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버이주일] 십자가에서의 효 (요 19:25~27)

  • 잡초 잡초
  • 355
  • 0

첨부 1


Ⅰ.들어가는 말

조선시대에 지혜로운 임금이었던 효종의 일화 하나가 있습니다. 왕께서 민정 시찰 중에 길거리에서 어떤 젊은이가 팔순이 넘은 노모를 업고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일로 이렇게까지 늙으신 노모를 업고 서 있느냐?”
그는 대답하기를 “어머님의 평생소원이 임금님의 용안을 우러러 뵙는 것이어서 제가 십리 길을 걸어서 어머니를 이렇게 업고 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임금님은 그의 효행을 기특히 여겨 그에게 후한 상을 내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이 퍼지자 그 동네에 별로 효자가 아니었던 젊은이 하나가 자기도 노모를 업고 임금이 지나는 길옆에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임금님이 그 모습을 보고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여기에 와 있느냐?” 그랬더니 그는 지난번에 후한 상을 받은 사람과 꼭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하도 임금님을 뵙고 싶어 하셔서 제가 먼 길을 걸어서 이렇게 업고 왔습니다” 이 때 동네 사람 하나가 갑자기 뛰어나와서 “아닙니다. 임금님, 저 놈은 천하의 불효자식인데 상금을 타 먹으려고 나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여러분이 이 상황에 있다면 어떤 반응을 하시겠습니까? 아마 우리 모두는 “저런 나쁜 놈은 당장 감옥에 가두어라”라고 명령을 내릴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님은 의외로 이런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효도는 흉내라도 내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느냐? 저자에게도 후한 상을 내릴지어다”  (이동원 목사, 『골고다에서 본 예수의 삶』에서 인용)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과연 어떤 시대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효도를 흉내라도 내는 사람들이 보고 싶어지는 때, 아니 효도를 흉내라도 내는 사람들도 찾기 어려운 시대가 아닙니까? 오늘 이 시대는 효도는커녕 자식이 부모를 너무나도 쉽게 무시하고, 심지어는 욕하고 죽이는 패역한 시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에는 명문 사립대 출신의 아들이 아버지를 청부살인하는가 하면, 또 어떤 아들은 생활고 끝에 아버지를 직접 살해하고, 자신도 죄책감에 못 이겨 스스로 자살을 한 비극적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정말 이 시대는 효도를 흉내라도 내면 그래도 괜찮은 자식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말세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일찍이 말세의 징조를 이야기하면서 말세가 되면 사람들이 부모를 거역할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딤후 3:2).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부모를 거역하는 세대, 아니 거역하다 못해 부모를 죽이는 세대, 이런 세대를 향하여 오늘 주님께서는 십자가위에서 웅변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효야 말로 우리 인생들이 가장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말입니다.



Ⅱ.몸말

1.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효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웅변적으로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속사역의 완성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작년에 영화 「Passion of Christ」를 통해 어느 정도 보았듯이, 십자가의 고통, 그것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고통 가운데 가장 극심한 고통이요, 가장 처절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엄청난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도,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안고 서 있는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마리아 곁에 있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그 결정적인 순간에도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에 대한 효를 잊지 않고 계셨고, “네 아비와 어미를 공경하라”(출 20:12)는 구약의 계명을 이루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효가 얼마나 중요한 하나님의 명령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예수님의 이 십자가에서의 효를 통하여 깨닫게 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2.십자가에서의 효란?

1)  네 부모를 공경하라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의 효를 통해서 우리가 부모를 최대한으로 공경해야 한다는 진리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어머니 마리아를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심한 통증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눈물을 흘리며 서계신 어머니 마리아를 보셨습니다(“보시고” 26절).

그리고 어머니를 향하여 이렇게 부르고 계십니다. “여자여” 어머니를 향해 어떻게 “여자여”라고 부를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드시는 분이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이 호칭에는 매우 중요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 속에서, 오히려 우리가 부모님을 진정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기서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향해서 “여자여”라고 부른 이 호칭은 “구나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원래 여인을 향하여 최상의 존경을 표시할 때 쓰는 말입니다. 아무한테나 쓰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주로 왕후나 여왕에게 쓰이던 존칭어였다고 합니다. 오늘로 말하자면 대통령 영부인에게 부르는 호칭인 “first lady”에 해당하는 명칭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여인을 향한 최고의 존칭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고통으로 거의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도 마리아를 향해 “구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런 격식을 차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 처절한 상황에서, 마지막 떠나는 순간에 자기가 인간으로 사용할 수 있는 최상의 경칭을 가지고,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존경을 드리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지십니까? 그렇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의 이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듣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부모님을 최상으로 공경해야 한다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죽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와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인류를 위하여 자신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엄숙한 순간에,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즉 구속사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십자가의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순간에, 어찌 보면 지극히 사적이라고 느껴질 수 있는 대화를 예수님께서는 그 어머니 마리아와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뜻 보면 예수님의 마리아에 대한 이런 말씀은 갈보리 십자가의 상황에 잘 맞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예수님은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며, 그 분의 뜻에만 순종하셨습니다.

