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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러시아 선교의 필요성! (마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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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하는 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족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 미국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 다음이 러시아로 생각됩니다. 어떤 이들은 러시아에 100개 이상의 종족들이 살고 있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154개 종족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이들은 160개 종족이 살고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어떻든 모스크바를 비롯하여 전 러시아는 인종 전시장과 같았습니다. 그 중에 우리 조선 사람들과 고려 사람들이 소수민족으로 고생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극소수에 달하기는 하지만 모스크바 시장의 보좌관이 고려인이었고, 꽤 성공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는 농촌지역에서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1. 러시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러시아의 중핵을 이루는 동슬라브족의 국가가 성립한 것은 9세기 후반입니다. 노르만인의 러시아 침입을 계기로 형성된 키예프 공국은 11세기에 들어와 비잔틴 문화를 개화시켰습니다. 그러나 11세기 후반에는 여러 공화국으로 분열하고, 13세기에는 타타르인의 침략을 받아 그 지배하에 들어갔고, 다시 리투아니아, 폴란드의 진출에 의해 동슬라브족은 러시아인, 백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의 세 민족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하는 공화국은 점차 세력을 뻗어 15C후반 북부의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이어서 중앙집권을 추진, 농노제를 확립하였습니다. 그 후, 농노제에 반대하는 카자흐 등 농민의 반란과 귀족간의 왕위쟁탈에 의한 대동란 시대가 있었으나,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 시대를 거쳐 표르트 대제(피트대제) 시대에 절대주의적 관료국가가 성립되었습니다.

18세기 후반에는 국제적으로도 세력을 신장, 판도를 넓히고 다민족국가로서의 소련의 기초를 만들었습니다.  19세기 말에 레닌을 지도자로 하는 러시아 사회민주 노동당이 결성되었습니다.

제1차 대전 중인 1917년, 마침내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고, 임시정부 외에 노동자, 군인, 농민으로 이루어진 조직(소비에트)이 탄생 하고 볼셰비키가 세력을 폈습니다.  11월에는 소비에트가 권력을 탈취,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의 소련에 대한 간섭전쟁을 시작하고 이에 호응하여 국내에서도 반혁명군이 각지에 봉기, 전란상태가 되었습니다.  국내의 반혁명군은 붉은 군에 의해 분쇄되고 외국의 간섭군도 1920년 말에는 대부분이 철수했습니다.

1922년에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카프카즈로 이루어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성립했습니다.  1936년에는 사회주의 체제를 명확히 하는 스탈린 헌법이라 일컫는 소비에트 헌법이 제정되었으나, 한편에서는 숙청재판이 계속되어 38년까지 학자, 문화인, 노동자, 농민등 막대한 인원이 체포, 처형되었습니다.  1941년 나치스 독일군이 기습공격을 가하여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모스크바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소련은 스탈린그라드의 공방전에서 가까스로 승리하였으나 피해는 막대하였습니다.  제2차 대전 후, 소련은 4차 5개년계획에 착수하여 얼마 후 공업, 농업이 종전의 수준을 되찾았습니다.  1953년 스탈린이 죽자 새로 지도자가 된 말렌코프는 소비생활을 촉진시켜 생활향상을 꾀했으나 중공업 우선의 당내 비판을 받아 사임했습니다.

그 후 불가닌 수상 밑에서 당 제1서기로 있던 흐루시초프가 실권을 잡았습니다. 흐루시초프의 정책은 소련사회에 결핍되었던 해방감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동서의 냉전도 이시기에 소련의 양보로 평화공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는데, 흐루시초프의 정책은 비판되고 최고지도자의 자리는 브레즈네프에게 넘어갔습니다.  1964년 당 제1서기가 브레즈네프는 흐루시초프 시대에 분할된 당 조직을 단일화하고 기업의 자주성을 확대하여 생산성의 향상을 도모했습니다.  그러나 브레즈네프 정권은 스탈린 비판을 환원하여 다시 이데올로기의 단속이 반복되었습니다.  브레즈네프 사망 이후 등장한 안드로포르, 그리고 그의 사망이후 체르넨코가 등장했으나 85년 사망하여 소장파인 고르바초프가 당 서기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개혁(페레스트로이카)과 개방(글라스노스트)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여 동서화해의 뉴 데탕트시대를 열었으나 보수파의 저항도 만만치 않은 반면에 급진개혁파의 추월도 심각했습니다.

