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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탐심과 영성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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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하나님(O! God)”이라는 희곡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만드셨을 때 왜 옷은 만들어 주시지 않고 벗고 살도록 하셨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평소에 생활이 너무 바빠 생각할 시간이 없거나 혹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는 어떤 의심도 가져본 적이 없습니까? 작가는 이 희곡을 통해 말하기를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옷을 만들어 주셨다면 사람들은 주머니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머니를 만들어 주면 그 다음에 사람들은 주머니를 돈으로 채워달라고 할 것이고, 하나님 마음이 약해 돈으로 채워주면 그때부터 인간의 모든 문제는 발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에덴동산은 더 이상 에덴이 아니게 됩니다.

사람이 가장 많이 변할 때가 언제인가 생각해보면 돈이 없다가 생길 때가 아닌가 합니다. 돈이 있어서 변한다기보다 돈과 함께 마음속에 생기는 탐욕 때문입니다. 우리가 탐욕에 관한 부분을 영적으로 정리 해두지 않으면 탐욕 때문에 신앙생활이 잘못될 가능성이 많다고 성경은 경고합니다. 어떤 사람은 탐욕이 담쟁이 넝쿨과 같아서 탐욕이 신앙의 어떤 부분이든지 감싸버리면 신앙의 아름다운 모습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담쟁이 넝쿨 같은 탐욕만 남게 된다고 했습니다. 물질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우리 인생들, 그러기에 항상 누구에게든지 탐욕과 탐심은 있게 마련입니다. 구체적으로 탐욕과 탐심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기에 주님은 우리가 경계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까? 왜 신앙적으로 살펴보아야 하고 정리한다면 어떻게 정리를 해야 하는가 생각해보려 합니다.

탐욕을 정리하지 못하면 첫째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탐욕이 한번 마음에 들어오고 나면 자기 자신을 잘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한 부자에 대해서 말씀 하셨는데, 이 부자가 소유한 밭의 생산량이 굉장했던 모양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사업에 성공을 해서 굉장히 많은 돈을 벌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몇 년 동안 쌓아놓고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부자는 자신이 모은 돈을 어떻게 관리할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 내 영혼아, 편히 쉬자. 그동안 고생했으니 이제 먹고 마시고 편히 쉬자!’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부자를 두고 어리석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다고 말씀하신 이유 중에 하나는 부자가 자기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리석다는 표현을 표면적으로만 생각하면 부자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점을 놓치게 됩니다. 여러분! 이 부자는 굉장히 지혜로운 사람이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요즘에 돈 벌기가 절대 쉽지 않습니다. 돈 벌기 위해서는 지식은 물론 세상 돌아가는 흐름과 미래를 꽤 뚫는 지혜에다가 부지런함과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책들은 “10년 후 한국”, “2010년 대한민국 트렌드”, “당신의 미래를 바꾸는 넥스트 트렌드” 등으로 미래를 예견하는 책들인데 전부 베스트셀러입니다. 한국사회가 그만큼 불투명합니다. 여태까지는 사회를 예견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몇 년 앞을 내다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디에 투자해야 할지 무엇을 배워 적용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사회가 복잡해지고, 변동요인이 너무 많아진 것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이 책들의 표지에 나오는 굵은 글자들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모릅니다. ‘트렌드를 아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세상의 흐름을 읽는 사람이 미래를 지배한다는 말입니다. ‘시장을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 ‘10년 후 당신 인생은 어떤 모습일까?’, 참 불안한 말들입니다.

요즘 2~30대의 주요 관심사가 조사되어 신문 통계에 났습니다. 주요 관심사 중에서도 첫째가 노후대책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40대 후반인 저도 아무 생각 안하고 있습니다마는, 20대, 30대가 벌써 연금도 들고 상가를 알아본다든지 하는 대책을 세우느라 정신없다고 합니다. 요즘 주부들은 재테크에 한창 열을 올릴 정도로, 그리고 은행 지점장을 바꿀 정도로 돈의 흐름을 붙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편안하게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자녀 교육을 잘 시킬 수 있는가에 혈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은 어떻게 시켜야 한다는 둥, 투자는 어떻게 하여 60세 은퇴 후에 10억을 가져야 살 수 있다는 둥, 3억은 가져야 살 수 있다는 둥, 보험 상품들은 또 얼마나 많이 쏟아져 나오는지 정신이 없습니다.

