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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부모, 왜, 어떻게 섬길 것인가? (엡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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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배의 자리에 함께 나오신 사랑하는 이웃 여러분, 가정의 달 5월 오늘은 8일입니다. 이날은 어버이날인 동시에 교회가 어버이 주일로 지키는 날 입니다. 지난주일 어린이주일로 지키면서 “자녀, 어떻게 키울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어버이 주일은 부모, “어떻게” 뿐만 아니라 “왜” 섬길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 현실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키우는 것을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이지만 자녀는 부모를 왜 섬겨야 하는지를 가르쳐야 하는 것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현실인 것 같습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리라”

왜 순종해야 합니까? 본문말씀 속에서 몇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자녀로서 부모를 잘 섬겨야 하는 이유는 인간으로서 자연의 질서에 따르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옳으니라.”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고 창조의 질서에 순응하는 길입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모든 분들은 부모 없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부모가 되는 기회를 가지지 못할지 모르지만 아무도 부모 없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존경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자식의 도리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세상 누구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논리에 근거해서 설득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존경하는 것은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선하고 바른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맺는 인간관계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부모를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존중되는 윤리입니다. 부모를 존경하는 것은 기독교 이전에도 존재했고 기독교 윤리 밖에서도 준수됩니다.

부모가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어쩌면 윤리 이전의 본능이기도 합니다. 이 본능적인 사랑을 받은 자녀라면 누구나 부모를 순종해야 옳습니다. 이 관계가 바르게 되어야 나머지 인간관계가 바로 될 수가 있습니다.

요즈음 세상에서 존경할만한 사람들이 없다든지 꼭 윗사람을 공경하지 못하는 근본 원인은 모든 도덕의 근간이 되는 부모 공경의 의식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가정에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배워야 학교에서 선생님을 존경할 수 있고 사회에서 윗사람을 존경할 수가 있습니다. 부모 순종은 모든 사회도덕과 사회 질서의 기본입니다.

둘째로 부모 순종은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절에서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은 “네가 주님 안에 있다면”, “네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네 삶이 예수 믿고 변했다면” 부모를 순종하라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흔히 에베소서와 쌍둥이 서신이라고 알려져 있는 골로새서를 보면 더 분명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3: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니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순종하는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기 때문에 신앙인은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해야합니다. 우리가 어려서 부모의 보호를 받고 있을 때뿐만 아니라 다 자라서 성인이 되어도 부모를 공경해야만 합니다.

더 나아가서 왜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합니까?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는 계명은 “첫 계명” 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적인 도리를 보아도 그렇고 신앙의 이유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도 지금 말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 될 열 가지 계명을 주셨는데 그 가운데서 네 개는 하나님과 관계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이고 여섯 가지는 사람들과 관계에서 지켜야할 계명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첫 번째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계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납득이나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믿고 따라야 할 첫 번째 도리가 부모를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의 윤리가 한국 사회에서 잘 못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효도 하지 않는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효도 하는 방식이 틀릴 뿐입니다. 효도를 않는 것이 아니라 죽은 부모 제사상을 차리지 않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부모를 예수를 믿는 사람만큼 잘 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죽고 나면 우리가 섬겨야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살아있을 때 섬기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살아있을 때 잘 섬기라는 것입니다. 죽고 나서 부모를 잘 섬겨야 복 받을 거라는 이기적인 논리가 아닙니다.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마지막 격려를 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복을 누리는 지름길이라고 소개를 합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것입니다. 모든 자녀 된 이들을 향해서 축복을 약속하면서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인생들은 그게 잘 되지 않기 때문에 오죽했으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하는데도 그렇지요? 자기 부모를 순종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아닙니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데도 하나님은 하면 상급을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우리가 워낙 잘 못 하기 때문에 좀 잘 하도록 하기 위해서 격려를 하는 것입니다.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축복의 첫째는 잘 된다는 것입니다. 그냥 오래 사는 것만이 복은 아닙니다. 정말로 어떤 분들은 오래 살아서 그것도 자녀들이 부모를 대우하지 않으면 오래 사는 것이 저주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어제 TV를 보니까 세상에 냉장고를 철사로 쇠줄로 감아 놓았더라고요. 부모가 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집에서 오래 산다는 것은 복이 아니지요? 그렇지요? 정말 못 죽어서 산다고 하지 않겠어요? 보통 집은 안에서 문을 잠그는데 밖에서 문을 잠그도록 만들어 놓은 집도 있더라고요. 그렇게 가둬두는 것입니다.

