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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스승주일] 온전한 선생(先生)이 되자! (약 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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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선생(先生)이란 단어는, 먼저 선(先)자에 날 생(生)자를 씁니다. 직역하면 선생이란 먼저 난 사람이란 뜻이지요. 국어사전은 선생이란 단어를, 첫째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 둘째 어떤 일에 경험이 많거나 잘 아는 사람이라 풀어줍니다. 종합하면 선생이란, 당신 보다 먼저 태어난 사람으로, 어떤 일에 경험이 많아, 그 일에 대하여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보다 먼저 태어났고, 당신 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해 온 나는, 당신의 선생입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는 선생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분명 내가 당신 보다 먼저 난 사람인 것 맞으면서도, 나만은 선생이 아니라고 우깁니다. 그러면서 나 말고 선생은 따로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선생으로서의 자기 직무는 유기 내지 포기한 채, 잘 가르치지 못해서 발생한 모든 책임을 특정 선생에게만 돌리곤 합니다. 해서 우리네 교육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한 채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니오, 일단 먼저 난 사람은 모두가 다 넓은 의미의 선생입니다. 아니, 먼저 난 사람들은 모두가 좋은 선생이어야 합니다. 물론 학교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도 이 선생 가운데 포함되긴 합니다만, 중요한 점은 그 분들만이 선생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 부모 세대들이 더욱 긴장해야 합니다. 왜? 이 땅의 모든 자녀들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만나는 선생은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둔 이 땅의 모든 부모는 좋은 선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의 교육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 난 선생들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첫째, 선생은 그동안 내가 경험한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알라는 말이 아닙니다. 최소한 내가 경험한 것은 잘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 경험을 해 놓고 그 뜻을 모르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둘째, 선생은 자기가 경험한 것을 잘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잘 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잘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 가르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준비도 해야 하고 또 꾸준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왜? 난 당신의 선생이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잘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먼저 태어나긴 했는데 잘 가르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그 원인이야 여러 가지일 것입니다만, 심각한 문제는 나이로는 선생인데, 내용적으로는 선생이 되지 못한 분들이 많다는 데 있습니다. 먼저 났으면 그만큼 훌륭한 선생이 되어야 마땅하거늘, 먼저 났으면서도 가르칠 것이 없거나, 잘 가르치지 못하는 분들로 인해, 문제가 대물림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먼저 난 선생으로서의 책임은 다하지 못하면서, 대접은 받으려고 한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유교적 전통이 뿌리 깊게 스며 있는 우리 사회이기에, 먼저 난 선생 세대는 나중에 태어난 후생 세대에게 장유유서(長幼有序)의 덕목을 강요하는 것 사실입니다.

문제는 선생 세대를 사랑하고 존경해 주어야 할 학생 세대들에게 그럴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선생 세대와 학생 세대가 서로 어긋나기만 합니다.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갈등과 반목을 반복합니다. 위에선 강요하고 아래선 반항하고, 위에선 존경하라 하는데 아래선 존경 못 하겠다 외치고, 그러다가 일탈하고, 그러다가 사고치고, 그러면 어르신들은 이 세상 망조가 들었다고 한탄하고, 그런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해서 성령강림주일이며, 동시에 스승의 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온전한 선생이 되자!>입니다.

# 2
오늘 주신 본문 야고보서 3장 1절을 보니, 예수님의 동생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던 야고보 선생께서, 아예 선생이 되지 말라 하십니다. 야고보 선생님의 권면, 직접 들어봅니다. / 3:1 / (읽기) / 여기 나오는 선생이란 단어, 헬라어로 역시 가르치는 자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은 가르치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더 줄이면 가르치지 말라는 거지요.

그런데요, 이 말씀은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왜? 우리 모두는 싫든 좋든 이미 선생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신 보다 먼저 난 나는 이미 당신의 선생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선생님도 이 점을 잘 알고는 계셨습니다. 해서 거기 1절을 보면, 우리를 가리켜, <선생 된 우리>라고 부르십니다. 선생 된 우리, 우리는 이미 선생이 되었다는 거지요. 문제는 그런데도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선생이 되었는데, 선생이 되지 말라, 모순이요 역설인데요, 무슨 뜻일까? 왜 이런 말씀을 주신 걸까?