삼성은 불과 얼마 전만해도 지금처럼 세계적인 기업은 아니었습니다. IMF 관리체제에서도 삼성은 큰 어려움 없이 지나갔습니다. 다가올 미래를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미래를 준비했던 기업이나 개인은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살아남았습니다. 미래를 준비한다는 것은 이렇듯 중요하고도 지혜로운 일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는 돈 버는 능력과 지혜도 있었지만 자신이 벌어놓은 돈을 어떻게 투자하고 관리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많은 수확이 있었기에 곳간을 더 지어 쌓아두어야겠다는 부자의 말을 현대적으로 다시 표현하면, 돈을 어디에 얼마씩 분산해서 투자해놓고 이자를 받아 재투자해야겠더라고 생각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 자체를 어리석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문제는 전부인 냥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언제 흙으로 다시 돌아갈지 모를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로 부자가 어리석은 첫째 이유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늘 하루를 더 살았다는 것은 죽음에 하루 더 가까워졌다는 의미입니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과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사람의 오늘은 분명히 자세가 다를 것입니다.

맹모삼천지교라는 고사 성어를 아시지 않습니까?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승인 맹자의 어머니는 아주 지혜로운 어머니로 알려져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자녀 교육을 위해 처음에는 장의사 옆집에 이사를 갔습니다. 그랬더니 맹자가 매일 사람 죽는 흉내, 장의사가 하는 흉내를 내고 노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시장 통으로 이사를 갔더니 그 곳에서는 장사하는 흉내를 내더랍니다. 결국 마지막으로 학교 옆으로 이사를 갔더니 그때부터 공부를 해서 맹자가 세계적인 스승이 되었다는 이야기 아닙니까?

요즘 들어 맹모삼천지교에 관한 이야기가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어머니가 그렇게 두세 번씩 시행착오를 할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세 번이나 이사를 하며 아들 맹자에게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는 해석입니다. 사람이란 언젠가 죽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않고는 위대한 인물이 되기 힘들다는 사실, 어린 맹자에게 어머니가 끊임없이 심어주려고 했던 것은 인간은 반드시 죽는 존재라는 것,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는 것, 죽음이 항상 그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또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사는 방법을 배우는 곳이 시장이었습니다. 얼마나 치열한 생존경쟁이 있는지 모릅니다. 죽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사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죽고 사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어떤 것은 배우고 어떤 것은 배우지 말아야 하는지 알게 되기 때문에 학교에서 배우고 인생의 낭비를 하지 않게 된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었습니다. 세 가지 깨달음이 맹자를 위대한 인류의 스승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부자가 어리석었던 이유는 인간의 행복이 물질의 풍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점입니다. 15절 말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생명’은 희랍어로 ‘조에’로 생물학적인 생명이 아닌 인생의 참 의미와 보람, 기쁨으로 채워진 생명을 뜻합니다. 진정한 기쁨과 만족, 보람과 가치는 물질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물질이 풍족하니 자기 영혼에게 말합니다. ‘내 영혼아! 내 모든 인격과 모든 전 존재야 물질이 있으니 평안하고 즐거워하여라! 행복하여라!’ 천만의 말씀입니다.

