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분노와 영성 (창 4:1-15)

  • 잡초 잡초
  • 326
  • 0

첨부 1


어떤 목사님에게 목사님을 비난하는 편지가 한 장 배달되었습니다. 뜯어보니 다른 내용은 없고 ‘바보’라는 글자만 있을 뿐입니다. 목사님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서 편지를 어떻게 할까 하다가 편지를 들고 강단에 올라가서 다음과 같이 재치 있게 말씀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내용을 다 적고 이름을 빠뜨린 편지는 종종 보았는데, 편지의 내용은 하나도 안 적고 이름만 적은 사람은 오늘 처음 보았습니다.’

복잡한 출근길에 운전을 잘 못하는 한 아주머니가 좁은 길에서 운전을 하다가 택시 운전사의 기분을 상하게 했습니다. 아저씨는 기분이 나빠서 창문을 내리고 아주머니에게 한마디 했습니다. ‘집에서 밥이나 하지 차는 왜 몰고 나왔습니까?’ 그러자 아주머니가 창문을 내리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요? 밥 하려고 쌀 사러 나왔습니다.’

살다보면 화낼 일이 참 많습니다. 화가 나기 시작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맥박이 빨라지면서 코에서 뜨거운 바람이 나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분노’라고 쓰이는 말은 히브리어로 ‘이프’로 원 뜻은 ‘콧구멍’입니다. 씩씩 거리며 코에서 바람 나오는 만화 장면들을 연상해 보시면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분노를 통제하고 조절하지 않으면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생활 속에서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화를 잘 내는 성질을 고칠 수 없을까 고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화를 잘 내서 손해 보는 것이 많다고 상담해 오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화내는 것 자체를 죄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분노가 일 때 어떻게 대응 하느냐에 따라 죄가 될 수도 있고, 유익이 될 수도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분노라는 감정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위험한 요소이면서 감정의 여러 부분 중 하나라는 것을 계속 알려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합당한 이유로, 합당한 대상에게, 합당한 방법으로, 합당한 때에, 합당한 시간동안 화를 내는 것은 상관이 없다.’

가인과 아벨은 형제인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분노하여 동생을 죽입니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의 대부분은 분노 때문입니다. 분노로 인해서 일어나는 비극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통제하기 힘든 분노를 다루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분노라는 감정은 우리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으며 분노라는 감정과 떨어져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죽기 전 까지 분노는 우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노라는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만 한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의 충만함을 사모해야할 이유를 함께 찾아보면서 오늘 우리 감정과 정서를 하나님께 맡겨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속에 있는 분노와 파괴적인 감정들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계기가 바로 지금, 오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거룩한 분노를 우리에게 갖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분노를 긍정적인 감정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죄, 고통스러운 것, 두려운 것, 분노를 내면 상대방에게 무조건 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베소서 4:26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라고 말씀합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26절 말씀을 나누어 생각해보면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분을 낼 수 있을 때 분을 내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죄로 이어지지 않도록 노력하십시오.’ 와 같이 끊어 읽기를 잘하면 참 좋은데, 끊어 읽기를 잘못하면 종종 어려움이 옵니다.

