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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가정 울타리를 갉는 여우 때려잡기 (마 5:2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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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마침 어버이날이기도 합니다. 효도는 자식의 도리입니다. 그러나 효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사랑하기는 마음보다 행함이 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효도는 더욱 그러합니다.

5 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특히 예수 믿는 가정은 늘 화목해야 합니다. 가정의 화목이 깨지면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3월 말에 통계청에서 16 년 만에 이혼율이 줄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작년에 발표한 우리나라 이혼율은 OECD 국가 중에서 2 위입니다. 10 년 전에 비해서 2.5 배가 늘었습니다. 특히 경인 지역이 전국에서 가장 이혼을 많이 하는 지역입니다. 해마다 인천이 1 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이혼율을 높인 주범은 간음죄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적인 타락은 심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간음과 이혼에 대한 계명입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모세 율법에 대한 6 가지 반제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간음과 이혼을 다루고 있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제 7 계명이 간음에 대한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지니라.”
7 계명은 내용이 아주 간단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간음에 대한 계명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길에서 여자를 만나면 고개를 돌렸습니다.

예수님은 어디까지가 간음인지 그 범위를 정의하셨습니다. 형법으로 간음죄가 성립되려면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음으로 음욕을 품은 것도 간음에 해당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행동과 동기를 똑같이 보신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의로운 척하고 속으로는 온갖 더러운 생각을 하는 것이 더 가증한 죄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나라는 성폭력에 대한 법률이 만들어졌습니다. 또 성추행 성희롱 같은 간음죄도 처벌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미성년자와 음행을 하는 것을 원조교제라고 합니다. 원조교제한 성인의 명단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망신을 주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반 형법보다도 훨씬 엄격하십니다. 만일 오른 눈이 실족하게 하면 빼어 내버리라고 하십니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가는 것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또 오른 손이 실족하게 하면 찍어 내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온 몸이 지옥 가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사실 죄를 짓는데 오른 눈만 짓겠습니까? 왼쪽 눈은 뭐하고 있었을까요? 또 오른손만 죄를 짓습니까? 왼손은 참여하지 않았습니까? 두 눈이 있는데 한쪽 눈만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상징적인 말씀입니다. 죄에 대해서 수족을 끊을지언정 단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그 뿌리부터 단호하게 잘라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는 유혹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으로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죄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이 간음죄는 육체의 욕망 즉 성욕과 구별해야 합니다. 성욕과 음욕은 다릅니다.

성욕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복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성욕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성욕은 본래 자식을 낳고 번성하기 위한 본능입니다.

그런데 음욕은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성욕을 잘못 사용하도록 유혹합니다. 성을 음란하게 사용하는 것이 간음죄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회의 뒷골목은 음란하기 그지없습니다. 네온이 가득한 밤거리는 어김없이 이 음란 산업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는 날로 이 문제가 심각합니다. 거리뿐만 아니라 안방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있습니다. 이 음란한 문화를 막아낼 묘책도 없습니다.

저는 고향이 동두천입니다. 동두천에는 미군기지가 있습니다. 제가 어릴 때는 미 7 사단이 들어와 있었고, 지금은 2 사단 병력이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 미군부대 앞 동네가 보산리입니다. 지금은 시로 승격이 되어 보산동이 되었습니다. 이 보산리를 일컬어 택사스촌이라고 불렀습니다. 주말이면 미군들을 상대로 유흥업을 하는 거리입니다.
지금 보면 상동 상가 지역의 밤거리하고 비슷합니다. 그런데도 가끔 외지에서 손님들이 오면 그 보산리를 구경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외국 잡지도 팔고, 한국 사람은 출입할 수 없었지만, 나이트클럽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절만 해도 그런 풍경이 희한한 구경거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이 보산리에 가까이 가질 않았습니다. 무섭고 겁이 났기 때문입니다. 제가 사는 동네는 생연2리였습니다. 같은 동두천이라도 향락 문화는 거의 만나질 못했습니다. 가끔 거리에서 미군들과 윤락여성들이 데이트를 하는 모습은 보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 비하면 그 때가 얼마나 순수했는지 모릅니다. 요즘 아이들은 거리에서 쉽게 음란물들을 접할 수 있습니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성에 대해서 환합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각종 음란물들을 접해 봤기 때문입니다. 비정상적인 음란행위들까지 환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서 이 세상이 얼마나 음란하지 짐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들어가 보면 그 세계는 죄악에 물든 지옥 그 자체입니다.