돈이 모든 것을 행복하게 만들어줍니까? 돈은 또 다른 갈증을 낳습니다. 20세기 들어 영국에서 통계를 낸 적이 있습니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 했더니 55%가 조금 나은 생활을 하고 있더랍니다. 11%는 돈이 여전히 아까워서 여행 한번 못가고 돈을 들고 벌벌 떨고 있더랍니다. 23%는 가정 파탄이 일어나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고 나머지는 그냥 그렇게 살고 있더랍니다. 재미있는 점은 복권에 당첨된 사람 91%가 한번만 더 당첨되기를 바라면서 복권을 여전히 열심히 사고 있더랍니다. 한번이라도 당첨되면 족한 것을 거기서 멈추지 않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인간은 만족을 모릅니다. 언제까지나 자기 소유물을 가지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질의 풍성함이 절대로 인간의 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늘이라도 우리를 부르시면 언제든 가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 눈을 떴으니 내일도 반드시 눈 뜨게 될 것이라는 보장을 받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습관처럼 내일 아침에도 눈을 뜰 것이라고 예상하고 기대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어느 날 어느 순간 눈을 다시 뜨지 못할 아침이 우리에게는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사는 사람은 탐욕의 유혹 앞에서 자기 자신의 본 모습을 놓치지 않습니다. 자기의 진정한 모습을 알기에 이 사람은 겸손합니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압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말씀처럼, 인생은 안개와 같습니다. 16, 17절에 이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죄에 대한 기준이 없는 사람은 돈을 자랑하고 물질을 자랑하면서 그것이 자기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기 자신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탐욕은 이렇게 우리를 어리석은 인생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어리석은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돈으로 안 되는 것이 많습니다. 여러분 자식 문제가 돈으로 해결됩니까? 안됩니다. 돈으로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것이 많은 것이 우리 삶입니다. 진정한 자신의 모습은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름답고 복되게 창조하셨고, 우리의 행복과 기쁨은 진정 하나님 안에서만 누릴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둘째 탐욕은 우리에게 허락된 보석 같은 가족과 이웃 그리고 사명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매우 중요한 하늘나라의 말씀을 하시던 중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생애에 단 한번 있을지 없을지 모를 중요한 기회에 말씀을 듣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들으면서도 하나님 말씀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만 집착해 있었습니다.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유대율법에 의하면 맏이가 모든 형제보다 배의 유산을 갖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2/3를 갖고 동생에게 1/3을 줘야하는데 동생에게 줄 것을 주지하고 자기가 다 차지한 모양입니다. 동생이 속도 상하고 마음도 아팠습니다. 동생이 예수님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으니 예수님이  설득력도 있고 능력이 있으니 ‘저 선생님이 우리 형님에게 한마디 해주면 우리 형님이 돈을 나누어 주겠구나.’ 하는 생각만 가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이 동생에게는 최우선순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근심과 걱정,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차 있으니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머리가 다른 생각으로 꽉 차 있고 마음이 꽉 차 있으면 아무리 중요한 하나님 나라 말씀이 들어와도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람이 그러했습니다. 이 동생은 예수님께 ‘예수님! 예수님 참 말씀을 잘하시는데 우리 형님에게 가셔서 부모에게 받은 유산을 저에게도 좀 나눠주라고 말씀 좀 해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답변해주시는 말씀이 이 부자에 대한 비유입니다.

