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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의 목자와 주권자 (대상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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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은 다윗에게 너무나 꼭 맞는 말이 될 것입니다.
  그는 황금 같은 청년기를 이리저리 도망다니느라고 다 보낸 사람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던 다윗이 드디어 그 천신난고의 날을 넘기고 이제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는 때가 왔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이 바로 그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역대기에 기록된 내용은 사무엘하 5장에 기록된 것보다는 조금 간략하게 되어 있지만, 사건의 요점은 빠짐없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윗은 역시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첫 손가락 꼽힐 왕이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의 왕국으로서의 진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최전성기를 누렸으며,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축복을 이 다윗 왕 때에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훌륭한 성군이 된 근본 배경에는 그가 왕으로 등극하기 훨씬 이전부터 시작하여 왕이 된 이후에도 역시 남달리 발휘했던 특별한 신앙생활의 면모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목자와 주권자’라는 제목으로, 그 다윗이 어떻게 해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었는지를 그의 전 생애를 크게 둘로 나누어서 함께 상고해 보면서, 오늘날의 성도가 하나님께 크게 쓰이기 위하여 꼭 필요한 두 가지 체험들을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고난의 때를 보내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고 인내하는 것이 신앙의 큰 인물이 되기 위한 준비 과정입니다.

바로 이런 체험이 다윗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훌륭한 목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본문 1절로 3절에 기록하기를 “온 이스라엘이 헤브론에 모여 다윗을 보고 가로되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 전일 곧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가 왕이시었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니 다윗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 여호와께서 사무엘로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사울왕이 길보아산에서 전사한 후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다윗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임금 될 사람이라는 점에 대하여 모두가 이심전심이었습니다.
  투표는 물론 여론 조사 따위도 할 필요 없이, 다윗의 등극은 모든 백성들에게 아예 기정사실처럼 받아졌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이들이 다윗을 헤브론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하면서, 그 정통성을 세 가지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다윗이 그들의 동족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한 핏줄이라는 말입니다.
  신명기 17장 15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왕은 반드시 이스라엘 사람 중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다윗은 물론 이 조건에 부합되는 왕이었던 것입니다.
  둘째는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가 바로 다윗이었다고 했습니다.
  사울은 왕으로 있을 당시에도 실상 왕으로서 백성들을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했던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침략한 외적을 친다든지, 백성들을 구제한다든지 하는 일들, 즉 마땅히 왕이 해야 할 일을, 실제적으로는 다윗이 이미 해 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기는 처지에 있으면서도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헌신적인 일들에는 오히려 앞장을 서고 있었고, 그런 면에서 다윗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훨씬 전부터 진짜 왕이나 다름없이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보통 이 세상의 정치 상황에서는 이것만 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왕으로 추앙되기에 아무런 법적 결격 사유가 없고, 자신은 온 백성으로부터 최고의 인기와 지지도를 누리고 있고, 정적은 이미 다 사라지고 하나도 남지 않았으니, 이것만 해도 평화적 정권 교체의 최상의 조건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데에는 그런 세속적인 조건이나 상황을 훨씬 초월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2절 하반절에서 백성의 대표자들이 다윗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는 말입니다.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라고 그들이 말했습니다.
  먼 옛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그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장차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윗 역시 그가 사울의 손으로부터 도망다니던 시절 내내 이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런 약속의 말씀을 내리셨다는 것을 전해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져서 다윗은 드디어 왕으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취임식 준비 위원회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순간 감회가 무량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가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 받던 날은 지금 백성들로부터 왕으로 추대받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이십 가량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아직 새파란 소년이었습니다.
  그 베들레헴 시골구석에 있던 자기 고향 집에서 자기 가족들만이 보고 있는 가운데 그는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으며 장차 그가 이스라엘의 임금이 될 것이라는 엄청난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지금까지의 생은 오직 그 말씀 하나만 가지고 실로 험한 날을 구사일생으로 통과해 왔던 기간이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이미 목숨의 위험이라는 고난을 여러 번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사람의 거짓말과 배반의 쓰라림도 톡톡히 경험해 보았습니다.
  물론 배고픔과 잘 곳 없는 고생 같은 것은 일상의 다반사처럼 겪어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황금 같은 청년 시절을 그저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처럼 보내었던 것입니다.

그 이십 년 동안 다윗이 소유했던 재산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가 그의 인생을 두고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네가 이스라엘의 목자와 주권자가 되리라"고 약속하신 이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었습니다.
  그저 그 약속의 말씀 하나만 붙잡고 그 쇠털 같이 많은 날들을 고생만 하면서 다 보내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말씀이 마치 꿈처럼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3절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헤브론에서 다윗의 대관식을 거행했습니다.
