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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하나님의 계명 대(對) 사람의 유전 (마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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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우리나라가 I.M.F.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신조어들이 많이 생겼는데 그 중에 하나가 ‘생계형 도둑’이란 말이었습니다. 즉 전문적으로 도둑질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장 먹고 살기 위해서 평소에 하지 않던 잔도둑질을 조금씩 하게 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생활이 어려워지다 보니까 수퍼마켓에서 음식물을 훔친다든지 남의 차의 휘발유를 자기 차에 슬쩍 뽑아 넣는 이런 ‘생계형 도둑’들이 갑자기 늘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도둑질한 사람치고 핑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들 하는데, 이런 ‘생계형 도둑’들은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정말 먹고 살기 어려워서, 당장 자식 입에 넣어 줄 것이 없다 보니까.’라는 등의 이유로 본인의 도둑질을 정당화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라에는 엄연한 법이 있고, 그 법은 전문 도둑이든지 생계형 도둑이든지 간에 절도는 절도라고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만약에 법이 그와 같이 적용되지 않고, 그런 이유를 대는 도둑질을 정죄하지 않는다면 나라꼴이 어떻게 될지는 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남이 한 일을 두고는 법을 가지고 판단하려 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한 일을 두고는 법보다는 자기 이유, 자기 변명, 자기 핑계가 항상 옳은 것처럼 여기고들 사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신앙생활에서도 자주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엄연히 세워져 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적용되는 경우에는 항상 그 법보다는 자신의 범죄를 합리화하는 이유가 더욱 타당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런 예를 잘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을 빤히 들여다보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자식들이 부모를 대할 때 얼마나 약삭빠르고 교묘하게 자기의 불효를 스스로 합리화시키면서 살고 있는지, 자기의 핑계를 가지고 얼마나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명백한 계명을 묵살하고 있는지를 바로 이 본문에서 적나라하게 밝혀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모 공경에 관하여 ‘하나님의 계명’이 명하는 바와 ‘사람의 유전’이 교묘하게 둘러대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그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오늘 우리는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다른 사람 아닌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육성으로 가르치고 계시는 이 부모 공경에 관한 교훈을 함께 귀를 기울여 듣고 또한 마음에 새기고자 합니다.

  1. 부모를 잘 봉양하지 못하는 핑계를 찾으려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유전’입니다.

  본문 1절로 6절에 기록하기를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페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너희 유전”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2절에 나오는 “장로들의 유전”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유대 율법학자들이 구약 성경의 율법을 해석하고 거기에다 여러 실천 조항들을 첨가한 것이었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이것이 거의 성경과 맞먹는 권위를 가진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들의 유전’을 가지고 실제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일들을 당시 바리새인들과 그 추종자들이 저지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십계명 제5계명인 것을 모를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여기서 예수님께서 인용하고 계시듯이, 그 외의 율법의 말씀 속에서도 재차 강조하기를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까지 했으니, 이 명령이 얼마나 엄격한 것인지는 더 이상 강조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무리 보아도 명백하기 이를 데 없는 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실로 교묘하기 짝이 없는 핑계들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에 있어서 그야말로 전문가라 할 만한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라고 대조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삼척동자가 보아도 도무지 달리 해석할 길이 없는 실로 간단명료한 하나님의 명령을 두고도 “너희” 즉 바리새인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교묘한 사람의 논리를 ‘장로들의 유전’을 통하여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말을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바로 마가복음 7장 11절에 기록된 “고르반”이라는 말입니다.
  이 ‘고르반’이란 말은 직역하면 ‘제물, 헌금’(offering)이란 뜻인데, 이 단어는 그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어떤 헌물이나 돈을 바치기로 서약할 때 쓴 표현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단 그 어떤 것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고르반 서약’을 하면 그것을 절대로 취소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민수기 30잘 2절에 기록된 말씀,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는 말씀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고르반 서약’이란 것은 바로 오늘날의 신자들이 “제가 이러이러한 제목으로 얼마만큼의 헌금을 하나님께 꼭 바치겠습니다.” 하고 작정연보하는 것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원래는 이처럼 경건한 서원이었던 것을 실로 교묘하게 악용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라고 정확하게 그들의 잔꾀를 지적하고 계시는 그대로입니다.
