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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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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이란 말과 ‘자산’이란 말들은 서로 엇갈리면서 비슷하게 쓰이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하지만 글자와 어감이 다르니만큼 분명 어떤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대강 정의해 볼 때, 아마도 ‘재산’은 ‘소유하고 있는 재물’이라는 일반적인 뜻의 단어인 반면에, ‘자산’은 ‘활용할 수 있는 가치가 있는 재물’이란 뜻이 좀 더 강조된 단어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직후 일약 삼천 명의 세례교인이 생기면서 출범한 예루살렘교회는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더하는 내적 역사와 더불어 가히 폭발적인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앞서 사도행전 2장 43절의 말씀에 보면 그런 교회 성장을 촉진시킨 이유 중에 하나가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난” 때문이라고 밝혔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많이 나타났던 이적들 중에 한 가지 대표적인 것을 기록하고 있는 말씀으로서,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고쳐 준 유명한 사건입니다.

  평생 불구자로 살 수 밖에 없었던 앉은뱅이가 한 순간에 벌떡 일어나 뛰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온 백성이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랄” 수밖에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의 이면에는 그저 한 불구자가 육신의 치유를 받은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즉 그 앉은뱅이는 자기의 병 고침을 받는 과정을 통해서 그 몸뿐 아니라 심령에 이르기까지 전인적(全人的)인 변화를 체험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신기한 일을 일어나게 했던 원인과 능력은 단 한 가지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 이것이야말로 예루살렘 교회의 최고의 자산, 즉 예루살렘교회가 그냥 소유하고 있던 ‘재산’이 아니라 사람의 심령과 생활에 활용되어 놀라운 변화와 역사를 창출해 내고 있던 가장 소중한 ‘자산’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자산은 단지 예루살렘교회만의 전용물은 아니었습니다.
  그 첫 교회를 따라 이 지상의 천년왕국을 통하여 두고두고 이어질 모든 신약교회들이 꼭 같이 귀중히 소유하면서 영혼 구원을 위해 크게 활용해야 할 공통의 자산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과연 이 자산은 교회를 통하여 어떻게 활용되어지고 있는 자신입니까?

  오늘 우리는 총회선교주일을 함께 지키면서, 교회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지키고 전파함으로써 사람의 심령과 생활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있는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세 가지로 나누어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종교를 개인의 욕구 충족만을 위해 사용하던 사람들을 변화시켜 줍니다.

  1절로 3절 말씀에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유대인 시간으로 “제 구시”라는 것은 오늘날로는 오후 3시에 해당됩니다.
  매일 이 시각에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오후의 정기적 제사를 드렸으며 일반 백성들이 기도드리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2장 46절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는데, 아마 이 시간에 성전에서 함께 모였을 가망성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어쩌면 그 같은 매일의 기도회를 인도하기 위하여 성전에 들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할 때에 그 성전 문 앞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 한 사람이 앉아 있었습니다.
  “나면서”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는 것은, 그의 불구가 어떤 일반적인 치료를 통해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이었다는 사실과, 또한 베드로와 요한의 신유 기적이 멀쩡한 사람을 가지고 무슨 쇼를 부린 사기 행각이 결코 아니었음을 명백하게 밝혀 두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미국 텔레비전에서 흔히 방송되는 소위 신유 집회들이란 것의 대부분이 실은 병 고침 받게 되는 사람들과 미리 다 각본을 짜고 행해지고 있다는 것이 언젠가 몰래 카메라를 동원한 고발프로를 통하여 방송된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병고침 받았다는 사람들은 원래 건강한 사람들이었고 그 신유집회를 여는 주최측으로부터 돈을 받고 그런 쇼를 강단 위에서 같이 벌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짐작은 했던 일이지만 막상 그런 고발프로가 방송되고 보니, 불신자들이 그것을 보고 기독교 전체를 조롱할 것을 생각하니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하지만 이 앉은뱅이의 경우는 그가 출생 때부터 지금까지 불구라는 사실이 성전을 출입하는 모든 백성들에게 다 이미 알려져 있었으니 그런 쇼를 하려야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날도 역시 “사람들이 메고 와서” 그를 성전 문에 앉혀 두었던 것입니다.

