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떨며 즐거워하라 (삼하 6:1- 19)

  • 잡초 잡초
  • 450
  • 0

첨부 1


출애굽기 25장에 보면 법궤에 대한 말씀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시내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기준으로 십계명을 주셨고, 실천적 삶의 중심으로 성막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성막을 짓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뽑힘을 받았는데, 특별히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사용하셨습니다.

성막에는 물두멍,번제단 같은 뜰에서 필요한 도구들과, 떡상, 촛대, 분향단 등 성소에 필요한 기구들을 준비케 하셨고, 지성소에는 법궤와 용서와 은혜의 자리 시은소도 구체적인 기준까지 정해주시며 제작하도록 하셨습니다. 법궤는 특별히 광야에서 자라는 싯딤나무로 만들도록 하셨는데, 이는 학명이 '아카시아 세아'라는 일종의 아카시아 나무로서 재목으로 쓰기에는 너무나 부적절한 나무였습니다.

그 아카시아 나무를 엮어 널판처럼 이어서 궤를 만들고 궤의 안팎을 정금으로 싸도록 하셨습니다. 궤의 길이는 2.5 규빗, 넓이는 1.5 규빗, 높이도 1.5 규빗이었습니다. 한 규빗이 팔꿈치에서 손끝 까지이니까 대략 50㎝로 계산하면 무난할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으로 본다면 이 법궤는 길이 1.25m, 넓이와 높이는 75㎝되는 아담한 모양이었습니다. 궤의 네 모퉁이에는 어깨를 맬 수 있도록 채가 달려있어 운반시에는 반드시 어깨에 매도록 하였습니다.

법궤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성막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곳이기도 하고, 그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대단히 중요한 그런 성물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교회에 여러 성구들을 사용하시면서 그 성구에 대한 여러분들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나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쓰여지는 것이 거룩한 데에 쓰여지기 때문에 성구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거룩한 도구라는 것입니다. 교회안에 사용되는 모든 것들은 다 성구라고 합니다. 곧 거룩할 성자입니다.

마이크도 성구에 속하고요. 피아노도 성구에 속합니다. 피아노가 삼익이냐, 영창이냐,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 피아노라 술집에서 춤 추고, 죄 짓는 분위기, 맞춰주는 도구로 쓰여질 수도 있구요. 거룩한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의 도구로 쓰여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쓰여지냐가 중요하지요. 그래서 교회에서 쓰여지는 피아노도 성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에 싯딤나무같이 쓸모없는 아카시아나무 같은 재료를 가지고 정금으로 안팎을 발라서 가장 소중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로 삼았고, 그 법궤 안에는 아주 중요한 것들이 들어있었는데, 모세의 광야에서의 은혜의 상징이었던 만나를 담은 항아리, 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들을 가장 귀하게 선용하시고, 세워주셨던 아론의 싹난지팡이,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시내산에서 받았던 십계명 돌판 두개, 그것이 법궤의 안에 있었습니다.

그 하나 하나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가장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부분들이 법궤 안에 들어있었습니다. 민수기 10장에 보면 모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열두지파에 수백만명이 애굽에서 출애굽하면서 그들은 출발하면서 일년만에 성막을 짓도록 명령을 받았는데, 성막을 진 이후에 언제나 성막은 이스라엘 삶의 중심이었습니다. 마음의 중심이기도 했지만, 지리적으로도 중심이었습니다. 열두지파가 세 지파씩 동서남북으로 배치가 되었고, 그 중심에 성막을 배치했습니다.

성막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면 그것이 성막이 어디에 있는지, 성막의 중심이 어디인지를 그들은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막 위에는 늘 구름이 있었고, 그 구름이 움직이면 성막이 움직이는 것이어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백만명이었지만, 자연스럽게 텐트를 걷고 또 광야를 행진했습니다.