축복은 잘 되고 땅에서부터 잘 될 때에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것이 축복입니다.  형통의 축복을 성경은 먼저 약속하고 있습니다. 장수의 축복 앞서서 형통의 축복이 복이라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면 하나님은 형통의 축복을 약속하는데 여기 뿐 아니라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말씀을 귀 기울여 잘 들으면 형통한다는 겁니다. 잘 들어야 됩니다. 눈을 감으면 귀도 감깁니다. 그렇죠? 잘 들어야합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형통의 축복은 여호수아 1장 8절에도 나옵니다.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가장 고전적인 약속으로 시편 1편3절에 나옵니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면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부모에 대한 순종이 주는 또 하나의 뚜렷하고 특징적인 복은 장수입니다. 장수의 축복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계명을 준수하는 자에게 주는 것입니다. “웰빙” “운동” 그것이 장수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부모 공경이 장수의 비결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이 땅에서 장수하는 복을 주고 저 세상에서는 영생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잘 살기를 원치 않는 사람 있습니까? 귀를 닫으십시오. 건강한 가운데 오래 사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안 들어도 됩니다. 모두 다 잘 되기를 바라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원한다고 하면 하나님이 이중 약속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더블 보너스가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는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참 사람들은 하나님 말을 잘 안 들어요. 안 믿어요. 그래가지고 부모를 잘 섬겨야 오래 산다고 그러는데 괜히 생명 보험은 여러분에게 생명을 보장하는 보험이 아니라니까요. 나는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죽고 나면 다른 사람이 받는 돈이더라고요. 생명보험은요. 저는 아직 가입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잘 순종하면 오래 살리라. 그건 내가 받는 축복입니다.

내가 오래 살아서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택을 줄 수 있는 것이 진짜 해택을 주는 거지 내가 일찍 죽어서 보험금타서 살면 모르긴 해도 집사람이 지금보다 행복할 것 같지는 않아요. 잘 되는 것은 나가다가 로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로또사면 잘못하면 심장마비가 걸리고 그렇지 않아도 관계가 끊어집니다. 갑자기 몇 억이 생기면 인간관계가 파괴됩니다. 하나님은 부모를 잘 섬기면 잘 된다고 했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말씀을 잘 안 듣지요?

이렇게 잘 되는 축복하고 오래 사는 축복까지 원샷에 두 가지 축복까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하는데 부모를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본문 에베소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두 단어가 강조되지요. 순종과 공경입니다. 비슷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지요? 만약 순종만 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그건 외식이고 위선입니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것 같은데 마음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부모를 제대로 섬기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반대로 부모를 공경한다고 하면서 순종을 하지 않으면 공경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공경이란 단어가 “아주 무겁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명사로 쓸 때는 히브리어에서는 내장이나 간장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몸속에 있는 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여러분은 아시지요? 그래서 간암이 무섭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귀중한 간처럼 부모를 가장 중요한 분으로서 모시고 존중히 여긴다. 는 그것이 공경의 어원적인 뜻입니다. 부모를 잘 섬긴다는 것이 달리 말해서 부모순종을 잘 한다는 것이고 공경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잘 순종하고 잘 공경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째로 부모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부모를 부모로 알아 모셔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순종을 잘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부모, 존귀한 분 귀한분이라는 것, 나의 삶에 축복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 어머니가 그 부모가 자식을 향해서 날마다 위해서 기도하고 복 빌어주면 그는 복을 받는 겁니다. 축복의 열쇠를 가지고 있는 부모 마음을 상하게 하면 절대 잘 되지 않습니다. 오래 살 수 없습니다.