우선 1절 말씀을 보니, 선생이 되지 말라 하신 이유가 나옵니다.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기 때문>이라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학생 보다 선생이 더 큰 심판을 받습니다. 이 말은 그만큼 선생의 책무가 무겁고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책임이 크고 무거우니 그에 따르는 심판도 클 수밖에요, 그러니 이 사실을 똑바로 알고 선생 되지 말라 하신 건데요, 이 말씀을 모순이면서 역설이라 했습니다. 역설은 뒤집어 읽을 때 그 뜻을 잘 알 수 있는데요, 그렇습니다.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씀은 뒤집으면 엉터리 선생은 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이를 적극적인 명법으로 받자면, 선생 노릇 제대로 하라는 겁니다. 이대로 가다간 마지막 날에 엄청난 심판을 받을 것이니, 어서 정신 차리고 온전한 선생이 되어, 그 날 심판 대신 구원에 이르도록 노력하라는 겁니다.

그러면 어찌해야 온전한 선생이 될 수 있을까? 무엇이 문제이기에 교육 문제를 놓고 온 나라가 이렇게 몸살을 앓아야 하는 걸까? 놀랍게도 야고보 선생님의 진단은 간단명료합니다. 직접 들어봅니다. / 3:2 / (읽기) / 거기 첫 단어, <우리>는 1절의 <선생 된 우리>를 받지요, 무슨 뜻인가? 선생이라 해서 실수가 없을 수 없다는 거지요. 부모라고 실수가 없을 수 없다는 거지요. 먼저 태어나 나이 많다고 해서 실수가 없을 수 없다는 거지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그러나 이제 선생이 되었으면, 이 것 하나만큼은 실수 없도록 해 달라는 거지요. 그것이 무엇인가?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배우는 학생 시절이야 말에 실수할 수도 있지만, 이제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으니,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한다는 거지요. 아니, 선생이 되어서까지 여전히 말에 실수를 하면 어떻게 하자는 질책이지요. 어찌 세 치 혀 하나를 제대로 어거하지 못해, 말로써 망하느냐는 안타까운 호소이기도 하지요.

그런데요, 거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구절, 2절,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는 선언입니다.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아멘! 여기서 우리는 온전한 선생이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배우게 됩니다. 그건 말에 실수가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직 말에 실수만 하지 않아도 온전한 선생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 3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지하게 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입니까? 나는 말에 실수가 없는 선생입니까? 나는 말에 실수가 없는 부모입니까?

질문을 조금 바꿉니다. 나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말조심하고 있습니까? 아니, 나이 어린 상대라고 오히려 방심하고 말을 함부로 하진 않습니까? 선생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언어의 폭력을 행사하고 있진 않습니까? 내가 너보다 먼저 났다고, 내가 너보다 경험이 많다고, 내가 너보다 높은 자리에 있다고, 내가 너보다 많이 가졌다고, 말을 함부로 하진 않습니까? 혹시 나는 말로 상처 주는 일을 은근히 즐기고 있진 않습니까? 나는 말에 실수가 없는 온전한 사람 맞습니까?

어떤 이는 말 좀 잘못 한 것 가지고 너무 겁주는 것 아닙니까? 반문하실지 모릅니다. 아니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말은, 나의 구원 문제와 직결되는 아주 중대한 사안입니다. 마음으로 믿으면 의에 이르지만, 입술로 시인해야 구원에 이른다 했습니다. 입술의 말, 그것은 내 영혼을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야고보 선생님, 잘못된 말 때문에 치르게 될 엄청난 대가를 적나라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3장 2절, 말에 실수하는 사람, 그 말로 인해 온 몸에 굴레를 쓰게 된다 하십니다. 그러니, 3절, 말에 재갈 물리듯 자기 입에 재갈을 물려서라도 말에 실수가 없도록 하라는 겁니다.

4절, 말에 실수하는 자, 광풍에 떠내려가는 배와 같다 하십니다. 곧 침몰해서 가라앉을 배 말입니다. 5절에 보니, 말에 실수하는 자, 자기 인생의 숲에 불을 지르는 어리석은 자라 하십니다. 6절에 보니, 말의 실수로 온 몸이 더러워질 뿐만 아니라, 말의 실수로 인해 내 인생 수레바퀴가 불에 타 주저앉게 된다 하십니다. 문제는 그 불이 지옥불이라는 데 있습니다. 6절, 한번 읽으며 마음에 새깁시다. / 3:6 / (읽기) / 한 마디로 말에 실수하는 자, 지옥 불에 던져진다는 거지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의 구원 문제를 좌우하는 중대한 사안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말이 내 몸을 더럽히는 것일까? 어떤 말이 내 영혼을 통째로 지옥 불에 던지는 말일까? 이 답 역시 간단명료합니다. / 3:8 / (읽기) / 거기 <쉬지 아니하는 악>과 <죽이는 독>에 표시하시고요. 9절에 보니 한 가지 나쁜 말이 더 있군요. 맨 뒤, <사람을 저주하는 말>도 문제가 된다는 거지요.

