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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도적으로 되라 (창 1: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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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란 책 아시지요? 저자 스티븐 코비가 제일 첫 번으로 든 습관이 무엇일까요? “주도적으로 되라”입니다. 지난주부터 “성공하는 신자의 7가지 습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한다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자신은 최고로 잘되고도 행복하게 됩니다. 그것도 습관만 되면 어렵지 않게 저절로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지난주 제목은 “우선순위”였습니다.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장 먼저 하느냐에 따라 삶은 전체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이 최우선이 된다면 성공적인 신자의 삶을 삽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잘되어도 신자로서 실패하면 후회밖에 아무 것도 남는 게 없습니다. 신자는 영원, 그러니까 현세는 물론 더 크고 영원한 삶을 사니까요.

두 번째로 그 우선순위를 앞에 놓고는 자기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주도적인 게 무엇인가요? 무엇을 할 때 종이 아니라 주인의 입장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축복인 동시에 명령입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명령형의 축복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지배하라.” 그대로 해야만 복이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1. 신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았다

사실 말은 좋지만 우리가 자기 운명을 지배할 수 있습니까? 제 성질도 못 다스리는데 무슨 힘으로 나쁜 상황을 지배합니까? 몸은 피곤하고 병이 듭니다. 돈은 부족하고 벌기는 너무 힘듭니다. 주위에는 괴롭히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원하는 대로 뭐하나 제대로 되는 게 있나요? 내 마음대로 된다면 다 왕이 되고 부자가 되고 좋은 집을 사겠지요.

현실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늘 눌려있어요. 오직하면 예수님도 말했겠어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아 내게로 오라.” 그만큼 삶이 힘들어요. 지배는 무슨 지배입니까? 지배한다는 사람들 보면 돈 있다고 높은 자리에 있다고 제 멋대로 합니다. 그게 지배입니까? 그것은 자기 욕심과 성질에 지배당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은 더 세상 짐에 눌립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배하라 하신 것은 그게 아닙니다. 공평과 정의로 사랑으로 지배합니다. 예수님이 묶여서 매 맞고 욕먹을 때 지배당하고 있나요? 그분이 못 박히고 비명을 지를 때 비참하고 망하는 것인가요? 그것은 스스로 선택하고 주도한 일입니다. 도망가려다가 붙잡혀 당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서 스스로 한 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왕의 특권을 잃었어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 받은 능력을 발휘해서 삶과 세상을 하나님처럼 지배했어야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스스로 죄의 노예가 되어 타락합니다. 왕관은 빼앗기고 모든 굴레가 씌워집니다. 가난과 병과 슬픔에 억눌립니다. 죽음의 노예가 되어 평생을 끌려 다니다 지옥으로 떨어져요.

그래서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스스로 주도적으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고난의 짐을 짊어집니다. 삶 전체가 오직 고통이요 수치요 멸망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당하면서 묵묵히 그 길을 걸었어요. 그렇게 해서 다시 인간을 노예 상태에서 구원해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당신은 더 이상 노예가 아닙니다. 다시 왕의 권리를 회복했어요.

그렇다면 지금 나를 짓누르는 이 짐은 무엇입니까? 마음을 슬프게 하고 삶을 재미없게 만드는 이 고통은 무엇입니까? 나는 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합니까? 아직 노예의 습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유의 복음을 들으면서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해서 그래요. 미국에서 노예들이 해방되자 그들은 어찌 할 바를 몰랐어요. 자유가 뭔지 몰라서요.

자유인은 주도적으로 삽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에요. 노예는 시키는 대로 합니다. 순응하면 되지요. 오히려 편합니다. 때리고 욕하면 그냥 당해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요? 그런 말은 자유인의 사고입니다. 노예는 그런 생각을 안 해요. 그냥 아프고 슬프면 웁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짐승처럼 존재하다가 끝나지요.

육신은 안 그래도 영혼이나 마음이 노예인 사람들이 많아요. 세상 사람들은 별 수 없다 해도 예수 믿는 신자도 그래요. 병이건 가난이건 문제이건 그냥 어쩔 수 없다고 순응합니다. 그러면서 슬퍼하며 괴로워해요. 자신이 자유인인데도 거부할 생각도 못합니다. 그냥 하나님께 해결해 달라고 기도만 하지요. 자신이 왕이라는 사실을 전혀 망각합니다.

2. 자신의 신분을 확인하라

제 설교 듣는 분들이 말합니다. “하시는 말씀은 다 옳지만 그대로 할 능력이 없어요. 우리는 아직 그 수준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렇게 힘들게 살고 싶지 않아요.” 이 말씀이 상당히 노예적입니다. 성경대로 사는 게 힘든 게 아닙니다. 양반이 힘들다고 쌍놈 하겠습니까? 조금만 연습하면 습관 되어 쉬워집니다. 높은 수준도 두어 달 연습하면 됩니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신자는 자신에게 하나님 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신자 노릇 합니다. 하나님 자녀로 다시 태어났어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어요. 예수께서 그렇게 만드셨어요. 그래서 하나님 형상이 회복되었어요. 그리고 다시 그 축복이 살아났어요. 생육하고 번성하고 다스리는 능력이 회복되었어요. 그것을 경험하려면 주도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며칠 전에 한 분에게 전화를 했어요. 그랬더니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받아요. 아프답니다. 이때 주도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무리 했더니 몸살이 왔구나. 그냥 나을 때까지 자자.” 이것은 자기 신분을 잊은 것입니다. 병이 주인이에요. 단호히 말하세요. “나는 이 병을 거부한다. 하나님의 건강을 원한다.” 자기 의사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그래요. “그래도 난 쉬고 싶어요.” 쉴 수 있는 분은 다행입니다. 그러면 주도적으로 쉬세요. “오늘은 즐겁게 쉬자.” 하지만 할 일이 있는 분은 “나는 오늘 일을 하겠다. 감기 몸살은 물러가라.” 그리고는 억지로 하지 말고 조금씩 몸을 풀고 워밍업을 합니다. 성령께 도움을 요청하면서 컨디션을 만드는 겁니다. 조금만 연습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주도적으로 하루를 살지 못해요. 일어나기 싫지만 억지로 일어나고 가기 싫은 직장에 억지로 갑니다. 빨리 끝나기만 기다립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몇 달간 점원 노릇을 했어요. 하루 품삯 30불 받기 위해서요. “품꾼은 해가 저물기를 고대하고.” 정말 그 말씀대로였어요. 이것은 주도적인 삶이 아닙니다. 노예로 끌려가다 마치는 거죠.

