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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자녀, 어떻게 키울 것인가? (히 1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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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예배의 자리에 함께 한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5월은 교회뿐 아니라 사회에서까지 가정의 달로 지킵니다. 어린이날, 어버이 주일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여러분이 찬양을 들으셨던 데로 교회가 어린이주일로 지키는 날이기도 합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이해서 우리의 영원한 숙제인 “자녀, 어떻게 키울 것인가?”라는 주제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은 자녀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하지만 자녀를 낳는 해산의 고통을 겪는 그 순간에는 선물을 받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애를 먹다보면 선물을 되돌려 주고 싶은 생각까지도 들 겁니다.

그 아이를 붙들고 씨름을 하다보면 내가 도대체 내가 남편하고 결혼했는지 아이와 결혼했는지 분간이 되지 않는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는 귀엽고 영리한 아이로 인해서 감격해하다가도 다음 순간 그 영악한 아이로 인해서 낙심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모 된 사람은 자녀 양육이란 거룩한 직무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런 부모를 위해서 수많은 책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수많은 말들이 테이프에 담겨서 유통되고요. 그리고 들어가서 웹사이트에 찾아보면 하루 종일 찾아도 끝나지 않는 자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자녀, 어떻게 키울 것인가?”라는 주제에 대해서 교단의 교육목표 세 가지를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자녀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라고 좁혀도 되겠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리를 떠나서 자신들의 인생을 의미 있게 살기 위해서 꼭 가르쳐야 할 세 가지를 다루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오늘 설교는 어린이를 자녀로 둔 부모들만 위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미 자녀들이 다 자라서 여러분의 자녀가 그들의 자녀들을 키우고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야 할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1.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알도록 키워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교단은 교육이념으로 개혁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웨스트민스터 교리표준문서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인을 양성한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교육목표 첫 째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로 알고 사랑하며 섬기게 한다.” 고 밝힙니다. 즉 예배적 인격자 로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예배할 수 있을 때에 제 구실을 다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때어나면 숨 쉴 수 있고 말 할 수 있고 자라지만 하나님을 가리켜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될 때 사람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부모들이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책임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전해 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달하던 예언자였습니다.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렘31:3)

무궁한 사랑으로 사랑한다는 것 생각해 보셨습니까? 정말 한 사람을 사랑하기로 마음먹고 사랑할 때에 그 사랑은 무궁한 사랑으로서 어떤 일을 해도 받아주고 용납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궁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기록해 놓은 사랑의 편지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시103:13)

하나님은 그래서 수없는 또 한 번의 기회를 우리의 삶에 허락하십니다. 믿을 수 없는 호의와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실수와 잘못을 할 때 벗어나 도망쳐야 하는 분이 아니라 그 품으로 달려가야 할 분으로 자기를 나타내십니다.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착하고 인정할만해서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여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우리는 이것을 믿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태어나서 살았던 세상에서는 그런 사랑을 접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부모라고 할지라도 자식이 그럴듯해 보이고 자식이 뭔가 괜찮아 보일 때 사랑하는 것처럼 느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아무런 조건 없이 끝까지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의 이야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그러나 이 진리야말로 우리 자녀들에게 전해 주어야 할 기본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역에 우리 부모들을 동업자로 택하셨습니다. 믿기 어려운 엄청난 사역을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부모님들에게 맡기셨습니다. 할아버지를 통해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할머니를 통해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학교 교사나 다른 분들을 통해서도 이 진리를 전달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알도록 하는 일차적인 책임을 부모인 여러분에게 맡겼습니다. 독자적인 인생을 떠날 준비를 부모인 우리가 시키도록 하나님은 계획하셨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이 엄청난 과업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욥은 좋았던 옛날을 이렇게 떠올렸습니다. “내가 그처럼 잘 살던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서 살 수 있으면 좋으련만 ! 내 집에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귀던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욥29:4, 표준새번역)

