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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의 손에 영혼의 생사가 달려 있습니다 (마 9: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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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산골 마을에서 어떤 부모가 다섯 살 된 여자 아이를 잃어 버렸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소용이 없자 젊은 부부는 마을의 목사님을 찾아와서는 교회 종을 쳐서 온 동네 사람을 부르고 아이를 찾아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종을 치고 사람들을 불러 모아 산 속으로 흩어져 아이를 찾게 했습니다. 겨울밤은 점점 깊어가고 바람 소리는 거세지고 동물의 울음소리 들리는데 아이는 보이지 않고 산속에서 사람들은 점점 불안해했습니다. 아이를 찾지 못하면 아이의 생존에 틀림없이 위험이 따르니 과연 아이가 살아 있겠는가?
아이를 찾기에 새벽이 되었을 때 한 사람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찾았다!" 산 속을 헤매던 다른 사람들은 함께 합창을 했습니다. "찾았다. 찾았다." 아이를 업고 내려와 그들은 교회 마당에 모여서 불을 피우고 음식을 나누면서 기뻐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축제가 벌어진 것입니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았고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아이가 살아 돌아 온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자 목사님이 사람들 앞에 나셔서 "여러분, 오늘의 축제는 마치 하늘나라의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돌아왔을 때 모든 천사들이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의 열성에 감사합니다. 어린 소녀는 여러분이 살렸습니다. 하지만 육신을 위해서는 이렇게 모두 다 나서는데 정작 영원히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그들의 육신적인 문제에 대하여 걱정하고 고민만 했지 영혼에 대하여 무관심 한 것을 매우 부끄러워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예수님은 답답해하시며 심히 안쓰러워하고 걱정스런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길을 잃고 유리(遊離)하기 때문이다.
유리하다는 말은 사람들이 지금 버려진 상태요 죽어가는 상태라는 말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 민망(憫惘)해하심은 고민하고 근심하심은 이들을 바로 인도해 줄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우리 사람이 죽게 된 이유는 먹을 것 입을 것 때문이 아닙니다.
육신적인 이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 겉으로 들어난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사실은 그들의 영적인 사람이 죽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이 없어서 개걸(丐乞)이 아니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고 여호와의 말씀이 없고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내 자신을 살펴보십시다. 내 주위를 살펴보십시다.
참으로 하나님의 관계가 바로대지 않아서 고민을 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자들이 과연 얼마나 있습니까?
모두가 한결같이 육신적인 문제만을 가지고 고민하고 걱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아이 밥 안 먹고 공부 안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지 그 영혼을 위하여 교회 생활등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아닙니까?
내 남편 사업이 잘 되고 안되고 나를 사랑 하느냐? 안 하느냐? 관심을 가졌지 당장 지옥에 갈 것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이러한 인생들을 보시고 고민하고 답답해하시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기도 제목을 하나를 일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영혼을 위하여 일할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기도 제목이 있다면 일군들을 보내어 달라는 기도가 필요하며 하나님은 그 기도를 얼마나 기쁘시게 받으실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께 화평 제단에서 영혼을 위하여 일 할 일군들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기쁘시게 받으시는지 기도하면 많은 일군들을 보내 주실 것을 확신 할 수가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여러분들의 기도 제목은 무엇인 줄로 아십니까?
주여 제가 일군이 되겠습니다. 고 하여야 합니다. 한번 따라 해 봅시다. 주여 제가 일군이 되겠습니다.
일군이 되게 해 주십시요가 아니라 일군입니다 하여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 가운데는 아직 나는 주의 일을 할 수 없어 아직은 일군이 아니야 하는 착각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이게 우리에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라면 일군이 아닌 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은 교회의 머리시고 우리는 몸 된 교회를 구성하는 몸의 지체입니다.
내 몸의 지체를 한번 살펴보십시오. 내 몸에 필요 없는 지체가 있습니까?
아니 내 몸을 위하여 수고하지 않는 지체가 있습니까?
한 지체도 없습니다.
