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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복 있는 교회 (행 2: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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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폴레온 힐은 인간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깊은 연구를 한 권위자입니다. 그의 책 「성공의 법칙」은 전 세계의 위대한 리더들과 성공한 사람들 500명 이상을 깊이 연구한 결과를 담고 있는데, 이들 모두에게서 공통점이 발견됐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자기가 꼭 이루기 원하는 목표를 갖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그 목표를 향하여 무섭도록 놀라운 열정으로 앞으로 밀고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자신과 목표 사이에 끼여들어 방해하는 것은 그 무엇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열정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는 누구나 열정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누가 봐도 어렵고 힘든 상황, 과거의 실패로 냉소적이고 침체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도 과연 열정을 가질 수 있을까요? 열정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풀면 "하나님이 그 상황 속에 함께 계신다(God In)"란 뜻입니다. 불가능한 난관 앞에서도 하나님의 지도자는 그 상황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봅니다. 어렵지만 하나님이 함께 뛰어 주시면 충분히 해 볼 만한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가정의 달' 5월에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가정에 이어서 성령강림절인 오늘, 복 있는 교회에 대해서 말씀을 듣습니다. 크고 작은, 다양한 교회들이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복 있는 교회입니까? 우리 교회는 과연 복 있는 교회입니까?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지구상에는 완전한 교회란 없습니다. 노력하고 최선을 다 할 뿐입니다. 우리는 종종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라는 말을 듣습니다. 시간적으로는 결코 돌아갈 수 없으나 영적인 면으로 우리는 돌아가서 잘 배워야 합니다. 열심히 배우고 노력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 성도들이 은혜 받는 행복한 교회, 교회적인 사명을 잘 감당하는 살아있는 참으로 복 있는 교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교회를 사랑하고 예배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풍성하게 임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사랑이 충만한 교회
  본문 44-45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초대 교회 성도들이 각자의 가정을 버리고 공동체 생활을 구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때문에 사랑으로 모인 것입니다. 사업이나 세상적인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한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예수를 믿게 된 성도들이 사랑의 교제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네 것 내 것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초대 교회의 유무상통은 욕심이 배제되고 오직 사랑의 원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개인의 욕심이 나타나면 흔들리고 깨어집니다. 욕심보다 더 큰사랑이 충만할 때 행복한 공동체가 이루어집니다. 물질보다 더 큰사랑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사랑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어디나 사랑 없으면 불쌍하고 불행해집니다. 교회의 크기나 숫자보다는 사랑이 충만할 때 복 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빨리 달리는 차 안에서는 아무리 바깥 경치가 아름다워도 휙휙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그 풍경을 100% 음미하지 못합니다. 초고속 인터넷 정보 통신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정말 편리하고 환상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은 상당히 메마르고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켄 가이어의 「묵상하는 삶」이란 책을 보면, 멕시코 시티의 대형 시장 한 구석에서 양파를 팔고 있던 한 인디언 노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카고에서 온 미국인 한 명이 다가와 양파 한 줄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노인은 10센트라고 말했습니다. 가만 보니, 노인이 내놓은 양파는 모두 스무 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인이 스무 줄 다 사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대량 구입하면 어느 정도 깎아 줄 수 있느냐는 서구식 경제 개념으로 물은 것인데, 이에 대한 노인의 대답은 뜻밖에도 다 팔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놀란 미국인이 물었습니다.
  "왜 못 파신다는 겁니까? 한꺼번에 다 팔아 버리면 하루 종일 여기서 고생 안 해도 되는데 좋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 노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지금 인생을 살러 여기 나와 있는 거요.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하오.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햇빛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하오. 친구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자기 아이들이며 농사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사랑한다오. 그것이 내 삶이오. 바로 그것을 위해 하루 종일 여기 앉아 양파 스무 줄을 파는 거요. 그런데 한꺼번에 다 몽땅 팔면 돈은 벌겠지만 그걸로 내 하루는 끝이요. 사랑하는 내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오. 그렇게는 할 수 없다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돈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스피드와 효율성이라는 이유로 너무나 많은 것들을 무시하면서 함부로 처리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좀 더 잘살고 편하게 살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삭막하고 메마르며 공허한 느낌들을 가슴속에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외적인 삶이 아무리 화려해도 영혼 깊은 곳에 이런 황량함이 커져 간다는 것은 무언가가 잘못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효율성만 따지는 사람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만에 날아갑니다. 그에게는 서울과 부산 사이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차를 천천히 몰고 가면 곳곳의 아름다운 산과 강과 들, 저녁놀과 쌍무지개가 보입니다. 더 천천히 걸어가면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흐르는 시냇물의 기가 막힌 화음이 들립니다. 가장 평범한 것들 속에서 가장 거룩한 메시지를 듣습니다.

  우리는 욕심과 바쁨 때문에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미워했습니다. 오히려 나 자신이 상처와 미움의 불행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준 것만큼 받습니다. 오히려 되로 주고 말로 받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성도입니까? 가정과 교회는 사랑으로 충만합니까? 그동안 나는 어떠한 역할을 하였습니까? 문제를 만들고 사랑을 파괴하지는 않았습니까? 좌충우돌하면서 상처와 피흘림의 선수는 아니었습니까? 모든 것들은 세월 속에서 다 변하고 사라집니다. 그러나 교회는 주님의 재림시까지 굳건하게 존재합니다. 우리와 후손들이 섬기는 교회가 사랑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누구나 편안하고 행복한 복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으로 충만하면 반드시 교회도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사랑이 충만한 복 있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
  본문 46절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성령을 받은 초기 예루살렘 성도들은 날마다 성전에 모이는 유대 전통과 관습에 따라 행동함으로 그들의 신앙을 표현하였습니다. 이는 아직까지 그리스도인과 유대인들 사이에 아무 불화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자주 모이는 장소는 성전과 성전 바깥 틀 동편에 있는 솔로몬 행각이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예배와 찬양을 드린 것입니다. 또한 성전에 오는 유대인들을 전도하기 위하여 제자들은 성전에서 열심히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초대교인들은 성령에 의해 자발적이고 기쁨 충만한 상태에서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교회의 집회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정상적이고 건강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성령 충만은 영적 교만을 버리고 겸손히 모이기를 힘쓰게 됩니다.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것들이 사라집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더욱 사랑하고 열심을 품게 됩니다. 교회에 모여서는 예배와 교제와 봉사에 힘쓰게 됩니다.