욥은 고통의 극심한 가운데서 내 집에서 하나님과 친밀이 사귀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정이 홈스위트 홈으로 기억 되면 자녀들은 곁길로 가지 않습니다. 문제아가 생기기전에 문제가정이 있고 문제 부모가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은 자녀는 결코 어긋난 길로 갈 수가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분도 하나님과 친밀한 집안 분위기를 만드십시오. 가정 예배가 드려지고 식사기도가 때마다 자리 잡게 하십시오.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접할 수 있는 자연스런 분위기를 만드는 책임이 부모인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제가 둘째 녀석의 이야기를 가끔 했었는데 둘째 녀석이 만 두 살이 채 되기도 전에 동네 슈퍼에 들어가서 먹고 싶은 과자 봉지를 덥석 집어 들고 나오면서 “아멘” 하고 나옵니다. 집에서 맛있는 것을 줄 때마다 기도하고 “아멘”한 것을 통해 이 녀석은 “아멘”만 하면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잘 배우기는 한 겁니다. 그렇지요? 그렇게 집어가지고 나오면 어쩌겠습니까. 엄마가 값 지불하고 자기가 그것을 먹게 되겠지요. 믿음대로 되는 겁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알아가고 신앙을 배우는 기회는 찾으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제가 남아프리카에 있었는데 가끔 야생동물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국립공원에 갔습니다. 동물들은 자연그대로 본래 자기들 데로 살고 있고 우리가 차를 타고 차 안에서만 다니면서 동물을 구경하는 겁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는 안전한 캠프로 돌아와야 합니다. 가면  사슴, 기린, 얼룩말, 코끼리 등 야생동물들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캠프로 돌아오면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서로 인사하는 말이 “너 오늘 사자 봤냐?” 하는 겁니다. 역시 백수의 왕은 사자입니다. 사자를 봐야 짐승을 본겁니다.

아이들이 가정예배를 드리는데 우리도 사자를 보도록 기도하자는 겁니다. 기도하는 거지요. “하나님, 우리도 내일은 사자를 보게 해 주십시오” 여러분, 아이들하고 가정예배를 드리면 기도하는 것이 아이들 수준에 기도해야 됩니다. 아이들에게는 사자를 보는 것이 제일 그날 밤 관심사인데 내가 특별히 박사학위 논문을 잘 쓰게 해주십시오. 라는 기도를 아이들과 같이 해야 되겠습니까?

그냥 “사자보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참 놀랍게도 우리가 그런 유치한 기도를 드렸는데도 하나님은 들어주셔서 사자를 보았습니다. 감격해서 즐거워하는데 우리 큰아들은 항상 교과서입니다. 큰아들이 하는 말 “아빠, 우리 감사기도 드려요”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역시 아이야 말로 어른들의 아버지라는 시 구절을 기억하게 되었습니다.

유치원에 다닐 때도 그랬고 뒤에 학교에 가서도 친구가 없다고 하소연을 합니다. 이 상황이 외국이 아닙니까? 친구가 없다는데 제가 친구를 사다 줄 수도 없고 기도하는 것 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하는 겁니다. 참 감사한 것은 그렇게 기도할 때 마다 유치원 때도 그랬고 중학교 때도 그랬고 친구를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 아이들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학부모 여러분, 좋은 교회 울산교회는 영아부, 유치부, 꿈마을 주일학교나 청소년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여러분을 도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어린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도록 하는 기본적인 책임은 부모인 여러분에게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합니다.

2. 친구와 더불어 살도록 키워야 합니다.

교단의 교육목적을 보면 그 두 번째 항목이 성경을 가르쳐 인화협동적인 인격자를 만드는 것이라고 그렇게 정해 놓았네요. 조금 더 풀어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도우고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부모로서 우리가 해야 할 두 번째 큰 책임은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배우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나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이 이웃으로서 친구로서 보게 하는 겁니다. 나만 잘난 것이 아니라 내 친구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알도록 해 주는 겁니다.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도우며 사람은 서로끼리 경쟁상대가 아닙니다. 만인은 만인에 의해서 야수노릇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되고 서로 도와야만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것 옛날에는 한 집안에 형제자매가 많을 때는 숙명적으로 배울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하나 아니면 둘이니까 서로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기가 점점 어려워집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본래가 자기중심적이요 이기적인데 그 나마 형제자매가 많으면 어쩔 수 없이 서로 나누어 가며 사는 것을 배울 수 있지만 집안의 모든 장난감을 혼자 독차지 하는 외톨이는 사회성을 배울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입니다.