제가 군복무 거의 끝날 무렵에 신병이 한 명 들어왔습니다. 이 친구 경력이 카바레 종업원이었습니다. 낮에 대원들이 뒷마당에 모여서 재미있게 이야기를 합니다. 들어보면 이 신병이 카바레에서 일어난 일들을 재담 있게 푸는 것입니다. 주로 가정주부들이 그런 곳에 와서 타락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지구에 사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닌 별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그래도 그 때는 음란한 문화가 숨어서 지냈습니다. 지금은 활개를 치고 다니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합니다. 동성연애자들이 법적으로 결혼을 할 수 있는 나라도 있습니다. 성전환자들이 호적에서 성별을 고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청소년들에게 피임기구를 보급해야 하는 실정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이렇게 음란한 문화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 있습니다. 어떻게 이에 맞서야 합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의 고민입니다.

제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부임한 교회가 서울 신촌에 있는 곳이었습니다. 전임 전도사로 맡은 교구를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첫 심방이라 기대가 컸고 긴장도 되었습니다.구역장님이 첫 가정으로 인도했는데, 그 집이 술집이었습니다. 교외선 신촌역 바로 앞에 있는 주막집이었습니다. 아침이라 영업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층 방으로 인도했는데 칸막이 옆에서 아가씨가 아직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식탁에서는 술 냄새가 배어났습니다.

주인이 교인이었는데 복을 받겠다고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무슨 말씀을 폈는데, 무슨 기도를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목회 초년생이 진땀을 뺀 기억만 납니다.
구역장 집사님이 두 번째 가정으로 인도했습니다. 그곳은 여관이었습니다. 숙박업이 잘 되라고 복을 빌어야 합니까? 낮 손님 밤손님 끊이지 않고 가득 차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이곳에서도 진땀을 뺐습니다.

목회 신참에게는 첫심방이 진땀나는 사역이었습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직업을 정말 잘 선택해야합니다. 여행객을 위한 숙박업이야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불륜객들을 주로 상대로 하는 숙박업은 삼가야 합니다.

간음죄는 가정을 파괴합니다. 음란한 도구들이 우리 주변에 있으면 그것은 곧장 죄로 유혹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이든 죄를 지으면 우리 영혼은 손상을 입습니다.

로마서 8:13 말씀입니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했습니다.

술, 담배, 도박, 사치스런 오락 등은 음란한 것과 쉽게 연결됩니다. 죄를 짓기 쉬운 직업을 가진 사람은 직업을 바꿔야 합니다. 죄로 유도하는 매개체들을 빨리 끊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 음란한 세대에서 하나님의 성도로 순결하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집에 음란한 그림, 사진 등이 들어있는 테이프이나 시디 같은 것이 있으면 버리기를 바랍니다.

구약성경에서 간음은 대부분 우상숭배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간음이 본래 자기 짝을 저버리고 다른 짝을 찾아 범하는 죄입니다. 이것을 종교로 볼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이 간음입니다.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대상 5:25>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나를 잊었고 또 나를 네 등 뒤에 버렸은즉 너는 네 음란과 네 음행의 죄를 담당할지니라 하시니라.” <겔 23:35>

그래서 성경에서 간음죄는 죄 중에서 아주 큰 죄에 속합니다. 다른 죄들은 다른 대상을 향하고 있지만 이 간음은 자기 몸에 짓는 죄입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8-20>

몸을 함부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세상 사람들도 간음으로 몸이 더렵혀졌다고 말합니다. 음욕이 생기면 성령님께 도움의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욕망을 따라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살도록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다음은 이혼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쉽게 이루어지는 이혼에 대해서 경계령을 내리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이혼증서를 주면 쉽게 아내를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여성이 물건처럼 취급받던 시대였기 때문입니다. 또 이는 모세의 율법을 잘못 해석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혼을 말한 것은 사소한 이유로 함부로 이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에 이혼은 다음과 같은 조건일 때만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육체적으로 결함이 발견되었을 때입니다. 신명기 24:1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이때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재혼할 기회를 공식적으로 주는 것입니다. (신24:2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러나 예수님은 이혼증서를 써 주어도 이는 간음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 19:3-9 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가로되 사람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여짜오되 그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마 19:3-9>