그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고 말씀하셨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지금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무서운 고난의 십자가를 꼭 제가 져야 합니까?” 고민하며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시다가도, 결국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라고 고백하시고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그러기에 그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러 번에 걸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내 옆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5장에서는 굶주린 자, 목마른 자, 헐벗은 자, 병든 자와 감옥에 갇힌 자들을 돌보아 준 이들에게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마 25:4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한을 통해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눈에 보이는 바, 가장 가까운 이웃은 누구입니까? 나 외에 가장 가까운 이웃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의 부모님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하나님 사랑, 다시 말해서 이웃 사랑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부모공경, 부모사랑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절정을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가까운 이웃인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최고의 사랑을 고백하심으로, 하나님 사랑을 십자가에서 실천하고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것 자체도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순종하신 것이고, 그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심으로 이웃사랑을 통한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신앙이 좋고, 믿음의 행위를 잘 한다고 하여도, 만일 우리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부모님을 공경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다 가짜입니다. 우리가 진정 부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하나님 사랑은 다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마태 22:40)이라고 했으니,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것은 우리가 이웃 사랑도, 하나님 사랑도 하지 못한 것이 되니, 율법 전체를 어긴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이 세대는 효를 흉내내는 사람들도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약 한달 전에 한 신문에 “아들을 고발합니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동아일보」 2005. 3. 28). 그것은 아들에게서 상처를 받은 한 60대 노인이 그 아들의 잘못을 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달라고 하소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노인은 건축업을 하다가 2년 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지금은 전철에서 껌팔이를 하는 떠돌이 노숙자로 전락해 하루 하루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번듯한 직장을 다니는 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의 집을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했고, 그러던 어느 날 왼쪽 수족까지 마비된 성치 않은 몸으로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어 다시 아들을 찾았다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하고 쫓겨났다는 것입니다. 현관문에서 “갈 곳도 없고, 찾아올 곳은 오직 너 밖에 없으니 살려 달라”며 아들에게 무릎까지 끓고 통사정을 했지만, 아들은 “죽은 줄 알았는데 왜 죽지 않고 찾아왔느냐?”고 자신의 멱살을 잡고 현관 밖으로 끌고 가 내동댕이를 쳤다는 것입니다.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이 아들의 모습은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까? 저는 이 시간 이 아들의 모습 속에서 저의 불효를 바라보고 회개합니다. 오늘 한국에 그리스도인들이 인구의 사분의 일인데, 이 사회가 왜 이렇게까지 패역한 시대가 되었습니까? 바로 접니다. 바로 우리가 패역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서 우리의 이러한 패역한 모습을 보시면 피눈물을 흘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어떤 목사님의 말씀처럼 “어버이는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대리자이십니다. 어버이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대리자이며, 생명 수여의 대리자이십니다. 어버이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이 땅에서 계시해주는 이들입니다. 어버이는 또한 사랑의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우리가 비록 죄인일지라도 우리를 용서해주실 수 있는 분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어버이밖에 없습니다.  남들은 다 욕하고 손가락질을 해도 우리의 어버이는 우리를 용서하고 감싸 주십니다. 그래서 어버이의 용서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이중표 목사, 「기독교신문」 2005년 5월 8일)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어버이를 사랑하고, 공경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의 효를 통하여 우리들이 진정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들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부모님들을 공경할 수 있습니까?     
 
2) 네 부모의 필요를 공급하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위에서 우리가 부모님들을 어떻게 공경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말로만이 아닌 부모님들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그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그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이제부터 이 분이 너의 어머니이니 네가 나를 대신하여 돌보아 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통 때문에 남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그 상황 속에서도 어머니를 보고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내가 이제 떠나면 나의 어머니는 누가 돌보아 줄 것인가?”
“이제 내가 떠나면 불쌍한 나의 어머니 마리아는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를 생각하셨고, 그 어머니의 필요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 순간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제자, 그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오늘 본문 27절에서 보는 대로 그 때부터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요한은 평생을 마리아를 자기 어머님처럼 모셨고, 그가 후에 에베소에서 목회를 할 때에도 마리아를 모시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에 가면 지금도 요한이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다는 집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효는 말로만의 효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효는 부모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채워주는데 까지 나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부모님의 필요를 채우고 공급한다는 것은 더욱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먼저 부모님들을 부양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부모님께 입술로만 부양(lip service)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부양은 잘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까 소개한 그 패역한 아들처럼 말입니다.