  그가 앉은 문은 “미문(美門)” 즉 ‘아름다운 문’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성전 내의 ‘이방인의 뜰’이라 불리는 구역에서 ‘여인의 뜰’로 들어가게 되는 문이었는데, 청동으로 만들어졌으며 우리가 미술 시간에 배웠던 저 유명한 소위 ‘고린도 양식’을 따라 아름답게 조각된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라는 사람은 이 문을 가리켜 “은으로 입히고 금으로 박은 문들보다도 훨씬 더 가치가 높은 뛰어난 작품”이었다고 평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 앉은뱅이가 바로 그 미문에 앉아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그처럼 보기에 아름다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이 문은 예루살렘 중심 시가지 방향으로 통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통행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많은 장소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 그대로 그 문은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서 가장 좋은 자리가 되었습니다.
  즉 구걸하기에 제일 좋은 이른 바 명당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앉은뱅이의 일상사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도움까지 받아 가면서 그 성전에 날마다 찾아왔습니다.
  세속 역사가까지 칭송할 정도로 ‘아름다운 문’ 앞에 매일 앉아 있었습니다.
  바로 자기 앉은 자리 지척에서 날마다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고 레위인의 찬송 소리가 들렸고 성도들의 예배와 기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실로 그가 날이면 날마다 앉아 있던 자리는 영적으로도 너무나 좋은 자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앉은뱅이는 그 좋은 터를 무엇하는 데에만 쓰고 있었습니까?
  오직 구걸하는 데에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목적으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에게 적선해 줄 사람들을 많이 모아 주는 목적에만 유용했던 것입니다.
  바로 성전을 곁에 두고도 그 앉은뱅이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보다는 그저 동전 몇 푼 더 얻고자 구걸하는 가장 낮고 천한 인생을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실로 많은 사람들이 종교생활이란 것을 이런 식으로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개인 소원 성취 - 이것이야말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 생활이라는 것을 추구하고 있는 대표적인 이유입니다.
  또 그 소원이란 것 자체도 사실 지극히 유치한 것들입니다.
  그저 잘 먹고 잘 살게 해 달라고 손 비비는 것들이 대부분이며, 먹고 살 걱정은 없다 싶은 사람들은 그저 조금 마음의 평안을 얻고 무언가 정신적으로 고상한 것을 찾고자 하는 것에서 지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신을 대한다는 사람으로서는 정말이지 낮고 천한 수준에서 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다른 종교인들뿐 아니라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그 정도 수준으로 대하고 있는 자들이 꽤 많이 있다는 사실은 정말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후진국이나 북한 선교를 한답시고 그저 빵 덩어리나 옷가지들만 나누어 주고는 예수 십자가 복음은 한 마디도 전하지 못하는 소위 선교단체들이 많이 있습니다.
  선교라는 이름하에 우리 신앙의 고귀하고 중요한 것들을 스스로 다 팽개쳐 버리고 이 기독교를 저질 종교로 전락시키는 행위를 그처럼 자행하고들 있는 것은 실로 개탄할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이처럼 너무나도 천한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처럼 오직 개인의 유치한 욕구 충족을 위하여 종교생활하려는 자들의 자세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주는 유일한 이름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은 그런 구걸 수준의 종교생활과는 도무지 어울릴 수 없는, 너무나도 고귀하고도 능력 있는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전도와 선교는 사람들이 구걸하는 개인 욕심을 채워주는 유치한 목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 들어있는 너무나도 값지고도 고상한 것을 나누어주는 실로 부요하고도 차원 높은 영적 사업인 것을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사람에게 정말 가장 필요한 구원을 베풀어 주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4절로 6절 말씀에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런 앉은뱅이의 구걸 소리를 듣는 순간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함께 그를 “주목하여” 바라보면서 그 앉은뱅이를 향하여 “우리를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 앉은뱅이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걸할 때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사람들로부터 적선을 거부당하는 것은 이 앉은뱅이에게 있어서는 일상의 다반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구걸할 때 옷자락을 붙잡고 간절히 구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최소한 눈이라도 마주치면서 구걸하는 것조차 하지 않고 그저 무심히 손만 내밀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 앉은뱅이로 하여금 그런 무감한 자세에서 벗어나서 자기네들을 주목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앉은뱅이는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항상 실망당하는 일에 익숙했던 그의 심령은 이번에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갑자기 흥분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이제 사도 베드로와 그 앉은뱅이 사이에는 기계적인 구걸과 적선의 관계가 아닌 보다 밀접하고도 특별한 교류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처럼 기대감에 가득 찬 앉은뱅이에게 베드로가 던진 첫 마디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 떨어지는 순간 그 앉은뱅이의 흥분했던 마음은 한 순간 풀썩 무너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훨씬 더 좋은 것이 바로 그 뒤를 이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는 놀라운 선물이었습니다.