  여기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웠다"는 말은, 왕이 되는 다윗이나 그의 신민이 되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 함께 하나님 앞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본분과 의무를 다할 것을 서약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두고 3절 끝에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사무엘로 전하신 말씀대로 되었더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임금이 된 가장 근본적인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선을 넘나드는 고난이 연속되는 청년기를 보내면서도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 하나만을 끝까지 믿고 인내했던 결과, 그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공수표로 끝나지 아니하고 그 ‘말씀대로’ 성취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이 그처럼 고난을 인내하는 값진 경험을 쌓음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편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해 주는 목자와 같은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의 일생은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증거하는 목사의 사명 물론 두말할 필요 없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글로 증거하는 신학자들 역시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자기의 생활을 통하여 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신실한 것인지,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얼마나 은혜롭고 축복스러운 것인지를 몸소 증거해 줄 수 있는 성도 또한 지극히 귀중하고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 낙 없어 보일 것 같은 생을 살면서도 하나님 말씀만 가지고 기쁘게 살고 끝내 승리하고야 마는, 실로 자랑스럽고도 멋진 생애를 불신자들 앞에 보란 듯이 증거해 줄 수 있는 성도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경향인의 10대 생활강령 중에서 네 번째가 바로 “설교말씀을 생활에서 체험한다”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가난하게 살아도 오직 말씀 믿고 인내할 때 결국 나중 축복을 창대하게 해 주신다는 이 말씀을 실제로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중병에 걸려도 예수님께서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병 때문에 낙심하거나 원망하는 시험에 빠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병 때문에 하나님께 더욱 큰 영광을 돌리게 되는 은혜의 체험을 직접 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성전을 헌당할 때 헌당헌금을 크게 정성껏 작정해 놓은 후에 불경기로 인하여 갑자기 사업이 침체되면서 어려움을 당한 교우님들이 그 안타까운 심정을 주님 앞에서 새벽마다 토해 놓으면서 눈물로 기도하는 것을 제가 봅니다.
  그런 교우님들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기 전까지 통과해야만 했던 20여년이라는 기나긴 고난과 기다림과 연단의 나날들을 상기해 보면서, 절대로 낙심하거나 도중하차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말에는 한 여 집사님께서 급성 암으로 인하여 37세의 젊은 나이로 남편과 어린 딸 하나를 남겨 두고 갑자기 소천하셨는데, 어제 제가 입관예배에 갔다가 초등학교 5학년 되는 고인의 외동딸이 울다가 지쳐서 어머니 장례식장에도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인에게는 불운이요 그 유자녀에게는 불행이라고만 말하겠지만, 저는 고인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한대로 된 일이요 그 어린 아이에게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베풀어 주실 남다른 위로와 은혜와 축복이 반드시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난을 때를 보내면서도 오직 하나님의 약속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의지하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신앙의 큰 위인으로 쓰일 인물을 키우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불운과 고생만 연이어지는 생을 살면서도, 하나님 약속의 말씀의 신실하심을 끝까지 의심치 않고 인내함으로써, “욥의 모년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셨다”라는 더 큰 ‘나중 축복’의 산 증인이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형통한 때를 살 때 하나님께서 매사에 함께 하심을 믿고 승리하는 것이 큰 신앙의 인물들이 누리게 되는 전성기입니다.

바로 이 체험이 다윗이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태평성대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4절로 9절에 말씀에 기록하기를 “다윗이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예루살렘 곧 여부스에 이르니 여부스 토인이 거기 거하였더라 / 여부스 토인이 다윗에게 이르기를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나 다윗이 시온산 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성이더라 / 다윗이 가로되 먼저 여부스 사람을 치는 자는 두목과 장관을 삼으리라 하였더니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먼저 올라갔으므로 두목이 되었고 / 다윗이 그 산성에 거한고로 무리가 다윗성이라 일컬었으며 /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두루 성을 쌓았고 그 남은 성은 요압이 중수하였더라 /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집권 초반기는 그야말로 욱일천하였고 만사형통이었습니다.
  그가 초창기에 이루었던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예루살렘 성을 점령하고 그것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만든 일이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이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예루살렘 곧 여부스에 이르니 여부스 토인이 거기 거하였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이 당시 여부스라고 불려지고 있었던 것은 바로 여부스 사람들이 거기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사기 1장 8절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을 정복해 들어올 당시 유다 지파가 이 예루살렘 성을 일시 점령했었습니다만, 그 이후 곧 여부스 족속에 의하여 다시 빼았겼습니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다윗왕 때에 이르기까지 약 4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고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다가 그 주위가 골짜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형적으로 방어하기에 아주 유리했습니다. 거기에다가 이 여부스 족속이 꽤 강한 민족이었던 까닭에 그처럼 가나안 한 복판에 이방 민족이 그때까지 버젓이 자리잡고 살고 있는 것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 성을 탈환하는 것이 이스라엘 왕국을 튼튼히 세우는 데에 있어서 꼭 필요한 급선무임을 인식했습니다. 수도로서 전술적인 위치도 좋았지만, 또한 그 예루살렘은 남쪽 유다 지파와 북조 지파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정치 전략적으로도 중립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Washington D.C.가 미국의 수도로 정해질 때 북부와 남부의 중립적인 지점에 세워졌던 것과 비슷합니다.

