많은 나라가 없습니다. 청소년들이 문만 열고 나가면 성적 유혹 앞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어른들이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성적인 문화를 매매할 수 있는 성 매매가 가능한 나라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안전지대가 없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기차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는데 창 밖을 보니 수없이 많은 러브호텔이 있었습니다. 러브호텔이 삼천리 금수강산에 산골짜기마다 없는 곳이 없습니다. 농촌에 가보면 다른 것은 못 찾아도 러브호텔은 보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러브호텔이 철도변에 있습니다. 이런 문화 앞에 우리 아이들이 크고 있습니다.

  위험한 폭력문화의 신호들

  또 하나는 폭력문화입니다. 버스 안에서 폭력사건이 나서 버스 기사가 맞아 죽었습니다. 그 폭력을 휘두른 사람들이 20대입니다. 이 젊은이들이 시한폭탄처럼 어디서 터질지 모릅니다. 폭력문화가 우리 사회에 큰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미국 캔사스시티는 유명한 레슬링 대회가 열리는 곳입니다. WWE라는 레슬링 대회입니다. 미국의 프로 레슬링은 굉장한 스포츠 시장입니다. 거기에 중계되는 필름들이 세계에 중계됩니다. 우리나라 스포츠 케이블에도 계속 나옵니다. 그런데 야구는 베리본즈, 농구에 마이클 조던, 골프에 타이거 우즈 같은 스타들이 있듯이 레슬링에도 스타가 있습니다.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별명이 알려져 있습니다. '푸른 악마'라는 스타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나오면 열광을 합니다. 그런데 99년도에 이 사람이 시합을 하다가 실제로 링에서 죽었습니다. 사고로 이 선수가 죽었는데도 관중들은 쇼하는 줄 알고 열광을 했습니다. 지금 죽어서 실려 나가는데도 쇼라고 열광을 했습니다.

  관중들은 더 폭력적이고 더 잔인한 장면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 레슬링 게임이 상상을 초월하는 게임으로 돌변합니다. 무기를 등장시키는 게임도 중계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격투기라는 것이 생겨서 올림픽 종목까지 등단할 추세에 있습니다. 지난번 아시안게임 때 격투기가 채택되었습니다. 이 격투기는 한계가 없는 폭력 스포츠입니다. 격투기는 주먹, 팔 등 사용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넘어진 상대를 무참하게 공격을 합니다. 머리에 피가 흐르는데도 발길질을 합니다. 게임 룰이 이런 것을 말리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너무 끔찍한 스포츠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격투기 동호회 회원이 40,00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제는 점잖게 싸우는 종목은 시시해서 보지 않습니다. 로마시대 격투기로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싸우는 분위기를 방불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폭력문화와 성 개방문화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크고 있습니다. 심각한 도전 앞에 있습니다. 이런 때 어린이주일을 맞이하는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영접하라는 것은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접하고, 이 아이들을 말씀으로 기르고 가르치고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부모님 되신 여러분, 여러분 가정의 아이들을 위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용납하고 가르치고 축복하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인이다

  이제는 어린아이 속에 예수님이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로 떠내려 갈 지 모르는 시대입니다. 그래도 우리 아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무장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아이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사창가에 던져놓아도 제 갈 길을 찾아서 갈 줄 믿습니다. 그 길 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자녀들 위에 축복기도를 많이 하는 부모님이 되기 바랍니다. 우리 부모님의 축복기도가 아이들을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방어가 되는 최고의 영적인 울타리가 되는 줄 믿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양육하는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교회는 자라는 세대를 교육하기 위해서 많은 투자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을 그들 속에 심어주어야 합니다. 예수가 그들 인격 한 가운데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길이 없습니다.

  "아이들을 용납하고 인정하지 말라" 이 말은 우리는 아이들을 용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성적이 안 나와도, 시험 쳐서 낙방을 하더라도 우리는 아이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용납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성적을 잘못 받아 오면 부모가 어떤 반응을 일으킵니까? "너 이래서 대학 가겠나?" "대학도 못 가서 사람 노릇하겠나?" "너 인생 낙오자 된다" 전부 경고성 이야기를 합니다. 아이들이 바라는 대답은 이것이 아닙니다. 선생님 앞에, 친구들 앞에 보여주지 못하는 성적표를 안고 마지막으로 부모 앞에 내어놓고 위축되어 있는 이 아이 앞에 부모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주로 공갈, 협박, 명령, 경고입니다. "그래, 성적이 안 오를 때도 있어. 시간이 많이 있으니 차츰 나아질 거야" 이런 말이 부모의 입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성적 만능주의의 교육현장에서 우리 아이들을 보면 참 애처롭습니다.

  독일, 프랑스, 영국, 우리나라 학생이 번지점프 대회를 했습니다. 300m가 되는 높은 다리에서 뛰어내리는 대회를 했습니다. 독일 학생이 겁이 나서 못 뛰었습니다. 그때 심판관이 "야, 명령이다" 하니까 뛰어내렸습니다. 독일 군인은 명령 한마디에 죽고 삽니다. 영국학생이 또 못 뛰어내렸습니다. 그때 "이봐, 신사체면이 그럴 수 있어?" 하니까 뛰어내렸습니다. 프랑스 학생에게는 "이봐, 저 창공을 봐. 근사하잖아. 저 무드를 살려봐" 하니까 뛰어내렸습니다. 한국학생이 올라왔습니다. 한국학생은 '명령이다' '신사체면이 있지' '무드를 살려봐' 해도 꼼짝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야, 성적에 반영한다"고 하니까 뛰어내렸다고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어린아이들을 영접하라" 여러분, 아이들을 영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의 잘못하는 행위를 쉽게 인정하고 타협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거꾸로 합니다. 아이들에게 막말을 합니다. 아이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쉽게 용납합니다. 아이들을 용납하기는 하되 그 아이의 잘못된 생각이나 행위는 선을 그어놓고 아이를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는 자식들에 대한 정서에 한계가 없습니다. 화란에서는 아이가 넘어지면 아이를 일으켜 주지 않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일어날 때 부모가 가서 안아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가 넘어질 새라 번개같이 달려가서 일으켜 줍니다. 넘어졌는지 의식도 하기 전에 일으켜 줍니다. 넘어진 순간에 아이가 뭔가 의식할 것입니다. '혼자서는 못 일어나겠구나' '부모님이 일으켜 주어야 할텐데'라는 위기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고 나면 '아, 고통도 덜하고 혼자 일어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그런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기다릴 줄 모릅니다. 사랑은 하되, 용납은 하되, 선을 긋고 타협하지 않을 것은 타협하지 않아야 합니다.

  맺는 말

  소자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은 훌륭한 잠재력이 많이 있습니다. 훌륭한 법률가, 교사, 정치가, 기업가, 훌륭한 미래의 인물이 키워질 잠재력이 있습니다. 이제는 별 소망이 없는 우리 어른들이 무궁 무궁진한 잠재력을 업신여기고 멸시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를 멸시할 수 없습니다.
  어린이주일, 우리는 두 가지 방면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린아이를 우리의 거울로 삼고 우리의 부정직과 교만과 불순종을 돌이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이 아이들을 가르치고 용납하고 축복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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