어느 때는 하루, 어느 때는 보름, 어느 때는 몇 달씩, 사람들이 생활을 할 수록 잔 꾀가 늘기 마련이지요. 처음에는 텐트를 치고, 내일 떠나려나하고 텐트를 치고, 물건들은 풀지 않고, 놔 둡니다. 왜냐하면 텐트를 내일 또 걷어서 가려면 정리를 다 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다음날 출발하면 좋은데, 움직이지 않습니다. 한 달이 되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살림을 다 풀어놓지요? 그러면 구름이 움직입니다. 그렇게 되면 살림을 정리해서 텐트를 걷고 가야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훈련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추라고 하면 멈추는 다시 말하면 순종하는 훈련을 이스라엘은 무려 40년 동안을 받았습니다. 그 순종의 삶의 중심이 바로 성막이었고, 그 성막의 중심은 지성소에 있는 법궤였습니다. 그들의 모든 지파의 중심이 있는 그 성막, 그래서 현대 크리스찬들은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같은 기독교 국가에 가보면 그 도시의 제일 중심인 타운센터에는 어김없이 높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교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중심에는 교회가 있습니다. 가장 도시의 중심, 타운센터에는 무엇이 있느냐? 교회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도시의 중심이었고, 그들의 삶의 중심,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창을 열면 교회가 열렸고, 도시의 중심으로 모이면 자연스럽게 교회로 가는 중심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삶이 다양해 졌지만, 여러분의 삶의 중심도, 신앙의 중심도 교회이기를 축원합니다. 언제나 여러분들이 바라보는 삶의 중심은 교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법궤가 그들의 삶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떠날 때에는 모세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사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법궤가 출발하면 모든 지파가 출발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 우리 백성들 앞에 가셔서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로 다 도망치게 하옵소서.

법궤가 멈출 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주는 수천만의 이스라엘이시니이다. 이제 법궤가 멈추고, 모든 지파가 진행하여 멈추면 멀리 앞서가셨던 하나님께서 다시 돌아오셔서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옵소서. 라는 모세의 기도는 얼마나 실제적이고 실감이 나는 기도인지 모릅니다.

법궤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하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네가지 정도의 의미를 법궤는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의 현존성, 바로 지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하는 임마누엘을 상징하는 것이 법궤였습니다. 그들은 법궤를 바라볼 때마다 법궤에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구나. 라고 그들은 생각하고 기쁨으로 그들은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 그들은 여호와의 통치하심을 믿었습니다. 법궤라고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상징했습니다. 역대상 28장을 보면 법궤를 보면서 우리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는데, 그 왕은 왕궁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습니다. 왕궁 자체가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지만 그 곳에서도 왕의 자리는 가장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신하들은 왕의 얼굴을 감히 바라보지 못합니다. 기어서 가서 왕의 발등상을 만지면 거기에 입 맞추면 거기서 그들은 최고의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왕의 얼굴은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거지요.

바로 그런 의미에서 왕 되신 하나님의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법궤를 우리 하나님의 발등상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 법궤를 바라다보는 것만으로도 왕의 발등상을 만지는 감격과 기쁨은 누린다고 그들은 비유한 것입니다.

이 법궤는 세 번째 화해와 용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속죄일에 속죄의 피를 뿌립니다. 하나님, 우리 백성이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용서함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대 속죄일에 속죄의 피를 뿌리고 성공적으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나오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용서하셨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때때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것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서 죽은 것입니다. 대제사장 자체가 하나님 앞에 들어갈 만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고 싶을 때 지성소에 갔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응답을 받고 싶을 때 하나님의 성소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눈물로 구할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응답하셨고, 역사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법궤는 그들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법궤는 홉니와 비느하스라고 하는 지도자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전쟁을 하다가 아무래도 전쟁에서 계속 패하니까 그들이 생각하기를 아무래도 법궤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우리가 전쟁에서 지는가보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은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전에서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 하는 그런 범죄를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잘못됨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진노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꾸만 실패의 원인, 잘못된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낸 것이 법궤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그들은 전쟁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했고, 그들은 법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어리석다고 해야 할지 백성들은 법궤를 가지고 온다고 하니까 갑자기 사기가 높아졌어요. 고함을 지르고, 함성소리가 났습니다. 블레셋 진영이 이상하게 이스라엘이 계속 패배해서 다 전의를 상실했는데, 갑자기 사기가 충전하니까 이것이 웬일이냐 정탐꾼을 보내보니까 그들이 법궤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와서 그렇게 사기가 높다는 거예요.