다행히 대한민국 엄마 아빠들의 교육열 하나는 끝내주니까 어린이집이다, 선교원이다, 유치원이다 하면서 거길 다니면서 서로 어울리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자기 생각대로 다 할 수 없는 것도 알게 되고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함께 노는 것도 배우게 되고 좋은 장난감을 나만 가지고 놀 수 없다는 것을 익히게 되어야합니다.

집에서는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유치원에서는 선생님의 사랑을 나눌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배우게 됩니다. 선생님의 눈길은 자기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배우면서 자라갑니다. 간식도 다른 친구들과 같이 나누어 먹으면서 좋은 장난감이 있으면 그것도 돌아가면서 가지고 놀아야합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에게는 나누기를 왜 배웠는지를 꼭 가르쳐야 합니다. 나누기는 왜 배웠나? 나누기는 나눠 먹기 위해서 배운 겁니다. 오늘 손님이 두 분 오시니까 우리 식구 네 사람을 합하면 모두 몇 명이 식탁에 앉는지를 묻고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1/6이상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주지시킵니다.

배운 지식은 생활에 적용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거든요. 그때부터 배운 것 그때부터 나누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나중에는 자기 평생에 먹을 것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것을 차지하려고 합니다. 옆에 굶어 죽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더 빼앗아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가르쳐야합니다. 그래야 손님으로 온 사람들이 같이 앉아 밥 먹는 것이 기쁨이 되지 아이들이 그 맛있는 음식을 자꾸 먹어버리면 생각은 있지만 어른들이 어떻게 그 아이들과 경쟁을 하겠습니까? 

사람들은 생긴 것만큼이나 생각하는 것도 다릅니다. 어떤 아이는 자기반 모든 아이들이 다 친구라고 생각하고 다른 아이는 어떻게 모두가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두 녀석이 열심히 싸우는데 “딩동” 하고 초인종이 울립니다. 그러면 한 녀석은 언제 싸웠느냐는 듯이 생글 생글 웃으면서 손님을 맞이하거든요. 그것을 쳐다보면서 안에서 부글부글 끊는 녀석도 있습니다. 저렇게 어떻게 할 수 있나?

손님이 왔다 가고 나면 2차 대전이 또 일어나는 겁니다. “형은 이중인격자야? 나하고 화를 내어 싸우던 때는 언제고, 손님이 오니까 금세 웃는 얼굴을 하고 . . .” 형인들 할 말이 없진 않습니다. “싸운 것은 네하고 나하고 문제지, 우리가 화났다고 손님한테까지 화난 얼굴을 보일 이유는 없잖니?” 그 정도 되면 재판하기에는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릴 때 뿐 아니라 살아가면서 우리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서로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서로 다르게 생각하는 것을 사람들은 알아요. 좀 자라가면 부모 팔아 친구 산다는 시대의 나이가 될 때면 부모와 거리가 생기게 되고 부모가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고 그 십대의 아이들의 눈에서 보면 우리 이중인격적인 우리의 모습들이 다 폭로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주로 하는 불평이 무엇일까요? “우리 부모님은요, 친구들이 못된 짓을 하면 나도 그런 짓을 하는 걸로 그렇게 믿어요.  “우리 부모님은요, 부모님이 십대일 때 했던 잘못을 나도 한다고 믿어요.” “우리 부모님은요, 내 말은 들으려고 생각지 않고 잔소리부터 시작해요.” “우리엄마는요, 교회일 하기에 바빠서요. 우리를 쳐다 볼 여가도 없어요.”  “우리 부모님은 일에 바빠서 우리에겐 관심이 없어요.”

