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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성령강림 이전의 과제 (잠 16:33, 행 1: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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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버이 주일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수고에 주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버이주일은 세속력에 따른 주일입니다. 세속력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올해는 세속력이 아닌 교회력에 따라 설교하려고 합니다. 교회력으로 다음 주일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령강림주일 이전 주일로서 성령강림 이전의 과제에 대해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성령강림 이전에 있었던 일들은 성령강림에 필요한 조건들이었습니다. 이런 성령강림 이전의 과제는 지금도 성령강림에 필요한 조건들입니다.

  “준비하는 시간은 결코 낭비하는 시간이 아니다”는 말이 있습니다. 준비는 그 자체로 중요합니다. 성령강림의 준비도 마찬가지입니다. 준비 그 자체가 성령강림에 중요한 요건입니다. 성령강림의 준비는 하나님 편의 준비가 있고, 인간 편의 준비가 있습니다. 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에 성령께서는 강림하십니다. 성령님은 절대로 준비 없이 오시지 않습니다. 만약에 준비 없이 온다고 해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어쩌면 준비 없이 오는 것은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준비 없이 오는 것은 비극입니다.

  옛날에 임금이 행차할 때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겠습니까? 미리 사신을 보내고, 가지고 갈 예물을 준비하였을 것입니다. 길을 잘 고르게 한 다음에 드디어 어가가 행차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도 마찬가지 준비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선지자를 통하여 이 땅에 전달되었습니다. 그런데 소위 중간기라고 하는 400년 동안은 하나님의 소리가 끊어진 기간입니다. 그런데 그 때 바라던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세례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입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모든 것을 다 준비시키시고 드디어 성자의 시대를 여셨습니다.
  이제 성자의 시대를 마감하고 성령의 시대를 여십니다. 그 준비가 무엇입니까? 성령님도 준비 없이는 절대로 오시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준비를 시작하는 최상의 시점은 끝이다”라고 하였는데 성령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시간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끝입니다.

  존 맥스웰은 “준비보다 더 큰 용기는 없으며, 두려움보다 더 큰 적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학생이 준비되면 선생은 자연히 나타납니다. 준비되면 일은 자연히 시작됩니다. 모든 일의 이치가 다 그렇습니다.
  흔히 시대를 구분할 때 ‘성부시대’, ‘성자시대’, ‘성령시대’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성부시대였고, 예수님이 세상에 계신 동안은 성자시대였고, 이제 성령의 시대를 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성부시대나 성자시대나 성령시대가 다 삼위 중의 한 위가 홀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는 삼위 하나님의 시대입니다.
  이제 성자시대를 마감하고 성령시대를 여는 극적인 순간입니다. 새로운 장을 여는 준비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이 준비를 하면서 성령의 오심을, 성령 강림을 맞이하고 체험하는 성도,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강림하시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했습니까?

첫째, 예수님이 승천하신 일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과 교대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이 있기 전에는 성령 강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는 요한복음 16:7에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이 승천하셔야 유익이 있다고 합니다. 웬 유익입니까? 예수님의 승천은 하늘과 땅에 동시에 유익이 있습니다. 하늘은 성부와 성자가 다시 만남으로 유익합니다. 땅은 그리스도의 육적인 활동이 끝나고 성령님을 통하여 영적이며 우주적인 활동으로 확대되기에 유익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이미 예언되었습니다. 요한복음 7:39에는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고 합니다.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가 무슨 말입니까? 아직 승천하지 않으셨으므로 영광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승천은 영광입니다. 승천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제 모든 지상의 사역을 끝내고 다시 하늘로 영광의 귀환을 하십니다. 얼마나 영광입니까?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하시던 이때의 고통이 다 물러나고 이제는 부활하셔서 지상의 사명을 다 끝내시고 귀환하십니다. 승천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영광입니다.

  여러분, 군대에서 제대할 때의 기분을 아십니까? 군에 가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기쁨이 있습니다. 제대 후에 딱히 할 일이 없어도 제대는 좋습니다. 모든 의무를 마치고 다시 돌아오는 기쁨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것이 영광이지요? 우리의 돌아가는 것이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의 귀향이 어떨 것 같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돌아가는 것도 이렇게 영광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15장에 보시면 예수님이 떠나시면 오실 보혜사에 대한 말씀들이 있습니다.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14:16),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14:26),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15:26)라고 합니다. 16장까지 하면 성경에는 “보혜사”란 말이 4번 나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셔야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셔서 도우시고, 대신 말씀하시고, 이런 일들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다음 일을 위해 승천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성령님의 시대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악한 농부의 비유’를 보시면 주인은 멀리 가 있습니다.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맡기고 수확을 얻기 위하여 종을 보냅니다. 그들이 종을 죽이자 다시 아들을 보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인이 와서 심판을 받습니다.
  달란트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우고 멀리 다른 나라에 갑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옵니다.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은 예수님 자신을 비유한 것입니다. 주인이신 예수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고 가셨다가 다시 돌아오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셔야 제자들이 일어섭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던 그들입니다. 이전에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안타까워하시며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마음을 조리고만 있을 예수님이 아닙니다. 두고 가셔야 그들이 자기 힘으로 일어납니다. 그들이 자립하고 그들에게 홀로서기를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예수님은 가셔야 합니다.