한국과 1990년 대사급 수교를 했습니다. 1991년 8월 극우를 지향하는 보수 강경파의 군사 쿠데타가 3일 천하로 끝난 후 마침내 고르바초프는 실각하고 급진 개혁파인 러시아공화국 대통령 옐친이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각 공화국들이 자주독립요구도 커져서 결국은 소련은 해체되고 느슨한 국가 연합형태인 독립국가 연합(C. I. S)이 결성되었습니다. 지금은 푸틴 대통령이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습니다.

2. 러시아 정교를 알아 둘 필요가 있습니다. 

러시아인들에게 국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당연히 러시아 정교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국민의 대 다수는 평생에 한번은 유아세례 받을 때 교회에 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유아세례는 믿음과는 관계가 없이 주고받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러시아의 주된 종교는 그리스 정교(동방정교)를 받아들인 후 다소 변형된 러시아 정교입니다. 러시아에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수용된 해는 988년으로, 이는 비잔틴 문화의 수입을 의미한다.  그러나 1453년에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함락과 함께 동로마 제국이 멸망함에 따라 러시아 정교는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제2로마, 모스크바를 제3로마라고 일컬었던 것은 이로부터 유래합니다.  이후 러시아 정교는 러시아 황실을 지지하며 제정 러시아를 이끌어나가는 견인차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여 제정 러시아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소비에트 연방시대가 도래하자 러시아 정교는 급속히 위축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할 무렵인 1980년대 말부터 서서히 신자가 늘어나 오늘날에는 러시아인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 사원의 양파 머리 지붕을 꾸뽈(Купол)이라 합니다. 이 꾸뽈은 타오르는 대지의 촛불과도 같습니다.  꾸뽈은 신에 대한 간절한 염원, 그리고 그 기도가 타오르는 대지의 촛불의 상징입니다. 촛불은 자신을 정화하고 자신을 불태우는 지고의 희생으로 상징화됩니다.  이 꾸뽈이라는 촛불 위에는 심지처럼 십자가가 하늘을 향하고 있습니다. 정교회는 자신의 존재를 이러한 시각적인 불꽃만이 아니라 종탑의 소리로 알립니다.

종소리는 주일이나 정교의 축일에 다양한 소리를 내는 종들을 울려 조화로운 종소리를 냅니다.  우리나라의 밖에서 치는 종과는 달리 정교의 종은 내타식, 즉 종 안의 쇠방울을 울려서 내는 종입니다. 꾸뽈과 종소리는 러시아 정교의 대표적인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정교회의 십자가는 우리 눈에 익숙하지 않은 횡축과 경사진 나무가 더 붙어 있는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가 매달린 육신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정교회의 십자가는 끝이 6면이거나 8면인 십자가를 사용합니다.

십자가의 맨 윗부분은 그리스도의 머리, 중간의 긴 횡목은 못 박힌 그리스도의 두 팔, 맨 아래는 그리스도의 두 발을 상징합니다.  맨 아래쪽의 횡목의 오른쪽은 긍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왼쪽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므로, 왼발이 있는 부분이 보다 아래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 중에서, 그리스도의 오른쪽에 매달린 강도만이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천국에 갔다는 것을 반영합니다.그러나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왼쪽과 오른쪽의 방향이 뒤바뀌게 됨으로 중세의 이콘 화가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왼쪽, 즉 바라보는 쪽에서 오른편에 그리스도를 부인한 베드로를 그려놓았습니다.

러시아어에서도 오른쪽을 의미하는 “쁘라비(правый)”는 “옳은, 정당한”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는데, 올바른 믿음, 즉 정교를 의미하는 러시아어의 “쁘라보슬라비에(православие)”의 어간 “쁘라보”도 이러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정교회 사원의 지붕에 십자가를 달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묻힌 골고다의 무덤 위의 십자가를 상징하므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안식처이자 세계의 중심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원의 내부는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입구의 출입구가 제일 처음 나타나고, 중간의 내부는 일반적으로 회중석이라고 하여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입니다.

정교회의 회중석은 가톨릭이나 개신교와는 달리 앉을 수 있는 의자가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해서 서 있어야 하지만, 너무 오래 서 있어서 쓰러지는 사람이 생기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회중석의 양 쪽 벽에는 프레스코화(벽화)와 이콘(그림)이 걸려 있으며, 신자들은 이 이콘 앞에서 초를 봉헌하고 기도를 드립니다. 회중석과 지성소 사이에는 이콘으로 만든 벽이 가로놓이는데, 이것을 “이코노스타스(иконостас)” 즉 “이콘의 벽”이라고 부릅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신자들은 초를 산 다음, 이콘 앞에서 성호를 긋고, 촛불을 켠 다음, 그것을 이콘 앞에 꽂아둡니다.