탐욕에 대해 말씀하시되 단순히 재판장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자로서 말씀 해주십니다. 탐욕을 흔히 부자들이 쉽게 저지르는 죄라고 하는데, 부자를 비판하고 정죄하며 미워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탐심도 주님은 함께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탐욕이 누구누구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지 있는 보편적인 죄라는 것입니다. 부자의 탐욕이든 가난한 자의 탐욕이든 탐욕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웃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동생은 탐욕 때문에 형을 보지 못했고, 형은 동생을 보지 못했습니다. 물질이 자기 존재와 가치를 나타내고 진정한 행복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짧은 본문에 부자가 자신을 지칭하는 ‘내가’라는 일인칭 표현이 무려 여섯 번이나 나옵니다. 원어를 보면 문장마다 훨씬 강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하는 것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자신을 위하지 않으면 위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 위할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당신이라는, 이웃이라는 단어를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풍요로운 삶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석 같은 이웃을 주시고 사명을 주셨는데 사람들이 물질 때문에 못 보는 것입니다. 물질을 제일 귀중하게 여기니까, 물질을 빼앗아 가려는 모든 것으로부터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원수가 생기고 물질 보다 중요한 관계는 어제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물질을 창을 통해 보는 사람이 있고 거울을 통해서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거울을 통해 보는 사람은 물질을 모은다고 수고하느라 보낸 세월의 흔적인 주름을 봅니다. 수고하며 흘린 자기 피와 땀을 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자꾸 위하게 됩니다. ‘너 돈 번다고 고생했다. 수고 했어! 너만 위해서 일해라. 너만 위해서 살아라.’ 자꾸 자기 수고와 노력만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을 통해 보는 사람은 ‘이 물질이 누구로부터 왔을까? 이 물질이 나를 낳아준 부모님으로부터 왔구나! 부모님께서 나를 건강하게 낳아주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을 거야. 나를 도와준 이웃들이 있었구나. 나에게 지혜를 준 사람이 있었구나. 나와 같이 마음을 함께 한 친구들이 있었구나.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구나. 내가 도와야 할 사람들이 있구나.’ 물질이 어디로부터 왔는지 무엇 때문에 주어졌는지 창 너머를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는 것입니다.

1888년 어느 날 ‘세계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이 죽다’라는 신문기사가 크게 났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이 아침에 일어나 조간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신문기사를 자세하게 읽어보니 ‘많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탄을 만든 제조업자 드디어 죽다 죽음에 사신 알프레드 노벨이 죽다’ 라고 난 것입니다. 자기는 인류에 공헌했다고 생각했는데, 죽고 난 다음에 대문짝만 하게 실린 기사에는 정작 ‘죽음의 사신’,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사람’, ‘죽음의 발명가’라는 수식어가 따르고 있었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은 너무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은 알프레드 노벨의 동생이 죽었는데 기자가 오해했던 것입니다. 화약발명으로 그동안 돈을 많이 벌어들였던 알프레드 노벨은 자기만을 위해 쓸 생각을 인류에 공헌하는 사람을 위해 사용하겠다고 바꿨습니다. 그래서 제정된 것이 노벨상입니다. 그 이후로 인류발전에 공헌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격려와 힘을 얻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돈 때문에 형제간에 얼마나 많이 싸웁니까? ‘왜 장남은 안하는 거야?’, ‘왜 큰언니는 안하는 거야?’, ‘왜 큰동서는 안하는 거야?’ 하며 싸웁니다. 왜 큰형님은 많이 주고 자기한테는 이만큼만 주느냐며, 내가 장남인데 왜 이것 밖에 안 주느냐며, 나는 딸이라고 적게 주느냐며 부모에게 서운한 마음을 갖습니다. 돈 때문에 가족끼리 싸우고 다퉈 급기야는 가족이 분열됩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많이 싸울 때가 장례식 때와 명절 때라고 합니다. 형제끼리 등 돌리고 앉았는데 참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가 아닙니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기 일보 직전이라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데 거기서 형제끼리 싸우는 것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돈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말입니다. 돈 때문에 죽고 죽이는 현실이 신문에 얼마나 자주 납니까?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혹시 여러분들은 아닙니까? 돈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형제간에 발길을 끊은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형제를 돈으로 살 수 있습니까? 돈으로 못 사지 않습니까?