  독수리가 둥지에서 자라던 새끼를 억지로 떼어 날려 보내는 것을 아십니까? 독수리가 둥지를 만들 때는 밑에는 딱딱한 가지를 두고 가시와 같은 것들로 바닥을 한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풀이나 깃털 같은 것으로 포근하게 만듭니다. 새끼들이 조금 자라게 되면 어미는 털을 치웁니다. 새끼의 몸은 가시에 찔리고 결국 참다못해 둥지 밖으로 뛰쳐나온답니다. 개들도 그렇습디다. 강아지들이 조금 크면 젓을 안주고 되레 으르릉대며 냉정하게 쫓습니다. 이제 혼자 살게 하려고 하는 동물들의 본능입니다. 모든 동물들, 특히 포유동물들이 다 그렇게 새끼를 양육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제자들은 아직도 미숙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자신에게서 떼놓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제야 예수님을 잘 따를 수 있다고 생각했겠지만 예수님은 이제야말로 그들을 떠나보내야 할 때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역은 끝나고, 성령님의 시대가 도래합니다. 제자들은 성령강림을 체험하고 성령님과 함께 홀로서기를 하게 두시고 예수님은 승천하신 것입니다.

둘째, 맛디아를 세우신 일입니다.

  성령강림 이전의 두 번째 과제는 사람을 세우는 일입니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하고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제 12제자의 수는 11제자가 되었고 예수님이 계획하신 수에는 빈 자리가 생겼습니다. 사람을 세우신 일은 예수님의 사역에 중요한 일입니다.
  12사도는 무의미한 무작정의 수가 아닙니다. 예수님 편에서 계획되고 의미 있는 수입니다. 그래서 12를 만수라고 합니다. 꽉 찬 빈틈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18장에는 이스라엘 출애굽 공동체가 처음으로 사람을 세우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우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는 초대교회가 처음으로 교회의 직분자인 7집사를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구약과 신약 공통적으로 사람을 세우는 일은 공동체의 중대사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도 사람을 세우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세웠느냐에 따라 공동체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흔히들 “인사가 만사다”라고 합니다. 인사는 정말 중요한 인간의 일입니다.
  최인호씨의 소설 ‘상도’에는 이런 말들이 나옵니다. “장사란 이익을 남기기보다 사람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다.” “작은 장사는 이문을 남기기 위해서 하지만 큰 장사는 결국 사람을 남기기 위해서 한다.” “장사는 곧 사람이며 사람이 곧 장사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세요. 사람을 남기는 장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세상에 남겨 놓은 것은 사람뿐이었습니다. 남겨놓으신 사람들을 통하여 교회가 설립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셨습니다.

  일은 항상 사람이 합니다. 어떤 고급차도 정비사가 없으면 가지고 있는 성능을 모두 발휘할 수 없습니다. 정비사는 차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을 훈련하시고, 사람을 이 땅에 남기시고, 사람을 통하여 교회를 세우는 것이 예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회사를 경영하는 최고 경영자, CEO는 두 가지를 장악하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과 재정입니다. 사람과 돈 이 두 가지가 일을 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는 중요합니다. 경영을 하려면 이 두 가지를 장악해야 합니다.
  한국인이 성공하려면 여섯 가지 ㄲ(쌍기역)으로 시작되는 단어의 조건을 지녀야 한다고 합니다. 바로 꿈, 끼, 깡, 꾀, 꼴 그리고 끈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세요. 이 모든 게 다 다르지만 다 같습니다.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포항제철을 글러벌 시대를 맞이하여 ‘포스코’라고 부릅니다. 포스코를 설립한 박태준씨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포스코의 발전설비가 95%의 공사가 진척되었을 때 심각한 결함이 발견되었습니다. 박태준씨는 이 설비를 아낌없이 폭파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포스코의 신용이 되었다고 합니다. 포스코에 가시면 곳곳에 구호들이 붙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기업은 사람이다”라는 구호가 있습니다. 또 “자원은 유한, 창의성은 무한”이라는 구호도 있습니다. 이것이 포스코가 성공한 기업정신이라고 봅니다. 사람을 중요하게 여길 줄 아는 기업이 성공합니다. 땅은 유한합니다. 하늘은 무한합니다. 물질은 유한합니다. 사람은 무한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람을 세우는 일을 주력합니다.

  사도의 자격은 21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첫째는 요한의 세례부터 올리워 가신 날까지 함께 다니던 사람입니다. 둘째는 예수의 부활을 증거할 사람입니다. 삶을 증거하고, 부활을 증거할 사람입니다. 사람을 세워 빨리 증거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증거할 사람이 있어야 증거합니다. 증거할 사람에게 성령이 임해야 담대히 증거할 수 있습니다. 이 둘 다가 교회를 설립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데 필수적인 일입니다.
  디도서 1:5에는 “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잘 정리하고 내가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을 위하여 사람을 남겨둡니다. 사람을 세우는 일을 교회는 열심히 하였습니다.

결론

  함석헌 선생의 글 가운데 이런 글이 있습니다. “만 리 길을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우리에게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 우리가 이런 사람입니까? 주님이 필요로 하시는 사람입니까? 주님의 수에 가입할 사람입니까? 우리가 들어가면 수가 꽉 채워지는 그런 사람입니까?

  이런 사람이 되어 성령 강림을 준비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설교 /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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