어떤 유명한 분이 신문기자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이성상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대답을 했는데 다음날 신문에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고 기사가 났습니다. 아내가 화를 내자 남편은 그런 말 한 적이 없다면 자신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나는야 한 여자가 좋다.’ 이렇듯 끊어 읽기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노를 내기 원하시는데 단, 거룩한 분노를 내기 원하십니다. 구약성경에 분노라는 말이 450회 나오는데 그 중 375번이나 하나님께서 내시는 분노에 대한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만큼 화를 많이 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도 예수님께서 화를 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성전이 성전답게 사용되지 못하는 것을 보셨을 때, 성전이 하나님 뜻대로 기도하는 집으로 사용되지 못하는 것을 보셨을 때 채찍을 드시고 분을 내시며 상을 뒤엎고, 짐승들을 몰아내며 전부 엎어버리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는 종교적인 위선자들을 향하여 “화있을진저”하시며 화를 내십니다. 심지어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나무라셨습니다. 출애굽기 32:19~20에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는 사이, 백성들이 기다리지 못해 우상을 만들어 섬긴 것을 보고 화가 나 십계명이 적힌 돌판을 던져버렸습니다. 모세의 분으로 백성들의 우상숭배가 그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소년 다윗도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을 보고 분노를 느껴 골리앗과 싸웁니다. 결국 승리하여 하나님의 역사 무대에 당당히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화를 내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 악이 흉흉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 거룩한 분노를 내라고 하나님은 권면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분을 내는 많은 이유 중의 하나는 자신의 기대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존심이 상했거나 자기 신념이 방해받고 위협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세상에 대해 분노하며 화를 내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무감동, 무감각, 무관심’ 100~200명 죽는 것을 보고도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몇 만 명, 몇 십 만 명이 한꺼번에 죽어야 조금 느낍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도 여유롭게 웃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대인이 겪는 정신적 질환의 특징 중의 하나는 정신적 질환의 원인이 불평과 원망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말 신앙인다운 분노를 가져 본 적이 있습니까? 신앙인다운 분노를 가질 때 회개가 일어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고 싶은 인생 궤도의 수정이 일어납니다. 분노라는 것 자체가 에너지이고 힘입니다. 평소에 분출해내지 못하던 힘이 자기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속상하고 화가 나서, 교회가 그리고 이 민족이 하나님 뜻대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때문에 화가 나서 자기 삶을 던져 안타까움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화내는 것 까지는 잘 하는데 본인의 희생은 꺼립니다. 자신으로부터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정말로 화를 내는 것이 아닙니다.

1780년 영국에 산업 혁명이 일어났을 때에 영국의 미래를 염려하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산업화가 되어 농촌 사람들이 모두 도시로만 몰려들었습니다. 젊은 아이들부터 몰려들었습니다. 평일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주말에는 술 먹고, 놀음 하고, 도적질 하며 생활이 엉망이 되어갔습니다. 사람이 많으니 남녀끼리 어울리면서 생활도 문란해집니다. 청년은 심히 안타까웠습니다. 젊은이들의 삶이 이래서는 안 된다며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외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더 방탕히 생활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 이 청년에게 외쳤습니다. ‘You can try!' (네가 한번 해봐!) 이 한마디 말에 청년은 충격을 받고 자기의 얼마 안 되는 돈을 다 털어서 집을 개조했습니다. 주일에 놀음하고 술 먹으며 방황하는 청년들을 불러다 모아서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읽고 쓰는 것과 성경말씀을 가르쳤습니다. 이 일을 열심히 확장시켜가다가 청년은 너무 지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청년이 죽을 때 이런 유서를 남겼습니다. ‘적은 돈이 있습니다. 이 돈으로 우리 마을 어린이들에게 1실링씩과 케이크를 사주십시오.’ 그리고 평생의 좌우명이던 디모데전서 4:6 말씀이 그 아래에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을 형제에게 일러준다면 그 형제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될 것입니다.’

어두운 현실 앞에 분노를 느끼며 자신의 삶을 던졌던 로버트 레이크스의 이야기입니다. 로버트 레이크스는 오늘날 주일학교의 시초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 어린이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여 주일에 어린이를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분노를 가진 한 사람으로 인하여 오늘날 우리 자녀를 신앙으로 양육하는 귀한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탁드립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유익이 없어지고, 신념이 무너져 화내던 일은 멈추시고, 하나님 뜻대로 바로 살지 못하는 이 시대를 보면서 분을 내시되 자기희생이 동반된 화를 내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고는 주님께 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분노 내기를 요청하십니다. 오늘 우리를 도전하고 계십니다. 이 시대를 바라보며, 가정을 바라보며, 자신을 바라보며 무기력하게 끌려만 다니는 모습에 분노하라고 말입니다. 이러한 분노는 거룩한 분노요, 창조적인 분노가 됩니다.