빅터 프랭클이 <죽음의 수용소에서>일어난 일입니다. 그의 가족이 다 끌려갑니다. 뿔뿔이 흩어져 수용되면서 모든 것을 다 빼앗깁니다. 결혼반지도 압수됩니다. 그리고는 욕설과 매질이 시작됩니다. 음식은 쓰레기 같아요. 수용된 사람들은 절망 속에 미쳐갑니다. 몇 년 뒤 수만 명 중에 20여명 살아남습니다. 건강해서 그럴까요? 아니요 정신력입니다.

분명 상황은 노예 중의 노예입니다. 거기서 무슨 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나요? 그러나 빅터 프랭클은 말합니다. “너희들이 다 빼앗아가도 뺐지 못할 것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어떤 반응을 선택할지 그 권한은 뺐지 못한다.” 그는 거기서도 주도적인 삶을 버리지 않아요. 자신과 동료를 격려하며 아내와 만날 날을 그립니다. 소망을 선택했어요.

주어진 환경에 눌리면 안 됩니다. 그것들을 보고 내 삶을 스스로 선택하세요.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행복도가 제일 높답니다. 솔제니친이 쓴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보면 시베리아 유형지에서도 행복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신자는 지옥에서도 기쁨과 감사를 선택할 힘이 있어요. 그리고 서서히 모든 상황을 바꿀 능력을 받았어요.

3. 왕의 삶을 훈련하라

주도적인 삶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아요. 연습해야 합니다. 남이 욕한다고 기분 나쁘고 어려운 일이 생긴다고 낙심할 수 없어요. 심지어 심심하고 우울한 기분이 일어난다고 무력할 수 없지요. 아침에 눈이 떠질 때까지 자고 무슨 일을 할지 몰라서 TV도 켰다가 컴퓨터도 켰다가 신문도 봤다가 하면 안 되지요. 오늘을 어떻게 보낼지 결정해야 합니다.

주도적으로 슬플 수 없지요. 우울할 수도 없어요. 주도적으로 성질 부리고 악할 수 있나요? 원치 않지만 저절로 되지요? 악한 습관입니다. 성경은 명령해요. “기뻐하라. 감사하라. 평안하라.” 마음대로 되나요? 왕권이 회복되었기에 연습하면 됩니다. 기분이나 감정을 주도적으로 조절할 힘이 있어요. 더 많이 용서하고 사랑하고 유머와 소망을 일으키세요.

예수 믿는 게 무엇인가요? 자유요, 왕권의 회복이요 그 힘으로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거드름 피우고 교만 떠는 게 아닙니다. 공평과 정의와 사랑으로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처럼 스스로 낮아지기도 하고 섬기기도 합니다. 억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 기쁨 속에 그렇게 합니다. 돈 받고 하는 게 아니라 주도적으로 합니다.

예수께서 사신 삶을 잘 살펴보면 됩니다. 또한 사도들의 삶을 보아도 됩니다. 그들은 벌 받을까봐 하지 않았어요. 대가를 받으려고 하지도 않았어요. 스스로 왕이니까 그 왕의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 했어요. 그 왕은 자신만 위하지 않아요. 모든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려고 주도적으로 종이 되기도 합니다. 백성들을 위해서 사는 왕의 모습과 같아요.

중국을 통일한 한신은 주도적으로 살았어요.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훈련하며 때를 기다렸어요. 불량배가 가랑이 밑으로 지나가라 하니까 그리 했어요. 큰 꿈을 가진 그가 만용 부리다 죽을 필요가 없었어요. 억지 복종이 아닙니다. 주도적으로 하니 부끄럽지도 않았어요. 바울도 그렇습니다. 우선순위 따라 주도적으로 사니 슬프지도 부끄럽지도 않아요.

바울을 보세요.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9:19) 스스로 최우선순위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을 위해 주도적으로 일했어요.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 .”

자기가 주도해서 최고의 삶을 선택했어요. 그러다보니 남들이 이해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래도 상관이 없었어요. 우선순위를 따라서 왕 노릇했으니까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케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였어요.

이제 이러한 본을 보면서 하나님의 가족 일원으로 스스로를 만들어갑니다. 그렇게 하나님 주신 명령형 축복을 이루어갑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왕권을 회복했어요. 이제 노예의 어떠한 짐이라도 벗으리라 결심하세요. 스스로 “너는 왕이다. 사랑과 권세로 넘치는 멋진 왕이다. 상황을 좋게 주도적으로 다스리자.” 엄청난 힘이 나옵니다.
(/김기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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