그런데 한 번 더 싸워보니까 여전히 이스라엘은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기가 막히게도 법궤까지도 빼앗겼습니다. 잘못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궤라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있어서 법궤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 그 자체였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전리품을 그들이 노획했다고 생각해서 그들이 믿는 다곤신전 앞에다가 가져다 놓았는데, 그 다음날 가보니까 그 엄청나게 큰 다곤신이 팔 다리가 부러져서 자빠져 있는 거예요. 이게 웬 일이냐? 다시 가져다 다 세워 놓았는데, 다음날 또 자빠졌습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이스라엘에 가장 중요한 저 법궤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나보다. 법궤를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는 엄청난 독종의 재앙이 그 마을에 임했습니다. 또 다른 도시로 옮깁니다. 몇 번에 옮김을 거듭하다가 그들이 내린 결론은 더 이상 이 법궤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 손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 법궤는 이스라엘과 블레셋 국경지역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이스라엘의 역사는 계속 진행이 되고, 결국 남왕국 유다의 왕이었던 다윗은 북왕국 지파의 장로들이 찾아와서 우리의 왕이 되어달라고 간청함으로 결국 다윗은 남북을 통일한 왕이 되었습니다.

헤브론에서 그는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지리적인 중심일 뿐만 아니라 신앙의 중심으로써 예루살렘을 삼기를 원했습니다. 다윗성이라고 정하고, 시온성이라고 정하고, 그 곳에 그는 삶의 중심을 차렸는데, 북왕국의 시돈의 왕이 자신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보내고, 석수와 목수들을 보내서 왕궁을 지어주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예요.

새로운 왕의 취임을 축하하면서 왕궁을 지어주고, 왕궁을 지은 재료들과 일꾼들을 보내준 다윗은 복을 받았습니다. 백향목, 하얀 색의 향나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아름다운 백향목으로 지은 왕궁에서 다윗이 생활하다가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백향목으로 지은 집에서 거하는데, 우리 하나님의 궤는 저 국경지역의 들판에 버려져 있구나.

그래서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올 계획을 가졌습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6장은 그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역대상 15장도 같은 내용의 말씀입니다. 군인 중에서 3만명을 뽑았습니다. 3만명의 군인 중에 법궤를 옮기는 일에 돕는 일꾼들로 사용하기 위해서 뽑았습니다.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우리 남자들이라면 과거 국군의 날 행진하는 것이 있었는데, 그 행진에 뽑히는 것이 군인의 꿈이기도 했어요. 이제는 국군의 날 행진하는 일이 매년 있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매년 국군의 날 행진이 볼 거리였습니다. 과거에는 자랑거리였습니다. 자부심이었어요.

제가 군생활할 때에도 국군의 날은 계속 장병들이 거기에 뽑혀 갔는데, 저도 무척 가고 싶었습니다. 3년동안 근무하는 동안 3번의 기회가 있었는데, 저는 한 번도 뽑히지 못했어요. 거기에는 자격이 있어야 합니다. 국군의 날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 각 부대마다 일개대대씩 편성을 하는데, 12000명 중에 600명씩을 뽑습니다. 제가 있던 5사단에서도 600명을 뽑는데 아무리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키가 1m75㎝이상, 몸무게가 몇 킬로그램 이상, 그 기준이 있습니다. 제가 1㎝가 모자라 가지고,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같은 군인이라도 국군의 날 그 행사를 보면 좋았어요. 그리고 부대에서 3개월, 여의도광장에서 3개월동안 이 행진하는 훈련만 합니다. 그러니까 국군의 날 때 보면 앞뒤로 오와 열이 맞아가는 게 사실 그게 얼마나 재미있고 멋있는 일입니까?