  여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라는 뜻입니다.
  즉 사도 베드로는 자기 개인의 무슨 특별한 능력으로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그를 일으켜 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애 중에 보여 주셨던 신유의 능력이 지금 사도들을 통하여 발휘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같은 특별 신유은사는 사도들에게만 주어졌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그 전하시는 복음과 그 행하신 능력의 기적이 병행된 것이었습니다.
  즉 기적은 기적 자체에 무슨 의미가 있었다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참되다 라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표적과 기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와 같은 사역, 즉 기적을 통하여 복음이 확증되면서 전파되어졌던 그 사역이 이제는 그 주님의 제자였던 사도들을 통하여 꼭 같이 계속되어지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비록 말은 사도 베드로를 통하여 떨어졌지만 꼭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힘이 그 앉은뱅이에게 임했을 때,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단번에 해결되는 역사가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어나 걷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앉은뱅이 자신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자신도 스스로 구걸하거나 요청하거나 기도하지도 못했던 것이지만, 실상은 그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이 바로 ‘일어나 걷는 것’이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바로 그 고질적인 문제점을 단숨에 해결해 주었던 것입니다.

  선지와 사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주어지기 전에는 사람들은 그 앉은뱅이와 꼭 같이 그저 ‘동전 몇 푼’만이 자기 인생에 지금 당장 가장 급한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죄인이고 평생을 매일 죄인으로 살아오면서도, 사람들은 그 죄가 바로 반드시 고침 받아야 할 자신의 최악의 문제인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란 불구는 결코 고쳐질 수 없는 병이라고 스스로 자포자기 상태로 사는 것처럼, 사람이 죄의 값으로 받게 된 죽음에 이르지 않고 영생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아예 생각하지도 못할 일로만 여기면서, 이 영적인 병에 대하여 스스로 무감각과 무관심 속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선포될 때 비로소 우리들은 비로소 내 인생에 가장 고질적이고 중한 병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가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8:24하)는 말씀이 선포됨으로써, 우리는 예수 이름 없는 인생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는 말씀이 선포됨으로써, 우리는 오직 예수 이름만이 우리에게 구원 베푸시는 능력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전파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죄사함과 구원을 값없이 베풀어 주는, 가장 값진 이름이면서도 가장 쉽게 받아 누릴 수 있는 실로 은혜로운 이름인 것을 기억하면서, 더욱 이 이름을 자랑스럽게 증거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 은혜 체험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 줍니다.