돈으로 값지고 보람되게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돈이 있어야만 행복하다고 느끼고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기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인생에 행복이라는 것이 돈을 조금 더 갖는다고 오는 것이 아니다. 돈을 차지했다고 행복한 것이 아니야. 또 돈을 못 받는다고 불행한 것이 아니야.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이 거기에 있지 않아. 그런데 거기에 인생의 모든 것이 달려 있는 것처럼 속상해서 병나고 죽고 싸우고 있구나.’ 하시며 인생들이 어리석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부모님 유산을 조금 더 받아야 우리 인생이 정말 행복합니까? 그렇다면 가져야하겠지요. 동생에게 안 나눠주고 혼자 다 차지해서 행복하다면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정말 인생이 행복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생이 외로워지고 고독하고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여 우애를 쌓는 아름다운 관계는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고기가 없어도 다툼이 없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이지 고기 쌓아놓고 다투어보십시오. 먹어도 위장질환 걸립니다. 속상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셋째 탐욕이 어리석은 인생이 되게 하는 이유는 탐욕이 있을 때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삶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성경은 가난이 미덕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부자인 것이 죄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가난하든 부유하든 삶의 배후에서 삶을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과 그 섭리를 믿고 사느냐 아니냐 하는 점입니다.

부자는 무엇이든지 자기 것이라고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즐길 지어다. 기뻐할 지어다.’ 그러나 주님 말씀이 ‘네 영혼이 네 것이라고? 내가 오늘 밤 네 영혼을 찾아가면 네가 즐기기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생명이 사람에게 있으면 죽을 날짜도 마음대로 정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부르시면 그만입니다.

제가 자랄 때 같이 보냈던 사랑하는 후배가 하나 있습니다. 수원에 있는 유명한 공고의 교장이 되기 직전, 교회에서 장로가 되기 직전 그리고 서울대학에서 박사학위 받기 직전인데 갑자기 자다가 돌연사 했습니다. 죽을 줄 모르고 공부했고, 죽을 줄 모르고 일했고, 죽을 줄 모르고 산 것입니다. 열심히만 살면 되는 줄 알고 자기 몸은 돌보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밤에 혼자 피를 토하고 죽은 것입니다. 가족들이 발견했을 때는 이미 죽은 몸이었습니다.

우리가 노력하고 애쓰는 모든 일이 내 것인 줄 알지만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돈을 아무리 벌어놓고 쓰려고 해도 하나님께서 데려가시면 모아놓은 돈은 누구 것이 되겠습니까? 우리 삶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를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고 풍요롭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는 것을 믿고 살 때 인생의 걸음걸음 속에 풍요로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시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잠시 잠깐 맡기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입니다. 관리하다가 주인이 달라하시면 돌려드릴 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타락시킬 때 뱀이 썼던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선악과만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있는 탐욕을 자극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매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먹으면 참으로 지혜롭게 될 만하다며 자극할 때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탐욕이 작용하게 될 때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탐욕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탐욕은 신앙에도 함께 섞일 수 있습니다. 신앙에 탐욕이 붙으면 하나님이 안보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는데 그 속에는 진실이 없습니다. 가족사랑은 있는데 그 속에 가족이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가족이 있는 것입니다.

민수기에 발락과 발람이 나옵니다. 발락은 모압 국가의 왕입니다. 발락이 가만 보니 이스라엘 백성의 세력이 점점 커집니다. 이길 방법이 없을 것 같아 머리를 썼습니다. 이스라엘에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한다는 계획으로 금은보화를 보내 발람을 매수합니다. 발람은 금은보화에 눈이 멀기 시작합니다. 탐욕이 생기니 하나님의 선지자가 누구를 위해 일해야 할지, 무엇 때문에 일해야 할지를 잊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러가는 길에 나귀를 타고 가는데 나귀가 길로 안가고 엉뚱한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말도 듣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귀가 벽으로 가면서 나귀를 탄 발람의 발을 상하게 합니다. 화가 난 발람이 채찍으로 세대를 때립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귀 입을 열게 하셨습니다. ‘네 눈에는 보이는 것도 없냐? 내가 언제 네가 가자는 데로 안 갔더냐? 일평생 네가 타고 다녔던 나귀인데 네가 나를 이렇게 때릴 수 있냐? 저 앞이 안 보이느냐?’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열어 길에서 천사가 칼을 들고 막고 있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탐욕이 있으면 짐승에게도 보이는 것이 사람 눈에는 안보입니다. 이것이 탐욕이 가져다주는 무서운 결과입니다. 골로새서 3장 5절에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은 안보이고 다른 것만 보이니까 우상숭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탐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생활 속에서 우리 신앙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는 시간이 얼마나 귀중한 시간인지 모릅니다. 주일 낮이나 저녁 그리고 수요일 저녁, 특히 일본과 축구중계라도 있으면 이 시간은 천금과 같습니다. 자칫하면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귀중한 시간을 떼어 예배드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시간을 구별해서 드린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시간의 주인이신 주님! 이 시간은 제게 좋다거나 편리해서 혹은 재미있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시간에 시간을 내어 지킵니다.’ 하며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활 가운데 보이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모든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는 것을 생활 가운데 고백하는 헌금입니다. 수확의 1/10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신앙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돈의 액수가 적을 때는 상관없지만 액수가 많아질수록 갈등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드림으로 ‘주님 이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나머지 9/10도 하나님 것인데 1/10을 떼어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이 모든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라고 생활 속에서 인정하는 것입니다.