시민들이 꽃다발을 걸어주고, 그리고 정말 자부심이 있는데 그런 뽑힌다고 하는 것, 지금 이 3만명은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서 군인 중에 또 뽑았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그 일을 위해서 도왔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2절에 보면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 기랏여하림과 같은 도시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사 없었습니다. 사람들도 정상적으로 뽑았어요. 뽑은 사람 중에 또 뽑았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겠다는 다윗의 계획도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법궤에 대해서 민수기 4장에 보면 세가지 지침을 주셨습니다. 첫째 법궤에 대해서 만지지 말 것. 둘째 보지 말 것. 셋째 수레에 실지 말 것. 그리고 단서를 붙이시기를 만지시거나 보거나 수레에 실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신학자들은 해석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기 위해서 이 조항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주신 그 자비하심이 그 계명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아담과 하와에게 온 동산에 모든 것을 주시고 나서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그 과실의 열매, 그것만 먹지 말라고 하는 것, 그것만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는 것, 아담과 하와를 괴롭히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을 죽이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복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인간의 욕심은 모든 것을 다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사단의 유혹과 도전에 그들의 눈이 달라졌어요. 저걸 먹으면 죽지. You must die. 반드시 죽으리라. 그런데 사탄이 의심을 불어넣고 나서 그의 눈이 달라졌습니다.

반드시 먹으면 죽는 과일이 아니라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으로 보여주는 눈이 달라졌어요. 그리고 사탄이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저것 먹으면 어떻게 되지? 반드시 죽으리라. 라고 대답하던 그들의 대답이 달라졌어요. 죽을지도 모른다. 50%로 확신이 떨어졌어요.

여러분 사람들이 그렇게 자꾸 쑤시면 꼭 이렇게 흔들어지지요. 아무리 훌륭한 사람도 옆에서 자꾸만 흠집을 내면 나중에는 정말 그런 것 같이 느껴져요. 중요한 일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우리의 믿음을 긁어냅니다. 흠집을 냅니다. 그래서 틈을 가지고 틈만 생기면 쐐기를 박고 들어온 것입니다.

장작을 패는 것이 쐐기를 박아야 패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망치부분으로 장작을 패서 장작을 깨는 사람 보셨습니까? 통나무는 그렇게 해서 쪼개지지 않지만 날부분으로 한번 두 번 쪼개기 시작하면 틈이 생기고, 그 강력한 통나무도 갈라지는 것입니다. 의심은 무서운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궤를 보지 말고, 만지지 말고, 수레에 실지 말라. 그러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는 그 말씀은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신학자들의 해석입니다.

그 분은 어떤 분인지, 정말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거룩하심에 대해서 정결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도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법궤에 가지고 오되 어깨에 메고 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을 뽑아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좋은 나무를 골랐겠지요. 최고의 목수들이 동원되었겠지요. 아주 정결한 소를 선택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수레를 끌고 갔습니다.

법궤를 그 수레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본문말씀을 보니까 우리는 두 사람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의 수레 앞에서 행하고 그랬으니까 당연히 웃사는 수레 뒤에서 따라서 행했습니다. 수만명의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을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위기가 왔습니다. 낙원의 타작마당을 지나갈 때 소들이 어떤 상황에 놀랐습니다. 소들이 놀라버리니까 수레가 같이 뛰고 거기에 실려있던 법궤가 떨어질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 수레 뒤에 따라오던 웃사가 얼른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수레에서 떨어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웃사는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웃사는 그 일 때문에 죽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호나사 그 자리에서 치시니 웃사가 죽으니라.