  “너희는 가로되” - 즉 바리새인들이 자기 부모 앞에서 말하고 또 다른 유대인들에게 가르쳤던 사실입니다.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 즉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께 드려서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 혹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에 쓰이게 될 것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 즉 그것이 ‘고르반’이 되었다고 그 부모 앞에서 말만 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즉 그렇게만 말하면 그 부모에 대한 봉양의 책임에서 아주 합법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된다고 바리새인들은 생각하고 남에게도 가르쳤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그의 가르침을 좇았던 유대인들은 그 경건한 고르반의 서약을 이처럼 악용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지금 있는 돈 가지고 부모님께 뭔가 좋은 것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사실은 이 돈은 제가 고르반 서약을 해 버렸습니다. 이 돈이 부모님 위해 쓰여도 유익하겠지만 하나님께 바쳐지면 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제가 부모님 봉양 잘 못해 드려도 그렇게 알고 이해해 주십시오.”라고 그들은 아주 당당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혹은 부모들이 무언가 자기를 기분 나쁘게 하면 “그렇게 나오면 제가 부모님 봉양할 것을 몽땅 다 ‘고르반’해 버리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줄 잘 알지요?”하고 일종의 위협까지 했던 자들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참 얼마나 교묘하기, 아니 교활하기 짝이 없는 말들이겠습니까?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는 그 좋은 서원의 말을, 그처럼 부모를 물질적으로 봉양하지 아니하는 불효를 변명하는 지극히 합당한 핑계거리로 써 먹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들은 부모 앞에 불효할 뿐 아니라 그런 “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만사에 다 그렇지만 부모 앞에 불효하는 자식들 역시 이처럼 자기 행위를 정당화하는 핑계거리를 찾으려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 핑계거리가 지극히 ‘신앙적인 것처럼’ 나타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정말 마음으로는 최고로 봉양해 드리고 싶지만 교회 건축 헌금 바치느라고 형편이 이러하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정말 신앙 있는 부모라면 당연히 이해해 주어야 할 이유처럼 들릴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제가 목사인데 어쩌겠습니까? 주의 일 하느라고 부모님 찾아뵐 시간도 없고 사업하는 사람도 아니니 돈으로도 봉양할 수 없지만 그저 아들이 목사가 되어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쳐진 삶이 된 것을 두고 감사하시고 만족하십시오.” - 일견 자기 사명에만 전념하고 있는 꽤 충성스러운 목사인 것처럼 들릴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날마다 함께 교회에 가야 하니까, 제 마음만큼 부모님 모시고 어디 구경도 제대로 못 시켜 드리는 것 어떡하겠습니까?” - 이것도 지극히 앞뒤 잘 맞는 말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말들이야말로 여기서 예수님께서 책망하고 계시는 ‘고르반’의 악용인 것입니다.
  헌금 생활에 힘을 다하는 것만큼 부모 봉양도 그만큼 힘을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목사 직분을 충성되이 감당하고 있으면 자식 노릇 역시 꼭 같이 잘해야 합니다.
  주일은 함께 예배드렸으면 다른 평일에 여행사를 통해서라도 부모님 바깥 구경을 시켜 드려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잘 섬기느라고 부모님께 좀 더 잘 해 드리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우리 사람으로서는 짜낼 수 있는 최고 합리적인 이유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계명을 정면으로 어기고 있는 교묘한 핑계거리요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식으로서 부모를 잘 공경하고 봉양하지 못하면 거기에는 어떤 변명도 핑계도 있을 수 없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더 잘 섬기려 하다 보니’라는 말조차도 그 이유가 될 수 없다면 다른 그 어떤 변명이나 핑계를 댈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일 주일 내내 얼마나 바쁜지 다 아실 터이니 찾아뵙지 못해도 이해해 주십시오.”라는 말이 변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업 시작하느라 돈이 달려서 그런 줄 아시고 제가 장사 잘 될 때까지만 참아 주십시오.”라는 말이 타당한 이유가 될 수 있겠습니까?