만약에 내 몸에 필요 없고 일 하지 않는 지체가 있다면 그것은 크게 잘 못된 지체요 병든 지체일것이요 아니면 내 몸에서 떨어져 나간 쓸모없는 지체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자라고 한다면 무슨 모양이든지 아니 내가 어떠한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일군으로서는 전혀 문제가 없고 얼마든지 일군이요 일군인 것이 가장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일군이 아닌 것 같이 있다면 이것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자리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나온 모든 분들은 다 하나님의 일군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군입니까?
세상을 향하여 방황하며 죽어가는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군들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사람들의 영혼의 생사가 달려 있다는 막중한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네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죽은 영혼의 핏값을 네게서 찾겠다는 말입니다.
일군이 일하지 않아서 죽은 일이 생기면 그 책임이 그에게 돌아가는 것 아닙니까?
이것 때문에 고민하고 영혼을 위하여 수고하고 내 자신을 드리는 것이 아주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가서 제자 삼으라. 세상 모든 영혼들이 네게 달렸나니…….
일군 된 자로서 내게 주어진 삶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육체를 몸을 가진 것은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주어졌습니다.
작년 한 해 죽은 사람이 우리나라에서만 29만 명이요 하루에 700명이 죽으니 20퍼센트가 신자라고 한다면 매일 560명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숫자 속에는 내 사랑하는 자들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과연 지옥이 어떤 곳인가? 한 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일을 상상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아무리 무서운 형벌이라도 지옥에 비하면 그것은 순간적이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배반한 자가 당하는 고통은 누가 그렇게 해서 그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도 잔인하신가? 아니 인간의 악이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까라마죠프의 형제]에서 지옥을 묘사하기를 죽은 영혼은 자기가 세상에서 부인하고 대항했던 그리스도를 봄으로서 평생을 악하게 살았던 자신을 위해 쏟았던 사랑과 긍휼을 이제야 깨닫게 되고는 고통의 불길이 마음에서 타오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을 판 가륫유다가 선생을 돈을 받고 팔았다는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여 목을 메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런 경험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마음의 상태에서는 인간은 아무리 좋은 곳에 데려다 놓아도 그곳이 지옥입니다.
음부에 떨어진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물을 한 모금만 달라고 하였지만 그것과 다른 모든 요청이 거절당하자 그는 물어보았다는 것 아닙니까? "내가 이 속에 얼마나 오래 있어야 합니까? 천년 후에도 만년 후에도 내가 나갈 수만 있다면 기다리겠습니다." 는 것입니다. 이 때에 아주 양심적으로 다가 오는 것 같습니다. "아들아, 너는 거기 천년 있거나 만년을 있지도 않는다. 너는 거기서 영원히 영원히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지옥입니다.
더 이상의 희망이 없는 곳입니다.
장차 영원히 망할 수밖에 없는 그 영혼들이 그렇게도 불쌍히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의 장래를 바라 볼 때에 어찌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예수님이 못 본체하시고 지나가겠습니까?
제 같으면 속상하게 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있으면 죽든지 말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을 수 있지만 주님은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심정을 가지고 영혼의 구원을 위하는 일군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도 지옥을 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더 늦기 전에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지나다니는 사람입니까?
모르는 사람입니까? 물론 그들도 대상이겠지만 사실 내 주위의 사람들입니다.
내 부모요 내 가족이다. 친척이요 이웃이요 친구요 사랑하는 자녀들입니다.
그들이 언제 죽어 지옥 갈지 모르는데 어찌 발을 뻗고 편히 잠을 잘 수 있겠습니까?
내 사랑하는 자가 그냥두면 죽어 지옥 가는데 천하태평같이 있어야 하겠느냐? 말입니다.
예수님의 고민을 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 열어 놓고 집 나간 자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정 예수 그리스도가 하신 일이 무엇인가? 병 고침인가? 의를 행함인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고 나에게 용기만을 준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하신 일의 결과일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그렇게도 소중한 이유는 내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나의 영혼을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참으로 아무런 미련 없이 평안한 가운데 주께 내 영혼을 드릴 수 있습니까?
이제 내가 그리스도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은 그의 구원함을 받았다는 것이요 그 구원의 확신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일 곧 영혼의 구원을 계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구원받은 자들에게 자신의 일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이 일은 사람 외에는 아무도 할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에 천사도 흠모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영혼의 구원을 위하는 일이 얼마나 복되고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참된 복은 죽어 가는 영혼에 생명을 주는 일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바로 하늘나라에 가지 않고 이제 각자가 구원 받은 자로서 세상에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땅에 계속 머무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인생을 모두 헛되이 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면 시간 낭비요 물질 낭비요 모두가 다 헛된 것뿐입니다.