종합하면, 악한 말, 독한 말, 그리고 사람을 저주하는 말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악독한 말과 저주하는 말이 쉬지 않고 나온다는 데 있습니다. 일단 내 입이 더러워지면 쉬지 않고 더 악한 말, 더 독한 말, 더 심하게 저주하는 말들을 내뱉게 된다는 거지요. 그래서 저주인 거지요.

그렇습니다. 악한 말로 더러워진 인생, 독한 말로 영혼을 죽이는 인생, 하나님의 사람을 저주하는 인생, 그 자체로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문제는 우리 선생 세대들이 이점에서 온전하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악한 말과 독한 말과 저주하는 말을 듣고 자란 학생들이 잘 될 턱이 없지요. 그런 선생에게서 배운 학생들이 행복할 리가 없지요.

해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성령으로 충만하여, 오직 말에 실수가 없도록 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온전한 선생이 되어 학생들의 영혼을 살려내라는 겁니다. 악한 말, 독한 말, 사람을 저주하는 말은 입에 담지도 말라는 겁니다. 말로써 망하는 인생, 가장 불쌍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 4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온전한 선생이 될 수 있을까? 이 점에 대해서도 야고보 선생님은 명쾌한 답을 주십니다. 먼저 직접 듣겠습니다. / 3:13 / (읽기) / 거기 13절에서 주목할 대목, 야고보 선생님의 탄식어린 반문입니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지혜와 총명이 있는 부모 손들어 보세요, 지혜와 총명이 있는 선생님 손들어 보세요, 지혜와 총명이 있는 선배 손들어 보세요. 왜 이렇게 물으시나? 그만큼 지혜와 총명이 있는 선생 보기가 어렵다는 거지요. 뒤집으면, 선생 된 너희가 가장 먼저 구할 것, 하늘의 지혜라는 거지요.

그런데, 15절 말씀을 보니, 지혜라고 다 같은 지혜가 아니라 하시는군요. 지혜에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요, 다른 하나는 아래로부터 생겨난 지혜라 하십니다. 여기서 먼저 우리가 감염되지 말아야 할 지혜, 곧 아래로부터 생겨난 지혜가 어떤 것인지 살펴봅니다.

1. 아래에서 난 지혜 / 3:14-16

아래로부터 난 지혜는 14절, 마음속에 독한 시기로 자리 잡는다 하시군요. 문제는 독한 시기가 다툼을 불러온다는 점이지요. 그렇습니다. 아래로부터 난 지혜는 독한 시기와 다툼만을 불러옵니다. 또한 그 속엔 자기 자랑만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 입을 열면, 시기만을 불러옵니다. 그런 사람이 가는 곳, 늘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런데도 계속 자기 자랑만 늘어놓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진리를 거스려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아래로부터 난 지혜에 감염되었기 때문입니다.

15절 보실까요? 거기 보니 아래로부터 난 지혜의 세 가지 속성을 알려주시는군요. 세상적인 지혜, 자기 정욕을 채우려는 지혜, 마귀에게 속한 지혜, 그리고 보니 지혜라는 말 자체가 아깝군요. 문제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지혜로만 충만한 곳에, 시기와 다툼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 3:16 / (읽기) /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벌어지는군요. 하늘로서 내리는 지혜 대신 아래로부터 난 지혜에 감염되었기 때문이지요.

이 말씀을 뒤집으면, 요란한 곳, 악한 일이 일어나는 곳,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 하늘의 지혜가 없는 곳이란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자녀들이 서로 시기하고 걸핏하면 다투는 가정, 그 부모 된 자들이 위로부터 주시는 지혜 대신 아래로부터 난 지혜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세상적인 욕심, 인간적 정욕에 매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부모가 있는 가정, 그런 선생을 모신 집단, 늘 시기와 다툼으로 요란합니다. 요란한 가운데 악한 일들이 계속됩니다. 가정도 교회도 사회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해서 말에 실수가 없도록 하늘로서 내리는 지혜의 영을 사모하라 하신 것입니다. 지혜의 영으로만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위로부터 난 지혜 / 3:17-18

먼저 기억할 점은 <위로부터 난 지혜>는 타고나는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께 구하여 얻는 지혜라는 사실입니다. / 1:5 / (읽기) 그렇습니다. 온전한 선생이 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 가장 먼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늘로서 내리는 지혜로 충만한 선생님은 어떤 선생님일까? 말씀 속에서 은혜를 나누며 말씀 마당을 닫겠습니다.

1) 성결 2) 화평 3) 관용 4) 양순 5) 긍휼 6) 선한 열매 7) 화평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골 3:1-2)

하늘의 지혜로 충만하여, 오직 화평으로 심으시고,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어, 영생복락 누리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당신은 구원 받은 온전한 선생이십니다. 아멘! (설교 / 장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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