  시간 남고 돈 많이 벌게 되었을 때에는 이미 부모님은 세상 떠나실 것이고 그 시간과 그 돈은 그저 자기 여생 즐기는 데에만 아주 잘 쓰이게 될 것입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식의 불효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처럼 자기 딴에는 맞는 말 같지만 실상은 교묘한 핑계에 지나지 않는 말로써 부모 봉양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야말로 바리새인들이 가르친 ‘사람의 유전’인 줄로 깨닫는 자녀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모를 잘 공경하는 것이 곧 하나님 잘 섬기는 일과 같다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본문 7절로부터 9절에 기록하기를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처럼 사람의 유전을 좇아 부모 봉양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라고 책망했습니다. ‘외식하는 자’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되게 사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부모 공경을 거짓되게 하는 사람을 꼭 같은 말로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 공경이 잘못되면 그것은 자신과 부모 사이에서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로 직결되는 것임을 가리킵니다.
  자식이 불효해도 그 부모는 그래도 그것도 제 자식이라고 탓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넘어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그렇게 그냥 끝나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처럼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식들을 직접 불러다 놓고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너와 네 부모 사이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너와 나 사이의 문제다. 너는 지금 다른 사람 아닌 나를 존경하지 아니하는 죄를 저지르고 있다.”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처럼 제5계명을 불순종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부모를 잘 공경하지 않는 것은 인륜을 해치는 정도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않는 것과 직결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불효한 자식들은 바로 “사람의 계명” 즉 ‘장로들의 유전’을 자기 “교훈으로 삼고서”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부모 공경은 명백한 하나님의 계명이니만큼 그것을 어기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정면 거역하는 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십계명은 줄줄 외우면서 부모 공경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입술로는 존경하되 마음으로는 멀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제5계명은 십계명 중에서 의미심장한 위치에 있는 것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이 계명은 사람이 이웃과 어떤 관계로 살아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는 후반부 계명들 중 제일 처음에 나옵니다.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탐심과 같은 죄악을 이웃에게 저지르지 않고 사는 것도 두말할 필요 없이 중요한 것이지만, 이런 것들 제일 앞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실로 부모 공경이야말로 사람이 인간관계를 배워 나갈 때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남에게는 참 공손하고 친절하다 할지라도 자기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한다는 그 자체도 사실은 가식적인 행위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사회적 인간관계는 좋다면서도 정작 자기 부모와는 갈라져 있는 사람들이 오늘날 현대사회의 젊은이들 중에 점점 더 많이 생겨나고 있는데, 이것은 완전히 병적인 현상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내게 가장 가까운 이웃인 부모와의 관계, 이것부터 제대로 되어야만 다른 이웃들과의 관계도 정상적으로 발전될 수 있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또한 이 제5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르친 십계명 전반부에 나오는 네 개의 계명들 바로 다음에 위치하고 있는 것 역시 의미 있는 일입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들 중에서도 이 부모 공경의 계명이야말로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는 데에 있어서 가장 요긴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자기보다 훨씬 높으신 존재의 권위를 인정하고 두려워하는 자세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세상에서 이런 기본적 자세를 배울 수 있는 길은 오직 부모 공경 밖에 없습니다.