부모가 훌륭한 분이 되어서가 아닙니다. 아니 부모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돈을 펑펑 대 주어서가 아닙니다. 부모는 부모라는 이유하나로 존경해야합니다. 사춘기에 들어서면 아이들이 똑똑해져서 우리 엄마가 정말로 존경할 만한 분인가 아닌가부터 따집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질 수 있는 똑똑한 아이를 낳은 사람이 바로 여러분 부모입니다. 내가 존경을 해야 될까 말아야 될까 이것이 여러분이 고민하라고 맡기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해야 될 것이 공경하는 것이 여러분의 도리입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지 부모가 부모노릇을 했니 어쨌니? 그렇게 하는 것은 그건 배은망덕한 자식들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모가 없었더라면 여러분이 따질 만큼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부모를 잘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부모의 위치를 인정하고 그 말씀을 잘 듣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부모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잘 듣는 그것이 순종으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내가 동의 하느냐 동의하지 않느냐는 우선 접어두고 일단 잘 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들어보면 어떤 때는 우리가 얼핏 들어보면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는 것 같이 보이지만 그런 말조차도 그 말씀을 하는 배후에는 자식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아 차려야 제대로 된 자녀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8년 외국생활을 하고 들어와서 아침마다 할머니가 따뜻한 미역국에 밥을 말아 먹으라고 하니까 스트레스를 엄청 받아서 한국말도 잘 안되는데 나를 붙들고 할머니를 설득을 해 달래요. “ 빵도 영양가가 있다는 것을 ” 그래서 제가 이야기를 했지요. 할머니가 손자들을 괴롭히려고 그런 말을 하겠느냐  손자들이 너무 귀하고 오랜만에 만나서 좋으니까 제일 좋은 것 주고 싶어서, 할머니가 아는 범위에서는 따뜻한 미역국에 밥 말아 먹는 거니까 그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이해하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할머니는 바뀌지 않는다. 할머니는 하나님과 닮아서 불변하시다. 그러니 네가 이해하고 네가 할머니가 날 사랑해서 하는 말이거니 그렇게 생각하면 짜증낼 일이 없잖니, 할머니가 날 사랑하셔서 오늘 아침에도 어제와 똑같은 말씀을 하시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우리 부모가 어떤 때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지 몰라요. 그래도 그 말씀의 배후에는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그것이 제대로 된 자녀입니다.  모든 일을 합리적인 말씀을 하지 않고 지혜롭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아들은 자기 아버지를 보고 그러더라고요. 우리 아버지에게는 하나님께서 왜 지혜를 주시지 않았는고? 탄식을 하더라고요. 그 아들도 지금 나이가 들어서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요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러나 어떤 분도 까다로운 분일수도 있어요. 그래도 순종해야 됩니다.

베드로전서를 보십시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2:18) 선하고 관용하는 자, 뿐만 아니라 까다로운 자. 어떻게 직장에서 까다로운 상사만 가리키는 이야기이겠습니까? 집안에서 좀 모시기 힘든 부모님일수도 있고 또 좀 힘든 시부모님일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순종하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로 섬기는 방법은 부모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겁니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은 물론 아니지요. 부모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될 때는 우리는 따를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사도들이 전도하다가 잡혔는데 관원이 위협을 합니다. 더 이상 전도를 못하도록 예수 이름으로 입도 뻥긋하지 못하도록, 그러니까 어떻게 대답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고 합니다. 우리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가장근본은 하나님 말씀이 무어라고 말하는지를 생각해야합니다. 그것 생각하지 않으므로 나라가 지금 노인 천국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왜 둘만 낳아 잘 기르자고 할 때 그대로 따라갑니까? 정부가 무슨 말을 해도 우리가 어느 것을 해야 하는지 성경에 따라서 성경이 뭘 가르치는지를 귀 담아 듣지 않으니까 나라 전체가 지금 어려워 지지 않습니까?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과 비교해서 하나님 말씀과 어긋나면 부모나 정부나 할 것 없이 NO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면서 순종해야합니다.

때로는 자녀가 할 수 없는 일을 시키는 부모들도 있을지 몰라요. 나쁜 일을 심지어는 도적질을 하는 것을 시킬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렇게 말 하는 배후에도 부모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사실 부당한 지시를 하고 말 하고 간섭을 하면 따른다는 것 존경하는 것이 쉽지를 않습니다. 그래도 부모입니다. 참된 순종은 언제나 공경의 자세를 동반해야 합니다.

