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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모자람의 충만 (잠 3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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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undance from Dearth>   

I. 청부(淸富)가 옳은가? 청빈(淸貧)이 옳은가?

얼마 전 한국에서는 청부가 옳으냐, 청빈이 옳으냐에 대한 열띤 논쟁이 있었습니다. 청부론을 지지하는 쪽에서는 불교와 달리 기독교는 깨끗하게 부자가 되는 길을 적극 권장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깨끗하게 번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입니다. 사실 청교도들이 부지런하게 일해서 자본주의가 생겨났다는 이론도 있습니다.

반면에 청빈론을 고수하는 쪽에서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라가는 제자들이라고 할 때 물질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자발적인 가난을 감수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른바 영성적 가난을 강조했던 것이지요. 사실 예수님을 비롯해서 성경 기자들은 돈을 맘몬(Mammon)신으로 보면서 부자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이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청부론이 옳으냐? 청빈론이 옳으냐? 이것은 마치 "닭이 먼저냐? 아니면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처럼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조금 기회주의적이고 모호한 입장이라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두 가지가 다 옳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문화와 어떤 환경 속에서 사는가에 따라서 청부론을 택할 수도, 청빈론을 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대학 교수들이 연봉을 얼마나 많이 받느냐 하는 문제가 이슈화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졸업한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님들의 초봉이 가장 높다는 조사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신문 보도를 통해서 알려지자 감신 학생들 중 일부와 몇 사람의 목회자들이 신학교 선생들이 왜 그렇게 돈을 많이 받느냐 하고 비판을 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비판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미국에서 오래 살아서 그런지 몰라도 자기 능력에 따라 많은 보수를 받는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아, 한국 사회는 빈부 격차가 너무 크다 보니까 월급을 많이 받는 것도 사회적인 지탄이 될 수도 있구나." 하고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아마 미국에 사는 저나 여러분들은 대체적으로 청부론이 옳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전형적인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에서는 돈이 없이는 하루도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남이 보기에 아무리 좋은 차 좋은 집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거의 다 은행에서 대부를 받아서 그렇게 살기 때문에 매달 얼마씩 갚아나가야만 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의 기본적인 수입이 없이는 생존 그 자체가 불가능한 사회가 미국입니다. 그래서 능력에 따라 할 수 있으면 많은 보수를 받으려는 생각이 미국에 사는 보통 사람들의 통상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의한 방법이 아닌 정당한 방법으로 깨끗이 부를 축적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도 트집을 잡지 않는 사회가 미국입니다. 오히려 연봉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 사람의 능력을 가늠할 수 있다는 생각이 미국 사람들의 지배적인 정신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많이 버느냐 적게 버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번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아무래도 유교적인 선비 정신이 부를 축적하거나 이윤을 남기는데 관심이 있는 상공인의 정신보다 앞서왔기 때문에 부 자체를 어느 정도 혐오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고결한 자세를 가지고 자발적인 가난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더 존경하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청부와 청빈에 대한 논쟁은 문화 사회적인 배경에 따라 그 대답이 다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관심을 오늘 봉독한 잠 30: 7-9에 돌려보겠습니다.

II. 가난과 부에 대한 아굴의 기도

잠 30장은 흔히 '아굴의 잠언'이라고 부릅니다. 아굴은 아마 잠언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진 솔로몬 임금과 동시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유명한 시인이나 아니면 훌륭한 도덕주의자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어쨌거나 아굴은 본문에서 두 가지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첫째로,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둘째로, 나로 가난하게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먹여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기도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기도가 두 번째 기도의 선제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굴은 물질적인 것에 대해서 기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지켜야 할 근본적인 삶의 자세에 대해서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허탄, 즉 허위로 된 모든 것을 피하고 거짓말하지 않게 해달로 기도했습니다. 앞으로 일생 동안 모든 거짓을 버리고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이지요. 이것은 가난하게 살든 부유하게 살든 꼭 지켜야 할 근본적인 삶의 자세가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남들이 볼 때 청빈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내면에 들어가면 그게 아닌 이중적인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은 기만하는 것입니다. 불행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깨끗하고 청빈하게 산다고 말하면서도 남이 안보는 가운데 부를 몰래 축적하고 있다면 이것은 허위요 거짓입니다.