둘째 우리 분노가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이유는 조절되지 않은 분노는 파괴적인 영향력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26 하반절,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분노를 오래 품고 있을 때의 영향력과 파괴력을 경계해야 합니다. 화가 나는 일을 겪으면서 분노가 이는 것은 막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잘 다루지 못하고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분노의 영향력과 파괴력이 어디까지 미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결국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을 불러서 말씀하십니다. ‘가인아, 네 안색이 안 좋구나. 화가 난 얼굴인데 네 마음속에 죄의 소원이 있구나.’ 기분이 나쁘거나 마음의 소원이 좌절 되거나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우리 마음에는 죄의 소원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죄의 소원은 ‘너 나한테 그랬지? 두고 봐라. 언젠가는 길을 한번 들일 거야. 기회만 와봐라.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이러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죄의 소원을 잘 다스리지 않으면 불행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가 있고나서 가인은 자기 동생 아벨을 결국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분노가 일어나면 어떻게 푸십니까? 분노가 일어난다고 해서 분노가 일자마자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은 잘 없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합니다. 화를 안내는 사람도 있는 것 같지만 화를 안내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중에 암에 걸릴 확률이 높습니다. 표현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면에 화를 잘 내시는 분은 심장마비로 죽을 확률이 높습니다. 표현은 건강해야합니다. 물건을 집어 던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식사를 준비 안 해주는 사람, 꼬치꼬치 따져 묻는 사람 등 분노를 표현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 이러한 화가 우리 마음에 점점 나타나게 되면 마음에 분노의 소원이 일어나게 됩니다. 얼마나 잘하는지 두고 보자는 마음이 숨어 있다가 기회가 오면 표출되는데, 그 때는 폭언이나 폭력 등 엉뚱한 방법으로 표현 됩니다.

제가 한 모임에서 화가 날 때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 조사를 해보았습니다. 남자들의 경우 -➀ 큰소리를 지른다, ➁ 입을 다문다, ➂ 술을 많이 먹는다, ➃ 자학을 한다, ➄ 운동을 한다, ➅ 담배를 피운다, ➆ 화풀이 대상을 찾는다 등이었습니다.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같은 조사를 했었는데 목사님들의 경우는 위의 경우에 더해 강대상에서 할 말을 다 한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바둑이나 술, 여자, 일 등으로 잊기 위해 한 가지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중독입니다.

여자들의 경우는 -➀ 집안청소를 깨끗하게 한다, ➁ 술을 마신다, ➂ 쇼핑을 한다, ➃ 이불을 뒤집어쓰고 잔다, ➄ 수다를 떤다, ➅ 음식을 많이 먹는다, ➆ 잔소리가 늘어난다, ➇ 눈물을 흘린다, ➈ 미장원에 가서 헤어스타일을 바꾼다, ➉ 폭력을 휘두른다, ⑪ 점을 치러간다 등이었습니다.

분노를 오래 간직하고 있을 때에 분노는 우리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기쁨이 사라지면 생활에 여유를 읽어버립니다. 삶의 보람을 찾지 못합니다. 그리고 인간관계가 파괴됩니다. 폭력과 언어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와 고통을 줍니다. 또 분노를 일으킨 일에 우리를 묶어두어 자유를 잃게 합니다. 이성적인 판단과 합리적인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맥밀런이라는 의학 박사는 분노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그 사람은 분명히 내 잠자리에서 수 십리나 떨어져 있지만 그는 무자비한 노예 감독보다도 더 잔인해서 내 생각에 가혹한 채찍을 가하여 포근한 침상을 고문대로 바꾸어 놓는구나. 아무리 천한 종이라도 단잠이 들겠거늘 나는 그렇게 못하는구나. 진정 나는 내 진노를 퍼부은 모든 사람에게 대하여 내 자신이 종이 되어 있음을 인정치 않을 수 없노라.’

