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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담대한 성령의 능력 (행 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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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선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러라. 사도행전 4:1-22.

지난주에 우리 교회 성도 한 분이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동네 여자 분을 데려오셨어요. 제가 만나보니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어요. 일주일 전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고 이번 주에 수술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잠간 사이에 세상이 깜깜해진 거예요.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납니다. 그분이 두려움을 도저히 감당 못하는 거예요. 누군들 안 그렇겠습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 인생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가득 찬 사람들에게 용기 주시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어요. 어느 분이 성경에서 “두려워 말라”는 말이 몇 번인지 세어보니 365번이래요. 제가 세어본 것은 아니에요. 의심나면 집에 가서 세어보세요. 왜 365번일 것 같아요? 1년 365일 매일 필요하니까.

세상에 마귀가 있잖아요. 마귀는 인간을 괴롭히는 전문가에요. 또 우리 주변은 우리를 위협하는 사건들과 사람들과 사건들로 가득 차 있어요. 우리 자신의 육정도 우리를 계속 잘못된 길로 몰아갈 가능성이 있지요. 그 뿐입니까? 경제적 어려움, 가난, 원수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들, 노쇠함도 큰 염려거리입니다. 50세 중반 쯤 되신 분과 이야기하는데, “내가 나이 들어서 병들면 어떻게 하지요?” 하는 거예요. 아니 20년 후의 일을 미리 걱정하다니요? 부모님이 결국 허약해지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면 나도 걱정이 되지요. 그 뿐인가요? 죽음도 걱정되지요. 우리의 인생을 위협하는 것들이 많아요.

그런데 예수를 믿기 때문에 세상과 마귀와 비신자들로부터 오는 핍박도 있어요.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어요. “세상이 나를 미워했으니 너희도 미워할 것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 예수님을 싫어하는 거죠. 예수님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반응입니다. 싫어하든가 좋아하든가. 여러분 가운데도 예수님을 싫어하다 좋아하게 된 분들도 있지요. 지난주에 우리 교회에서 전도폭발 지도자 임상을 했는데 전국에서 50명이 오셨어요. 첫 사흘 훈련받고 현장실습을 나갔는데 80%가 예수를 믿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누가 예수를 싫어하느냐 하면, 예수님 때문에 위협을 느낀 사람들이 있어요. 5-6절에 보니까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여” 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그 당시 권력자들이 ‘예수’ 그러면 싫어했던 거예요. 예수님의 제자들을 싫어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정치적 세력은 종교에 대해 두 가지 태도를 취해요. 한 가지는 종교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7,18장에 보면 말세에 짐승들이 나타나는데, 그 중 하나가 종교 지도자인 적그리스도로서 두 번째 짐승을 이용합니다. 즉 종교를 총동원해서 세계정복에 사용합니다. 다 사용한 후에는 차버립니다. 북한에서 그랬지요. 처음에는 지도자가 기독교와 손을 잡고 1948년까지 북한을 장악하더니 그 후에 탁 차버리고 신자들을 잡아가고 죽이고 교회를 다 없애버렸어요. 권력자는 언제나 종교를 이용하니 종교 지도자들은 조심해야 돼요.

또 한 가지 태도는 협력하지 않는 종교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신앙 때문에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지난 2천년동안 예수님 때문에 죽은 사람을 다 합해도 20세기에 죽은 사람보다 적어요. 지금도 스리랑카에서는 계속 교회에 폭탄을 던지고 신자들을 죽입니다. 인도 북부에서는 힌두교가 기독교를 핍박하고 신자들을 죽이고 교회에 불을 질러요. 인도네시아에서도 신자들이 얼마나 많이 죽었습니까? 구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북한, 쿠바 등, 독재자들과 무신론자들은 기독교를 핍박했어요.