또한 나는 깨끗하게 돈벌어서 부자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되었다면 이 역시 기만이요 거짓인 것입니다. 아굴은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떠한 형편에 이르든지 먼저 순수하고 정직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우리의 관심은 두 번째 기도에 있습니다. 이 기도를 자세히 보면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① 가난하지 말게 해주소서!
제일 먼저 아굴은 하나님께 가난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가난은 진짜 가난입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가난이 결코 아닙니다. 빵 한 조각이 없어서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극심한 가난입니다. 입을 옷이 마땅치 않아서 냄새나는 똑같은 옷을 일년 내내 입고 다녀야만 하는 그런 가난인 것입니다.

여러분, 극심한 가난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가난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눈물 머금은 빵 한 조각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이 살다보면 가난은 순식간에 찾아옵니다. 잘나가던 사업이 갑자기 부도를 만나게 되고 갑자기 법률 소송에 말려들어 재산을 축낼 때도 있습니다. 아니면 회사에서 대량 해고를 단행해서 갑자기 밥줄을 잃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아굴은 일상 생활 속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극심한 가난을 염두에 두고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아굴이 왜 가난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느냐 하는 이유가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철저히 신앙적이며 철저히 신학적입니다. 가난이 가져오는 인간적인 고통이나 수치 때문만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9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왜 가난해서는 안됩니까? 너무 가난해서 죄지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사흘 굶어서 남의 집 담 안 넘어가는 사람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살기가 곤궁해지면 사람이 죄를 안 지을래야 안 지을 수 없습니다. 극빈 가정에서 자라난 사람이 공직에 올라가면 더 많은 부정축재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지나친 가난은 확실히 죄지을 기회를 많이 줄 수 있습니다.

아굴이 위대한 것은 단순히 윤리적인 죄 문제만 언급하지 않고 하나님 신앙을 이야기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내가 지나치게 가난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가난한 사람도 도와주셔야 되는데 극빈은 이러한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극빈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궁색한 폐를 끼치고 갖가지 죄악을 저지를 경우 하나님의 이름이 욕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② 부하지도 않게 해주소서!
그러면 부자가 되는 것은 왜 문제가 됩니까? 미국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가 되는 것은 대부분 사람들의 소원일 것입니다. 1987년에 미국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 20만 명을 대상으로 해서 설문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습니다. 75%의 학생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한 것이 아주 중요한 인생의 목적이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전체 학생들의 71%가 대학에 진학한 주된 이유가 졸업 후 월급을 더 많이 받는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물질적인 부가 중요하지만 그 반대급부(反對給付)도 만만치 않습니다. 제일 무서운 것은 신앙을 버릴 수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자신의 경제적인 힘만 믿고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굴은 본문 9절 전반부에서 지나친 부에 대하여 이렇게 걱정하고 있습니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이 무슨 말입니까? 내가 부자 되어서 내 배가 따뜻해지면 자부심(self-sufficiency) 때문에 하나님을 몰라보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당에 올 필요도 못 느끼고 기도할 필요도 못 느끼고 결국은 영혼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지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마 19: 24에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 부가 분명히 좋은 것이기는 하되 우리 영혼을 위해서는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진정한 행복과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 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눅 12: 15에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은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이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으로 침대는 사지만 달콤한 잠은 살 수 없다.
  책은 살 수 있지만 명석한 두뇌는 살 수 없다.
  음식은 살 수 있지만 식욕은 살 수 없다. 화려한
  장신구는 살 수 있지만 아름다움은 살 수 없다.
  집은 살 수 있지만 행복한 가정은 살 수 없다.
  사람들은 살 수 있지만 진정한 친구는 살 수 없다.
  약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다.
  오락은 살 수 있지만 행복은 살 수 없다.
  종교는 살 수 있지만 구원은 살 수 없다.
  장식용 십자가는 살 수 있지만 구세주는 살 수 없다.
  좋은 삶은 살 수 있지만 영생은 살 수 없다.
  세계 어느 곳이라도 갈 수 있는 여권은 살 수 있지만
  천국은 살 수 없다."

