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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족의 역할 (엡 5:15 ~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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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찌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5:15-6:4

저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어버이주일만 되면 예배를 잘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어버이라는 단어는 이상한 감성을 일으키지요. 키 크고 건장한 남자도 어머니란 단어 앞에서는 금세 부드러워집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은혜가 그만큼 크고 깊습니다. 제 경우, 11살에 어머니와 헤어져 아주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어요. 돌아가셨으면 체념하겠지만 살아 계신데도 뵙지 못하니까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치든지, 어버이주일만 되면 도저히 예배를 인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오랫동안 참 힘들었습니다. 그러다가 1986년에 마침내 평양에 가서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그 한을 풀고 나니 그 이듬해부터는 어버이주일이 되어도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우리는 어머니를 사랑합니다. 또한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족을 주셨습니다. 가족에는 세 가지 관계가 있습니다. 부부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그리고 자식과 부모의 관계인데, 그 중 부부관계가 모든 가족관계의 출발점입니다.

성경적 결혼은 일부일처제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아담과 하와, 그리고 또 다른 여인 누군가를 지으셨겠지만, 단 둘만을 지으시고 배우자로 정하심으로써 일부일처제를 정해주셨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일부다처제나 중혼을 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통해서 결혼의 신성함을 위해 “간음치 말라” 명하십니다. 제 10계명에는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하셨습니다. 이슬람교에는 오늘날까지 한 남자가 네 명의 아내를 가질 수 있다는 법이 있는데, 그것은 가부장적인 잘못된 문화요 인간의 기본적 인권을 무시하고 역행하는 제도입니다.

가족관계에서 사랑이 가장 기본적이고 절대적인 요소입니다. 가족관계의 출발점은 부부관계입니다. 그러므로 부부가 되기 위한 최우선의 가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만일 결혼에 있어서 사랑 이외의 조건이 우선시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제도를 창조하시고 우리의 가슴에 사랑의 감정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사랑을 통하여 상대방이 아름답고 좋게 보이게 하고 서로 끌리게 하여 결혼에 이르도록 만드셨습니다. 사랑하기에 예뻐 보이는 것이지 외모가 예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 같은 방법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결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혼에는 언제나 사랑과 존경이 절대적입니다. 이에 근거하여 부부의 도를 지키겠다고 함께 서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존경이 빠져나가면 그 관계를 유지하기가 아주 힘들어집니다. 부부사이는 원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기 때문입니다. 피가 섞이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는 서로 피가 섞여있으므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사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영원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본능적 관계입니다. 그러나 부부사랑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자연적으로 유지되지 않기에 의지적으로 노력하고 수고하며 헌신하고 또한 결단하며 관계 가운데서 서로를 알아가고 다듬어가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사랑을 이루어 가는 훈련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장배경도 다르고 성품과 취미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른 남남이 만나서, 연합하여 하나 되게 하는 언약을 지키는데 사랑과 존경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란 서로 같이 지켜가야 하는 것입니다.

결혼자체로 무조건 좋은 가정이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가정을 이뤄가려면 서로 끊임없는 사랑의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대부분의 남자들이 결혼 전에 사랑의 몸살을 앓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결혼식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그렇게 펄펄 끓던 사랑이 식기 시작합니다. 이제는 내 사람이 되었다는 안도감에서 결혼 이후부터는 사랑에 점점 무관심해집니다. 이것이 남자의 경향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경향성을 아시고 특별히 남자들에게 “네 아내를 사랑하라”고 사랑의 리더십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각 가정의 사랑에 대한 책임은 남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가정에 아직 사랑이 있다면 그동안 남자가 잘했다는 증거이고, 더 이상 사랑이 없다면 그것 또한 전적으로 남자 책임입니다. 물론 아내도 남편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내에게는 사랑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하지 않으셨어요. 사랑의 종류에도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에로스 사랑입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사랑이요, 받는 사랑입니다.