우리 이 일 때문에 굉장히 맘이 편치 않습니다. 많은 성도들에게 질문을 받습니다. 하나님 너무 하신 것 아닙니까? 저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수레에서 떨어지는 것을 몸을 던져서 받았는데, 공로패는 주지 못할망정 죽일 수가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문제를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은 그토록 가혹하셨는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나 이해할 수 없는,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도우려고 했는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협조하려고 했는데, 정성을 다해서 나무를 구하고, 그 나무를 구하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했겠어요?

우리나라의 대궐, 경복궁이나 경희궁이나 덕수궁 같은 짓는 사람들, 그것을 재건하거나 복원하는데 우리나라의 대목수가 있다고 하는데, 그 분의 다큐멘터리를 보니까 전국을 다니면서 그 소나무를 구하러 다니는데, 구할 만한 소나무가 없어서 지리산, 설악산, 다 다니면서 결국 그 나무를 구해서 운반해 와서 그 궁궐을 복원하는데 쓰였습니다.

부정탄다고 목욕하고, 집에도 안 가고, 부부관계도 안 하고, 얼마나 샤머니즘적으로 철저하게 단속하는지 모릅니다. 지금 하나님의 법궤를 치를 수레를 만들기 위해서 그 나무를 구하는 일부터 얼마나 정성을 다해서 전국에서 구했겠습니까? 그것을 만드는 일에 그 당시에 최고의 목수, 우리나라로 말하면 대목수를 초청해다가 왕의 명령이니까 최고의 기술자가 그 수레를 만들었겠어요?

그것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희생과 얼마나 많은 물질적인 수고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에 얼마나 많은 경제적인 희생과 지출이 있었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수고하고, 얼마나 희생하고, 얼마나 내가 땀을 흘렸는지, 우리는 이 쪽에 우리의 심경이 다 빼앗겨 있습니다.

우리는 이 쪽에 우리의 마음이 다 뺏겨져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이 수레를 새로 만든다고 하는 것, 그리고 수레가 새 것이라고 하는 것에 우리의 관심이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중요한 것 한가지를 놓쳐버렸어요. 법궤를 어깨에 메어야 한다고 하는 이 엄청난 사실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2절에 보면 수레에 실는 것이 아니라 어깨에 메고 와야 한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가 맡긴 지도자들, 일꾼들은 수레에 실고 오는 방법으로 진행해 가고 있는 거예요. 담임목사가 한 것은 개혁적이고, 담임목사가 멋있게 목회하려고 하면 뭐 합니까? 따라주어야지요.

장로님이 따라주어야 하고, 권사님이 따라주어야 하고, 집사님이 따라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너무나도 중요한 그러나 다른 것들 때문에 덮혀져 버린 그런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위기 상황이, 돌발상황이 나타나면서 그 문제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것은 너무 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너무하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 가혹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많은 사람들은 두 번째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의 그 심판하심이 그렇게 된다면 우리 기독교는 시장성이 없는거야. 시장성이 없다는 말이 뭐예요? 보편적이지 않다는 거지요. 그러면 누가 봉사하려고 하고, 누가 일하려고 하고, 누가 희생하려고 합니까?