미국 LA의 Mosaic Church의 담임 목사인 Erwin McManus 목사는 교인 1500명 중에 헌신하기로 된 자가 900명이라는 모습을 볼 때에 아니 그 교회는 헌신하지 않는 자는 교회에 등록을 아예 시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한 여러분들은 그 누구도 예외가 없이 영혼의 구원을 위한 일군들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항간에 우리에게는 뚜렷한 목적도 없이 돈 10억을 모으는 방법 등을 방영하는 것을 들을 수가 있었는데 어찌 내가 돈을 벌기 위하여 존재하고 좋은 집을 사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한갓 헛될 것입니다.

저는 항간(巷間)에 잘 아는 어떤 집을 방문했습니다.
만나기만 하면 돈 없다고 하고 누가 자기 보고 돈 빌려 달라고 했습니까? 돈 달라고 한번 했습니까?
그런데 아주 큰 집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래서 저는 속으로 이제 당신의 인생은 이것으로 목적 달성이 끝이 났군요 이것으로 더 이상 바라 볼 것이 없어졌군요 이 속에서 갇혀 살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다 들여 잃어 버린 영혼을 구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지난 주 집회를 가운데 젊은 의사 부부가 특송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잘 보아도 30대 초반 더 이상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잘 나가던 개업 의원을 정리하고 선교를 위해 추수 할 영혼을 위해 저 우즈베키스탄으로 간지 1년 3개월이 되는데 거기서 30-49여명을 모아 놓고 교회를 세우고 의료로 봉사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그들에게 돈 냄새가 나는 것이 얼마나 신선한 냄새를 느끼고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무나도 감동적이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아방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위한 나의 삶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마흔 두 살의 고려대 조무성 교수가 어느 날 갑자기 위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 그리고 학생들. 그는 문득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들과 곧 헤어져서 다시는 볼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는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 그의 건강은 양호했습니다. 그는 술과 담배를 모르고, 기독교 신앙 안에서 경건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건강에 대해서는 별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흔 두 살 되는 생일에, 암이라는 판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자세히 조사해 보니, 위암이 상당히 퍼진 상태였습니다. 그 사실을 안 순간, 아내와 두 아들의 모습이 뇌리에 스쳤습니다. 그리고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더욱 열심히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암에 관한 책들을 구해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의사와 목사님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얼마나 건강에 대해서 무지했던가를 깨달았습니다.
과로와 스트레스가 암을 유발하는 주범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식생활에도 그 원인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열 가지 원칙을 세워 놓고 지켰습니다. 경건 요법과 정신요법을 비롯한, 영양, 운동, 휴식, 의술, 예술, 청결, 관광, 봉사 요법 등을 알게 되었는데 이들 열 가지 중에 첫 번째가 경건 요법이고 마지막이 봉사 요법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 암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지름길이라고, 조 교수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영적․ 정신적․신체적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을 돕게 될 때에 기쁨을 얻게 되는데, 이 기쁨이 암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주변에는, 신체적으로는 아무 이상 없으나,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런 이들을 “목자 없는 양처럼 고생하며 유리하는 사람들(마9:36)”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다른 번역본에서는 ‘고생에 지쳐서 기가 죽어 있는 사람들(새)’, ‘시달리며 허덕이는 사람들’, ‘매우 지치고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현대어 성경〉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들, 곧 ‘목자 없는 양’같은 사람들이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너무 큰데, 그들은 그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에 가서 도움을 받아야 할지 모르는, 가엾은 백성들」이라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려대 조무성 교수는 10가지 치료 요법을 가지고 자신의 암을 이겨냈습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들, 곧 자신의 문제가 대단히 크건만,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방황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을까요? 영혼을 위한 일군이 되는 것입니다.
영혼을 위하여 수고한 자는 그 상을 결코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영혼을 위하여 얼마든지 일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것으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영 육간에
어떤 이는 기쁨과 즐거움과 소망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 지 왜 돈을 벌어야 하는지도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김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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