네 번째로는 부모님의 필요를 채워드리는 것이 부모를 섬기는 구체적인 방법입니다.  부모가 뭘 필요를 하는 건지 그것을 채워 주는 겁니다. 당대에 예수님 당시 신앙이 좋다고 늘 폼을 잡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있었지요? 이사람 들은 부모 몫으로 드려야 할 재산을 하나님 앞에 다 위탁 시켜버리고 다 하나님께 드렸으니까 나는 부모 섬김 하는 것 이제는 안 해도 된다. 고르반 드림이 되었다. 부모님 몫을 내가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니까 높으신 하나님께 드렸으니까 덜 높으신 부모님을 안 섬겨도 된다.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얼마나 책망을 했습니까? 너희는 너희관습을 쫓아서 하나님의 계명을 범했다고 야단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부모님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생활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요즈음은 어떨까요? 십일조를 매월 잘 내면서 부모님 용돈을 드리지 않는다면 현대판 고르반은 아닐까요? 그러면 십일조 내는 대신에 그것으로 용돈을 내라는 말씀입니까? 또 그렇게 듣는 사람도 있어요. 알아서 하세요. 박하와 해양의 십일조, 의와 신 이것도 저것도 소홀하지 말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경제적 필요에 대해서 자녀로서 책임을 다할 것을 성경은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오죽하면 불신자 보다 더 악한자라고 그렇게 까지 말 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설교를 듣고 나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되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를 평생 살면서 한 번도 못 들은 사람도 있고 이런 설교를 5월 달마다 벌써 10년 20년째 들어온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좀 삶이 바뀌어야 합니다.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이나 생활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양쪽 부모님 다 제대로 챙기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돈이 없으면 전화라도 한 통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께 한 달에 전화 한통 한 것 때문에 파산되는 사람 있으면 제가 우리 집으로 모셔 살게요.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찾아뵙는 일을 시도해 볼만합니다. 분기에 한 번 정도는 초청해서 우리 집에 며칠 와서 묵고 가십시오. 그렇게 이야기 해 보면 어떨까요? 특별히 좋은 교회 울산교회 교인 같으면 멀리 계신 부모님들이 있으면 5월은 초대하는 달로 삼으세요. 5월 며칠부터 축제를 하지요? 멀리 계신 부모님들께서 올해는 왜 초청을 하지 않지? 라고 생각하도록 5월이면 멀리계신 부모님을 초청해 오는 달로 삼으십시오. 

부모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일은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한시적이지요? 살아계실 동안만 할 수 있습니다. 아직도 살아계셔서 여러분의 목소리를 들려 드릴 수 있고 여러분이 찾아뵈올 수 있다고 하면 설교 들은 사람답게 한번 결심한번 합시다. 바뀌어져야 합니다. 좋은 교회 울산교회, 그 교회 교인들은 부모 섬기는 것 참 잘한다고 이렇게 전국에 소문나기를 나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울산교회 교인만 되기만 하면 복을 받는데 알고 보니 부모를 잘 섬겨서 복 받고 건강하게 오래 잘 살더라. 이렇게 소문이 나야 되지 않겠습니까?

저도 좀 잘 하려고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다가 어떻게 하는 것이 잘 하는 걸까? 생각해 보니까 내일 아침 식사는 대구까지 올라가서 장인하고 함께 혼자계신 장인과 식사라도 같이 했으면 좋겠다. 점심때는 어머니에게 가서 인사를 드려야겠다. 전화를 했더니 시골이 얼마나 좋은지 안 올라오시겠데요. “너네나 한번 왔다가라.” 우리는 모시러 가려고 했는데 그러나 저러나 내가 한번 무언가 바뀌어져야 되지 않겠어요? 10년 20년 설교를 들었는데 꼭 해 오던 데로만 하면 어떻게 합니까?  올해는 우리 한번 결심을 해야겠습니다.

어제 신문에 보건복지부와 KT가 함께 한 광고문구가 마음을 찔리는 게 있었어요. “부모님은 내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바쁜 줄 아십니다.” 라는 제목의 글로서 처음 5분 통화는 공짜로 KT에서 감당하겠다고 전화를 하라. 그러더군요. 오죽하면 전화회사가 우리에게 그러겠습니까? 읽어 보니까 좀 생각되는 게 있어서 여러분에게 읽어 드릴게요.

대학시절
친구들과 술 마시며 어울릴 때도
공부하느라 바쁘다며 집에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신입사원 시절
삼시 세끼 꼬박 챙겨 먹으라는 어머니의 전화를
바쁘다며 정신없이 끊어버렸습니다.
 