  만민이 다 평등하다 할지라도, 부모만큼은 분명히 자기 위에 있는 존재인 것을 깨닫고 인정하고 공경할 줄 알게 됨으로써, 사람은 자기보다 높은 대상을 제대로 대하는 법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눈에 보이는 세상 부모를 공경할 줄 모르면 아무리 그 몸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린다 해도 그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진정 경외하는 마음으로 경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현대 사회에서 부자관계나 모녀관계가 마치 친구 관계와 꼭 같은 것인 줄로 착각하고, 친구 관계처럼 되는 것이 가장 원만하고 이상적인 부모자녀 관계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딸이 아버지 앞에서 맞담배를 피우고 다 자란 아들이 어머니에게 여전히 반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민주적인 가족이라고, 부모와 자녀가 격 없이 지내는 화목한 관계라고, 권위주의를 철폐시킨 평등 사회라고들 부를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오직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는” 사람의 불륜한 유전일 뿐이며, 결국은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불신앙으로 직통하게 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고,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웃어른인 줄 알고 받들어 모시는 것만이 부모를 대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요긴한 자세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 부모 공경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들은 결국 다 파괴되어지고 말 것이며, 자식이 부모의 권위를 받드는 것을 경시하게 될 때 그와 정확히 비례해서 그 마음도 하나님에게서도 멀어져만 갈 것입니다.
  세상 사는 모습이 어떻게 바뀌고 사람들의 가족관은 어떻게 변한다 하더라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이 계명만이 사람을 진정 사람답게 만들어 주고 신자를 진정 하나님 경외하는 신자로 만들어 주는 불변의 ‘하나님의 계명’인 줄을 깨닫고 준행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하나님의 계명’ 대(對) ‘사람의 유전’ - 이 둘을 나란히 대조시켜 놓고 보면, 과연 어느 쪽이 옳으며 권위 있는지,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라의 법이 서야 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는 도둑질할 수밖에 없다는 변명을 찾는 사람들처럼, 오늘날의 자식들도 역시 제5계명을 뻔히 알면서도 자기만은 부모 효도할 수 없는 핑계를 찾아내려 합니다.
  이 법 지키지 않으면 인륜이 파괴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는 것인데도, 자기 자신만큼은 어쩔 수 없다고 기가 막히게 둘러대려는 자식들이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제 딴에는 합당한 이유가 되는 것 같아도 자식이 부모 앞에 불효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명백한 범법 행위이며, 변명의 여지가 없는 중죄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고르반’, 즉 ‘내가 부모님께 드려서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바침이 되었다’라는 말로도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을 변명할 수 없다고, 우리 예수님께서 세상의 불효자들의 모든 핑계거리를 완전히 원천봉쇄해 놓으신 것입니다.
  제가 부득불 간증 하나 해 드리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경향교회에 부임하게 되면서 한 가지 기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제가 매 달마다 어머니께 용돈을 조금씩 드릴 수 있게 된 일이었습니다.
  물론 교회에서 제 사례를 넉넉하게 주셔서 할 수 있게 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이 남아돌 정도로 많아서 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담임목사로 취임하면서 첫 달 사례를 받을 때부터 우선 십일조와 감사헌금, 그리고 여러 가지 월정헌금 등을 이전에 원로목사님께서 하시던 수준과 꼭 같이 맞추어서 해 보니까, 매 달 받는 사례의 삼분의 일이 일단 정기 헌금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들께서 아시는 대로 제가 예배당의 조명 시설 등 몇 가지를 위한 특별헌금을 작정하고 매 달 갚아나가는 액수가 또 사례의 삼분의 일이 되었습니다.
  물론 두말할 필요 없이 이 모든 것들이 저는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나머지 제가 쓸 수 있는 삼분의 일 중에서 어머니를 위해서 저로서는 정성껏 매달 얼마의 용돈을 따로 떼어서 드렸던 것입니다.
  그래도 제가 특별히 개인적으로 돈 많이 쓸 일은 별로 없고, 제가 본 교회 당회장으로서 여러 사람들을 대접해야 할 일이나 공적 활동을 위해 돈을 써야 할 일들을 위해서는 교회에서 목회비를 따로 주시니까 아무 부족한 것은 없었습니다.
