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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신앙 (민 13:25 - 민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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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십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정처 없이 인가(人家)를 찾아 방황했습니다. 가도 가도 사람 사는 마을은 나타나지 않고 두 사람은 지쳐버렸습니다. 먹을 것은 물론이고 물도 마시지 못한 채 사막길을 헤맸기에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 때 저 멀리서 공동묘지 같은 것이 보였습니다. 그 순간 아들은 완전히 절망했습니다. "아버지, 이제 모든 것은 끝장났어요. 우리같이 길 잃은 사람들이 헤매다가 죽은 무덤이 저기 있잖아요.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죽어서 무덤에 묻히고 말거예요." 그러나 아버지의 태도는 달랐습니다. "애야, 그게 아니란다. 저기 저렇게 공동 묘지가 있다는 말은 인가가 가까이 있다는 말이 아니겠니? 우리 조금만 더 걸어가 보자. 분명히 마을이 나타날 거란다."

누구의 말이 옳을까요? 아들일까요? 아버지일까요? 아버지의 말이 옳습니다. 공동묘지가 있다는 말은 누구간 그 무덤을 만든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니 과연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마을이 있어서 두 사람은 구조되었습니다.

아들이나 아버지나 육신의 눈을 가졌으니 눈앞에 나타난 무덤은 똑같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무덤을 바라보는 태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들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았습니다. "야, 저기 저렇게 무덤이 있는데 우리처럼 길 잃은 사람들이 죽어 넘어진 곳이 아닌가? 이제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비참하게 죽어 저 곳에 묻히겠구나." 무덤의 이미지가 죽음이니 즉각적으로 자기들의 죽음을 예감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무덤을 보았습니다. 무덤 안에 들어가 있는 죽은 시신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죽은 사람들을 장사지낸, 산 사람들을 먼저 떠올렸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 이제는 살았구나!" 하고 희망의 탄성(歎聲)을 질렀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은 똑같은데 보는 사람의 태도는 이렇게 서로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현실이 아니라 이 현실을 바라보는 눈입니다. 이것은 '육의 눈'과 '영의 눈'의 차이입니다. 육의 눈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것만 봅니다. 그것도 부정적이고 비관적으로 보기 쉽습니다. 반면에 영의 눈을 가진 사람은 보이는 것만 보는 것이 아니라 볼 수 없는 것까지 봅니다. 현실이 아무리 암담하고 절망적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미래에 하실 일들을 미리 봅니다. 그리하여 언제나 희망적이고 낙관적으로 사물을 봅니다! 

<12정탐꾼들의 가나안 탐지 보고서>
  여러분, 이러한 원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도 어김없이 나타납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코앞에 두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 땅에는 강대한 토착민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냥 무혈입성(無血入城)이 아니라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 정탐꾼, 즉 스파이들을 미리 보내어서 탐지(探知)할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12 지파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들을 각 지파대로 12명을 뽑아서 가나안 땅에 밀파(密派)를 했던 것이지요.

민 13: 18-20을 보면 정탐꾼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는 땅을 살피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요, 약속의 땅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오라는 것이지요. 출 3: 8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출 3: 17 참조). 이렇게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오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약속해 주신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정탐꾼들에게 주신 사명은 바로 이 땅을 살피고 오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땅을 살피는 것이 주임무였는데, 이 땅을 살피기 위하여 부차적인 임무도 주어졌습니다. 예컨대 그 땅에 사는 백성들이 강한지 약한지, 숫자가 많은지 적은지, 땅이 좋은지 나쁜지, 그들이 사는 마을이 장막촌인지 요새화된 성읍인지, 토지가 기름진지 메마른지, 거기에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파이 활동의 증거물로서 그 땅의 과일도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민 13: 20). 때마침 포도가 처음 익을 무렵이었기에 포도송이를 따오기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12명의 정탐꾼들은 40일 동안 가나안 땅 구석구석을 살펴보고 돌아왔습니다. 40일이라는 숫자는 완전 숫자이므로 정탐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스파이 활동을 마친 정탐꾼들의 보고가 판이(判異)하게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일본에 통신사로 파견된 정사인 황윤길(黃允吉, 1536-?)과 부사인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보고가 달랐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김성일 쪽에서는 일본이 쳐들어 올 기미가 없으니 안심하라는 보고였고, 황윤길 쪽에서는 일본이 곧 침략을 할 것 같으니 단단히 방비를 해야 한다는 보고였습니다. 결국, 당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 간의 당파 싸움 때문에 조정에서는 괜찮다는 동인 쪽의 보고를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 임진왜란이 일어난 것 아닙니까?