  모 일간지에 게재되던 만화에 매우 인상적인 내용이 있어 소개합니다. 어떤 총각이 어떤 처녀에게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심정으로 프로포즈를 합니다. 열 번 프로포즈했지만 그때까지도 여자가 싫다고 합니다. 좌절한 남자는 '열 번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가 있구나'라면서 그만 포기해버립니다. 그때 여자의 마음속 생각은 '바보 같은 사람, 한 번 만 더 찍어보지…'였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한 번만 더 프로포즈했다면 사랑이 이루어졌을 텐데. 우리의 기도도 이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때까지, 뿌리를 뽑을 때까지 부르짖고 부르짖고 또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잠깐, 기다려."
  "그럼 없던 걸로 하죠, 뭐."
  대부분 이런 식으로 기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특별히 기독교역사를 돌아봅시다. 역사의 판도를 바꿨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몸부림친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안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인간에게 무슨 대안을 기대할 수 있습니까? 사람에게, 한국교회에 대안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되살아나느냐가 관건입니다. 기도와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구호 외에 사람이 달리 할 일은 없습니다. 한 가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의 능력을 믿을 뿐입니다. 우리는 몸부림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몸부림치는 백성들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어떤 개구리가 우유 통에 빠졌습니다. 개구리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기로에 놓였습니다.
  '이제 우유 통에 빠졌으니 아무리 허우적대도 나갈 수 없을 거야.'
  좌절한 개구리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있다가 그만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다른 개구리 한 마리가 우유 통에 빠졌습니다. 이번에는 열정적인 개구리였습니다. 이 개구리는 안 되는 일이 어디 있느냐는 심정으로 밤새 허우적댔습니다. 그러자 우유가 굳어져서 치즈가 되었고 개구리는 통 밖으로 펄쩍 뛰어나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모이는 교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 기쁨과 순전한 마음, 음식, 찬미와 찬송이 있습니다. 내용이 좋으니까 모이고, 잘 모이니까 내용이 좋아집니다. 모이지 않은 교회도 이유가 있습니다. 잘 모이는 선순환의 교회가 되어야지 안 모이는 악순환의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말세가 될수록 모이기가 어렵습니다. 바쁘기도 하지만 영적인 열정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역사가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피곤하기도 하지만 이유와 변명도 많습니다. 모이지 않으면 합력하여 악을 이룹니다. 점점 병들고 망하게 됩니다. 열심히 모일 때에 성령 충만해 지고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모여야 교회가 삽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모이기를 힘쓰는, 잘 모이는 복 있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성령 충만한 교회
  본문 47절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성령의 선물을 통하여 최고의 축복을 발견했으므로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찬미는 자발적인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분위기는 총독이었던 플리니우스(Plinius)가 트라얀(Trajan) 황제에게 보낸 서신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은 법 이상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고 보고함으로서 영적, 윤리적 삶이 칭송을 받았음을 입증시켰습니다.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백성에게 욕을 먹고 전도의 문을 닫아 버립니다. 성령의 강한 역사와 그리스도인의 칭송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많아졌고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성령 충만이라고 표현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고 우리는 다만 성령의 도구인 것입니다. 악령은 다 물러가고 성령 충만한 교회가 가장 복 있는 교회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성령 충만할 때 기쁨과 찬송이 넘치게 됩니다. 기쁨과 찬송이 넘칠 때 비례적으로 성령 충만에 됩니다. 성령 충만은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성도와 교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다른 무엇보다 성령 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래야 능력 있게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너절하게 여러 가지를 구하려 하지말고 가장 중요한 것, 성령의 충만함을 부어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구하는 데 너무 인색했습니다. 그 이유인즉,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믿으면 내 안에 성령이 계시는데 무엇 하러 또 구하느냐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충만하게'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구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성령을 부어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힘있게 사역해 나갈 수 있기 바랍니다.
  자신이 성령 충만하지 않으면 밤낮 남들을 원망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왜 이 모양이냐, 우리 부서는 이 모양이냐, 교인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소리만 높아집니다. 그러나 성령이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받고 변화되는 모습을 체험하게 됩니다. 한 가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 충만해지면 사람들의 기도가 단순해집니다. 잡다하던 기도가 한 가지에 집중되고 복잡하던 기도도 단순해집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주님이 역사 하시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능력,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 삶의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역사가 임하기 바랍니다.

  성령 없는 신앙생활은 기름 없는 차, 전기 없는 전등, 향기 없는 조화, 비 없는 구름, 생명 없는 시신과 같습니다. 교회 생활과 봉사가 너무나도 힘듭니다. 은혜와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어야 합니다. 모범과 감동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를 빛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시련과 시험이 많은 세상이지만 모두가 성령 충만하여 승리하는 복 있는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오늘은 성령강림 주일입니다. 성령 충만은 우리의 생명이고 사명입니다. 성령 충만으로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우리 교회는 사랑이 충만한 교회,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어 가장 복 있는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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