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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주일] 주님의 영이 모든 사람에게 (행 2: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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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인 글라스의 거장인 찰스 코닉은 어느 날 젊은 미술학도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그 젊은 미술 학도는, “선생님의 화구를 며칠만 빌려 주십시오. 제가 찰스 코닉이 된 기분으로 스테인드글라스 하나를 그려 보겠습니다.”고 말했고, 찰스 코닉은 그의 화구들을 빌려 주었습니다.
며칠 후 코닉은 그 학생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학생의 말이 코닉이 화구를 써도 역시 작품을 잘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코닉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승의 도구가 지네를 변화시킬 수 없네 스승의 불을 받아가야 하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무늬만 입혔다고 그리스도인 되는 거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불을 받아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예수님은 성령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성령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여러 차례 나타나시고,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들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9, “이 말씀을 하신 다음에 그가 그들이 보는 앞에서 들려 올라가시니 구름에 싸여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예수님의 승천. 그러니까 예수님의 승천일은 부활하신 후 40일째 되는 날인데 이날은 부활절부터 40일이 되는 목요일입니다. 그리고 그 후 10일만인 주일이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제자들과 함께 모인 곳은 감람산이었는데, 여기서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분부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사람들이 너희를 잡을까 하니 나돌아 다니지 말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께서 임재하실 때가지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3:11, 광야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알리는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나는 그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외치는 세례자 요한은 이미 성령과 불로 임하는 세례에 대해 말씀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5,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었는데 그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다.”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릿도의 사람으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거듭나지 아니하고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여기 ‘본다’라는 말은 먼발치에 그냥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그곳에 서서 본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볼 수 없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는 말씀은 결국 구원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 우리 믿음은 “예수 믿으면 구원 받는다.”는 겁니다. 물론 예수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처음부터 성령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2:3의 말씀처럼, 성령으로 감동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를 주님이시다’하고 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예수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안다고 해도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예수를 주님이라고 말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우리뿐인 줄 아세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 알아요. 교회는 안 다녀도 예수에 대해  들어 보았다구요. 그런데 모두 다 예수에 대해 안다고, 모두 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그렇게 말하던가요?
보세요. 한국의 기독교인이 천만을 넘었다고 자랑합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교회 다녀요. 그러니까 예수님에 대해 믿지요. 그런데 그렇다고 모두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그런 고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을 보세요. “정말 예수님이 여러분의 주님이십니까?”
‘주님’이란, 그분이 나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당신의 핏값으로 영원한 죽음이 빠진 나를 살려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나의 시간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나의 지식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내가 가진 재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나의 생명, 나의 삶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여전히 내 삶의 주인은 나 잖아요?
성령으로 감동하지 않고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시다”하고 말 할 수 없기에 그래서 성경은 처음부터 성령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더욱이 고린도전서 2:10,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당신 자신과 그 하시는 일들을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고, 고린도전서 2:11,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아니면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하나님의 생각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 구원 받는 백성이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달리셨을 때 구원 받은 강도. 그는 “예수여,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하여 주십시오”하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 강도가 성령 받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께 그렇게 고백한 것은 바로 그를 감동시킨 성령의 은혜였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시다.” 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그들 감동하심으로 그는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로마서 8:9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고, 로마서 8:14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 모두 성령을 의미하는데,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만이 누구든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다는 것은 곧 성령과 함께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12은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신다 하셨는데, 로마서 8:14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영접하면 당연히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38, “회개 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 곧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께서 인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의 인도하심을 거역하면 그는 예수님을 영접한 자가 아니며,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죄는 용서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훼방한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그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이기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 성령 받은 사람인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모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기에 여기에서 예배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감동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시다” 말할 수 없는데 여러분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말하며 여기에 앉아 계시기에 성령 받은 사람인 줄 믿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절반의 승리가 없어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심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그래요. 온전한 승리이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성령으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온전히 성령께 모든 것 맡겨야 합니다. 그것을 성령충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성령 충만 하시길 축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4,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것을 주시는 분은 같은 성령입니다.” 그러니까 어려가지 은사가 있는데 그것은 성령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통하여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을 말 하는 은사를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언을 통역하는 은사를 주십니다.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가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의 강조는 은사는 각각 다르지만, 한 분이신 성령께서 각자에게 각각 주셨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께서 주신 것이 은사라는 겁니다.
그러나 병을 고치고, 예언을 하고, 기적을 행하며, 방언을 말하고 하는 등등의 은사들은 성령을 받지 않고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또 성령을 받아서 “예수를 주님이시다”하고 말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살아도, 병을 못 고치기도 합니다. 기적을 행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예언은커녕 방언을 말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가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라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소유를 나누어 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가 내 몸을 불사르기 위하여 내 몸을 넘겨둘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 나열된 각양 은사들은 사랑이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이 모든 은사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개인에게 주어지는 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은 주님의 능력, 곧 사랑의 능력입니다.