비슷한 맥락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은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곳에 정착해 살고 있는 토착민들이 너무 강하고 담대해서 우리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저히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보고였습니다. 이와 같이 부정적인 보고를 듣자 백성들 사이에 동요가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 때 갈렙이 일어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땅에 얼마든지 들어가 토착민들을 이기고 땅을 얻을 수 있다는 보고였습니다!

자, 중요한 것은 오합지졸(烏合之卒)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갈렙의 보고는 듣지도 않고 10명의 정탐꾼들 이야기만 들었다는 사실입니다. 10 대(對) 2, 벌써 숫자부터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으니 믿음 없는 백성들은 부정적인 보고에만 귀가 솔깃했던 것은 당연하지요. 이렇게 하여 백성들이 밤새도록 소리를 지르고 통곡했습니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이번에도 모세와 아론에게 원망을 퍼붓습니다.

본문 14: 2-4를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참 기가 막힌 광경이 아닙니까?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사람들 말만 듣고서는 원망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여기에 끌고 와서 죽게 만드느냐? 이제 우두머리 한 사람을 세워서 당장 애굽땅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적전분열(敵前分裂)이 일어나 벌써 심리적으로 패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부정적인 보고는 이렇게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어리석은 대중들은 부정적인 보고만 듣고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시도(試圖)를 한번 해보기도 전에 두려움에 떨게 된 것입니다. 이 때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대는 회중들 앞에서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은 어떤 자세를 취했습니까? 14: 5을 보세요.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무슨 말입니까? 믿음 없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태도에 그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자, 이제 중요한 것은 이렇게 형편없이 흔들리는 백성들을 보다가 두 사람이 분연히 떨쳐 일어났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었습니다. 이들은 극한 의분(義憤)의 표시로 옷을 찢고 외쳤습니다. 14: 7-9을 보세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정탐꾼들 중에 절대 다수인 10명이 안 된다고 해도 두 사람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과 달리 여호수아와 갈렙은 적극적인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12사람이 똑같은 현실을 보고 돌아왔지만 그 결과에 대한 보고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과 여호수아/갈렙의 차이점>
이제 우리의 관심을 부정적인 보고를 했던 10명의 정탐꾼들과 긍정적인 보고를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의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살펴봅시다. 초점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질문을 이렇게 한번 만들어 봅시다. 10명의 정탐꾼들이 본 것과 보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거꾸로 "10명과 달리 여호수아와 갈렙이 본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도 될 것이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① 문제가 되는 장애물들만 보았지 정탐의 주목적이 되는 땅은 보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12명의 정탐꾼들을 보낸 곳은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기에 땅을 살펴보라고 스파이들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탐의 주목적은 땅을 살피는 것입니다. 거기에 어떤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어떤 장애물들이 도사리고 있는지는 두 번째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명의 정탐꾼들은 주목적인 땅보다는 땅을 둘러싸고 있는 문제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여러분, 어떤 일을 하든지 문제없는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크고 작은 문제가 있습니다. 넘어서야 할 장애물들이 첩첩산중(疊疊山中)으로 기다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문제가 많고 장애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압도당해서는 안 됩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을 보세요. 모세가 시킨 대로 포도 한 송이가 달린 가지를 꺾어서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어 둘러매고 왔습니다(13: 23). 가나안 땅이 비옥한 곳이었기에 석류와 무화과도 가져왔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의 처음 보고를 보면 그런 대로 긍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13: 27을 보면 가나안 땅에서 가져 온 과일들을 보여주면서 그 곳이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말이 끝나자마자 부정적인 말을 합니다. 땅은 좋은 땅인데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13: 28-29을 보세요.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땅은 괜찮은데 그 곳에 살고 있는 토착민들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들어가기에 장애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는 그런 대로 객관적인 사실을 보고했다고 보여지지만 13: 31-33이 문제입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10명의 정탐꾼들을 보다 못해 갈렙이 일어났습니다. 30절에 보면 "우리 다 올라가서 그 땅을 점령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그 땅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확신에 차서 긍정적인 보고를 했던 것이지요.