기독교는 언제나 진리를 선포하기 때문에, 진리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세상과 마귀의 핍박을 받아요. 기독교는 진리와 자유, 사랑과 정의를 끝까지 믿기 때문에, 독재국가도, 무신론도, 다른 종교도 핍박을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국가들은 자유를 줍니다. 인권과 자유가 어디에서 나타났습니까? 기독교 국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상입니다. 기독교는 왜 진리와 자유를 좋아합니까? 진리가 언제나 이기니까. 진리는 진리니까. 그래서 겁을 안 내요. 마음대로 조사해보고 마음대로 해보라 합니다. 기독교 국가는 마음대로 믿고 마음대로 믿지 않을 수 있게 합니다. 정치적으로 탄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진리니까 믿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는 것입니다. 4절에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여자가 5천에 아이들도 있으니까 예루살렘 교회는 갑자기 최소한 2만 명의 대교회가 된 것입니다. 왜? 진리를 알면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거든요. 예수님을 알면 참된 자유를 주시거든요. 저도 예수님을 만나서 얼마나 마음이 편해졌던지 누구든지 사귀고 용납할 수 있고, 심지어 원수마저도 사랑하려 하는 자유가 생겼어요. 죄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 악을 싫어할 수 있는 자유, 사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자유가 생겼어요. 진리는 전진합니다. 진리는 번져갑니다. 진리는 보편성이 있어요. 진리는 살아있어요. 진리는 승리, 성장, 성공, 행복, 유익하게 만들어주는 삶의 축복입니다. 진리를 따라가면 마음에 평화가 있지요. 왜? 하나님을 따라가는 거니까.

베드로와 요한이 구치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이 되니까 예루살렘 공회 회원 70명이 다 모였어요. 베드로와 요한을 세워놓고 협박하면서 질문을 합니다. “너희가 도대체 무슨 권세와 누구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8절에서 대답합니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들과 장로들아.” 이 때 베드로의 모습이 어땠다고요? “성령에 충만하여.” 베드로가 성령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충만해지니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우리도 암 선고를 받는다면 순간적으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부활하신 예수와 성령의 능력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일어나면 인간이 이해하기 힘든 평화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는 것을 체험할 수 있어요. 어제 만난 젊은 여자분,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분이었지만, 잠시 그분을 위로하고 붙들고 기도했어요. 2-3분 기도했는데 “아멘!” 하고 나니 그렇게 떨던 분이 얼굴이 싹 달라져요.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겁니다. 우리가 인간이므로 두려움이 없을 수는 없지만, 성령에 충만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평화와 담대함과 자신감이 나타납니다. 오늘 아침에도 삶의 도전과 위기 때문에 불안과 두려움이 있다면 예수님께 오십시오. 성령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여 말합니다. “이 병자가 어떻게 낳았는지 알고 싶다면 내가 말해주겠다. 너희가 죽인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었다. 나사렛 예수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이 무엇입니까? 부활의 능력입니다. 이보다 더 큰 능력이 없습니다. 사도바울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알고 싶다”(빌3:10), 그것이 알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제 자신의 능력과, 지식과, 실력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당할 때마다 똑같이 기도했어요.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지 않았습니까? 그 부활의 능력을 나에게 보여주시옵소서. 죽은 자를 살리신 하나님이여, 나는 이 문제를 감당할 수 없으니 하나님이 맡으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처리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내 개인에겐 없지만 내 속에 계신 성령님의 능력이 내게 부활의 능력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성령과 그 능력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담대하게 말했어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우리가 증인이다. 우리가 직접 보았다.’ 예수를 경험한 사람의 담대함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시편 118:21-22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당신은 내게 응답하셨고 나의 구원자가 되셨으며,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성전의 머릿돌이 되었나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 눈에 놀랍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놀라게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과 가까이 하고 그분의 능력을 구하면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모든 인생의 위험과 두려움에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에게 어떤 특징이 나타나는지 살펴봅시다.

첫째로, 담대한 사람이 됩니다. 13절에 보면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참 좋은 구절입니다. 여기 두 가지가 보여요. 하나는 베드로와 요한은 무식한 어부들이었는데, 그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갈릴리 어부답지 않게 용기와 자신감이 있고, 교육받은 그 시대 엘리트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담대하게 말했던 것입니다. ‘기탄없이’(with boldness)란 담대하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시골사람이라고 우물쭈물하지 않았어요. 성령 충만했어요. 위험하고 어려운 환경, 두려움의 골짜기에서도 그들은 당당했습니다.