생활 가운데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 물질과 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고 고백할 때 탐욕을 넘어설 수 있게 됩니다. 성경이 만든 사람, 백화점 왕 워터메이커는 시간과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인 것을 믿고 말씀에서 시키는 대로 드리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셔서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셨습니다.

시간도 아까워하고 물질도 아까워하면서, 이것도 저것도 내 것이라며 움켜잡기 시작할 때 탐심은 내 자신 뿐 아니라 가족과 이웃 그리고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남편을 돈 벌어다 주는 기계로 보게 만들고 하나님도 내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분으로 보게 할 것입니다. 통계를 내보니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과 신앙생활에 대해 고민을 가장 많이 할 때가 헌금봉투에 돈 넣을 때라고 합니다. 십일조를 어떻게 할까 본봉에서 넣느냐, 세금을 떼고 넣느냐, 애들 용돈을 떼고 넣느냐, 여기에서 감사헌금을 떼고 넣느냐 등등 뺐다가 넣었다가 뺐다가 넣었다가 합니다. 자기 자신과 자녀를 위해 쓸 때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다고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생애가 하나님께 있으니 그분의 인도하심 따라 가리다. 선하신 주님께서 내 삶을 인도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윗은 장인에게 10년 이상 쫓겨 다녔습니다. 아들에게도 배신당했습니다. 아내도 빼앗겼고 이래저래 인생에 고난과 고초가 많았지만,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인생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돌아보시고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자기를 향해 밀려오는 탐심을 물리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톨스토이 단편집에 나오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제목의 이야기입니다. 바흠이라는 사람은 땅을 구입하기 위해 바시키르인이 사는 지역으로 갑니다. 땅을 사려는 사람은 아침에 출발해서 해지기까지 걸어서 돌아온 만큼의 땅을 자기 소유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바흠은 아침부터 열심히 걷습니다. 좀 지칠 때는 물도 마시고 배고플 때는 밥도 먹으면서 나아갑니다. 그렇게 나아가다보니 더 좋은 땅이 보이고 그래서 돌아갈 시간은 생각하지 않고 너무 많이 가 버렸습니다. 돌아가려고 보니 너무 아득합니다. 죽을 힘을 다해 걷고 뜁니다. 해는 어느새 점점 기울어가고 힘은 점점 빠집니다. 드디어 해가 넘어 가기 직전에 출발점으로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바흠은 죽고 말게 됩니다. 결국 바흠에게 필요한 땅은 무덤으로 쓸 2미터 가량의 땅 밖에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생각하면 필요한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일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오늘 내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한분입니다. 그분이 다른 모든 것을 공급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여러분 자신을 맡기고 주님과 더불어 동행하는 일평생이 될 때, 부족함이 없었노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정말 자기다운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형제와 이웃, 자녀 그리고 사명을 새롭게 보는 눈이 열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되 지금도 변치 않고 때를 따라 도우시는 목자 되신 주님을 온전히 섬기며 좁은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는 믿음의 자녀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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