첫아이 돌
고속버스로 올라오신 어머니를 바쁜 회사일
마무리하자고 한 시간 넘게 기다리게 만들었습니다.
내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바쁜 줄로 아시고
이제는 알아서 미리 챙기시는 부모님
시간이 부족했던 게 아니라
마음이 부족했던 자식을 용서하십시오.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향해서도 주께 하듯 해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3:23)

눈에 보이는 부모 공경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순종하기 위한 테스트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시작자요 완성 자이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소년시절부터 청년시절에 이르기까지를 한마디로 순종했습니다. 열두 살 때 그는 당신이 예사 아이와 다른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당신자신이 하나님인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권위 아래서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 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2:51)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가장 고통의 순간에도 어머님을 향한 공경의 마음을 잃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있는 것을 보시고 십자가 위에서 모친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 이다”(요19:26) 내 대신 당신을 섬길 아들입니다. 라고 요한을 소개했습니다.

물론 우리 번역이 상상력이 없이 번역을 해서 우리에게는 좀 걸립니다.  “여자여” 엄마에게는 “여자여” 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 번역을 그렇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번역이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쓸 수 있는 가장 극존칭 용어입니다. 그것은 로마의 황제 안토니우스가 유명한 애굽의 여왕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때 사용한 바로 그 단어입니다.

최고의 존칭으로 불렀을 뿐만 아니라 그 고통스런 마지막 순간 십자가 위에서도 어머니의 구체적인 필요를 위해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요한을 보고 “보라 네 어머니라.” 지금부터 네 어머니로 섬기라고 말 했습니다.

요한은 그 시로부터 마리아를 자기 어머니로 섬겼고 여러분이 터키에 성지순례를 가보면 에베소에 가보면 교회에 있는 한 숲속에 한 산 중턱에 성모마리아의 집이 있습니다. 거기 갔을 때 저는 아주 뭉클한 감동이 있었어요. 단순히 어느 동네처럼 관객을 끌기 위해서 순례자를 모우기 위해서 붙여 논 이름이 아니라 거기에는 요한이 마리아를 섬겼던 집이라는 감동이 왔습니다. 요한은 60세에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로 이주해서 90이 넘도록 제자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사는 장수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실언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의 원형경기장보다 더 오랫동안 기억에 자리한 곳이 바로 성모 마리아의 집입니다. 자기 어머니의 노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심으로 어머니의 필요를 채워주셨습니다. 그 분을 주님이라고 따르는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제 우리는 얼마나 신실하게 우리 부모의 필요를 채워드리는지 돌아볼 차례입니다. 의식주의 필요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정신적인 정서적인 필요도 채워드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좋은 교회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미국의 어느 노인은 이런 광고를 신문에 내었답니다. “나에게 전화를 걸어주는 분에게는 1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오죽 외로웠으면 그런 광고를 내겠습니까? 늙어가는 우리 부모님의 노후에 정서적인 필요를 채워드리는 일에 올 한해는 시간을 드립시오. 한 달에 한 통화 반드시 하겠다. 그렇게 결심해 보십시오. 내가 처음부터 매주일 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매일 하라고도 하지 않겠습니다. 한 달에 한번은 마음에 담긴 전화를 드린다고 그렇게 결심해 보십시오.

뿐만 아니라 아직도 신앙을 갖지 못한 부모님이라면 하늘 아버지를 만나도록 하는  일에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두어야 하겠습니다. 쉽지는 않습니다만 가까이 계신 분을 전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만. 우리가 소원하면 하나님께서 창조적 지혜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부모님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그 부모를 버려두고 우리만 하늘의 영광을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늘 아버지를 알고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주님으로 섬기다가 천국소망을 가지고 이 땅을 하직하도록 해야 될 책임이 바로 자녀인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부모님을 섬겨야 합니까?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고 신앙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이고 이중의 축복이 따르는 계명입니다.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축복과 함께 약속과 함께 하나님이 순종하라고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어떻게 부모님을 섬겨야 하지요?  먼저 부모님을 마음에서부터 존경해야합니다. 여러분이 똑똑합니까? 부모님이 아니었으면 그 똑똑한 여러분은 없었습니다. 부모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말씀을 귀담아 듣고 시키는 것을 하십시오. 그리고 부모님이 나이가 들면 부모님의 필요를 여러분이 이제는 채워드리고 부모님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하나님과 더 잘 사귈 수 있도록 해 드리는 것이 자식 된 도리입니다.

마지 못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해 보십시오. 일 년 후에는 제가 설교 하지 않고 여러분이 간증하는 시간을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일 년 동안 결심하고 부모를 순종했더니 얼마나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는지 한 사람 한 사람이 할 말이 있는 한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구주대망 2005년은 좋은 교회 울산 교회 성도님들께 부모 섬김의 원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아멘. (/정근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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