이처럼 다윗이 자기네 성을 공략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여부스 토인, 즉 여부스 거민들은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하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사무엘서에 보면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고 다윗을 업신여겼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자신만만했던 여부스 족속을 물리치고 예루살렘 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 과정을 보면 6절에 기록하기를 "먼저 여부스 사람을 치는 자는 두목과 장관을 삼으리라"고 다윗이 선언했다고 했습니다.
  즉 이 예루살렘 성 공략에 성공하는 자를 장차 이스라엘 군의 총사령관으로 삼겠다고 공언함으로써 자기 부하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이 전투에 임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요압이 그 전투을 진두지휘하여 결국 여부스 사람을 물리쳐 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그 산성을 다윗성이라 이름하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 후에 8절에 보면 "다윗이 밀로에서부터 두루 성을 쌓았고 그 남은 성은 요압이 중수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이 "밀로"라는 예루살렘 바로 바깥쪽에 있는 요새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이 8절의 말은 예루살렘 즉 다윗성의 수비 상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하여 그 바깥쪽의 요새와 성채들을 수축했고, 잔여 공사는 요압 장군의 지도 아래 마저 끝내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여부스 족속을 물리치고 예루살렘을 빼앗아 거기 다윗성을 세움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서의 그의 위상은 더욱 확고히 굳혀졌습니다.
  가나안 한 가운데 눈엣가시처럼 박혀 있던 강력한 이방 민족을 단숨에 물리쳤을 뿐 아니라,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인 곳에 이스라엘의 수도를 건설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집권 초기는 그야말로 누구 말마따나 국제 문제와 국내 문제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아낸 격이었습니다.
  온 백성의 인기와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왕이 되었을 뿐 아니라, 다윗은 실로 능력 있는 군주임을 이처럼 국정 초기부터 멋있게 과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을 두고 이 역대기는 어떻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까?
  9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의 그와 같은 성공적인 초기 사역을 두고, 역대기서는 다윗이 시기를 잘 타고 왕이 된 까닭에 그렇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아래 있는 사람들을 잘 써서 그처럼 가장 시급한 현안 과제를 잘 해결해 내었다라고 칭찬하지도 않았습니다.
  다윗이 정확한 판단과 먼 미래를 내다 본 안목을 가졌던 까닭에 그처럼 왕으로서의 입지를 초창기부터 탄탄히 잘 다져 나갔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신문이나 역사 교과서였다면 아마 틀림없이 그런 식으로 주석을 달았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세상의 불신 정치가들이라면 언론을 부추기거나 강압을 해서라도 자기의 능력과 치적을 과시하는 글들을 쓰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은 그 대신 "만군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갔다"라고 간결하면서도 무게 있게, 다윗의 성공적인 초기 사역을 요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다윗은 왕으로서의 그의 초창기 활동과 업적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증거했다는 말입니다.
  그는 여부스 족속을 무찌르고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다윗성을 중건하고 나라의 기반을 다져 가는 이 일련의 성과를 통하여, 자신의 능력을 과시한 왕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살아 계셔서 그와 함께 계심을 만 백성과 나라 앞에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만사가 다 잘 되어 나갈 때부터, 다윗은 그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으로 되어지는 일인 줄 잊지 않았으며, 또한 그 사실은 곁에서 보는 모든 사람의 눈에도 너무나도 명약관화했습니다.
  사무엘하 23장 5절에 보면 다윗은 먼 훗날 자기의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도 말하기를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함께 하심으로써 나로 하여금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해 주셨다"라고 회상했습니다.
  다윗의 자신의 전성기를 두고 그처럼 오직 하나님의 동재와 도우심 때문이었다고 여겼으며, 모든 영광을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돌렸던 것입니다.

  고난 중에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모습을 증거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만사형통할 때 그 모든 공로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자세 역시 그리 쉬운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려울 때에는 하나님 이름 부르다가도 숨통이 트이고 살만하게 되면 절로 교만하게 되기 쉬운 것이 보통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자신의 생애에 모든 일들이 잘 풀려나가게 되는 것을 두고서 진정으로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원로목사님께서 바로 그런 목회를 평생 해 오지 않으셨습니까?
