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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숙한 교회 (미 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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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변하는 것은 순간입니다. 누군가에 큰 영향을 받으면 사람은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누구나 누군가에 큰 감명을 받게 되면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인생의 일대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모습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도 여러 가지 반응이 나온다는 사실을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비록 같은 장소에 있지만 결과는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들음에 있어 길가 밭과 같은 결실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씀이 들려지기는 하지만 씨를 새들이 다 쪼아 먹음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것과 같이 말씀을 들었지만 바로 잊어 버려서 전혀 말씀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같은 사람은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돌작 밭과 같은 결실을 얻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듣고 바로 깨닫기는 하지만 쉽게 말씀을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듣고 깨닫고 뜨거워지기는 하지만 금새말씀을 잊어버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도 말씀과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저 자기 방식대로 살아갑니다. 가시와 엉컹퀴 밭과 같은 결실을 얻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만 어려움이나 고난이 다가오면 믿음을 배반하고 말씀을 배반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옥토 밭과 같은 결실을 얻는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거두는 사람입니다. 즉 배운 대로 깨달은 대로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배운 대로 즉 훈련받은 대로 살아가고자 할 때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훈련 받게 되어지면 변화가 일어날 뿐만 아니라 삶을 통해 실천함이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시온에서 훈련받은 열방의 백성들이 가는데 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가르칩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게 충만하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 세상에 충만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통치하심으로 공의와 정의로운 사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임하게 될 때 그곳은 평화가 깃들게 되어있습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될 때 “스스로 전쟁 무기를 쳐서 농기구로 만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국가들이 서로 대적해서 싸우는 것은 무언가 욕구 불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통치하게 되는 날, 말씀에 의한 그분의 판결이 얼마나 공정하고 공평한지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더 이상 전쟁의 필요성을 느끼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자발적으로 무기를 농기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농기구를 만든다는 것은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사람들이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정죄하는 것으로 사용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화평을 말하고 평화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원수된 자들이 서로 용서하게 되고 죄인들이 용서 받는 평화의 시대가 열렸던 것을 봅니다. 문제가 있는 곳에는 주님의 십자를 통해 그 문제들이 제거 되었습니다. 이 땅에 가장 큰 벽은 죄 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을 통해 이런 죄의 문제도 완벽하게 해결해 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죄라는 것 때문에 가로막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로마서 5장 10절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만이 세상을 평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을 지배하지 않는 한 참 평안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숙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말씀이 살아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숙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말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노라 하면서 여전히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성장하지 못할 것입니다. 말씀에 지배아래 있지 못하기 때문에 다툼이나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성도간의 다툼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사탄의 역사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남을 공격하고자 하는 마음이 들 때는 나 자신의 생각과 이런 마음들을 제거하기 위해 말씀을 묵상함을 통해 성숙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기관이나 기구들이 세계의 평화를 가져 올 것이라고 착각을 하는 경우를 봅니다. UN이나 특정한 구호단체들이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인 양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보면 그런 기구들이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실망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더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원단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욱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욱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며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진정한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교회가 성숙해지며 성도들이 성숙해질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4장 12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반드시 변화가 일어나야 하며,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듣고도 변화되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평화를 기대하기 힘듭니다.
내가 예수님 알기 전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면 예수님 믿고 난 후에는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임을 통해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기 위해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이 땅에 친히 오셔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케 하셨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공의만 앞 세웠다면 우리는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심판을 하신 것입니다. 그 심판을 나와 아무 상관이 없으신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주님의 은혜를 배반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은혜아래 있게 되어지면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포도나무는 팔레스틴 지역에서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는 과일나무입니다. 또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 역시 이스라엘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보통 포도나무 사이에 심어졌던 과일나무였습니다. 이 두 과일 나무는 땅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즐기게 될 풍요로움은 일종의 겸손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도나 무화과는 비싼 과일이 아닙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기본 식품이었습니다. 이 과실을 풍성함은 백성들이 충분히 먹고 마실 수는 있겠지만 결코 호의호식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과일은 경제적으로 검소해진 생활 수준을 암시하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는 백성들은 소비주의 성향의 삶을 멈추고 검소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량주의 빠진 성도, 교회는 성숙한 교회, 성도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검소하지 못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통치하는 나라에서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유명 브랜드도, 상상할 수 없이 엄청나게 값비싼 사치품도 없을 것입니다. 모두 다 실용적인 풍요로움 안에서 삶을 즐기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세상의 나그네로 와 있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검소하게 살수록 그만큼 천국에 가까워져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이 궁상을 떨면서 살 필요는 없지만, 검소하게 살아가야 할 의무는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즉 분에 넘치도록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대로 감사하면서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도가 성숙한 성도이며, 검소함을 실천하는 교회가 성숙한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자족함을 배워야 합니다. 바울은 빌 4장11절을 통해 “어떤 형편에서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12절,13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품과 궁핍에도 일체의 비력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매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또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을 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민이 각각 자기의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행하되 오직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영원히 행하리로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비록 온 세상이 바로 옆에서 신앙생활 하는 주님의 백성들 마저도 하나님께서 주신 가치관과 세계관대로 살아가기를 꺼려하더라도 믿음을 가진 성도는 즉 메시야의 통치를 기다리는 성도들은 나 자신만큼이라도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고 그분에게만 순종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많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자신의 삶을 비교해서 상대적인 경건을 지향하며 무난하게 살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앞의 경건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경건을 요구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나은 것 가지고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른 신앙은 옆의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교해야 하며, 하나님의 절대적인 평가에 기준을 두는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결코 옛날처럼 죄 속에서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운 만큼 그 은혜를 체험한 성도들의 삶도 놀랍게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놀라운 변화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물론 행위를 통해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성도들은 결코 부패와 타락의 삶을 계속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럼에도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 도덕적 윤리적 의무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목격하기도 합니다. 이런 신앙의 모습은 바른 신앙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진정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살고 있는가? 그들은 진정한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인가 하는 것을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시행착오는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죄를 지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이미 본질적으로 바뀌어 있을 것입니다. 복음을 진정으로 경험한 사람은 예전의 삶의 방식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상대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 자신을 절대 평가함을 통해 더욱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우리는 성도다운 성도,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영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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