그냥 아무나 괜찮아, 괜찮아, 신앙을 잘 못해도 괜찮고, 그냥 교회 들어와서 불교식으로 십자가에다가 합장을 해도 그래도 괜찮아. 교회만 와. 교회에서 온갖 더러운 죄들을 여전히 그대로 해도 그냥 교회만 오면 괜찮아. 이 교회에서 못된 짓 하고, 저 교회에서 못된 짓 해도 우리교회만 오면 괜찮아, 괜찮아. 그래서 숫자만 많이 모아놓으면 제일이고, 부흥한 교회이고, 유명한 교회이고, 훌륭한 목사라고 치부되는 이 풍조 속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도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평안의교회가 지난 22년을 오는 동안에 많은 분들이 평안의교회를 오시기 원했습니다. 여러 장로님들이 우리 평안의교회로 이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장로님들의 이명을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것은 장로님 자신들에게도 불행한 일입니다. 여기서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었을 때 장로님들이 모든 성도들에게 권위가 있고, 존경을 받지.
다른 데에서 오시면 장로님들이 존경을 받고, 장로님들의 말씀에 권위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서로가 불행한 일입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이사오는 그런 정도가 아니면 당신의 자리를 죽을 때까지 지키십시오. 장로님 가정이 우리 평안의교회 오기를 너무너무 원하시는 거예요. 부인 권사님은 날마다 날마다 평안의교회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남편 장로님은 괴롭습니다. 저를 만날 때마다 ‘목사님, 장로만 아니면 벌써 왔을텐데... 그래도 제가 명색이 장로인데... 같은 동네에서 교회를 옮깁니까?’

‘우리 집사람이 맨날 평안의교회 노래를 하지만 제가 괴롭습니다.’ 그 장로님은 자기의 직업상 만나는 사람들, 전도할 때 우리 평안의교회로 보내줍니다. 전화가 옵니다. ‘목사님, 이번 주에 아무개 보낼 테니까 잘 좀 받아 주세요.’ ‘웬 일이예요?’ ‘저는 장로니까 제 교회를 나가니까 제가 새신자는 평안의교회를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장로는 싫던 좋던 함부로 옮기는게 아니지요. 이미 장로가 되었을 때는 그 제단에서 죽기를 작정한 거예요. 그런 각오가 없으면 장로될 각오 생각하지 마세요. 장로는 몇 년 적당히 다니면 주는 계급, 명예가 아닙니다. 장로는 죽기를 작정하셔야 합니다. 내가 이 제단에서 죽겠노라. 그런 결심이 없으면 장로하지 마세요. 혹 제가 장로로 추천을 해도 ‘목사님, 저는 이 제단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양하셔야 합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오려고 했습니다. 어느 교회는 반으로 쪼개져서 그래서 홧김에 평안의교회로 수십명이 달려오기도 하고, 저는 지금까지 철칙이 하나 있습니다. 두명 이상 단체로 오는 사람은 절대로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남의 슬픔이 우리의 기쁨이라고 말하지만 그런 세상적인 기준에 우리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도 하나님의 교회이고, 여기도 하나님의 교회이고, 하나님이 계실 때에 모든 교회가 건강하고 부흥되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다른 교회의 아픔을 우리 교회의 부흥의 도구로 쓸 수가 없는 거예요.

그렇게 오기를 원하는 교인들을 모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난 22년동안 철저하게 오히려 우리교회에 오겠다고 하는 사람을 두시간, 세시간 거품을 물면서 설득해서 당신네 교회로 돌아가세요. 당신은 이 교회로 올 이유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설득을 하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겨우 1300명입니다.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 한 가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금요일날 웹서핑을 하고 있었는데, 아주 놀라운 뉴스를 하나 보았습니다. 지난 1월 13일자 크리스챤 투데이 기사였는데, 한국교회가 정체 혹은 마이너스성장을 하고 있는 중에도 각교단마다 성장하는 건강한 교회들을 교단장의 추천을 받아 소개하였는데, 장로교 합동정통측에서는 영안교회가, 장로교 통합측에서는 은혜의교회가, 장로교 합동측에서는 서초교회가, 그리고 감리교단에서는 감사하게도 우리 평안의교회가 소개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감리교회만 해도 5,000교회, 150만 성도인데, 부족한 우리교회가 추천되어 한편으로는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저는 얼른 기사 내용을 프린트하여 가족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신문기사에 우리 교회가 났어. 이게 1월 13일자 기사인데, 아빠가 5달이나 모르고 있었네...' 숫자가 아니라 얼마나 건강한가가 중요한 줄로 믿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서 우리가 믿음의 생활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새 수레를 만드는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목수가 어떤 기술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대로 그 수레를 만드는 과정이 법궤를 어깨에 메어야 하는데, 수레를 만드는 과정부터 잘못되어 가고 있었어요. 시장성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일에 우리의 관심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꼭 짚고 가야 합니다. 그러면 웃사는 왜 죽었는가? 성경에는 분명히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셨다고 그랬습니다.