일주일 전에는 이런 소송이 신문기사에 난 것을 보았습니다(「조선일보」 2005. 4. 30). 어떤 불효자식이 아버지를 죽을 때까지 부양하고 매달 용돈도 줄 것을 약속하고 아버지에게 재산을 물려받았는데, 그 다음부터는 아버지를 나 몰라라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70대 아버지가 화가 나서 “이 불효자식아, 물려준 돈 내놔라”하면서 장남에게 4억 6천만 원의 반환소송을 낸 것입니다. 이 아들은 자신의 빚도 갚아주고 돈도 물려준 아버지를 잘 보살피고 시중은행 금리에 해당하는 정도의 용돈도 매달 주기로 약속을 해 놓고는, 막상 재산을 물려받은 후에는 약속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고, 심지어는 아버지와 밥도 같이 먹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부모가 자식을 신문지상에 고발하며, 세상 법정에까지 고소하는 세상이 되었는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풍조야 어떻든 우리 신앙의 자녀들은 부모님들을 부양하는 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으로 알고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실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들을 공급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부모님들의 필요를 공급할 때 어느 만큼 해야 하는가의 기준은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만큼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한국의 젊은 부모들은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주려고 합니다. 사실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 자식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 7:9-11)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이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는 항상 좋은 것으로 주려고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우리가 심각하게 자문해보아야 할 것은,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자식을 생각하고 사랑하는 것만큼, 우리의 부모에 대해서생각하고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요즘 젊은 부모들은 지나가다가 무엇인가 좋은 것을 보면 그것을 자식에게 주고 싶어 합니다. 물론 좋습니다.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식들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의 반만이라도 우리 부모님들을 생각하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우리가 진정 효도하려면, 그 기준을 부모된 우리들이 우리의 자식들에게 하는 것만큼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곧 부모의 필요를 공급하는 바른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의 수준은 여기서 머물러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부모님들의 필요를 공급한다는 것은 꼭 물질적인 것에서만 그쳐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잠언 23:23-2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의 아비는 크게 즐거울 것이요, 지혜로운 자식을 낳은 자는 그를 인하여 즐거울 것이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부모님들의 필요를 공급하되, 물질적인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의 마음을 즐겁게, 기쁘게 해 드려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오늘 우리의 부모님들에게 더욱 귀한 봉양이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물질적 필요를 공급하고, 때로는 좋아하시는 음식도 대접하고, 좋은 옷도 사드려서 그들에게 기쁨을 드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런 것은 순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많은 자식들이 부모님에게 어버이날 하루 찾아뵙고,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도 사드리고 용돈도 드림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으로 우리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입니다. 물론 요즈음 같이 효를 흉내 내는 사람도 드문 세상에서는 어버이날만이라도 대접해 드리는 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모님들을 진정 기쁘게 해 드리려면 그 분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려면 우리는 부모님들과 늘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많은 부모님들이 외로움에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 많은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홀로 눈물짓다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부모님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닙니다. 맛있는 음식이 아닙니다. 비싼 옷이 아닙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자식들인 우리들입니다. 우리들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위에서 비록 자신은 이제 떠나지만, 자신을 대신하여 그의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어머니와 평생 함께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식들이 부모님들과 함께 함, 이것이 바로 부모님들을 가장 기쁘시게 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부모님들을 진심으로 공경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필요를 채우고, 그들과 함께 함으로 기쁨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들을 귀하게 보시고, 약속하신 계명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가 상급을 받을 목적으로 부모에게 효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공경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3) 상급이 있다

그렇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며 효를 다하는 자에게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약속이 실현됩니다. 이 약속이 그대로 이루어진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도 요한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요한은 12제자들 가운데 가장 장수하는 복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90이 넘는 생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는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로 알고 끝까지 효를 다하였기에 하나님의 약속을 복으로 받은 것이었습니다.

탈무드를 읽어보면 랍비였던 요시아라는 사람에 관한 흥미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너는 천국에 가면 푸줏간 주인 데네스의 곁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꿈을 깨고 나서도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과거에는 어느 나라, 어느 문화에나 소위 푸줏간 주인은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랍비는 기분이 좀 나빴습니다.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천국에 가서 하필이면 푸줏간 주인 옆에서 영원히 살아야 하나?”

그러나 잊을 수 없는 꿈에 대한 어떤 감동 때문에 계속 데네스라는 이름을 가진 푸줏간 주인을 찾았습니다. 그러다 어느 시골에서 마침내 그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더러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라고 했는데, 그는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꿈을 잊을 수가 없어서 랍비는 그 시골로 찾아 나섰습니다. 그에게 찾아가서 “왜 나에게 오지 않았느냐?”고 물으니까, 데네스는 “저는 이렇게 유명하신 랍비 선생님을 만나 볼 자격도 없는 사람이거니와, 사실은 병약한 부모를 돌보고 있기 때문에 제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랍비에게는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렇구나. 하나님은 부모를 귀히 여기는 자를 천국에서도 귀히 여겨 주시는구나” (이동원 『골고다에서 본 예수의 삶』에서 인용)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의 효를 본받아 살아가는 자들에게는 이런 귀한 복을 주십니다.