이런 불평을 들으시면 여러분은 어떤 기분이 듭니까? “잠들면 모르지만 깨어있는 시간에는 너희 잊어본 일이 없단다.”라고 말하고 싶습니까? 여러분의 생명까지 자식을 위해서는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녀석들은 부모님은 우리를 위해 시간도 내질 않는다고 말하면 얼마나 억울합니까? 그렇게 바쁘게 사는 것도 모두다 그 놈들을 위해서 하는 건데, 그래서

부모로서 우리가 갖는 느낌과 우리 자녀들에게 전달되는 느낌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개선하기 위해서 누가 나서야 할까요? 자녀들일 수는 없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을 책임은 부모인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을 주어야합니다. 시간을 준다는 것은 우리가 너희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단다. 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겁니다. 단순히 시간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사랑하고 있단다.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겁니다.

누군가에게 시간을 주는 것은 여러분의 생명을 나누는 일입니다. 시간은 바로 여러분의 삶을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을 낼 수 없는 것은 역으로 삶을 나누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의도적으로 삶을 거두어가진 않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사춘기의 두 아들을 위해서 정부고위직을 사임하는 외국의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그들은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아는 분들 같아요. 가족관계,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시간을 드려서 소중하게 가꾸어 가야만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 부인이 쓴 “가정이란 무엇인가?”(생명의 말씀사)를 권하고 싶습니다. “가정이란 무엇인가?” 한번 여러분 구해서 읽어 보십시오. 내용은 아주 좋은데 비해서 같이 전에 나랑 읽던 사람은 불평을 하기 시작하더라고요. 불평을 하는 사람을 보니까 이과계통이더라고요. 이과계통의 사람들이 불평하는 것은 본래 시를 왜 쓰는지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책이 좀 어렵나 보다고 생각을 했어요. 한사람이 불평을 하니까 이과 문과를 초월해서 불평이 쏟아져 나오더라고요. 그래서 당황해서 내가 생각을 해 보았는데 왜? 통역이 시원찮나? 그런데 결론은 가정이 우리에게 없다는 겁니다. 가정이 없는 한국사회가 가정이란 무엇인가? 라는 주제를 읽고 이해하는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을 발견을 했습니다.

그러나 읽는데 들이는 노력에 비해서 엄청난 보상을 약속하는 귀한 책이 “가정이란 무엇인가?” 라는 책입니다. 말 자체가 그래요. 가정이란 무엇인가? 한문으로 가정(家庭)과 영어로 what is family 하는 것과 뉘앙스가 다릅니다. 가정과 패밀리 뉘앙스는 다릅니다. 그러니까 패밀리라는 말을 번역할 단어가 없다는 거예요. 중국도 없고 한국도 없다는 말입니다.

처음 읽을 때보다 두고두고 귀하게 생각되는 주제들을 그 책에서는 다루고 있습니다. 수천 년의 인류 문명사에 빛날 명작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소중한 관계를 배우고 만들어가는 것은 언제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또 이 말을 너희 자녀에게 가르치며, 너희가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라.”(신11:19, 표준새번역) 고 말합니다.