그렇지요? 웃사의 죄라면 그 잘못된 사람들 가운데서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수레 앞뒤에서 형제가 법궤를 섬긴 죄 밖에 없어요. 주님의 일에 가장 가까이 헌신한 일밖에 없습니다. 충성한 죄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웃사의 잘못됨을 인하여 분노하셨다고 그랬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러한 결론을 가졌습니다. 웃사의 잘못은 우리의 잘못이다. 3만명이나 뽑힌 사람들이 아무도 잘못된 방법으로 진행되는 과정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무지함도 죄요, 알면서 말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그러므로 웃사의 죄는 곧 우리들의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것을 웃사가 대신 죽은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분위기는 아주 냉각되었습니다. 다윗왕도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법궤는 예루살렘으로 오지 못하고, 도중에 오벧에돔의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다윗왕이 기쁨으로 그것을 들고 올, 그것을 메고 올 그런 마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다윗왕과 모든 백성들이 이제는 두려웠어요. 그저 이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실수하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가끔씩 성도들 만나면 그러지요. ‘목사님, 저 이제 일 안합니다.’ ‘왜요?’ ‘선교회 일 하다보니까, 무슨 속회일 하다 보니까 이러쿵 저러쿵 말들이 많고, 그래서 다시는 일 안 할랍니다.’ 그러고 아주 스스로 다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 웃사의 일을 보고나서 어느 누구가 주님의 일에 나설려고 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오벧에돔의 가정은 놀라운 가정입니다. 지금 주님의 일로 모든 일에 형통하고, 은혜롭고, 사랑으로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도, 우리도 그렇게 참여했던 오벧에돔이 아니라 지금 웃사가 죽었고, 왕과 모든 백성들이 실의에 빠져있던 주님을 잘 못 섬길 때에 심판받는 그런 분위기에서 오벧에돔은 ‘우리집에 모시겠습니다.’ 라고 결단한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죽기를 작정한 거예요. 혹시 내가 주님 모시다가, 법궤 모시다가 나도 웃사처럼 죽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누군가 이 일을 해야 하는데, 주님, 내 생명 주님께 맡깁니다. 여러분 주님의 일 한다는 것이 여러분의 이익 때문에 일 하시는 분 있습니까? 이만큼 일하면 내 명예가 생기겠지, 이만큼 일하면 내 경험이 생기고, 이만큼 일하면 어떤 보람을 느끼고, 여러분들이 주님의 일 하면서 이런 이기심 때문에 일하지는 않습니까?

오히려 성경은 말합니다. 오벧에돔처럼 죽기를 작정하고 주님의 일을 하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의 말씀은 너희가 죽고자 하면 살고란 말씀이 이 오벧에돔의 가정에 얼마나 잘 적용이 됐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에 소문이 나기 시작을 합니다. 석달동안 모셨는데, 하나님께서 오벧에돔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소문이 들려요. 오벧에돔이 법궤를 모시면서, 주님을 섬기면서 복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의 가정이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다윗의 마음에 기쁨이 생기고 다시금 법궤를 모시고 올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다윗은 역대상 15장의 말씀과 같이 찬양대, 노래하는 자들을 다시 뽑았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세마포 옷을 지어서 입혔습니다. 자신도 예복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노래하는 자들과 그리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과 세마포 옷을 입은 거룩한 사람들을 다 데리고 다윗이 성전으로 달려갑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이 웃사의 사건 이후에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12절부터 계속 반복되는 단어들을 보면 12절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13절 여호와의 궤를 맨 사람들이, 15절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오니라, 17절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이제는 하나를 해도, 둘을 해도 계속 반복되는 것이 뭐예요? 여호와의 궤를 메는 것입니다.