고린도전서 12:8-12, “어떤 사람에게는” 그랬습니다. 그것은 주어진 은사가 각각 다르다는 겁니다. 11절, 이 모든 일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하시며, 그는 원하시는 대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십니다.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똑 같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은사 가지고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말 할 수 없는 겁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서 낙심합니다. “방언을 못하는 나는 성령 받지 못했다.” “병 고치지 못 하는 나는 성령 받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은사는 성령이 아니고서도 가능합니다. 또 성령 받았어도 방언 못하고 병 못 고치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성령 임재는 은사 이전의 일입니다. 은사는 성령 받은 사람의 활동 가운데 한 부분이라면, 성령 임재는 그 사람의 근본과 전체의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 임재는, 무엇을 할 줄 아느냐 곧 방언을 하느냐 못하느냐, 병 고치느냐 못 고치느냐, 예언을 하느냐 못 하느냐가 아니라, 생각이 바뀌는 것입니다. 말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고,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 근본 본질이 바뀌는 것입니다. 죽었던 사람이 산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가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과 예수 믿은 후가 달라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성경은 “너희가 전에는 이랬다” 그러나 “이제는 이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너희가 예수 믿지 전에는 이랬지만 지금 예수 믿었으니 이제는 이래야 한다.”고, 뭔가 달라진 모습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령임재는 새로운 창조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 하셨습니다.
여기 “거듭나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곧 옛 사람은 죽었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거듭남은 물과 성령으로만 가능하다고 예수님은 요한복음 3장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이건 공부 많이 해서 되는 것 아닙니다. 이건 열심히 운동해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건 돈이 많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거듭남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시편 104:30,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불어 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 됩니다. 주님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불어 넣으시면 사람과 만물은 다시 창조 됩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새사람이 됩니다. 심지어 죽은 자라도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산사람이 됩니다. 에스겔 37장,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 위에 성령께서 임하시자 그들은 살아나 큰 군대를 이루었습니다.
그렇기에 성령으로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성령임재는 곧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하신 가장 큰 일이 뭡니까? 각 양 은사를 행하는 것 입니까?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가장 큰 일은, 예수님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이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말하게 하고 그 고백대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 성령은 우리로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합니다.
표준새번역은 “성령이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리고 마침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될 것이다.”라는 것은 그렇게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씀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필연적으로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고백하고, 그렇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8, ‘그가 오시면’ 곧 성령이 오시면 그 성령이 하시는 일이, 예수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을 깨우쳐 주시며, 예수 믿는 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 하실 것입니다. ‘그분’,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누구신가를 깨우쳐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다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직접 보았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진정으로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다 도망갔습니다.
성령임재 후, 그들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당당하게 고백했고, 예수님께서 자신의 주님 되심을 분명히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모든 것이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심을 믿어 그 모든 것들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시간, 물질, 심지어 그 생명도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성령 충만으로 예수님을 주님이신 고백하는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새로운 말을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4,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이 시키는 대로, 성령의 말하게 하심 따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 때까지 사람의 말을 하였습니다. 자기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입을 열어 말하자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사도행전 2:41, 그의 말 곧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예수 믿기로 하고 세례를 받았는데 그날에 신도의 수가 약 삼천 명이나 늘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말,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이었고, 그래서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베드로를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말은 이제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37,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 마음이 찔려 “형제들이여, 우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회개하는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사도행전 3장,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들려준 말은,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그리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자 그는 즉시 따라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걷기도하고 뛰기도 하였습니다.
전에는 사람의 말, 자신의 말을 하던 사람. 전에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당한다고 말씀하실 때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던 사람들. 전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누가 높아질 거냐고 다투던 말을 하던 사람들. 이 사람들이 성령께서 함께 하시자 새로운 말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말을 합니다.
성령 충만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는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담대함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골리앗 앞에선 다윗.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고 승리하게 사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외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모두 유대인들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신앙 교육과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그들은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 제자들 다 도망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당당히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성령임재로 예수님이 곧 구원이심을 확신하게 된 겁니다.
사도행전 4:12,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을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을 얻어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에 이 이름 밖에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내가 믿는 그분이 나의 구원이 되신다는 확신이 있으면 뭐가 두렵겠습니까?
더욱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체험하였으니 무엇이 겁이 나겠습니까? 어찌 담대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 얻게 하신 것입니다.
(/이영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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