항상 가르쳐야 하지만 주제에 따라서는 가르치기에 적합한 시기도 있습니다. 특히 믿기 어려운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만한 적합한 기회도 살다보면 만나기 마련입니다. 날 잡고 앉아서 진지하게 대화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아버지 여러분, 식구들 먹여 살린다고 바빠서 아이들 데리고 차분히 이야기할 기회가 잘 없지요? 이해는 됩니다. 그렇지요?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아들놈들이 하는 것이 귀엽게 보이지 직장에서 돌아와 피곤해 있으면 하는 짓을 보면 화부터 먼저 나요. 나도 아버지이기 때문에 이해는 갑니다. 그러나 자식들에게는 아이들이 십대가 되면 아버지와 대화가 꼭 필요합니다.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세요. 들어주는 겁니다. 그리고 한 마디라도 하면 아이들이 부모의 이야기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식물들이 자라는데 꼭 필요한 밀항요소가 있는데 그 요소가 없으면 제대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아버지 여러분이 많은 시간을 자기 자녀들을 위해 투자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적은 시간이지만 반드시 자녀들을 위해 십대의 자녀들의 위해 아버지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한 단계씩 올라갈 때마다 아이들에게 부모로서 진지하게 뭔가 대화할 줄 아는 부모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유치원에 가면 친구들과 싸워서는 안 된다. 좋은 것이 있으면 나눠 먹어야한다. 이런 것 부터시작해서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진학할 때 아들이 군대 입대를 앞두고, 취직과 결혼을 앞두고 뭔가 진지하게 한평생 산 부모로서 자식에게 할 말이 있어야 세상을 산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인생길을 먼저 걸었는데 자식이 군대에 가고 자식이 직장을 가고 결혼을 하는데 한 마디도 진지하게 해 줄 말이 없다면 여러분은 인생을 헛되이 산 사람들입니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물론 십대 사춘기의 자녀들의 눈에 아버지가 그렇게 위대하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 별 볼일 없는 아버지입니다. 유치원에 가기 전에는 우리 아버지가 세상에서 제일 힘이 센 아버지라고 믿지 사춘기가 된 아이들이 누가 그렇게 아버지가 위대하다고 생각합니까?

별 볼일 없는 아버지이지,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아버지는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아버지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하셨을까? 하고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40대 50대를 겪어가면서 여러분이 살다 보면 기억날 겁니다. 그러기에 부모 자식지간에 이야기를 하면서 자식들을 위해서 넓은 아파트를 준비하는 것이 아버지의 몫이 아니라 그들의 인생이 부요하게 되기 위해서 그들의 인생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 아버지뿐만 아니라 엄마고 아버지고 별 볼일 없어요.

어떤 때는 한번 가지고 놀고 싶습니다. 가지고 놀고 싶다는데 우리 입장에서는 완전히 싸우려고 덤비는 놈들 같습니다. 머리에는 물을 들이고 팔에는 문신을 하겠다고 하지요. 그러면 여러분이 사춘기 때는 전혀 상상도 못 해 보았던 짓이니까 뚜껑이 열리려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되나 도움은 안 됩니다.

어떤 때는 아이들이 영악해서 이렇게 하면 엄마가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 그러는 거지 진짜로 문신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문신을 하면 엄마가 팔팔뛰는 모습을 한번 보자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넘어 가면 안 됩니다. 여유를 가지고 전략을 세워야합니다. 고지를 점하고 해야지 화부터 내고나면 일단 여러분이 지는 겁니다.

남자고 여자고 부부 싸움할 때 고함을 목소리를 올리는 사람은 지금 밀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지요? 밀리고 있는 사람이 고함을 크게 칩니다. 어제 투표 때에도 열심히 선거 운동할 때 목소리 크게 해서 한 지역에다가 몇 천만 원 몇 억을 쏟아 붓겠다는 사람은 다 밀리니까 온갖 소리를 다 하는 겁니다. 소리가 높아지지 말고 그럴 때일수록 잘 사태를 파악해서 한 번 여유 있게 한마디 받아주면 “진짜 그렇게 하려는 것 아니에요.” 라고 나올 건데 그것을 모르고 그냥 길길이 날뛰고 아버지까지 불러들이고 온 집안을 전쟁터로 만들면 일이 되지 않는 겁니다.

물론 우리 자녀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아이가 되길 원치를 않습니다. 예절바른 아이, 괜찮은 청소년, 믿음직한 청년으로 우리 자녀들이 자라기를 다 원합니다. 하지만 밖으로 보이는 것으로 십대 자녀들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물을 들이면 어때요. 조금 배꼽이 드러나는 옷을 입더라도 여유를 가지고 바라봐 주십시오. “너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구나! 그래 세상에는 옷을 다 입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단다.” 여유 있게 이야기를 해 주세요.