촛불은 죽은 자들을 기억하는 표시이고, 향 내음은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호는 세 손가락을 먼저 이마(성부)에서 배(성자)로 그은 다음, 카톨릭과는 반대로, 오른편 어깨(성자들)에서 왼편 어깨(성령)의 순으로 긋습니다.  정교에서는 성호를 그을 때 모아 쥐는 손가락의 수에도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합니다. 세 손가락은 정교의 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삼위일체(троица)를 위미하고 두 손가락은 그리스도가 지닌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상징합니다.

정교회의 사제는 결혼을 한 “백승”과 독신 수도사인 “흑승”으로 구분합니다. 독신 수도사로 서품을 받고 나면 다시 결혼할 수 없으며, 결혼한 백승 사제도 재혼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일반 정교회 사원의 사제들은 대부분이 결혼한 백승들이고,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독신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교와 같은 고위 성직에는 독신 사제만이 교구회의 선출에 의해 임명됩니다. 

3. 러시아 선교는 절대로 필요합니다.

러시아에는 러시아 정교가 34%, 이슬람교 14%, 기타 카톨릭, 유태교, 불교 등 다수 종교가 있다고 합니다. 개신교도 얼마는 있는데 주로 알미니안 계통이며, 칼빈주의는 한국 선교사들이 들어가서 활발하게 전파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러시아 제국은 1860년 베이징 조약에 의거해 중국으로부터 사실상 불모지와 다름없는 태평양 연안의 우수리 강과 아무르 강 사이의 극동 지역을 새로이 확보함으로써 우리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최초로 13가구의 한인 농민들이 1863년 추운 겨울 야밤을 틈타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우수리 강 유역으로 이주하였으며 그 후 이들의 숫자는 점차 증가하여 1866년에는 100가구까지 되었다고 합니다.  러시아 제국은 멀리 떨어진 주요 전략지에 한인들을 정착시켜 이들로 하여금 이 지역을 개발하게 할 계획으로 이들의 이주를 환영하였습니다. 

1884년에는 조선과 러시아 제국 사이에 외교 관계가 맺어지고 이어 1888년에 통상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양국 사이에 공식적 국교가 수립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러시아 정부는 1884년 6월 25일 이전에 들어온 사람에게만 시민권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전체 이주자 가운데 20~30%에 불과하였습니다.  그 후 조선 정부는 계속하여 이주를 억제했지만 이민은 그치지 않고 극동 연해주 지방으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1884~1917년까지 연해주 지역에 이주한 한인의 대부분은 그 곳에 정착한 러시아인, 코사크인 및 기타 부유한 농부들의 땅을 소작으로 농사를 지으며 고달픈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1911년 연해주의 총독으로 온 곤다치는 한인들이 러시아 땅 개척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여 더 많은 한인들을 귀화시키려 하였습니다.

결국 당시 한인 이주민의 운명은 제정 러시아 지방 행정관의 정책에 따라 좌우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러시아의 극동 연해주 지방으로 이주해 온 한인들은 자신들의 새 터전을 성실히 개척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1930년 일본이 아시아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자, 일소 관계가 악화되어 전략적으로 민감한 국경 지대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들은 일본과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게 되었습니다.  이에 소련 당국은 이들을 분산시켜, 한인의 인력으로 중앙 아시아의 땅을 개척하려는 정책을 세우게 됩니다. 결국 1937년 가을 중일 전쟁이 시작된 후 20만 명에 달하는 극동 지방의 재소 한인들은 스탈린 정권하에서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 조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주 도중 질병과 기근으로 인해 많은 한인들이 죽어 갔고, 떠나기 전 전 재산을 몰수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구한말부터 일제 시기까지로 이어진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는 일단락되었고, 이들을 1세로 하는 재소 한인들이 그들의 2세, 3세들과 함께 지금까지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세우려는 곳은 러시아의 남부지역 라스토프주의 밧다이스크 지역입니다. 이곳에는 일찍 이주해 온 교려인, 조선인들이 살고 있으며, 지금도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이주해 오고 있습니다.

끝맺는 말

예수님께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고 말씀하셨습니다. (설교 / 신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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