옳습니다. 아굴은 바로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지나친 부를 바라지 않았던 것입니다! 

③ 꼭 필요한 양식만 허락해주소서!
아굴은 지나치게 가난한 길을 원치 않았습니다. 지나치게 부한 길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굴에게 남겨진 한 가지 대안은 무엇입니까? 그는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자기를 먹여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 할당된 몫으로 족하겠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지혜로운 기도인지 모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가 쓴 유명한 단편 소설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은 도대체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How Much Land Does a Man Need?)라는 제목의 소설입니다. 도무지 만족을 모르는 부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땅도 엄청났지만 더 많은 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이 부자는 새로운 유목지가 한창 개발중인 지역에 러시아 화폐로 1천 루블(rubles)만 내면 하루 종일 자기가 걸은 만큼의 땅을 차지할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단 해가 떨어지기 전에 자기가 출발한 지점에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규정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이 사람은 흥분을 가누지 못한 채 해가 뜨자마자 기름진 대평원을 젖먹는 힘을 다하여 걷기 시작했습니다. 기름진 땅 곳곳에 말뚝을 박으면서 이 광활한 땅이 모두 자기 것이 된다는 기쁨 때문에 피곤도 모른 채 걷고 또 걸었습니다. 아니 뛰어 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지점에서 그동안 걸어 온 길을 되돌아보니 엄청난 길이의 땅이었습니다. 더 가고 싶었지만 해지기 전에 출발지점으로 돌아와야 한다는 규칙을 지키기 위하여 왔던 길을 부지런히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지나치게 넓은 땅을 잡았기 때문에 도저히 해 떨어지기 전에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는 일이 불가능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처음 떠났던 곳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그 많은 땅을 고스란히 잃어버린다는 생각을 하자 넘어지고 다치고 땀이 뒤범벅이 된 채 단 1초도 쉬지 않고 걷고 또 걸었습니다.

마침내 해가 지평선 위로 막 떨어지고 있었을 때 이 사람은 간신히 출발지점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그 자리에서 거품과 피를 토한 채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하루 종일 기를 쓰고 걸어서 엄청난 땅이 모두 자기 소유가 되었다는 기쁨을 채 누리기도 전에 죽고 말았습니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다음과 같이 끝내고 있습니다. "머슴은 괭이를 집어들고 머리에서 발끝까지의 치수대로 여섯 자(six feet)의 땅을 팠다. 그의 묘를 쓰기 위해. 그리하여 그를 그곳에다 묻었다." 이 부자에게 필요한 땅은 겨우 6 피트였으면 족했지만 그는 그 이상의 욕심을 부렸던 것입니다.

아굴은 이와 같은 맹점을 정확하게 꿰뚫어 볼 줄 안 현자(賢者)였습니다. 그리하여 지나치게 가난하지도, 지나치게 부하지도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으며, 꼭 자기가 생활하기에 필요한 양식만 허락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III. 모자람의 충만을 향하여

아굴의 기도는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이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야 하는 가 하는 기본적인 철학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할 수 있으면 순수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가난해서도 안됩니다. 그렇다고 너무 부자가 되어도 불안합니다. 극단적인 가난과 극단적인 부는 신앙 생활에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플라톤(Plato)은 행복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들었다고 합니다. 첫째, 생활하기에 조금 부족한 듯한 재산. 둘째, 사람들이 칭찬하기에는 조금 떨어지는 용모. 셋째, 자신이 자만하고 있는 것에서 사람들이 절반 정도 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넷째, 겨루어서 한 사람에게는 이기고 두 사람에게는 질 정도의 체력. 다섯째, 연설을 했을 때 청중의 절반 정도는 박수를 치지 않는 말솜씨.

플라톤이 제시한 다섯 가지 조건은 전부 다 조금은 부족하고 모자란 상태입니다. 약간 모자란 듯한 삶, 어쩌면 여기에 행복의 비결이 있을지 모릅니다. 현대인들은 도에 넘치는 부와 소유욕, 분수에 넘치는 명예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만족을 모릅니다. 감사를 모릅니다. 오히려 불행합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약간 모자라게 사는 것이 더 충만한 삶이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조금 부족하게 살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넉넉하게 살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여기에 계신 분들은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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