우리 하나님은 그러시지 않습니까?  “나는 사람이 판단하는 것처럼 그렇게 판단하지는 않는다. 사람은 겉모습만을 따라 판단하지만,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본다.”(삼상16:7, 표준새번역). 여러분도 십대자녀들의 속마음을 왜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지 옛날을 생각해 보세요. 올챙이 때를 여러분도 십대 때를 생각해 보면 조금 이해가 될 건데 그렇게 십대인 아이를 40대인 엄마의 수준에 맞추려면 시끄러워 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결정적인 기회를 화를 낸다고 소모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딸이 심각한 얼굴로 “엄마, 나 고백할게 있는데요.” 들어보니 심장이 멎는 것 같은 고통이 몰려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동안 제대로 키워보려고 노력한 모든 것이 한 순간 물거품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딸아이에 대한 심한 배신감을 느끼는 그 순간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고래고래 소리치며 화를 내는 것은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만 그 때도 남은 기회는 붙잡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 난 지금 너무 마음이 아프고 참기 어려울 정도로 화가 난단다. 하지만 너를 사랑해, 하나님도 너를 사랑하고 있단다. 하나님이 너를 포기하지 않는 한 나도 너를 밀쳐내지 않을 거야 너는 내 사랑하는 딸이야.” 그렇게 한 마디를 해 주면 딸아이의 생애는 바뀔 수 있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은 더 할 나위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더불어 존귀하게 여기며 살아야 할 친구관계에서 그것이 우리를 파괴하려고 들 때에 고통스럽긴 해도 삶의 한 부분임을 우리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고통의 순간도 마음을 가다듬으면 더 없이 좋은 교육의 기회로 변할 것입니다.

3. 자기를 소중히 여기도록, 독특한 사명을 스스로 깨닫도록 키워야 합니다.

교단의 교육 목표 세 번째는 문화적 인격자로 키우는 것입니다. “자기의 존재의의와 독특한 사명을 자각하여 자기 선 자리에서 맡은 일에 충성케 한다.”고 규정합니다.

요즈음 십대아이들이 자살을 하는 소식을 심심찮게 듣습니다. 며칠 전에도 컨닝을 하다가 들켜서 벌을 받던 아이가 높은 건물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다는 마음 아픈 뉴스를 들었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어제 재보선 선거가 어떻게 되었는지 보려고 TV를 켰더니 나오는 소식 첫째가 아이가 또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부모가 죽이고 있는 거예요. 부모들의 잘못된 가치관이 아이를 죽이는 겁니다.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어떤 일을 저질러도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더불어 살도록 의도된 존재가 인간 사이입니다. 인간 사이는 서로 먹고 먹히는 야수사이가 아닙니다. 만인에 대한 짐승 노릇을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서로 다르고 어떤 사람은 탁월할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데 떠오를 수도 있고 사람들을 장악하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정치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술적인 탁월함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모든 탁월함은 갖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 섬기기 위해서 하늘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장점 때문에 결코 열등감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 아이하나만 잘 되기를 바라니까 세상이 서로 먹고 먹히는 짐승 사는 세상을 넘어 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짐승들은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잡아먹지 않습니다. 배가 홀쭉한 사자는 무언가를 잡아먹지만 배가 불러지면 호수에 가서 사슴과 같이 물을 마십니다. 더 이상 먹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욕심의 한계가 없잖아요. 평생 먹어도 남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절대 남의 손에 좋은 것을 허락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렇고 교회는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자녀들이 신앙으로 자랐기 때문에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자녀가 남보다 더 나은 것이 있으면 그 자녀가 누군가 자기보다 못한 아이를 돕기 시작하면 여러분 아이가 공부를 잘 하는데 공부를 못하는 아이를 도와주기 시작하면 그 아이가 왕따 당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고귀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남다른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좋은 교회 울산교회에 속한 신앙의 부모님들을 둔 것을 우리 아이들이 행복해 할 수 있도록 되어야겠습니다.