  어머니께서도 말씀은 “머할라꼬 이런 거 주노? 고맙고도 미안하네요.” 하시면서도, 한 번도 그 용돈 봉투를 거절하지는 않으시고 기쁘시게 받아 주시는 것이, 저로서도 더욱 흐뭇했습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지난달부터 시작한 ‘헌당헌금 추가 작정’을 하게 되면서 약간 사정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시작하자고 한 일이니까 당연히 제가 제일 먼저 작정을 해야 하겠는데, 무슨 돈으로 해야 할지 조금 난감했습니다.
  이미 작정한 특별헌금 갚아나가는 것이 없었더라면 정말 마음 같아서는 한 몇 억 원 정도는 작정하고 싶었는데, 도무지 그럴 계산이 안 되고, 그저 최소한의 억 단위인 일 억 원은 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헌당헌금 관리하시는 장로님께 여쭈어 보았더니, 일 억 원을 농협 승계를 통해서 빌려서 헌금하고 달마다 원금과 이자를 갚아 나가는 식으로 하면 매월 백 오십 만원 씩 팔년을 월정헌금하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제게 남아 있는 사례 중에서는 정말 그 액수를 뗄 곳이 없었습니다.
  그때, 퍼뜩 제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십니까?
  ‘아, 어머니께 매달 드리는 용돈을 중단하면 어떻게 맞출 수 있겠는데.’라는 생각이 정말이지 더도 아니고 딱 일초 동안 들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일초가 지난 후에 즉시 따라온 생각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렇지, 예수님께서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고르반’이라고 하신 것이구나. ‘내가 어머니께 용돈을 드려 유익하게 하실 것이 하나님께 헌당헌금으로 대신 드려지게 되었다.’라고 하기만 하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런 것이야말로 바로 ’사람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죄라고 예수님께서 그처럼 정곡을 찔러 말씀해 놓으셨구나.”라고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어머니께 드리는 용돈도 그대로 드리고, 또 헌당헌금 추가작정하는 것도 원래 마음 먹었던 액수 그대로 작정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판단되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양쪽을 다 할 수 있는 길도 열어 주셨습니다.
  제가 다시 헌당헌금 관리하시는 장로님과 의논해서, 그전에 특별헌금 작정한 것 매달 갚아 가던 월정금액을 조금 줄이고 그 대신 상환기간을 늘여서 갚아 가기로 하고, 거기서 나온 차액과 제가 또 힘껏 드릴 수 있는 것을 합쳐서 헌당헌금 추가작정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제 자랑으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저처럼 꼭 같이 자식된 입장에 있는 성도들께서는, 우리 예수님께서 자식이 부모에게 불효하는 일에 대해서 그 어떤 변명이나 핑계도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던 것을 꼭 깨달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한다든지 이 신구약 외에 다른 말을 성경보다 권위 있게 여기면 그것은 두말할 여지없는 이단인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모 공경 제대로 하지 아니하면 실상 그런 이단이 저지르는 죄에 빠지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람이 부모 공경을 제대로 하지 아니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백한 계명을 정면으로 어기는 중죄라고 단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부모 공경 못하는 핑계를 대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좇는 것이라고 단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와 백성을 바로 세우고 이끌기 위하여 법을 세우셨고, 그 불변하며 반드시 순종해야 할 법 중에 하나가 이 ‘제5계명’인 것입니다.
  ‘사람의 유전’은 오늘 날에도 자식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불효의 핑계를 대게 하고 또한 부모를 떠나게 함으로써 결국 하나님께로부터도 멀어지게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명’은 부모 공경 제대로 하지 않으면 이 땅에서도 망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죽은 인생이라고 명백히 선언하십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 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을 지킴으로써 우리 육신의 생명을 낳고 길러 주신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며, 스스로도 땅에서 장수하고 잘 되게 되어 있는 자식들의 축복들을 온전히 받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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