13절 뒤에 보면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었던 줄을 알고” 영어 성경은 이 구절을 아주 멋지게 번역했어요. “They realized they had been with Jesus.”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과 같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어쩐지 다르더라. 그들이 예수님과 같이 있었구나!’ 한 것입니다. 보니까 알겠다는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있으면 세상이 감당 못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납니다. 오늘도 불안하거나 힘들거나 낙심했거나 어려운 일 있으면 예수님과 함께 한 시간만 찬송 기도하며 앉아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대화하고 나오면 사람들이 놀랍니다. 울면서 들어간 사람이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나오더니 얼굴이 환해집니다. 평화와 자신감과 용기가 일어납니다. 인생이 힘들거나 불안하면 예수님께 바짝 다가가십시오. 예수님 앞에서 울고 일어나면 세상에 나가서 울 일 없어요. 사람들은 여러분의 환하고 자신감 있고 평화로운 얼굴을 보며 ‘저 분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구나!’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과 같이 있었던 사실이 주변 사람들에게 드러납니까? 여러분의 표정에, 말에, 태도에, 생활모습에 그 흔적이 나타납니까?

둘째로,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은 삶에 확실한 증거가 있어요. 14절에 보면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Nothing to say. 왜? 그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베드로와 같이 서있는 것입니다. 속임수라든지 마술이라고 할 수가 없었어요. 평생 구걸하던 40여세의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같이 서있는 것입니다. 증거가 있어요. 여러분도 예수님과 함께 사시면 확실한 증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스스로 체험하니 주변 사람들이 봅니다.

성경에서 제일 얌전한 사람은 이삭일 것입니다. 힘들게 우물을 팠는데 적들이 와서 달라고 하면 양보하고 또 다른 우물을 파는 거예요. 등뼈가 없는 남자 같아요. 계속 양보하고 계속 져요. 그런데 몇 년 후에 아비멜렉 왕이 찾아와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심을 내가 보았도다.” 한 거예요. 빼앗아간 사람들보다 이삭이 더 부자가 되었어요. 그들이 하나님께서 이삭과 같이 계심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 것을 만민이 보게 하여 주옵소서.” 저는 이 기도를 좋아합니다. 축복할 때도 이 기도를 자주 합니다. 베드로 요한의 모습이에요. 여러분의 모습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삶에 증거가 나타납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일이 됩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생깁니다. 불가능한 것들이 가능하게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보고서 놀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구나. 하나님이 저분과 함께 계시구나.” 우리가 이것을 실제로 체험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사람을 겁내지 않고 하나님을 겁냅니다. 권력자를 겁내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18절에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참 멋진 말입니다. ‘당신들이 날보고 예수 이야기를 하지 말라 하는데, 당신들이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들이니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하는지 당신들의 말을 순종해야 하는지 당신들이 직접 판단해보시오. 대답은 뻔한 게 아니요? 부활하신 예수를 우리가 직접 만났고 보았고, 그분과 같이 살았었는데, 무슨 소리요? 그 예수의 이름으로 이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을 보지 않았소? 예수를 전하지 말라니! 하나님을 순종해야지!’ 여러분도 사람을 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사람 앞에 굴복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굴복하십시오. 종종 하나님 때문에 고통당하더라도 그분께 순종하며 사는 삶의 평화와 자신감과 누리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해야 됩니다. 하와는 마귀를 선택하여 타락했어요. 성경에 계속 나오는 주제가 뭔지 아세요? 선택입니다. 하나님을 택할지 사람을 택할지, 하나님을 택할지 마귀를 택할지, 하나님을 택할지 나를 택할지, 하나님을 택할지 세상을 택할지, 우리의 삶에 계속 도전이 옵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대신 하와를 택했어요. 가인은 자신을 택하고 동생을 죽였습니다. 사울 왕은 두려움을 택하여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택하여 골리앗을 넘어뜨렸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택한 결과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리라” 하였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21절에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더라.” 예수와 같이 있고 성령 충만하여 그 능력을 조금씩 체험하면, 그 결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이 폭풍 속에서도 평화를 누리며, 위협 속에서도 자신감 있게 사는 여러분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성령에 충만하면 우리에게 능력, 담대함, 자신감, 증거에 대한 확신이 생기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영광 돌리는 삶을 삽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괴롭히고 불안하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핍박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사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도움으로 성령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체험한 이 놀라운 삶이 여러분과 저의 삶이 되어서 어떤 전쟁에서도 이기기를 원합니다. 어떤 불안도 극복해서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설교 / 김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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