이혼 증서를 쓴 것은 다른 여자에게 새장가를 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간음죄를 짓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음행한 연고 외에는 이혼을 못하도록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음 구절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32 절 마지막에 있는 구절입니다.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전에 보수적인 교단의 교수 한 분과 이 구절을 가지고 논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교단은 성경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가지고 기독교인은 재혼을 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재혼한 가정에 심방을 가서 이는 성경에 위배되니 재혼을 취소하라고 했답니다. 이혼을 당한 여자는 재혼하면 안 된다고 했다는 이 구절을 근거로 그랬답니다. 예수님의 말씀인데 거역하겠느냐고 따졌습니다.

저는 그 분의 주장을 아주 황당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 신명기 24 장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아까 읽었던 부분입니다. 모세는 이혼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혼증서를 쓸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아내를 버리면 그 아내를 다시 취하면 이는 간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 <신 24:1-4>

이혼한 아내가 다른 곳에 시집을 갔는데 그 남편이 죽었습니다. 처음 남편이 마음이 변하여 이전 아내를 다시 맞아들이고 싶어 합니다. 모세는 이것을 금했습니다. 한번 버린 아내를 다시 맞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러니까 이혼은 신중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한번 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이혼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재혼을 금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재결합은 금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복음으로 달리 해석해야 합니다. 다른 곳으로 결혼하지 않았다면 다시 재결합하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이 구절을 잘못 해석해서 이혼한 사람은 다시 결혼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깨끗하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재혼할 수 있다고 해석합니다.

우선 이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부득이 이혼을 했다면 다시 재혼할 수 있습니다. 한번 잘못 했으니까 다시하면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억지로 재혼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에게 구속받지 않고 교회 봉사하면서 사는 것도 복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참과부라는 직분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권사입니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때는 권사가 되려면 조건이 과부라야 했습니다. 이는 교회 봉사가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혼을 쉽게 하는 것은 결혼의 참의미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기적인 동기로 결혼하게 되면 위기가 찾아올 때 이혼하게 됩니다. 상대에게 이익을 취할 것이 없으면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납니다. 다른 곳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최근에 황혼 이혼이 유행처럼 되어 사회 문제가 되었습니다. 일방적으로 비참하고 억울하게 결혼 생활을 참아왔다는 것입니다. 의처증, 구타, 극단의 정신분열증 같은 경우를 참아왔다는 것입니다. 법원에서도 이혼을 다시 조정할 수 있도록 시간을 끌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라 할지라도 이혼의 동기가 인간의 완악함이 아닌지를 살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선 간음죄를 짓지 않으려면 주변에 음란한 것들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그런 것은 불에다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한번 붙들리면 여간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이 마귀가 주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단호하게 음란한 것들에서 떨쳐 나옵시다. 눈을 뽑고 손을 잘라내는 심정으로 음란한 것들로부터 자유하십시다. 성령님께 도움을 청하시기 바랍니다.

크리스천은 이혼하면 안 됩니다.

성경에 이혼을 허락한 케이스는 단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배우자가 음행한 죄를 지었을 때입니다. 용서할 수 있으면 좋지만 용서할 수 없는 지경이 되면 이혼해도 됩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가능하면 용서하고 다시 기회를 줍시다. 배우자가 바람이 나서 도망을 쳤다면 기도해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보십시오.

두 번째는 고린도전서 7 장에 있습니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속받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고전 7:15>

믿음의 문제입니다. 배우자가 신앙을 꺾으려고 할 때는 이혼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결혼생활을 유지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결혼이 중요하지만 영혼 구원보다 중요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신중해야 합니다. 혹 지금은 믿지 않아 핍박을 하지만 언젠가는 그도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구절이 이를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고전 7:16>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 둘이 한 몸을 이루어 가정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결혼의 소중함을 깨닫고 하나님이 짝 지워주신 상대를 더욱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 / 황금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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