  7절로 10절 말씀에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을 것을 선포하면서 그 앉은뱅이의 손을 잡아 일으켰을 때, 그의 몸에는 실로 평생 처음 느껴보는 변화가 차례대로 일어났습니다.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벌떡 “뛰어 서게” 되었습니다.
  설 뿐 아니라 한발 한발 앞으로 움직이며 “걷게” 되었습니다.
  걸을 뿐 아니라 이제는 “뛰기도” 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체험하게 된 거동의 자유를 그 앉은뱅이가 어디에다 제일 먼저 사용했습니까?
  집으로 달려가 가족들을 만나려 했습니까?
  그 동안 가고 싶어도 제발로 가지 못했던 예루살렘 부근의 명승지를 가보고 싶어했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일어서서 뛰기까지 할 수 있게 된 앉은뱅이는 즉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지척에 있었지만 평생 들어갈 수 없었던 그 곳에, 이제 움직이게 된 발이 제일 먼저 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그의 입술은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찬미”하는 말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슨 찬송을 불렀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자기의 병 나은 것을 두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다는 뜻입니다.
  그 찬미하는 목소리가 어떠했겠습니까?
  결코 조용한 소리는 아니었을 것임이 분명합니다.
  복음성가에서 ‘그는 걸었네 뛰었네 찬양했네’라는 가사와 곡조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큰 소리로 외치면서 하나님을 찬미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 앉은뱅이가 베드로와 요한에게 감사했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물론 나중에 개인적으로 감사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그 시간 그 자리에서는 하지 않았고, 그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있던 군중들도 오직 그가 하나님을 찬미하는 소리만을 계속 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물론 그것은 아무 문제도 될 수 없었습니다.
  불신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무례한 일이고 배은망덕한 사람처럼 보일 일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일으켜 준 사도들에게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된 그 앉은뱅이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평생 하나님 앞에서 구걸만 하고 하나님 이름을 찬미하지는 못하는 입 가진 사람 얼마나 불쌍합니까?
  자기 인생살이에 대한 불만을 토할 때는 목소리가 절로 높아지면서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소리는 아예 입밖으로 나오기도 어려운 이상한 입 가진 사람들 얼마나 안타까운 사람들이겠습니까?
  무슨 전도회나 제직회 석상에서 발언할 때에는 혼자 열심 다 있는 것처럼 열변을 토하면서도 그 인격의 지성소에서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송축하는 말은 나올 줄 모르는, 영적 벙어리들이 이 지상교회 안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불신자들이야 그런 입 가진 것 당연하지만 신자라는 사람들이 그런 ‘불구(不具)의 입’을 가지고 있어서야 말도 되지 않을 일입니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기 심령으로 똑똑하게 듣게 된 사람의 입은 결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참된 것,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의 위대한 것을 분명하게 체험하게 된 사람의 입은 결코 그렇게 닫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 구속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 안 할까” - 그 사람의 입에서는 찬양이 나오지 않으려 해야 안 나올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구걸밖에 못하던 입술이 ‘하나님을 찬미’하게 되는 아름다운 장면들을 뿌듯한 마음으로 목도하게 되는 즐거움을 우리 자신들도 더 많이 누릴 수 있는 길은 오직 전도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그 이름을 듣고 깨닫고 믿고 체험하게 된 사람으로 하여금 매순간마다 절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게 만드는 예수 그리스도의 놀랍고도 은혜로운 이름을 더욱 널리 힘있게 전파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중세 교회사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명한 천주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당시 교황이었던 이노센트 2세를 방문했었습니다.
  그때 이노센트 2세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들어온 막대한 양의 헌금을 막 세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마침 찾아온 토마스 아퀴나스를 보고 교황은 의기양양하게 말하기를 “이것 좀 보게, 토마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라고 말할 수는 없게 되었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말 그렇군요, 교황님.”이라고 맞장구치면서 한 마디 덧붙이기를 “하지만 이제 교회는 ‘일어나 걸으라’고도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했었습니다.
  은과 금은 엄청나게 많이 소유하게 되었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잃어버린 천주교는 이미 그 어떤 영혼도 살릴 수 없는 무력한 종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재산’을 축적하고 소유하고 있는 영리단체가 아니라, 사람의 영혼 구원을 위해 쓰라고 주어진 고귀한 ‘자산’을 가치 있게 활용하는 구령단체입니다.
  ‘나사렛’이란 명칭은 사람들이 별 가치 없게 여기던 이름이며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배척당했던 이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예수’라는 ‘구원자’의 이름과 동격이며, ‘그리스도’라는 ‘기름부음 받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권위와 능력이 있는 이름입니다.
  바로 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야말로 사도들이 “내게 있는 것”이라고 증거했듯이, 참된 기독교인과 기독교회가 여전히 소유하고 활용하고 있는 최대최고의 자산인 것입니다.

  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만이 자기 욕심 성취를 위해 종교 생활이라고 하고 있는 ‘영적 걸인’들을 변화시켜 줄 수 있습니다.
  오직 이 예수님의 이름만이 모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급한 죄용서와 영혼구원의 문제를 해결시켜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진정 하나님을 찬양하는 신전 인격자로 살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이 귀한 이름을 꼭 소유하고 이 능력의 이름을 잘 활용하여 개인과 가정의 구속 은혜를 스스로 충만하게 체험하고 이웃과 민족의 구령을 위한 전도와 선교의 사명을 더욱 크게 감당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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