Ⅲ.나가는말

어제 「국민일보」(2005. 5. 7)에는 50대 경찰서장의 눈시울을 붉힌 팔순 노모의 “새벽 편지”가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그 편지는 서울 강남경찰서의 손창완 서장의 어머니의 편지입니다. 손 서장의 어머니는 86세의 노모인데, 매일 새벽에 출근해 밤늦게야 귀가하는 아들의 얼굴조차 보기 힘들자, 평소에 아들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해주고 싶은 말을 글로 적어 새벽에 아들의 안방 문틈에 살짝 끼어놓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쉰이 넘은 아들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아들, 내 말 좀 들어보소. 걱정이 되어 하는 말이네. 이 세상은 좋은 것도 많이 있지마는 이름 모르는 병도 너무 많아 내 몸을 내가 조심하고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명심하게. 젊은 나이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라네. 아들도 오십이 넘어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라네. 요새 사람들은 좋다는 것은 다 먹고, 운동은 다 하는데, 아들은 물론 시간도 없지마는 제발 몸 관리 좀 하게. 시간 나는 대로 병원에 가서 혈압도 재보고 검사고 가끔 하면서 제발 내 몸 내가 챙기고 관리 좀 하란 말이네. 어미의 간절한 부탁이네”

손 서장은 8순 노모의 편지를 읽다가 눈시울이 붉어지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하기를 “비록 어버이날에도 출근을 해야 하지만, 그 날만큼은 일찍 퇴근하여 어머니와 저녁식사를 함께 하겠다”고 기자에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그래도 이 손 서장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직도 자기를 걱정해 주시는 어머님이 살아계시고, 또 그 어머님에게 무엇인가 대접해 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 제가 아는 어느 대학의 총장님께서는 이렇게 효를 하고 싶어도 효를 받으실 부모님이 계시질 않아 안타까워하면서 이런 회한의 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철이 들고 자식을 키워 보면서 효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면서 어버이를 찾아 몸부림을 치지만 어버이 가신 지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바로 못 다한 효임을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제가 여기 눈물어린 글을 드리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가버린 아버님, 어머님을생각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움은 어찜입니까? 불효가 무엇인지를 나이 50이 훨씬 넘어서야 깨달은 소치입니다. 이제야 받은 정과 사랑을 드리고 싶은데, 아무리 찾아도 부모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무덤을 찾아도 말이 없으십니다. 요즈음은 꿈에도 찾아오시지 아니합니다. 나의 영원한 사랑의 부모님! 백발이 다 되어서라도 지금 내 곁에 계신다면...지금은 이토록 구경할 것도 많고, 제가 운전도 할 수 있고, 형편도 여유가 있는데, 하필이면 가난할 때 오셔서 가난하게 사시다가, 가난하게 떠나신 부모님 생각이 나면 못 다한 이 자식의 정성이 이 자식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한으로 떠오릅니다. 풀 수 없는 한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몹시도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은 부모님! 정말 단 한번이라도 이 자식의 곁에 와주실 수 없나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많은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실수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날 낳으시고 기르신 어버이에 대한 효는 제한된 기간 안에만 유효합니다. 그 기간이 지나면 아무리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부모님들이 우리가 진정한 효에 대해서 깨닫는 순간까지 기다려 주시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바로 효에 대한 후회입니다. 효를 받아야 할 우리의 어버이는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은 채 인생의 종착역을 향하여 쉬임없이 걸으시다가 어느 날 우리를 홀연히 떠나십니다. 그 후에는 우리가 아무리 눈물어린 편지를 써 보아도 부모님이 이 땅에 계시지 않다면, 그 어떤 효의 글도, 물질도 무가치합니다. 효에 불타는 자식의 마음과 행동은 어버이 살아계실 때만 효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동안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지금 부모님께 순종하십시다. 지금 부모님께 열과 성의를 다해 효도하십시다. 그것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믿는 이들의 바른 자세입니다. 지금 부모님이 생존해 계신다면 부모 공경에 최선을 다하시고, 이미 고인이 되셨다면 생전에 효를 다하지 못할 것을 하나님 앞에 깊이 반성하는 마음으로 교회의 어른들과, 우리들 주변의 어른들을 잘 섬기십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의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는 나는 과연 어떠한 자녀인가를 점검하십시다. 십자가에서 효가 무엇인지를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우리 주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 이 시간 다시 한번 서 봅시다. 그리고 육신의 부모님께는 실패했지만, 영적인 우리의 아버지, 영원한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더 이상 실패하지 맙시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주승중 목사/동안교회)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