어떻게 우리 아이들을 도울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녀를 존귀한 존재로 여길 때 가능합니다. 요즈음 사람의 가격은 너무 심하게 평가절하 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잉태된 아이는 마치 쓰레기처럼 취급되고 있습니다. 진단했던 의사나 그 진단을 진단했던 부모나 생명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존 귀히 여기고 살려야 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합니다. 그것도 생명을 고귀하게 여기고 살리는 일에 쓰임 받기로 자기 기술을 쓰기로 서약한 의사들이 내가 모든 의사들이 다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풍조가 그렇다는 겁니다.

돈 버는 것이 앞자리에 오고나면 보이는 게 없어집니다. 의사를 해서 굶어 죽는 사람 보았습니까?  신앙의 부모는 달라야 되겠지요? 애굽의 임금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 태어나는 남자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하지만 이스라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임금의 명령을 무시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준수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그 누구의 명령이라도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명하지 않으셨으면 절대 순종을 할 수 없는 겁니다. 들어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따를 수 있는 것은 따르고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면 우리는 거부할 수 있는 그런 신앙인으로 자리 잡아야 예수 믿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이 사회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대한민국 그리스도인은 어리석은 정부와 야합해서 놀아났습니다. 그동안 정부가 어떻게 선동했습니까? 그 장단에 맞추어서 보통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신앙이 괜찮다는 성도들조차 어떻게 춤을 추었습니까? 60년대, 정확히 말하면 1966년에는 세 자녀를 세 살 터울로 서른다섯 안에 갖자고 선동했습니다. 삼삼삼오 무슨 이야기 입니까? 셋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전달하는 겁니다.

그것이 먹혀든다고 싶으니까 70년대부터는 둘 낳기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그 때 구호는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습니다. 그리고 80년대 들어서는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고 딸이라도 하나만 갖도록 부추겼습니다.

그 후 90년대에는 “아들바람 부모세대 짝꿍 없는 우리세대”라고 유치원에 가보니까 짝꿍이 없어요. 성비가 안 맞아서 “아들” “아들” 해가지고 아들 바라는 부모들 세대들 때문에 짝꿍 없는 우리들 세대로 아이들이 자조적할 만큼, 아마 2000년대 들어와서는 정부가 더 이상 선동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들이 한 것이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늦게나마, 그렇지만 요즘 젊은이들 마음속에는 “딸, 아들 필요 없다, 우리끼리 잘 살자.” 그런 것 같아요.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 지금 와서 걱정이 태산입니다. 노인들은 점점 많아지고 일할 젊은이는 적어지니 살길이 막막하다고 급조된 출산장려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하루에 수많은 아이들의 생명을 죽이는 일에는 대책을 세우지 않습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먹고 황소는 통째로 삼키는 것 같은 위선적인 정책만 내어놓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20초에 1명씩 영아들이 살해를 당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6,000명 영아들이 낙태시술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현장을 찍어놓은 비디오를 보면 칼이 가까이 오면 그 아이들이 피하려고 몸부림을 친답니다.

여러분 그런 죄를 짓고 여러분이 잘 되기를 바랍니까? 아무런 항거 할 수 있는 말 한마디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는 그 어린 생명을 죽이면서 잘 살아 볼 거라면서, 그 죄는 회개해야합니다.

하루에 6,000명 아이가 죽는다는 것은 일 년이면 150~200만이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6.25전쟁 때 사람이 죽고 다치고 한 것을 통틀어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더 신기한 출산장려책을 내어놓는 대신 낙태를 불법화시켜야 합니다. 이미 가진 아이를 낳게 하고 정부가 키우는 일에 앞장서면 됩니다.

저 가난한 나라 북한도 육아원 사업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교회들에게 육아원을 innovation 을 해 달라고 해서 시민교회는 칠천만원을 평양 육아원을 innovation 하는데 지원했어요. 아무리 가난해도 아이들이 있어야 내일산업현장의 일꾼이 있는 것이고 유사시에는 군인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생명을 귀히 여기지 않고 하루에도 수 천 명의 영아를 학살하는 세대가 받을 재앙이 두려운 겁니다. 그래서 우리 울산교회는 낙태반대운동에 적지만 매월 수 년 동안 지원해오고 있습니다.