이 때 이 말을 들은 10명이 벌떼처럼 덤빕니다. 31-33절을 보세요.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갈렙의 긍정적인 보고를 듣자마자 태도가 돌변(突變)해서 아주 부정 일색의 보고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너무도 강한 사람들이어서 우리가 이길래야 이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나안 땅에 대해서만큼은 좋게 이야기하다가 태도를 급변하여 악평을 했습니다. 가나안 땅이 거민을 삼키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여러 족속들이 전쟁을 해서 끝없이 사람들을 잡아먹는 저주의 땅이라는 것이지요.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신장이 다 장대한대 특히 거인족 네피림(창 6: 4 참조) 후손인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니 우리는 메뚜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주목적인 가나안 땅은 점점 초점으로부터 멀어졌고 그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넘어야 할 장애물들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10명의 정탐꾼은 문제는 크게 보고 주목적인 땅은 작게 보았습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땅은 크게 보고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장애물은 작게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양쪽 진영의 건널 수 없는 차이였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일을 하시든지 간에 목표를 분명히 정하십시오.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문제가 있고 장애가 있습니다. 그러나 목표가 중요한 것이지 문제와 장애물에 의하여 압도당하면 안 됩니다! 목적 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어떤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② 사람만 보았지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주목적인 땅 이야기는 아주 조금만 언급하고 내내 사람들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족속들이 살고 있는데 다 강하고 큽니다. 거인족인 그들에 비하면 우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뚜기와도 같아서 이길래야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만 보고 왔습니다. 아무리 장대한 거인족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은 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을 보면 두렵고 실망스럽지만 가나안 땅을 주시마 약속하셨던 하나님을 보면 얼마든지 승산(勝算)이 있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14: 7-9을 보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므로 능히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 한 분이시지 원주민 거인족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밥으로 삼으셨다고 선언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똑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만 보는 사람은 넘어집니다. 낙심합니다. 포기합니다. 두려워 떱니다. 염려합니다. 그러나 문제의 배후에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일어섭니다! 희망을 갖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담대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문제를 만나더라도 사람만 보아서 안 됩니다. 사람을 지으시고 모든 문제 해결의 원동력(原動力)이 되시는 주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③ 현재만 보았지 미래는 보지 못했습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의 현재만 보았습니다. 그 곳 토착민들이 보통 강한 것이 아니고 성읍들이 얼마나 견고한 요새로 되어 있는지 모르며 장대한 거인족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은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쓰러지고 말 것이라는 비관이지요. 사실, 이들이 본 것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쩌면 정확한 실상을 보고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땅의 현재만 보았지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복하여 누리게 될 축복의 땅은 미쳐 보지 못했습니다. 믿음 없이 세상적인 현실만 보았지 하나님께서 다스리실 미래의 땅, 영광의 땅, 축복의 땅, 약속의 땅은 미쳐 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사과 속에 있는 씨앗은 셀 수 있지만 씨앗 속에 있는 사과는 셀 수 없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과 속의 씨앗'은 현재를 말하며, '씨앗 속에 있는 사과'는 미래를 말할 것입니다. 현재는 뻔히 보이지만 미래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리해서 현재는 보이는 것만 가지고 너무나 쉽게 계산할 수 있지만 미래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쉽게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과 속에 있는 씨앗'보다 '씨앗 속에 있는 사과'가 장차 훨씬 더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엄청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옳습니다. 미래에 대한 푸른 꿈을 가진 사람들만이 오늘 사과 씨앗 속에서 열리게 될 무수히 많은 열매들을 미리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히 11: 1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믿음을 가진 사람은 현실이 아무리 실망스럽다고 할지라도 현재만 보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가 해결될 미래를 미리 보면서 용기를 갖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문제를 만나더라도 그 답답한 현재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찬란하게 다가올 미래의 영광도 함께 보셔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만 약속의 땅, 축복의 땅을 밟을 수 있습니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향하여>
부정적인 보고를 했던 10명의 정탐꾼들과 이들의 말만 듣고 동요를 일으켰던 백성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민 14: 29을 보면 끔찍한 말씀이 나옵니다. 백성들 중에 20세 이상이 된 사람들 중에 하나님을 원망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시체가 되어 나뒹굴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14: 33-34을 보면 이들의 불신앙 때문에 정탐한 날수 40일의 하루를 일년씩 환산하여 자그마치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태도가 이렇게도 무서운 심판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4: 36-38을 보면 가나안 땅에 대하여 나쁜 소문을 퍼뜨린 10명의 정탐꾼들은 하나님 앞에서 재앙을 받아 죽어 넘어졌지만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정적인 보고를 했던 10명의 정탐꾼들이나 이들의 말만 듣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던 백성들은 모두 애굽적인 사고 방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길들여진 불신앙과 현실안주의 소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미래에 펼쳐 주실 약속과 축복의 땅, 가나안 땅은 보지 못하고 사람들과 온갖 장애물로 둘러싸인 가나안 땅의 현재만 보았기에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은 이와 같이 애굽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백성들을 광야에서 모조리 쓸어버리시고 긍정적인 믿음, 미래 지향적인 믿음, 진취적이고 개척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을 새로 일으켜서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원하십니까?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삶의 태도를 버리셔야 합니다. 애굽적인, 병든 신앙을 과감히 청산해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으로 무장하여 불가능성 속에서 가능성을, 장애물 속에서 해결 방법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제 2의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가나안 땅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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