둘째, 필레오 사랑입니다. 이것은 주고받는 사랑이에요. 성경에는 “서로 사랑하라, 서로 용서하라, 서로의 짐을 지라, 서로 고백하라”와 같이 “서로”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이건 아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서로 사랑하라” 즉,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주는 사랑이 계속되다보면 그 한쪽의 사랑이 아무리 많다하더라도 결국 지치고 맙니다. 아무리 사랑을 쏟아줘도 그에 대한 반응이 없으면 보람을 느끼지 못하므로 사랑하기를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도 사랑을 주기만 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희생하고 헌신하고 돌보기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늘 받기만 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런 사람은 받는 것을 당연시하고 감사할 줄 모르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서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동안 사랑을 받기만 했다면 오늘 회개하십시오. “나에게도 내 사랑을 표현할 책임이 있구나.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서로에게 유익해야만 행복한 가정이 된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속히 깨달으십시오. 오늘부터 돌아서십시오. 그리고 상환하십시오. 서로서로 사랑해야 가족의 역할을 제대로 하는 것입니다. 서로 주고받아야 더 사랑할 힘이 생기고 사랑하는 기쁨과 보람이 있을 때 사랑이 배가되고 지속되는 것입니다.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쏟아 붓는 사랑만으로는 온전한 가정이 될 수 없습니다.

셋째, 아가페 사랑입니다. 성경은 부부사랑을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로 설명합니다.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꾸준히 사랑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 공로 없고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우리를 위해 친히 죽으신 주님의 온전한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사람은 겸손히 주님의 사랑을 본받게 됩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피 값으로 사실 만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꾸준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예수께서 베푸신 사랑에 근거하고 그 사랑에 힘입어야 합니다. 그 사랑으로만이 비로소 나와 결혼한 이후의 아내가 흠과 티와 주름 없이 더 아름다워져 가도록 도울 수 있으며, 그 같은 돕는 역할을 기뻐하게 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온전한 가정을 이루어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가정을 사랑으로 세우고 유지해야 할 책임을 남편들에게 요구합니다. 좋은 부부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런 명령을 따로 해야 할 정도로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부부관계에서 결코 사랑이 저절로 유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약속하고 마음을 다잡아서 결심하고 노력하고 서로 마음과 관심을 주고받아야 좋은 가족이 됩니다. 어느 한쪽이라도 노력을 중단해 버리면 가족이 유지될 수 없어요. 받는 사랑을 당연시 여기고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자기 집을 한낱 하숙집정도로 여기고 살면 결코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는 완전히 다릅니다. 부모는 내리사랑인지라, 성경에 따로 “부모들이여! 자녀를 사랑하라.” 이렇게 명령할 필요가 없습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사랑합니다. 우리도 부모가 되기 전까지는 사실 우리의 부모님들이 우릴 어떻게 기르셨는지 잘 몰랐지요. 그러나 자녀를 키워보니까 그 절절한 심경이 어떤 건지 잘 알게 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우리 자녀들은 우리가 그랬듯이 여전히 부모의 사랑을 잘 몰라요. 아니 짐작도 못합니다. 언젠가 고등학생이던 제 둘째딸아이와 함께 차를 타고 가는데 제 옆에 앉은 그 아이의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든지 한 손으로 딸의 손을 꽉 잡았었지요. 그런데 그 애는 그저 의아한 얼굴로 절 쳐다보는 겁니다. 제 심정을 모르겠나 봐요. 알 리가 없지요. 부모들 마음이란 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라는 말 굳이 하지 않아도 다 너무나 사랑합니다.