맥밀런 박사가 사자와 악어를 조사를 해 보았더니 사자는 약 25년 정도 사는데, 사자가 죽어 뼈가 하얗게 되어 없어질 때까지 사는 짐승이 악어였습니다. 그 원인은 사자에게서 발견된 아드레날린 호르몬 주머니가 악어의 것보다 훨씬 컸다는데 있었습니다. 화가 나고 긴장되면 사자의 아드레날린 주머니에서 호르몬이 온 몸에 퍼져 엄청난 양의 화를 발산하는데 비해 악어는 웬만큼 화가 나도 눈만 껌뻑일 뿐 특별한 변화가 없다고 합니다. 동물의 왕국 같은 TV프로를 보아도 사자는 처음부터 긴장하고 흥분하지만 악어는 결정적인 순간에만 화를 발산합니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수명과도 연결됩니다. 유명한 생리학자 존 헌터는 분노가 심장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대해서 연구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세미나에서 자신의 의견을 반박하고 비난하는 사람에 대해 흥분하며 대응하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분노는 우리 마음과 생각에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집사님 한분이 상담을 요청하셨습니다. 시골에서 7형제 중 막내셨는데 부모님이 위의 3명 정도밖에 교육 시킬 형편 밖에 안 되어 밑에 4명은 교육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집사님은 공부가 너무 하고 싶은데 할 수 없었습니다. 집사님은 형들만 없으면 자신이 공부할 수 있을 텐데 하며 형들이 안 죽을까 하고도 생각했다고 합니다. 결국 자신이 공부할 차례까지 돌아오지 않아 중학교 때 가출을 해서 서울에 올라와 갖은 고생 끝에 대학까지 나왔습니다. 건축을 해서 지금은 어렵지 않게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자기 장남을 심하게 때리는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장남이 자기에게 맞다가 내려치려는 팔을 잡더니 ‘당신, 나한테 죽어.’라며 눈이 돌아가더랍니다. 그러면서 집사님은 자기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함께 오신 아내 되시는 권사님도 집사님에게 맞은 것 같았습니다. 왜 맞고 그냥 사셨냐고 했더니 집사님이 너무 불쌍해서 도망가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어릴 적에 형만 없었어도 자신이 공부 할 수 있었는데 하는 원망하는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장남에게 전이 되어 너무나 증오하고 미워했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큰 아들은 정신 병원에 가게 되었고 집안이 어려워졌습니다.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며 흐느껴 우는 집사님을 보면서 분노로 인한 아픔이 그 사람에게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전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통계를 보면 한국 가정의 한집 건너 한 집이 폭력으로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 중에 반 역시 폭력으로 시달리는 가족과 연결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로 폭력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우리 분노가 통제되지 않으면 자신 뿐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가족과 이웃에게까지 많은 고통과 아픔을 주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우리 안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분노의 소원을 스스로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기에 성령님께 부탁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미워하는 마음은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는 마음 그대로 두면 분개의 감정으로 발전해 나갑니다. 분개는 무엇인가 깨뜨려 버려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분개가 지나면 적개심이 됩니다. 적개심은 놔두면 증오심으로 나가게 되고 결국은 한(恨)이 됩니다. 한은 자기가 죽든지 남이 죽든지 하는 어려운 상황을 만들고야 맙니다.