어깨에 메는 일은 수고스러운 일입니다. 수레에 실고 가는 일은 편리한 일입니다. 주님의 일을 편리함으로 하자고 하면 어깨에 메고 가야 하는 법궤를 수레에 실고 가자는 의견이 나오기 마련이예요.

그러나 우리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예배를 하는 데에 있어서는 편리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자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이제 다윗과 모든 사람들은 너도나도 할 것도 없이 모두가 어깨에 메고, 메고, 메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이제는 그들이 살아가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14절 여호와 앞에서 다윗이 힘을 다하여 춤을춥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고 춤을 춥니다. 17절 다웃이 여호와 앞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다윗이 계속되는 그의 삶의 태도를 보면 여호와 앞에서, 여호와 앞에서, 여호와 앞에서, 코람데오라고 하는 것, 고신대학교 교훈이 코람데오입니다. 우리의 헌신의 자세는 목사 앞에서도 아니고, 장로 앞에서도 아니고, 사람들 앞에서는 더욱더 아닙니다. 여호와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이 표현되어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다윗은 왕입니다. 남북을 통일한 권위있는 왕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예복을 입고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어린아이처럼 좋아했어요. 기억하십시오. 다윗이 왕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 왕은 백성들 앞에서의 왕이지, 하나님 앞에 왕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세상적인 지위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러분들이 시장도 되셔야 하고, 국회의원도 되셔야 하고, 대통령도 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지위는 사람들 앞에 지위지, 하나님 앞에 대통령이 아니지요. 하나님 앞에 국회의원, 하나님 앞에 시장 아니지요. 하나님 앞에서는 용서받아야 할 어린양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한 거예요. 겸손할 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본분을 모르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그저 기뻐 뛰어 놀아야 할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그 다윗의 순수함이, 그 다윗의 겸손함이 오늘 우리에게 도전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게 복을 주실 수록, 하나님 내게 지위를 주실 수록 하나님이 나를 더 많은 자리에서 경험하게 하시고, 높여 주실 수록 점점 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며, 그의 일이 되어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여호와 앞에서 기뻐하고 감사하며 백성들 앞에서 그 일을 보여가는 다윗의 모습.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제목처럼 두가지의 결코 공존할 수 없는 주제를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앞의 부분에서 웃사의 사건은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렵고 떨리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금 오벧에돔에게 복을 주신 그 하나님 앞에서 다시금 용기를 얻고 어깨에 궤를 메고 다시금 돌아오면서 그들은 기쁨과 감격이 넘쳤습니다.

어떻게 이 두려움과 기쁨이 공존할 수 있을까? 신학자들은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두려움은 기쁨을 억제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고무시킨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두려움이 있습니까? 내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일에 내 생명을 걸리라. 그러한 진지함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하면 그러한 하나님을 향한 신뢰로 나아갈 때에 우리의 발걸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인 줄 믿습니다.

내가 여호와 앞에 나아가는 내 삶이, 내 발걸음이 기쁨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 2편 11절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며 떨며 즐거워 할지어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여기에서 왔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여호와 앞에 떨면서 한 편으로 여호와 앞에 즐거워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 앞에 거룩하신 두려움으로 오히려 갑절로 기쁨을 가지고 나아가는 다윗의 모습, 그리고 노래하는 자들과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과 세마포를 입은 거룩한 주의 백성들이 기쁨을 가지고 나아가되 그러나 법궤를 어깨에 메는 두렵고 떨린 마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은혜와 복이 된 줄로 믿습니다. 다윗이 백성들을 축복하고, 귀한 은혜를 나누었던 것처럼 오늘의 우리의 신앙에서도 떨며 즐거워 하는 우리의 삶에 부끄러움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 황요한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