  사람이 볼 때에는 도무지 안 될 일이고 승산이 없는 일임에 분명한데도, 신기하게도 그 모든 태산 같은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결국에는 다 이루어 놓으셨습니다.
  원로목사님께서 하시는 일마다 만군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동행하셨다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뚜렷한 사실이었습니다.
  늘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만 하려 하고 늘 성취된 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분이셨으니까, 하나님께서 원로목사님의 전 생애의 사역을 점점 더 강성하게, 전성기에서 더 큰 전성기로 나아가게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잘 되어 나갈 때, "저 사람은 참 팔자 좋게 태어나서 저리 잘 되는구나"라고들 말합니다.
  "그 사람은 마침 기회를 잘 타고 사업을 시작해서 저리 돈 많이 벌고 있는 거지요."라고들 흔히 말합니다.
  "그 사람은 정말 사람이 똑똑하고 실력이 있으니 당연히 성공한 것이지요."라고들 또 자주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신자들 중에서 소위 성공했다는 사람들, 불신자들 중에서 소위 위인이 되었다는 사람들이 서로 하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성공했을 때 좀 다른 말로 칭송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나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저렇게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 -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을 누비면서 한 평생 사는 동안 이런 말 좀 들을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장로님, 저 집사님은 어쩌면 저렇게도 하는 일마다 잘 풀려나가고 주변 사정이나 시기가 저렇게 딱딱 들어맞을까? 정말 하나님께서 함께 동행하시면서 만사형통하게 해 주신다는 말씀이 저런 성도를 보고 하는 말이구나.” - 적어도 교회의 직분자로서는 이런 칭송을 받을 수 있는 믿음과 열매가 그 하는 일들마다 따라다녀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살아 계심을 성경 말씀이 물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살아 계신 것은 사실상 이 말 못하는 만물도 그 자연계시를 통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각자의 주어진 생을 열심히 살아감으로써, 그 생을 통하여 축복을 누림으로써 또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성도와 함께 하심을 증거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직장이나 사업을 위하여 성실하게 노력하고 성공하여 축복 받을 때 그것이 바로 불신자로 하여금 신자를 달리 보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주일에는 아침부터 밤까지 빠짐없이 예배에 참석하고 또 엿새 동안에는 남보다 배로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성적을 얻는 것, 바로 이런 것을 통하여서도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축복 받고 영광을 돌리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것은 목사의 설교나 전도사의 심방 조금도 못지않은 귀중하고도 능력 있는 전도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생활과 직분과 사명을 통하여 진실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매사에 함께 하심을 보여 줄 수 있는, 신자 최고의 영적 전성기를 반드시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다윗의 생은 이처럼 본인의 입에서는 말 한 마디 없어도, 오히려 백 마디의 웅변보다도 더 강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는 어려울 때 하나님 말씀을 약속만을 굳게 믿고 끝내 그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위대한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순탄한 대로를 걷게 될 때, 바로 순간 교만에 빠지지 않고 오직 모든 영광을 그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께만 돌리면서 이스라엘의 주권자로서의 전성기를 향해 치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큰 인물이 되는 데에는 고난 통과를 통한 연단 과정은 필수적이며, 더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형통할 때 늘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체험하면서 영광을 돌릴 줄 아는 것 역시 필수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환난이 닥치고 고난이 연이어지게 될 때 그 때문에 낙심하거나 원망하게 되면, 그 시험은 진짜 시험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오직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더 크게 쓰시려고 이처럼 연단의 기한을 길게 하고 계시는구나.’라고 깨닫고 인내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형통한 때를 열어 주시기 시작할 때, 자칫 방심하거나 교만에 빠지면 그야말로 십년 공부가 다 헛수고가 되고 맙니다.
  축복을 부어 주시기 시작하면 하나님께 더욱 큰 감사를 바치고 더욱 온전히 영광을 돌릴 줄 알아야만이 그 하나님의 동재하심이 지속되며 그 축복은 가파른 급상승 곡선을 그리면서 더욱 크고 높은 전성기를 향해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큰 인물에게는 그 길을 완전히 막는 장애물이란 있을 수 없고 더 이상 복 받지 않아도 된다는 상한선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생의 고난의 때를 통하여서는 오직 말씀만 끝까지 붙들고 연단을 받음으로써 그 약속이 성취될 그날을 향하여 끝까지 인내함으로 나아가며, 인생의 형통한 때를 맞이하게 될 때에는 오직 모든 공로와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만 바침으로써 계속 쏟아 주시는 축복의 전성기를 마음껏 누림으로써, 실로 하나님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섬기는 일에 크게 쓰이는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설교 /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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