분노의 소원, 원인이 되는 일과 사람을 용서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분을 품고 있으면 복되게 살아갈 수 없기에, 하나님 자녀로 살아갈 수 없기에 분을 토해내라 말씀하십니다. ‘백성들아 너희들은 시시때때로 토하라’ 토하는 사람이 이것과 저것을 가려서 토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있는 그대로 다 토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도 우리 속에 있는 것을 그대로 다 토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받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상한 마음도 받아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셋째 분노의 감정을 성령님의 지배 아래에 두어야 하는 이유는 분노는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것 뿐 아니라 우리 영혼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27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고 나와 있습니다. 분노는 마귀가 우리 삶 속에 들어와 지성과 감정, 의지를 마음대로 작동하게 하는 통로를 만듭니다. 마귀가 우리 지성과 감정, 의지 위에서 춤추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분노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마귀를 가리킬 때 즐겨 쓰던 단어는 ‘사타나스’였는데 에베소서의 이 구절에 쓰인 단어는 ‘디아볼로스’라는 단어입니다. ‘디아볼로스’란 ‘비방자, 다른 사람의 명성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이간자’입니다. 사탄이 분노라는 감정을 타고 들어와 우리를 비방하고 비방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고 하나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더 나아가 화를 내고 난 후의 일을 예상하지 못하게 만들고 화의 결과가 영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급박한 상황에서 끝장을 볼 것처럼 화를 모두 발산하게 만듭니다. 그리하여 눈물 흘리며 후회하는 인생이 되게 만듭니다.

재미있는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마귀들의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거기에는 인간들을 괴롭힌 무기들이 전시 되어 있었는데 특별히 마귀들이 추천한 우수무기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첫째, 시간이 잘 가지 않는 시계, 이것은 특별히 사명자들에게 잘 적용되었던 무기였습니다. 사람들이 말씀 듣고 은혜 받으면 자신의 분노를 뉘우치고 아내나 남편, 자녀들에게 사과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는데, 마귀가 그 순간 마음에 이 시계를 집어넣는다는 것입니다. ‘시간은 많아. 괜찮아. 천천히 해도 돼. 저 사람이 준비가 안 됐을 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사명자들로 미적거리게 만들다 결국 회개하지 못하고 용서를 구하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안대가 있습니다. 이 안대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에 눈을 멀게 만듭니다. 급한 일에만 정신없이 붙들려 살게 됩니다. 예배보다, 하나님보다 더 급한 일이 있어 이것저것 챙기며 급히 달리다 보면 결국 중요한 일을 다 못하는 것입니다. 급한 일로 시간을 낭비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는 최근 들어 현대인들에게 잘 먹혀들어가는 무기라고 합니다.

셋째로 특수 안대가 있습니다.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도록 하고 보지 말아야 할 것만 보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남을 볼 때 비판하고 원망할 점, 단점만 보게 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점은 보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무기보다 월등히 우수한 제품이 하나 있었습니다. 쐐기라는 무기였습니다. 사람의 영혼에 이 쐐기를 한번 박아 놓으면 빈틈이 생기는데 이 틈을 통해서 무엇이든 집어넣으면 다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분노라는 쐐기가 그렇습니다. 분이 나서 한번 맘이 상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더 나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그 틈으로 들어간 것이 마구 움직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곰곰이 생각할수록 뱃속에서 면이 불듯 점점 부풀어 오릅니다. 분노는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결국 가인은 자기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해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가인이 분노를 내는 대신에 ‘우리 형제의 제사가 둘 다 열납 받지 못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동생 것이라도 받아주셨으니 감사하구나. 그런데 동생의 제사는 왜 열납되었을까? 동생에게 나도 배워야겠구나. 무엇이 하나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이런 마음으로 아벨과 연합하여 나갔다면 가인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 심판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나님 자녀답게 사는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형제를 형제로 보지 못하게 만들고 분풀이의 대상으로 보게 만듭니다. 이것이 분노입니다. 마태복음 5:21~22에서는 “형제에게 분을 품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요 라가라 하는 자마다 지옥 불에 떨어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분을 품는 자는 회개가 없습니다. 자기가 다 옳기 때문에 회개도 없고 사과도 없고 용서도 없습니다. 완고한 마음 그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해 어떻게 할 줄을 모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분노는 우리 일상생활 속에 늘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삶의 기준을 바꿔 거룩한 분노를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분노가 일어난다 할지라도 지속시키지 말고 능히 우리 분노를 다스리실 수 있는 하나님 앞에 내어 맡겨 분노가 자기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믿음으로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설교 : 김형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