이 몇 십 년 동안 살벌한 세상에서 생명의 존귀함이란 애당초 없었습니다. 그래서 툭하면 죽이고 죽고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신앙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생명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고귀한 선물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번 5월에도 또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이 죽어갈 것인지 걱정스럽습니다.

생명의 고귀함, 존귀함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고유한 사명을 가진 존재임을 알게 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독특함은 아무도 복제할 수 없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 독특하고 자란 환경이 독특하고 세워져 있는 입장이 독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존재의의와 독특한 사명을 자각하여 자기 선 자리에서 맡은 일에 충성케 한다.”고 규정하는 교단의 교육목적 세 번째는 귀담아 들어야할 요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신앙의 부모 여러분, 여러분 자녀의 고유한 개성을 살리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판에 찍어내는 그 교육, 그것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신앙의 부모들이 생각해서 학교를 보내는 것보다 내가 신앙으로 키우는 것이 났겠다고 생각하여 홈스쿨링 하는 것 저는 반대하지 않습니다. 신앙의 부모가 해 볼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잘못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녀교육은 학교에 맡기는 것도 아니고 정부에 맡기는 것도 아닙니다. 부모에게 하나님은 그 책임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판단해서 어느 쪽이 좋을 것인지를 마지막 책임을 부모가 내리고 마지막결단을 부모가 내리고 그 책임을 부모가 져야 되는 것입니다.

공부, 공부하는 분위기도 이제는 탈피해야 합니다. 영어 수학 위주로 나가는 것도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각자의 개성을 따라서 능력과 은사에 따라서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도록 하면 되지 않습니까?

눈만 뜨면 나가서 노는 놈 보고 공부하라고 싸우지 마시고 친구들 데리고 집에 와서 놀아라. 내가 떡볶이 해 줄게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이 부모 자식 지간에 의리를 세워 가는 겁니다.  눈만 뜨면 공 하나들고 뛰면 그대로 가도록 격려해 주세요. 공부 잘 해보았자 일 년 열두 달 열심히 회사에 나가야 밥 먹고 살고요. 공 잘 가지고 놀면 게임 몇 번씩 한 달에 해도 연봉이 얼마입니까? 친구 좋아서 사람 잘 만나서 사람들과 친해 질 수 있으면 생활 설계사 이렇게 나가니까 엄청난 돈을 받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여러분처럼 그 머리가지고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데 왜 여러분의 자식들을 그렇게 기대하지 않습니까?

아이들 생긴 대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망치는 일을 중단하면 됩니다. 다 어른 들이 말했듯이 자기 먹을 것 타고 난다고 그러는데 맞는 말입니다. 표현을 좀 더 성경적으로 한다면 하나님께서 할 일 이 있어서 세상에 다 보낸 아이들이 아닙니까?

말씀 정리합니다. 어린이주일을 맞이해서 자녀, 어떻게 가르쳐야 합니까?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제일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섬기면 사람은 행복해 집니다.

내 살림만 해도 고달픈데 뭔 하나님 그러지만 자기만 쳐다보면 답이 안 나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답이 나옵니다. 이웃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도우는 진리를 전하는 대상으로 이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함께 손잡고 서야 될 대상으로 이웃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아이들에게 키워주어야 합니다. 일등 해야 해 그러지 말고  네 친구를 돌봐주어야 해! 그렇게 이야기할 부모가 울산교회에서는 나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자기를 소중히 여기도록, 자기의 독특한 사명을 깨닫도록 키우는 사명이 부모 된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좋은 교회 울산교회는 좋은 부모 들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만 합니다. 아이들이 “ 나는 우리엄마 우리아빠가 울산교회 다니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도록 그런 부모가 되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멘. (/정근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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