사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얼굴을 자주 보여드리는 것이 큰 효도가 됩니다. 왜 그럴까요? 부모가 기뻐하시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특별히 잘생겨서 자꾸 보고 싶어 하시는 게 아닙니다.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는 예쁘게 보이는 법입니다. 부모에겐 자식이야말로 가장 값지고 귀한 선물이지요. 또한 부모님께 목소리를 들려 드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자녀의 목소리 자체가 부모에게 최고의 감동을 주는 음악입니다. 저도 우리 애들이 전화로 “아빠!” 하고 부르면 그 어떤 천사의 찬송보다 더 좋습니다. 그게 부모의 사랑인 것입니다. 물론 자녀들은 그 사랑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은 또 자기 자식을 낳으면 그 자녀에 관심을 갖느라 자신의 부모들은 잊어버리고 맙니다. 여러분, 아직도 부모님이 살아계시면 여러분의 나이가 얼마든지 부모님께 자주 얼굴을 보여드리고 여러분의 목소리를 자주 들려 드리시기 바랍니다. 부모님들은 그것만으로 행복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통해 부모님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부모에게 잘못하는 행위를 엄중히 벌하십니다.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때리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5). “자기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7) 명하셨습니다. 또한 신명기 21:18-21에 보면 “그의 부모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라. 이같이 너희 중에 악을 제하라”고 명하심으로 불효를 사형에 처할 악으로 규정하십니다. 지금은 구약시대가 아니라 직접적으로 이런 징계를 받지는 않지만, 요점은 하나님께서 부모를 얼마나 귀한 존재로 세워주셨는지를 분명히 알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귀히 여기라”는 뜻이지요. 불효의 죄가 중히 다스려져야 한다는 율법의 취지는 예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적용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하늘 같이 여기도록 명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종종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불효의 종교라고 폄하하지만 그건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관계를 아버지와 자식간의 관계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만 돌아가신 부모를 기리는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제사의 방법이냐 추모의 방법이냐?”하는 방법의 차이일 뿐이지 근본적인 효의 정신에 대해서는 기독교가 어떤 다른 종교나 유교보다 더 심오하며 전혀 뒤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 했습니다. 공경은 능동적이요 적극적이요 자발적입니다. 부모의 능력, 지위, 재산과 상관없이, 부모이기에 그 자체로 섬기는 것이 의무요 덕목입니다. 우릴 교육시켜주셨고 잘 먹여주셨고 뭔가 해주셨다는 조건에 따라 섬기거나 마는 선택사항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부모를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사실, 생명의 근원이 부모라는 사실만으로 부모공경의 이유가 충분한 것입니다. 그런데다 부모님들은 우리를 헌신적으로 기르시고 돌봐주시고 사랑해 주시고 희생해 주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데 누구에게도 뒤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약속이 딸린 첫 계명입니다. 그 첫째 복이 이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기를 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계산속으로 꼭 복 받기 위해서 부모에게 잘 하겠다는 것은 우선순위가 잘못된 것이지요. 부모공경을 마땅한 일로 알고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잘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아이들 가운데 참으로 부모에게 잘 하는 애들이 있습니다. 그런 애들을 보면 “아! 저 아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며 마음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때로 그렇지 못한 경우를 봅니다. 언젠가 한 고등학생이 자기 외할머니에게 함부로 하는 것을 봤는데, 어찌나 못된 언행을 하든지 그 아이의 장래가 걱정될 정도로 마음이 편찮았었지요. 지금은 그 아이도 결혼해 엄마가 된지 오래 되었는데 도무지 그 인생이 제대로 풀리질 않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부모를 사랑함으로써 자녀에게 본을 보여야 합니다. 자식을 위해서 사랑을 실천하고 먼저 내 부모에게 잘해야 합니다. 자녀들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통해 보고 배운 대로 익히고 따라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부모님께 했던 그대로 우리의 자녀가 우리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여러분과 제 가문이 부부사랑은 물론이요, 부모를 향한 사랑과 순종과 공경을 잘 실천하여서 대대손손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부모님을 존중히 여기면 먼저 언어로 나타납니다. 어른에게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은 자기를 저주하는 것입니다. 의식주를 돌봐드릴 뿐 아니라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언어를 사용하며 자주 전화나 편지를 드리고 방문하십시오. 부모님들이 원하는 바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생신을 기억해 드리거나 동기간에 우애가 좋으면 부모님께 큰 기쁨이 됩니다.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다”는 속담처럼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부모에겐 다 같이 귀하고 사랑스런 자식인데 그 자녀 간에 사이가 나쁘면 부모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 원인이면 속히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형제들과의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부모님 살아계신 동안 형제간에 우애하는 모습을 보여드림으로 부모님이 평화를 누리고 사시다가 천국 갈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 합니다. 물론 쉽진 않습니다. 그러나 힘들 때 가능한 게 기도입니다. 성령의 도움이 있어야 해요.
그렇다면 왜 부자관계, 부부관계, 부모관계가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요? 지혜롭지 못한 때문입니다. 똑같을 말을 하고 사랑을 하면서도 지혜가 모자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에 “지혜 있는 자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지혜가 모자라면 하나님께 구하고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가족관계에 담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끝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노력하긴 하는데 잘 안되지요. 왜 안 됩니까?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성령님, 날 도와주세요. 날 변화시켜 주시고. 새롭게 해주세요. 제게 새 힘과 용기를 주십시오. 지혜를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하고 전진하면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변화시켜 주시고 우리의 가정에 행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나라가 있기 전에 가정이 있고, 교회가 있기 전에 가정이 있으며 직장이 있기 전에 가정이 먼저 있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하고 사회적인 공헌도가 높아도 가정의 행복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가정의 행복이 최고입니다. 국가와 직장도 중요하지만 마지막까지 가장 중요한 것이 가정입니다. 새로운 회개와 결단과 헌신으로 우리의 가정에 큰 축복이 되기를 원합니다. 부모님이 병이 드시면 정성을 다해 임종 때까지 모셔드리는 자녀의 도리를 통해,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들이 대대손손 하나님의 약속하신 그 축복을 누리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설교 : 김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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